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길 (1)
원철은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렇게 몸을 일으킨 녀석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피식 웃더니.
“후후.”
맞잡은 내 손을 좌중을 향해 번쩍 들어 올렸다.
“?!”
그러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
“원철 스님이 괴룡을 인정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는 언용운이다!!”
청죽관의 식구들이 달려 나온 것은 그때였다.
가장 먼저 달려온 녀석은 은하성과 우소릉이었다.
“역시 용운 형님이시다! 여래신장! 와 저건 아무리 용운 형님이라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형님의 몸에서 새빨간 기운들이 딱!”
“그리고! 언 형의 손에 들린 회한이 촤아아악!!”
“크으으! 누님 나 오늘 생활관 안 들어가!!!”
“저도요!!”
호들갑을 떠는 녀석들의 틈바구니에서, 경룡이 형은 얼굴을 구기며 눈시울을 붉혔다.
“따흐흑.”
옆에선 고완산 선배가 똑같이 붉은 눈시울을 하고선 경룡이 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광경에 원철이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빼려 했다.
“…그, 그럼 빈승은 이만 소림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근데 예해수가 그런 원철을 막았다.
“잠시만요! 원철 스님!”
그리고 내 팔에서 손을 뗀 원철의 손을 원상 복귀시켰다.
“이대로! 이대로 잠시만 있어 주세요!”
“아, 아미타불?”
그러더니 항시 휴대하는 수첩을 펼쳐 나와 원철의 모습을 빠르게 그려냈다.
예해수는 눈은 수첩에 고정한 채 은하연에게 물었다.
“총무부장 후배님? 이건 솔직히 삽화도 넣어야 해요. 인정하시죠?”
예해수의 말에, 은하연은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공이랑 판화 만드는 이들을 지원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렇게 모여든 청죽관 식구 중엔, 언제 내빈석에서 내려오셨는지 노삼 교수님도 계셨다.
교수님은 연무장이 떠나가라 웃으시며 춤을 추셨다.
“흐하하! 이건 청죽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개방의 승리기도 하다! 하늘에서 보고 계십니까 남개 어르신! 당신의 후예가 소림을 꺾었습니다!”
…이 정도면 사람 세워놓고 대놓고 돌리는 거 아닌가?
나는 교수님께 조금 자중하시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전했다.
“…교수님 체통 없이 그러고 계셔도 됩니까?”
그런 내 말에 노삼 교수님은 당당하게 답하셨다.
“거지가 체통이 어딨느냐? 우리는 원래 그런 거 안 지킨다!”
“…아니, 그래도 원철 스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요?”
교수님은 그런 내 말에 대뜸 원철에게 질문을 던졌다.
“불쾌한가?”
노삼 교수님의 질문에 원철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하. 비, 빈승은 괜찮습니다.”
“괜찮다는데?”
“아니, 그렇게 물어보면 당연히 괜찮다고 말하죠!”
“그, 자비로 어떻게 안 되나? 내가 소림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기뻐서 그래, 순수하게 기뻐서. 아무리 숭산에서만 지냈대도 청죽관에 대한 지난날의 평들, 귀가 있으니 들어보긴 했을 것 아닌가? 볕들 날이라곤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지….”
…들을 생각이 없으시군.
교수님을 말려보고자 경룡이 형을 찾았지만.
정작 그 형도 한껏 얼굴을 구기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엷은 한숨을 토해낸 나는 원철에게 말했다.
“원철 스님. 이만 가보세요. 곤란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런 내 말에 원철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혀 곤란하지 않았습니다. 청죽은… 좋네요.”
“그런 것 치고는 당혹스러운 기색이시던데?”
“제가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아서 당황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곤란하거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별게 다 즐거우시네.”
“소림의 하루는 예불 시간과 공양을 하는 시간을 빼면 수련으로 시작해서 수련으로 끝이 납니다. 더욱이 저는 스승님이 계시는 암자에서 함께 지내는 데다, 배분이 쓸데없이 높아 사질들이 어려워해서….”
“친구가 없으시구만?”
“…….”
너무 정곡을 찔렀는지 원철의 말문이 막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친구 해드릴까?”
그런 내 말에 원철이 반색을 하며 답을 하려던 때.
은하연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원철 스님?”
“예?”
“일생일대의 선택이 될 수도 있잖아요?! 조금 숙고를 하시는 것도 저는 괜찮다고 봐요.”
그런 은하연의 음성에 언동생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은 소저? 그게 무슨 말이오? 그리고 너희는 왜 고개를 끄덕여?”
은하연은 손뼉을 쳐 주위를 환기하며 말을 돌렸다.
“자자, 다들 좀 진정하세요. 언 공자도 원철 스님도 방금 대련이 끝난 참이잖아요. 조금 있다 시상식도 있을 텐데 두 분 모두 운기도 하고 좀 쉬셔야죠.”
이후로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 있었고.
이어서 폐회식을 겸한 시상식이 시작됐다.
정진대회에 참가했던 후기지수들이 다시금 모여 도열한 가운데.
무림맹주님이 입을 여셨다.
