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33화 (233/444)

제233화. 교류 (5)

정진대회 마지막 날이 밝았다.

객석이 관중들로 빼곡히 채워진 가운데.

목청 좋은 소리꾼이 대회 일정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정진대회 마지막 날이 밝았습니다! 금일은 어제처럼 한 종목의 예결선이 온종일 치러지겠습니다! 치러지는 종목은 무위! 그 방식은 연승전(連勝戰)으로….”

무위 종목은 춘계 대항전 때와는 치러지는 방식이 바뀌었다.

‘아, 방식 말고 이름도 무술에서 무위로 한 글자가 바뀌긴 했나?’

춘계 대항전에서는 세 명의 출전자가 각각 한 경기씩을 맡아 먼저 이 승을 차지하는 쪽이 승리를 가져갔다.

반면 정진대회 무위 종목은 연승전(連勝戰).

이긴 자가 계속 연무장 위에 남아 다음 상대와 싸울 수 있는 방식이었다.

“…고로! 먼저 이 패를 떠안아도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내리 삼 연승을 한다면 역전승이 가능한 제도라 아시면 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부님께서는 탐탁지 않다는 듯 입을 여셨다.

- 원철이라는 놈이 기도가 제법 출중하던데, 소림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냐?

‘흠. 이게 소림에게 유리한 제도 이긴 한데. 방식을 바꾸기로 한 것 자체는 춘계대회 직후입니다.’

춘계 기숙사 대항전이 청죽관의 우승으로 끝난 직후.

역대 최악의 성적을 받아들었던 향란관의 자치회장 매진악이 연승전을 제안했고, 그것이 채택됐다.

그때 채택된 제도를 이번 대회의 운영위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운영위에 소림의 계율승 중 하나가 끼어 있으니 소림의 입김도 들어갔다고 볼 수도 있긴 하겠네요.’

아무튼.

방식이 바뀌며 심리전 요소가 줄었고.

그 대신 부상이나 체력 안배를 신경 써야 했는데.

“갑조 일 번은 청죽관! 갑조 이 번은… 남녕표국! 갑조 삼 번은 북해빙궁! 갑조 사 번은 향란관! 이어서 을조의 추첨도 진행하겠습니다! 을조 일 번은….”

이어진 대진표 추첨에서 청죽관의 예선 상대가 남녕표국으로 결정되었다.

남녕표국은 광서성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으로, 얼마 전 무림맹에 입맹을 한 단체였다.

- 남녕표국이면 그제 밤에 용운이 네가 들여다보고 온 곳이로구나. 국주가 천하 명표 중 하나로 이름이 나 있다면서?

‘예.’

남녕표국의 국주는 능운표(能雲鏢) 육담호.

육담호는 돈보다는 신의와 애민을 좇는 표행으로 명표(名鏢) 반열에 올랐다.

아울러 일신의 무력도 천하 백대 고수 안에 능히 들어간다고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능운표 대협은 저 높이 빈객석에 계시지.’

하나 육담호 본인이 무림명숙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인물인 것과 별개로, 남녕표국의 표사들은 그런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육담호의 명성을 보고 모여든 이가 많았지만, 표국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재들의 관리나 교육이 아직 체계적으로 되고 있지 않은 탓이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남녕표국의 소국주와 젊은 표사들은 대진표에 이름을 올린 집단 중 최약체로 평가받고 있었다.

출전 순번을 논의하라고 마련해준 막사 안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가감 없이 말했다.

“운이 좋군.”

내 말에 정현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큼. 확실히 남녕표국의 인사들이 풍기는 기도가 다른 참가집단에 비해 덜 매섭기는 했습니다.”

은하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번 대진까지 고려하는 게 좋겠어요.”

“말 잘했소. 다음 대진까지 고려해야 하지. 북해빙궁이 이번에 보내온 후기지수들은 무재보단 문재 쪽이 트인 사람들이라 아마 향란이 올라올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예선은 은소저가 세 명 모두 정리하는 것으로 합시다.”

“…예?”

그렇게 청죽은 예선 첫 순번으론 은하연이 나가게 되었다.

이윽고 찾아온 경기 시각.

“그럼 이어서 청죽관과 남녕표국의 대진이 있겠습니다.”

은하연은 연무장으로 나가다 말고, 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언공자, 만약에….”

“쓰흡. 만약은 없소. 소저라면 할 수 있고. 해야 하오.”

“…….”

은하연은 엷은 한숨을 쉬곤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런 은하연의 상대로 나온 건 남녕표국 소국주 육경진이었다.

연무장에서 서로를 마주한 은하연과 육경진은 경기 시작에 앞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정현이 말했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요?”

