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처음인데? (1)
각원 스님이 패배를 시인하고 연무장을 내려가자, 관중들이 사방에서 들끓었다.
“청죽관의 정현이 각원을 꺾었다!”
“가만, 이거 이번 종목 최초로 소림의 제자가 패한 거 아닌가?”
“앞 단계에서 기권하긴 했지만, 그건 체력 관리를 하려고 그런 거니까…. 뺀다 치면 그렇긴 하지.”
“정말 대단한 검술이었네. 쏟아지는 매서운 곤초를 그 흐느적거리는 검으로 제압하다니…. 무당의 검이 무엇인지 나 같은 까막눈도 알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러게 말이야. 차기 검룡은 정현 도장이 되지 않을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이야기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룡은 원작의 정현이 얻었던 별호였으니까.
‘상황도 공교롭네.’
나는 팔짱을 끼며 소림의 참가자 대기석에서 올라오는 각심을 응시했다.
‘각심.’
각심은 검을 애병으로 삼은 검승(劍僧)이었다.
원작의 정현이 검룡이라 불리게 되었을 때는 녀석이 저 각심을 꺾으면서였다.
물론, 원작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주인공 세대가 이학년 이 학기 말에 접어들 무렵이었지만.
나는 팔짱을 끼며 사부님께 물음을 던졌다.
‘정현과 각심.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 글쎄다. 풍기는 기도는 비슷하구나? 산문에서 수련에 매진한 젊은 중과 네 녀석을 따라다닌 정현. 각자가 보내온 시간에 답이 있겠지.’
사부님의 말씀에.
나는 잠시 생각을 거슬러 정현과 보내온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몸이야 원작에 비해 훨씬 단단해졌을 것이다.
체계적으로 단련시켰고, 먹여야 할 것은 먹였다.
녀석이 누려야 할 것을 빼앗은 것도 없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천독단 한 개 정도?’
근데 그건 일학년 겨울방학에 때에나 먹는 거였고, 되레 원작보다 이르게 개발된 백독단을 먹여뒀다.
어떻게 봐도 몸 상태는 원작 정현의 이맘때보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본래라면 겪었을 심리적인 고통이나 고뇌를 거의 겪지 않았어.’
무인의 성장은 심기체의 조화 속에 이루어진다.
땅도 비가 온 뒤에 비로소 굳고, 쇠도 두드려야 강해진다는데.
심적인 발판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쓰흡. 돌이켜 보니 좀 화초처럼 키운 거 같은데요….’
그런 내 말에 사부님께서는 헛웃음을 지어오셨다.
- …누가 누구를? 용운이 네가 정현을? 내가 잘못 들었나?
‘아뇨, 정현을 두고 한 말 맞는데요?’
- …세상 어떤 위인이 화초를 그렇게 마구 굴려대고 쌩독을 먹이면서 키운다더냐? 그런 인간도 없거니와 그러고도 살아남는 화초는 없다. 풀 한 포기도 안 남지.
나는 사부님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다시금 각심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도 각심에 대해 말씀하셨다.
- 검승이라.
‘흔한 것은 아니죠?’
소림의 무승들은 주로 권법이나 곤법에 매진한다.
하여, 각심 같이 검을 사용하는 무승은 드물었다.
- 검을 휘두르는 중이 흔하지는 않지. 하나 그렇다 하여 허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하공부출소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니까.
강호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소림이다.
그들의 무학은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중 어느 것을 고른다 해도 천하 일절을 다투는 상승무공이 튀어나온다.
그 총체가 바로 소림이 자랑하는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였다.
‘그 상승무공을 익혀내고자, 천하의 기재들이 소림이 문을 두드리고.’
그런 기재들을 거르고 걸러 세 명을 추렸을 때.
검을 택하고도 살아남은 게 각심.
사부님의 말마따나 허접할 리가 없었다.
“들어오십시오.”
“예. 그럼 빈승, 주저치 않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곧바로 시작된 대련에서 그게 여지없이 드러났다.
사아아아악!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전신의 근육들이 핏대를 세우고.
참선과 선식 그리고 소림에서 허락한 영약 덕에 축적된 정순한 내력이 전신에 금광을 더한다.
각심은 금광을 휘감은 검을 앞세워 정현이 그려내는 태극을 찌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챙! 챙!!!
채애앵!!!!!
그것을 받아내는 정현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달마십삼검이로구나. 소림의 땡중들이 칠십이절예라 부르는 상승무공 중 하나지.