“정진대회. 명숙들께서 뜻을 모아주셨고, 후기지수들은 최선을 다했으며, 관중들께서는 뜨거운 환호와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공손 모가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합니다. 덕분에 천하의 미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공손무결은 곧바로 우승기를 뽑아와 내보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정진 대회 우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우승자는 청죽관입니다!”
조금 전에 눈물을 뺀 덕분일까?
경룡이 형은 의젓하게 우승기를 찾아왔다.
“다음으론 대회 최우수 후기지수 발표가 있겠습니다! 청죽관의 언용운!”
그리고 이어서 내 이름이 불렸다.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가니.
공손무결이 씨익 웃으며 전음을 보내왔다.
[맡겨 두겠다더니. 정말로 우승기를 찾아가는구만. 축하하네.]
[제가 뱉은 말은 어지간하면 지키자는 주의여서요. 축하 감사합니다.]
[나도 감사하네.]
[제가 뭘 드렸나요?]
[줬지. 자네들의 우승은 청죽관으로서도 경사겠지만, 내게도 큰 의미가 있네. 구파의 색채가 옅은 자네들이 종합 우승을 차지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네. 특히나 소림의 후기지수들을 무위로 꺾었으니까.]
그렇게 전음을 마친 공손무결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청죽관의 생도 언용운. 그대는 정진대회에 참가하여 각종 종목에서 재기와 무위를 바탕으로 청죽관의 종합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정진 대회 최우수 후기지수로 선정하여 표창한다. 부상(副賞)은 공효대사님께서 지급하겠습니다.”
그러더니 공효대사를 불러내며 본인은 빗겨 섰다.
그렇게 내 앞에 선 공효대사는 소매춤에서 목함 하나를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몸을 던져 증명한 괴룡의 길은, 노납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겠소.”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환단이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 * *
시상식과 폐회식이 끝났고 관중들은 돌아갔다.
정진대회가 막을 내린 것이다.
하나, 대회의 취지가 취지인 만큼 ‘연회’라는 이름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 남아 있었다.
먹고 노는 것이 뭐가 중요한 일정이냐 할 수도 있겠는데.
“이 공손 모는 정진대회를 추진하면서도 잘 치러낼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나, 여기 계신 빈객들과 새외의 벗 그리고 후기지수들이 열과 성을 다해주신 덕분에.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대회를 잘 치러낼 수 있었습니다.”
공손무결과 대군사님이 정치적인 부담과 갖은 위험성을 인지하고도 정진대회를 추진한 이유는, 백본회의 판도를 바꾸고 새외와의 연계를 끈끈히 하기 위해서였다.
“대회는 끝났습니다. 하나, 천하를 근심하는 일은 남았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서로 간의 고민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여, 푸짐한 요리들과 향 좋은 미주들이 가득한 가운데 열린 이 교류의 장이야말로 본무대라 할 수 있었는데.
“보주님. 여기는 괴룡의 외숙 되시는 분입니다.”
구파의 색깔이 옅은 청죽관의 우승이 시사하는 것이 크다는 공손무결의 말이 정말인 모양이었는지.
공손무결은 밝은 얼굴로 돌아다니며, 윤영 숙부를 중심으로 새외의 인사들과 신세력들을 잇고 있었다.
“이윤영입니다.”
“오호. 각궁보주 야율수요. 여기는 내 자식 놈이오. 위야, 인사하거라.”
“야율위가 이대인을 뵙습니다.”
“인석이 괴룡과 호형호제를 하기로 했다니, 대인과 나도 형제나 다름없소. 하하하.”
그 광경을 보아하니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성싶었다.
‘새외의 후기지수들은 맹주님 뵙기 바쁘구만.’
하여 술동이를 챙겨 일어났는데.
당옥기가 살쾡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어디 가? 너 오늘 술 마시면 안 돼! 내상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의원의 자세로 들어간 당옥기.
“제가 마실 거 아닌데요, 의원님?”
녀석의 말에 답을 하자.
정현이 한마디를 덧붙이고 나섰다.
“검에 술을 치러 가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다.”
그러자 당옥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하.”
회한을 응시하며 살짝 웃었다.
“그러고 보니 탁종건 어르신도 좋아하시겠네. 본인의 유작을 맡긴 녀석이 그 검으로 명실공히 천하제일 후기지수가 됐으니까?”
“천하제일 후기지수는 무슨. 아무튼 잠시 다녀오마.”
그렇게 본관의 연회장을 나온 나는 뒤뜰로 향했다.
양호처로 통하는 이 뒤뜰에는 운치 좋은 회랑이 있었다.
나는 회랑 위에 얹어진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오른 뒤.
회한을 뽑아 들고 사부님께 먼저 한잔.
꼴꼴꼴-
이어서 달을 보며 탁종건 대야장에게도 한잔.
꼴꼴-
그렇게 술을 흘려보내고는, 사부님을 향해 말했다.
“그 이야기나 해보십시오.”
- 무슨 이야기 말이냐?
“소림 말입니다.”
- 술맛 떨어지게 땡중들 이야기는 갑자기 왜?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입니까? 이 대회 시작 전부터 소림 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하셨습니다. 제자와 처음 만나셨을 때도 소림과 악연이 있다 하셨고요.”
