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29화 (229/444)

제229화. 교류 (1)

탁가철방의 현판식을 마치고.

언용운이 청죽관 생도들과 언동생들에게 집합을 건 이때.

예해수는 언용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언용운 후배님? 저 자치회실에 가봐야겠어요.”

“지금 말입니까?”

“예. 소식지에 적을 내용이 떠올랐어요.”

“자신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그러시다면야, 가보셔야죠. 서두르세요.”

“예!”

그렇게 신축 청죽관의 자치회실에 돌아온 예해수는 공보부실로 들어가 붓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번 소식지에 들어갈 제목 하나를 뽑아냈다.

『탁가철방, 막간산의 명장들이 단강구에 입성하다! - 텃세를 부리려다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고만 단강구의 야장들!』

“박수를 친 이라는 부분은 붉은 안료를 사용하면 더 좋겠지? 활자소에 따로 말해야겠다.”

그렇게 소식지에 들어갈 이야기 하나를 뚝딱 써낸 예해수는 기존의 것을 밀어두고, 종이 하나를 새로 꺼냈다.

그리고 다시금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무림맹주님의 선언에 구파일방과 정무학관에 초비상사태가 걸린 이유!』

두 번째로 뽑아낸 제목 아래엔 대회의 취지와 규모 같은 상세한 내용도 적었다.

그렇게 일필휘지로 뽑혀 나온 또 하나의 소식.

제목이야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으로 짓긴 했으나, 무림맹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관한 내용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됐기에.

예해수는 본인이 쓴 글줄을 소리 내어 읽어보며 퇴고에 들어갔다.

“정무학관과 소림 부속학관이 자웅을 겨루던 교류전과 정무학관의 추계 기숙사 대항전을 합쳐 진행하기로 한 이번 대회는 정진대회라는 이름으로…. 앗. 나도 모르게 정진(精進)이라고 썼네요. 정진(正進)대회가 정식 명칭인데?”

오탈자(誤脫字)를 고치고, 더 넣을 말을 넣고.

“…백도 무림이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개최되는 이 대회에서, 우리는 새로운 용봉의 출현과 포효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해수가 그렇게 정진대회가 벌어진다는 소식을 알릴 초안을 잡아가는 데 집중하고 있던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예해수가 앉아 있던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려 시선을 끌었다.

똑. 똑.

살수(殺手)다 뭐다 난리가 났던 게 얼마 전.

깜짝 놀란 예해수는 본능적으로 헛숨을 삼켰다.

“히익!”

그런데 시선을 끈 사람의 얼굴을 살펴보니 언용운이었다.

때가 탄 빨간 모자를 눌러쓴 언용운.

어째선지 그 모습을 보자 예해수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어, 언용운 후배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예 선배. 지금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예? 소식지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는데요? 아까 탁가철방에서 말씀을 드렸지 않나요?”

“제가 다들 집합하라고 한 게 먼저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 선배한테 자신 있으시냐고도 물었고요.”

“아?”

“흠. 자치회실에 들리고도 늦지 않게 도착하실 수 있겠냐는 뜻이었는데.”

언용운의 말에 예해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어. 그러니까 제가 지금 ‘제일 늦게 온 놈’이 된 상황인 건가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언용운의 모습에.

예해수는 열심히 쓰고 있던 소식지의 초안들을 다급히 들어 보이며 말했다.

“모, 몰랐어요! 어차피 저는 무위가 일천해서 수련 쪽으론 별 도움이 안 될 테니까. 정말로 이걸 만들고 있어도 된다는 뜻인 줄 알았어요.”

그런 예해수의 말에 언용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오해가 좀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워낙에 청죽관 식구들이 척하면 척이라 제가 말을 정확하게 안 하긴 했던 것 같습니다.”

“네. 정말이에요. 화나신 건 아니죠?”

“화 안 났습니다.”

말과는 다르게 경직된 언용운의 표정과 분위기.

예해수는 두려움을 느꼈다.

“복학하시자마자 제가 외유를 좀 다녀오고 이래저래 손발을 제대로 맞춘 적이 없으시니,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죠. 그럴 수 있어요.”

하여, 마른침을 삼키며 이런 생각을 했으나.

‘제발 다음에 나올 말이 그런데나 하지만이 아니기를….’

대저 슬픈 예감이라는 것은 틀리지를 않는 법.

“그런데 말입니다.”

“…….”

“어차피 도움이 안 된다. 그런 말씀은 앞으로 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안 되는 게 어딨습니까? 하면 되는 거죠. 연무장으로 같이 가시죠.”

예해수는 터덜터덜 언용운을 따라 나왔다.

삑삐이빅! 삑삐빅삐! 삑!!

그렇게 도착한 연무장엔.

귀를 때리는 호각 소리 아래, 청죽관의 선후배들이 이만 죽고 싶다는 얼굴로 몸을 비틀고 있었다.