각심이 펼치는 검은 치우침이 없었다.
변화가 필요할 때는 늘어 나는 관음보살의 손처럼 변화했고.
사아아악!
챙! 채챙!!!
빠름이 필요하다 싶을 땐 그런 변화를 내려놓고 우직한 찌르기로 속력을 더했다.
쌔애애액!!!
즐겁다는 듯 웃음을 머금은 채, 정현과 어지럽게 검을 섞고 있는 각심.
그야말로 무에 심취한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애들은 착해.’
먼저 내려간 각원이 깔끔하게 패배를 시인한 것도 그렇고.
각심도 격구에서 당한 패배에 집착해 복수를 하겠다는 느낌보다는 당장에 대련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이놈들은 그냥 무(武)에 진심인 놈들이야.’
진심인 만큼 실력도 확실했다.
세상 물정을 좀 모르는 것만 빼면, 어디다 내놔도 한몫을 할 녀석들이었다.
‘공효대사도 본인 철학이 있어서 그렇지, 고까운 느낌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앞으로 마주할 싸움들은 소림이 한 팔 거드느냐, 궁둥이를 붙이고 있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질 터.
‘정진대회를 계기로 소림의 태도에 변화가 좀 있어 주면 좋겠네.’
채앵!!!!!!!!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수십 합을 맞붙은 끝에 거리를 벌린 각심이, 일순 왼손의 엄지와 장지를 붙여 불상이 흔히 하고 있는 손동작인 법륜인(法輪印)을 만들었다.
척.
그러자 웅혼한 기운이 각심의 검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사아아아악!!!
그 모습을 보며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인왕퇴산(仁王退散). 정현의 검초를 끊어내려면 강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로구나.
‘예.’
삽시간에 금광이 있는 대로 휘감긴 각심의 검은 불문을 지키는 사천왕이 쥐고 있는 거검(巨劍)처럼 변했다.
그렇게 강검으로 거듭난 각심의 검은 지체 없이 휘둘러졌다.
쌔애애애애액!!!
물론, 정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쌔액! 쌔애액!
쌔애애애액!!
녀석이 그려낸 크고 작은 반원들은 이어지고 이어져 거대한 태극으로 변했고.
부드러움을 제압하기 위해 강함을 택한 소림의 검과 그 검마저 흘려내겠다고 회전하기 시작한 태극의 검이 대차게 맞붙었다.
콰아아아앙!!!!!!!!
강능단유(剛能斷柔)와 능유제강(能柔制剛)의 검이 부딪힌 자리.
“하아. 하아…. 후우우우.”
그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정현이었다.
몽롱한 눈으로 숨을 몰아내던 녀석은 호흡을 고르더니.
다시금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기수식을 취했다.
‘저 몽롱한 눈빛은 깨달음의 순간을 맞은 것 같은데…. 이러다 내가 나설 필요 없이 정현이 다 이겨버리는 거 아냐?’
* * *
각원과 각심을 상대로 내리 이 연승을 거둔 정현이었다.
내력도 얼마 남지 않았거니와, 전신이 땀에 절은 지 벌써 오래였다.
기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나, 정현은 양팔에 금광을 휘감고 권초를 펼쳐오는 원철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쌔액!
쌔애액!
객기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기진맥진하여 널브러지는 게 정상인 상황임에도 이상하게 몸에 활력이 있었다.
쌔애애액!!
시간을 느려지게 만드는 집중력도 여전했다.
캉! 캉!
카카캉!!!!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정현은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상기해 보았다.
‘…화가 났다.’
어제는 합격진, 오늘은 은하연.
소림에게 패해 널브러진 청죽관 식구들의 너절한 몰골을 보니 노기가 일었다.
한창 대회 중인 와중에 언용운을 찾아온 소림의 방장도 정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 소협을 돕고 싶었다.’
언용운은 사문에서도 수치라 여겨지는 자신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받아주고 이끌어 주었다.
그런 언용운의 뒤를 받쳐보겠노라 다짐했지만.
정현이 생각하기에 실상 큰 도움은 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라도 꼭 힘이 되고 싶었다.
‘아니, 힘이 되어야만 했다.’
청죽관은 준결승 대련을 언용운이 혼자 해결했다.
향란관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하는 매진악과 남궁윤은 검수로서의 정현을 자극할 정도였다.