“남녕표국의 일거리 중 수익이 나는 것은 다 강남 상계와 관련이 있을 테니… 두 사람은 면이 원래 있을걸?”

“그렇겠습니다. 한데….”

“한데, 뭐?”

“너무 은소저께 부담을 주신 것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자칫 무리를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부담을 줬을 때. 소릉이처럼 본인의 실력을 절반도 못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레 본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내는 사람이 있다. 은 소저는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야. 무위에 있어서는 자기를 둔재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고.”

나는 그제 밤에 만났던 남녕표국의 소국주 육경진을 떠올리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제 만나봤는데. 남녕표국의 소국주가 사람이 좀 가볍더라. 본인 힘으로 이룬 건 아직 없는데, 자기 과신이 좀 있었어.”

“무슨 이야기를 하시다가 그걸?”

“은소저가 아미의 검수를 제압하고 마교와의 전투에서 일선에 나선 게 사실이냐고 묻더라고.”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셨습니까?”

“물론이지. 어차피 조금만 품을 들여도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니, 숨길 일도 아니잖아? 그랬더니 주판만 만지던 사람이 그게 가능하냐면서 못 믿는 눈치더군. 자기가 알던 은하연이 아니라 이거지.”

“그렇다면 육소협은 오늘 큰코다치겠군요.”

정현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대련이 시작됐다.

쌔애애액!

은하연이 한기를 감은 검을 휘두르며 짓쳐들어갔고.

육경진은 그런 은하연을 향해 마주 달려와 육가검법의 초식들을 쏟아냈다.

캉!

카카카캉!!!

일견 막상막하인 듯 보였으나, 그 균형이 깨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슥!

은하연은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옥녀보법으로 육경진이 내지른 초식들은 부드럽게 흘려냈다.

그러고는 본인의 초식엔 서릿발 같은 날카로움을 더했다.

쌔액! 쌔애액!

쌔애애애액!

그에 육경진의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읏!”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은하연의 검이 육경진의 가슴팍에 특유의 얼어붙는 생채기를 새겼다.

핏-

생긴 상처는 가볍디가벼웠으나.

그건 은하연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철렁했던 육경진일 터.

걸음을 물리며 마른침을 삼킨 육경진은 검을 거꾸로 잡고 포권을 취했다.

“져, 졌습니다.”

* * *

“은하연 생도가 남녕표국의 후기지수 셋을 모조리 꺾습니다! 준결승 진출은 청죽관의 몫이 되었습니다!!”

은하연은 삼 연승을 해냈다.

“소검후! 소검후!”

파리한 얼굴로 돌아온 은하연은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내게 눈을 흘겼다.

“흐아. 이제 저 좀 쉬어도 되는 거죠?”

“그러시오. 준결승은 나와 정현이 알아서 해보겠소.”

갑조 삼, 사번의 대진의 결과는 나와 은하연의 예상대로 향란관의 승리로 끝났다.

“이번에는 향란관의 당준기 생도가 북해빙궁의 후기지수 셋을 연속해서 꺾었습니다!”

이어서 벌어진 을 조의 예선에선 소림이 운매관을 꺾었다.

“각원 스님의 기권으로 차례를 양보받은 각심 스님이 호연찬 생도를 날려버립니다! 소림의 삼 승으로 끝이 납니다!”

다음은 윤국관과 남해 적룡궁의 대진이었다.

은하연은 청죽으로 왔고, 팽소진은 휴학을 했다.

하여, 원작보다 훨씬 약해진 전력으로 정진대회를 치르는 윤국관이었지만, 대진운이 좋았다.

상대가 남해 적룡궁이었으니까.

각궁보의 전사들이 말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남해 적룡궁의 후기지수들은 배 위에서 살아가는 족속들.

“제갈설지 생도가 삼 연승을 거둡니다! 을조에서도 홀로 삼승을 거둔 후기지수가 나왔습니다!”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제힘을 내는 그들은 뭍 위에서는 본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고.

제갈설지의 분전이 더해져 윤국은 예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이후로 점심시간을 겸해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준결승 대진이 시작되었다.

준결승 대진은 오전과 반대로 을조부터 치러졌다.

퍼어엉!!!

“각심 스님의 기권으로 차례를 이어받은 원철 스님에 의해 제갈설지 생도가 장외로 나가떨어집니다! 결승 진출은 소림의 몫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준결승까지는 올라온 윤국이었으나, 이전 경기에서 힘을 소진한 제갈설지 홀로 소림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결승전에 소림이 선착한 가운데.

우리가 속한 갑조의 준결승 대진이 시작되었다.