“백스물하나앜!”

그 광경에 당황하고 있을 새도 없이, 언용운의 말이 이어졌다.

“목소리가 작습니다! 이래가지고 소림은 무슨 다른 기숙사나 초청단체들은 잡겠습니까?!”

“앜!!!”

“예 선배는 저기 저 자리로 가시면 됩니다.”

“…어. 네. 아, 알겠어요.”

예해수는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나, 그 말을 꺼내 보기도 전에 연무장에서 몸을 비틀게 되었다.

그렇게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구르기를 한참.

“체조는 여기까지.”

언용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드디어 끝난 건가? 하는 안도만이 가슴속에 스치는 이때.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우측에 있는 사람과 짝을 짓고….”

언용운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예해수 선배는, 나랑 합니다.”

그 말에 연무장과 거의 물아일체가 되어 구르느라 녹초가 됐던 생도들이 일사불란하게 거리를 벌리며 흩어졌고.

예해수 앞엔 언용운이 서더니 허리춤의 회한을 뽑았다.

스르렁-

그런 언용운에게서 전해지는 투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무거운 팔이었지만, 예해수는 기수식을 취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팟!

아니나 다를까.

일순 언용운의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예해수를 향해 쇄도하더니.

쌔애애애액!!!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서리 같은 검날이 예해수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힉!”

예해수는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서 막았다.

챙!!!

그에 언용운의 검이 슬쩍 방향을 틀었지만.

예리한 검신이 만년한철 특유의 한기를 흩뿌리며 예해수의 머리카락 몇 올을 베고 지나갔다.

‘봐, 봐주기는 하신 것 같은데, 넋 놓고 있었으면… 죽었을 수도?’

언용운의 경지를 생각하면 그럴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하나, 언용운이 뿜어내는 투기와 검초가 예해수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거보십쇼 선배.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게… 된 건가요?”

예해수는 살기 위해 검을 고쳐 쥐며, 아까 하려다 잊었던 말을 되뇌었다.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이런 말은.’

* * *

정진대회 석권의 기치(旗幟)를 세운 지 보름이 지났다.

“나랑 소릉이는 탁가철방 가서 부러진 무구는 맡기고, 수선한 무구는 받아 올 테니까. 체육부장님… 고 선배는 어디 가셨지?”

“체육부장님은 격구장비 관리하러 가셨어요.”

“그럼 은소저가 책임지고 무당산에 다녀오시오.”

“해검지 찍고 오라고요?”

“척하면 척이군.”

“…진짜 모르고 싶네요.”

“그런 말 할 시간에 출발하는 게 좋지 않겠소? 철방 다녀온 나한테 따라 잡히면 다들 각오해야 할 텐데. 그리고 정현.”

“예. 언 소협.”

“너는 마방연 가서 영환 교수님한테 강시가 든 관 하나 받아서 짊어지고 올라가.”

“…예?”

“너는 체력이 남잖아. 부하(負荷)를 좀 올릴 필요가 있어.”

“…….”

“그리고 저번에 무호에서 일 생각해봐. 나랑 같이 다니려면 사기(死氣)에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 예!”

그렇게 청죽관의 오전 수련 일정을 맡겨놓고.

나는 우소릉과 함께 탁가철방으로 향했다.

깡! 깡! 까아앙!!!

야장들이 신이 나서 쇠를 때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는 가운데.

“공자님! 맡기신 검들은….”

탁장명은 웃으면서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가, 나와 우소릉이 짊어지고 있는 궤짝을 보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또 해 드셨습니까?”

“정진대회를 앞두고 수련을 좀 격렬하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검을 해 드시면…. 저희는 잠을 언제 한번 푹 잘 수 있는 걸까요?”

“잠이라는 게 참 그렇습니다. 죽으면 끝도 없이 자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때 가서 아깝지 않으려면 살아있을 때 조금 줄이는 게 맞죠.”

“…예?”

그 모습을 보며 사부님께서 혀를 차오셨다.

- 쯧쯧. 불쌍한 것들…. 분명히 도망칠 기회가 있었거늘. 어쩌다 이런 지독한 녀석에게 걸려서는….

‘?’

- ?

사부님의 말을 외면하며 나는 탁장명을 응시했다.

“농담입니다.”

“하, 하하하.”

“아, 혹시 격구 장비도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재료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본디 무구라는 게 쇠만 다뤄서는 만들 수 없으니까요. 필요하십니까?”

“춘계 대항전 때 사용하던 게 너절해져서 어찌할까 고민이었는데. 저희 총무부장님이랑 체육부장님을 나중에 따로 보내겠습니다.”

“예. 아, 그리고 드릴 게 있습니다.”

말과 함께 탁장명은 한 자루 협봉검을 내밀었다.

스르렁-

뽑아보니 날이 한철인 검이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뭡니까?”