그들을 상대하고 나서 맞이하게 된 소림.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력하게 물러난다면 언용운은 그 성격상 무리를 할 게 뻔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마음은 도가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삿된 마음이고 나약한 생각이며 집착이라 여겨 떨쳐내려 했을 것이다.
하나, 이제는 떨치고 싶지 않았다.
‘언 소협을 보며 깨달았다.’
강해지고 싶어 하는 향상심도, 이기고 싶어 하는 호승심도.
혼자 걷는 도가 아니라 함께 걸어갈 도를 생각한다면 진정한 도로 통하니.
‘그 자체만으론 나약함이나 집착이 아님을.’
그러니 눈앞의 원철을 이기고 싶었다.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원철이지만,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해본다.
정현은 우선 스스로의 몸 상태를 돌아보았다.
‘활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객관적으로 나는 지쳐 있다.’
원철은 권사.
각원이나 각심 때와는 달리 거리에서 우위에 있으니.
불필요한 움직임은 하지 않는다.
‘중심만 제대로 잡고 있으면 투박한 검초로도 정확하게 막아낼 수 있다.’
쌔액!
그렇게 작고 투박한 반원을 이어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고오오오-
어느 순간.
웅성거리던 주변의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고.
세상천지에 자신과 원철 둘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
정현은 그간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심상의 벽이 허물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 혼몽해진 감각 속에 정현의 검에 엉기기 시작한, 진하디 진한 기운.
우우웅!
정현은 북두칠성을 닮은 그 기운을 먹물 삼아, 부드러움과 강함이 동시에 담긴 진한 태극을 그려냈다.
쐐애애액!!!!!!
하나, 그렇게 휘둘러진 정현의 검은 금광이 휘감긴 원철의 팔뚝에 가로막혔다.
펑!!!!
동시에 정현의 집중력이 깨어지며, 시야가 확 하고 트였는데.
이때 원철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시주. 벽을 넘으셨군요.”
“?!”
그러자마자 원철이 질러낸 장력이 정현의 복부에 쏟아져 들어왔다.
펑!!!!!
뭘 해볼 틈도 없이 연무장 밖으로 튕겨 나가며 정현은 생각했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었던 건가….’
* * *
나는 의식을 잃고 연무장에서 튕겨 나온 정현을 받아들며 생각했다.
‘주인공의 힘으로도 삼 연승은 역부족이었나?’
그러면서 슬쩍 정현의 맥과 내장 쪽을 살펴봤는데.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내력과 정신력의 한계에 달한 상태에서 맞고 기절한 거였다.
나는 정현을 당옥기와 양호처에 넘기고 원철이 기다리고 있는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선 포권을 취했다.
“고맙소.”
내 인사에 반장을 한 원철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손속에 사정을 둔 것 말씀입니까? 정현 도장께서는 지친 것이 역력했는데 어찌 그 정도 사정도 두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일을 두고 감사를 하시니….”
“방금 말고.”
“말고요?”
“그전에 정현이 깨달음의 순간을 맞았을 때, 원철 스님이 이끌어 주셨잖소?”
“아하. 그 또한 사해 안에 살아가는 백도 무림의 동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다시 겨뤄보고 싶기도 하고요.”
“어째 뒤쪽이 진심 같은데?”
“반반 정도로 해주십시오. 빈승이 싸우는 것을 좋아하긴 하나 불법(佛法)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원철의 말에 피식 웃으며, 나는 회한을 뽑았다.
“시작합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의 대기가 원철 쪽으로 빨려드는가 싶더니.
쌔애애애애액!!!!!
녀석의 우수에서 번쩍하고 주먹 모양으로 화한 금광이 분출해 나왔다.
- 백보신권(百步神拳)!
백 보 밖의 바위도 권 경으로 부숴 버린다는 소림의 상승무공.
나는 지체 없이 좌수를 뻗어 항룡장을 분출했다.
콰아아아앙!!!!!
그에, 원철의 손에서 뻗어나 온 금권과 내 손에서 뻗어나간 묵룡이 충돌하며 대기를 찢는 파공음이 터져 나왔는데.
비산한 먼지가 걷히자, 원철이 히죽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항룡유회! 역시 괴룡이십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역시 천하에는 기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미친놈.
임자를 만나 기쁜 모양이었다.
“이하동문이오.”
근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힘 조절 생각 안 해도 되는 녀석은 마교 놈들 말고는 처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