- …….
“제 눈치가 보통 눈치입니까? 귀신을 속이세요. 아, 사부님이 귀신이시지 참.”
- ?
“아무튼 불초 제자 놈이 대회를 치르는 데 영향을 줄까 가만히 계셨던 거 다 압니다. 뭔 일인데요?”
- …흠.
그런 내 말에 사부님께서는 잠시 고민하시는가 싶더니.
어렵게 운을 떼셨다.
-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그렇게 운을 뗀 사부님은 소림에서 산문을 쓸고 땔나무를 베는 허드렛일을 하던 소지승(掃地僧)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분이 제 태사부 되시는 분이신가 보군요.”
- 맞다. 천하의 기재셨지. 본 것은 잊지 않으셨고, 한 구절을 읽고서 한 권의 내용을 짜 맞춰낼 재능이 있으셨다.
말씀만 들으면 천고의 기재였다.
그런데 어쩌다 소림의 대사 반열에 들지 못하고 두타승이 되어 천하를 떠돌다 파천검문으로 이어진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시기하는 자가 있었군요.”
불법을 받드는 자들이라 하여 모두가 선량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인간이니 욕심이 있는 것이다.
그런 걸 다 떨쳐낸 사람은 부처라고 불린다.
그 점을 짚자, 사부님께서 동의하시며 계속해 말을 이어 가셨다.
- 영리한 녀석. 스승님을 시기하던 세 명의 땡중이 입을 맞췄다. 그렇게 없는 호랑이가 만들어졌다. 스승님께서는 무공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셨고. 그런 식으로 소림의 무학을 빼내려는 자들이 많았던 탓인지 스승님께서는 엄혹한 처분을 받으셨지.
처분의 내용을 딱히 입에 올리지는 않으셨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으셔도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림의 벌은 엄했다.
단전을 폐하는 조치 등을 취했을 것이다.
- 그렇게 사부님은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셨지. 이후로 삼류 무사들의 무공을 고쳐주는 것으로 몇 푼씩 벌어 연명하며 세상을 떠도시다가 만박두타라는 이름을 얻으셨다.
“…….”
- 뒤로는 용운이 너와 처음 만났을 때, 네 녀석이 했던 이야기다. 나를 만나셨고, 돌봐주시다 파천검문의 원류인 파산검결을 전수….
나는 울컥 치미는 노기에 몸을 일으켰다.
“이런 천하의 땡중들을 봤나. 진작 이야기를 하시죠! 빡빡이 놈 중 하나랑 친구 하자는 이야기까지 했는데. 이럴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그렇게 내가 몸을 돌리려는데.
- 아서라!
사부님께서 불호령 같은 일갈로 내 걸음을 멈췄다.
- 백 년도 더 된 이야기고, 정작 스승님께서 용서를 하신 일이다.
“…그게 용서가 됩니까?”
- 그 일을 계기로 나를 만나는 인연을 얻었으니, 절로 용서가 된다고 하셨지.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 나는 소림에 분노를 쏟아냈다.
…아. 그게 최초에 협객으로 분류됐던 사부님이 검마 소리를 듣게 된 시작이었나보다.
‘그런 사부님과 초대천마 혁련금의 인연이 천마신교를 태어나게 했고.’
천하공부출소림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가운데, 사부님께서는 남은 말을 뱉어내셨다.
- 하지만, 지금은 너를 만나는 인연을 얻었으니…. 절로 용서가 되더라는 그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도 같구나.
“…….”
- 용운아.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된다. 네가 과거의 악연에 매몰되는 것은 되레 나와 태사부님을 망령으로 만드는 것이니라.
그런 사부님의 말씀은 사람을 머쓱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하여 나도 모르게 말도 행동도 멈추고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쩝.”
사부님도 비슷한 심정이셨던 모양인지 괜히 역정을 내셨다.
- 그러게 애초에 내가 술맛 떨어지게 그 이야기는 왜 하냐고 했지 않느냐?! 에이잉! 뭐하느냐? 술이나 치거라!
나는 피식 웃으며 사부님께 다시금 술을 뿌려드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어떤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해묵은 분노를 굳이 들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겠지요.”
- 그래, 괜히 너까지….
“소림 전체를 건드는 건 안 하겠습니다.”
- ?
“다만 만에 하나라도 그놈들의 정신을 계승한 자가 있다면, 파천의 이름을 걸고 작살을 내버리겠습니다.”
- 아니, 이놈이 뭘 들은 게냐?
“저만의 길을 걸으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런 길을 걷지 말라고 한 말이지 않으냐!
“그런 놈들을 갱생시키고 배제하는 게 제 길입니다.”
- …어떻게 말을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해석하는지. 스승님, 이제야 왜 저를 보고 한숨을 쉬셨는지 알 거 같습니다….
그렇게 사부님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때.
본관 쪽에서 인기척이 있는가 싶더니.
“괴룡? 여기 계시오?”
누군가 나를 찾아 회랑으로 들어왔다.
북해빙궁의 담용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