“회한을 새로 벼릴 때 만년한철 철괴는 전부 다 들어갔고, 원래 재료인 한철도 얼마 정도 들어갔는데… 거기서 남은 한철로 만든 겁니다. 딱 협봉검 하나 만들 정도가 남았더라고요.”

나는 곧바로 검을 검집에 돌려 넣은 뒤.

우소릉을 향해 던졌다.

“너 하면 되겠네.”

내가 던진 검을 받아든 우소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언형?”

“나 따라다니는 녀석들 중에 너만 아직 백련정강 검 쓰고 있잖아. 협봉검 쓰는 녀석도 너고?”

“…그렇긴 한데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어서.”

“그렇게 말하면야…. 가만, 되겠는데? 패룡도 찾을 때 한몫했잖아? 싫으면 이리 내던지. 다른 사람 주지 뭐. 팔아도 되고.”

“시, 싫은 건 아니에요!”

* * *

수련을 거듭하며 물심양면으로 대회 준비를 단단히 하는 동안.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리하여 어느덧 정진 대회가 개최되는 날이 되었다.

본디 교류전은 소림사와 정무학관에 번갈아 가며 개최하는 행사였는데.

애초에 금년이 정무학관의 차례이기도 했고.

또 마교의 습격으로 불에 탔던 정무학관이 재건되었음을 알린다는 목적도 있는지라.

정진대회는 정무학관에서 개최되었다.

“정무학관의 사대기숙사 생도들은 입장하세요.”

우렁차게 울리는 경혜사태의 음성에.

나는 춘계 대항전 우승자의 상징인 우승기를 들고 본관 앞 광장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내 뒤를 따라 운매, 향란, 윤국, 청죽의 깃발을 든 자치회장들과 다른 생도들이 걸어왔다.

민간에 개방하는 행사였기에 구경을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괴룡이다! 정무학관과 단강구를 구해냈다는 소영웅! 언용운이 제일 앞에 있다!!”

“매진악! 남궁윤! 공자님들 여기 좀 봐주세욧!”

“호연찬! 우승기 찾아와라!!!”

“젊은 후기지수들이여. 건승하시오!!”

그들은 마련된 객석에서 우리를 향해 뜨거운 환호를 쏟아냈다.

그렇게 관객들의 환호가 쏟아지는 와중에.

단상 바로 아래에서 우승기를 기다리고 있던 무림맹주 공손무결이 입을 열었다.

“워낙에 큰 행사를 벌여놔서, 어제 도착했는데도 이렇게 얼굴을 보는구만. 아, 그 소식지는 잘 받아보고 있네. 제목이 참 자극적이야. 나도 모르게 펼친다니까?”

“근데 이런 시국에 이렇게 큰 행사를 벌이셔도 되는 겁니까?”

“이 시국이니까 할 수 있는 걸세. 사도련도 마교도 어쩌지 못할 거야. 원래 멍석 깔아놓으면 되레 설치지 못한다고 여기서 깝죽거렸다간 하나 된 백도무림과 전쟁을 각오해야 할 테니까.”

“그렇기는 하네요. 아무튼 여기 우승기를 맡기겠습니다.”

“하하하.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건가?”

“당연하죠.”

“난 자네의 그런 자신감이 좋아. 그래. 건투를 빌겠네.”

그렇게 우승기를 반납하고 청죽관 생도들이 서 있는 자리로 돌아오자.

“북해빙궁의 후기지수들은 입장하세요!”

새외무림에서 온 손님들을 비롯하여.

이 대회에 참가 자격을 얻은 여러 방파의 장문인과 제자들이 차례차례 본관 앞 광장의 한편을 차지하는 가운데.

“소림의 후기지수들은 입장하세요!”

마지막으로 소림의 이름이 불렸다.

“소림이다!”

“백도무림의 태산북두!”

사대기숙사 생도들이 입장하던 때 이후로 쏟아진 가장 큰 환호.

소림의 무승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사대기숙사 생도들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 섰는데.

그중 가장 앞 열에 선 무승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괴룡의 명성이 숭산의 소실봉 자락까지 파다하더이다. 어디 한번 제대로 어울려 봅시다.”

말을 하는 무승의 눈동자에선 호승심이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이놈들 역시 어지간히 이날을 기다려온 모양이었다.

하기야, 대종사인 달마가 그랬다며 만날 벽을 보고 무예만 닦는 녀석들이니, 한 번씩 열리는 이런 대회가 열리면 근질근질하겠지.

‘…이건 또 이거대로 신선하네.’

무림에 온 이후로 내가 싸움에 나섰던 순간은 주로 시비를 걸거나 나쁜 짓을 하는 놈들과 맞붙을 때였다.

이토록 순수하게 나와 싸워보고 싶어 하는 이를 보는 건 기실 처음이었기에, 나로서는 이 무승의 태도가 제법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는 우두득 목을 풀며 피식 웃었다.

“그럽시다.”

제법, 재밌는 교류전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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