“그럼 청죽관과 향란관의 준결승 대진이 있겠습니다!”

창량 교수님과 이래저래 연이 좀 쌓이긴 했고, 남궁윤이 언동생에 끼게 되었다.

하나, 기숙사끼리의 감정으로 치면 앙숙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게 향란과 청죽이었다.

나는 선봉으로 나서며 피식 웃었다.

‘향란과 붙은 뒤 소림이라. 생각해보니 대진운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

하나, 소림을 생각하는 것은 일단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지금은 눈앞의 상대에 집중해야 할 때였으니까.

향란관의 선봉으로 나선 후기지수는 자치회장 매진악이었다.

‘매진악.’

나는 그의 여러 면을 본 바가 있었다.

청죽과 나를 찍어 누르려 날을 세워오는 모습도 보았고.

향란관의 회장을 역임한 수완을 얼핏 보기도 했다.

‘올빼미가 된 매진악을 흙투성이가 되도록 굴려 보기도 했지.’

참 많은 꼴을 보았는데.

그간 보았던 매진악의 모습 중, 오늘이 가장 위험해 보였다.

‘잘 벼린 칼 같네.’

이 자리에, 진주언가의 망나니를 무시하던 향란관의 자치회장은 없었다.

매진악은 더는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하여 방심도 하지 않았다.

진심, 그리고 전력을 다해 내게 부딪혀 오려 하고 있었다.

척.

비스듬히 틀린 양발.

왼손으론 검집을 부여잡고, 오른손으론 가볍게 검병에 붙이고 있는 독특한 기수식.

그 모습을 보며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사양무광(射陽無光)? 저 매가 놈이 검을 쓰는 것은 처음 보는데, 이제 보니 점창파의 제자였나 보구나.

‘맞습니다.’

- 점창의 검은 쾌(快)고. 점(點)이다. 찰나의 순간 상대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놈들의 검이니, 조금의 방심도 하지 말거라.

‘물론이죠.’

사부님의 당부에 답하며 나는 회한을 뽑아 들었다.

스르렁-

그러자, 매진악의 오른발이 한층 더 뒤틀린다 싶더니.

팟!

노란 검사가 휘감긴 검이 집에서 스릉- 뽑혀 나오며 나를 향해 뻗쳐왔다.

사일검법(射日劍法).

하늘에 태양이 열 개가 걸려있던 시절,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 후예(后羿)의 화살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창의 검법.

매진악은 일순 사람의 모양을 한 빛살이 되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나를 향해 쇄도했다.

쌔애애애애액!!!!

하지만 해볼 만했다.

극한의 집중력은 내 오감으로 하여금 시간을 쪼개게 했다.

비산하는 먼지가 멈춰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늘어지는 시간 속에.

나는 바쁘게 보법을 밟았다.

그렇게 허리를 뒤틀어 매진악의 검초를 피해냈다.

샥!

“!”

자신의 쾌검을 내가 피해내자, 매진악은 놀란 눈을 하면서도, 속사를 하듯 다음 검초를 이어 내려 했다.

하나, 허리를 비틈과 동시에 휘둘러진 내 회한이 먼저였다.

이 순간 강기가 휘감긴 회한이 매진악의 검면을 후려쳤다.

쩌!

그러자, 매진악의 검이 통곡을 하듯 울어대며 낭창하게 흔들거렸다.

검수의 통제를 벗어난 매진악의 검.

어어어엉!!!

그 검으론 더 이상 쾌의 묘리를 담은 찌르기를 수행할 수 없었다.

매진악은 거리를 벌리며 빠르게 검을 고쳐 쥐려 했으나, 그로 인해 생긴 틈을 놓치지 않은 내가 매진악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항룡장을 먹였다.

펑!!!!!

“쿨럭!”

그것으로 끝이었다.

매진악은 피를 토하며 연무장 밖으로 날아가 박혔고.

심판은 청죽관의 깃발을 향해 손을 올렸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에 눈만 깜빡이던 소리꾼과 관중들은 그제야 목청을 높였다.

“어, 언용운 생도가 매진악 생도를 장외로 날려 보냈습니다!!”

“하, 한 초식 만에 이긴 건가?!”

“두 초식 아냐? 아니다, 세 초식인가?!”

“몰라! 너무 빨라서 뭐가 뭔지 못 봤어!”

“어쨌든 언용운이 매진악을 이겼다!”

“청죽! 청죽! 청죽!”

“괴룡! 괴룡! 괴룡!!”

쏟아지는 함성 속에 나는 향란관의 출전자가 대기하고 있는 자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다음은 누구야? 궁윤이 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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