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이렇게 추운데 개구리가 있네 (2)
백웅대주와 내 시선이 얽힌 지 잠시.
상석에 앉아 있던 담경주가 입을 열었다.
“백웅대주는 그쯤 하라.”
그는 백웅대주를 나무라듯 운을 뗐다.
하나, 진짜 화살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백웅대주의 말대로 용주 네가 취한 것 같구나. 내가 버젓이 있고 백관들이 있는데 어디라고 언성을 함부로 높이느냐?”
“…형님. 그건!”
“돌아가서 머리 좀 식혀라.”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담 형도 형세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닌데, 우리 쪽에 미안한 마음에 급했지.’
빙궁의 직제는 ‘부-단-대-조’로 이어진다.
꼴랑 대주 급이 이만한 일을 저 혼자 저지를 리는 없는 것이다.
담경주의 입김이 작용한 것일 텐데,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사람이 거기다 대고 맞섰으니….
‘뭐, 크게 보면 잘된 일이지만.’
담용주로서는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겠으나, 덕분에 이쪽으로 관심이 쏠린 것을 이용할 기회가 왔다.
‘…그나저나 담경주는 이런 행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게 뭘까?’
단순한 자신감의 표출이라기엔 정제된 느낌이 있었다.
빙궁의 후기지수들과 우리의 실력 비교하려는 건가?
‘좀 더 살가운 방법도 있었을 텐데.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을 보면 북해 땅에서 쫓아낼 구실을 찾는 것 같기도 하군.’
당장 마교에게 장악이 끝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수상함이 풍기는 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그 같은 생각에 빠져 있던 때.
담경주가 재혁숙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백웅대주의 무례를 사과하겠소. 팽 교수님께서는 우리와 인연이 좀 있으시니 아시겠지만, 북해 사람들이 말투에 거침이 좀 없는 편이오. 악의는 없을 거요.”
“젊은 무인들이 모이다 보면 흔히 일어나는 일 아니오. 우리는 백웅대주의 행동을 무례라 생각지 않을 것이니, 빙궁도 언용운 생도의 행동을 너그러이 여겨주시오.”
“별개로 궁금하긴 하오.”
“뭐가 말이오?”
“원체 길이 멀고 북해에 일이 많아 우리는 정진대회에 정예 후기지수들을 보내지 못했소. 그야말로 구색만 갖춰 보냈지.”
“…흠. 그 말씀은?”
“우리 빙궁의 무인들과 정진대회에서 이름을 날린 정무학관의 후기지수들이 맞붙는 모습이 궁금하긴 한데. 어떻게 한번 붙어보시겠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렇게 빙궁 후기지수들과의 대련이 결정되었다.
연무장과 대기석 같은 것들이 마련되는 동안 나설 순번을 정해야 했다.
그런데 담경주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인지, 재혁 숙부부터 언동생들까지 눈빛이 하나같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흠. 너무 고양된 분위기는 좋지 않은데.’
분위기를 풀고자 재혁 숙부를 향해 말했다.
“숙부. 저희랑 상의도 없이 그렇게 붙자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거, 저놈들이 열받게 하지 않느…. 아니 잠깐만. 애초에 자신 있으면 붙어보자고 나선 게 용운이 너 아니냐?”
“쓰흡. 창량 교수님께서 오늘 일을 물으시면 숙부 핑계를 대려고 했는데. 안 속으시네요.”
내 너스레에 언동생들 사이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는데.
이 와중에 여전히 굳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남궁윤이 입을 열었다.
“내가 나가겠다.”
“선봉으로 나서겠다는 거냐?”
“그래. 저 녀석들에게 겸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궁윤이가, 겸손을…?
본인부터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뜻은 가상했다.
하나, 이미 내심엔 선봉으로 나설 녀석이 정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궁윤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정현을 내보내려는 거냐?”
“아니.”
“…그럼?”
“소릉이가 나간다.”
그러자 우소릉이 기함할 듯이 놀랐고.
“예?! 제, 제가요? 자신 없는데요?”
곁에 있던 은하성이 더 깜짝 놀라며 우소릉의 등짝을 때렸다.
“소릉 동생! 용운 형님께 보충 수련을 받고 싶어? 어디서 자신이 없다는 소리를 입에 올려! 연대책임으로 번질 수도 있는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앗! 저도 모르게 그만.”
그에 사색이 된 우소릉.
나는 녀석의 어깨에 팔을 걸며 말했다.
“아냐. 평소라면 경을 쳤겠지만, 오늘 한정으론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나가서 마음 편히 지고 와라.”
“예?”
“그리고… 일 하나 하자.”
* * *
담용주는 착잡한 마음으로 재경부에 도착했다.
“음? 부부경이 아니십니까? 지금 한창 연회 중 아닌지요?”
“아. 소궁주님께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으라 하셔서 말일세.”
“…아.”
“재경부에 올라가 있겠네. 누가 날 찾거들랑 기별 주시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재경부에 도착해 책장과 서랍들을 열어 서류들을 살펴보고 있자니.
새삼 언용운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형님의 말 한마디가 가슴속에 사무치는 것 같은데. 괴룡은 어찌 그리 태연할 수가 있는가?’
심지어 백웅대주의 말은 담용주의 낯이 다 뜨거워질 정도의 모욕이었다.
‘별호를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기실 생사결을 벌이자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북해빙궁과 중원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으니, 실제로 그렇게까지 일이 번지기는 힘들 것이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쉬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아니었다.
‘그 상황을 틈타 알아보려던 것을 살펴보라니?’
보통 냉철한 걸로는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닌 것이다.
‘빙공을 수련한 사람은 나인데. 몸속에 차가운 피라도 흐르는 건가? 하기야, 그러니까 망나니라는 오명을 자처할 수도 있었겠지….’
적으로 마주하면 가장 고단한 상대가 바로 언용운과 같은 부류였다.
‘형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괴룡을 푸대접하시는 것인지.’
담용주는 자연스레 소궁주인 담경주를 떠올리게 되었다.
‘…정말 마교와 손을 잡으신 건가?’
그 생각은 아침나절에 언용운에게 던졌던 질문으로 이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담경주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손을 떼시라 말하고 싶었다.
하나,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로 형님이 마교와 손을 잡은 상황이라면.’
그런 행동은 담용주 본인은 물론이고, 자신을 돕기 위해 와준 언용운과 다른 후기지수들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
‘소궁주를 의심했다는 죄를 물으시겠지.’
그러니, 증거를 찾아야 했다.
맞다는 증거든 아니라는 증거든 찾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사락-
담용주는 재경부의 서류들을 빠르게 살피기 시작했다.
담용주는 재경부의 부부경 직을 맡고 있었다.
어느 문서를 어디에 보관하는지, 어떤 문서가 최신의 것인지 알았다.
하여, 서류들을 훑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없다.’
문제는 있어야 할 자료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담용주가 정진 대회를 다녀온 동안 없었던 조직이 세 개나 늘어났다.
들어간 물자와 재화가 없을 리가 없거늘, 정작 재경부에 출납을 기록한 서류가 없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혹시 재경부경의 집무실에 있나?”
담용주는 홀린 듯이 재경부경의 집무실로 향했다.
재경부경의 집무실에도 이렇다 할 것은 없었다.
다만, 만년한철 금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 안에 무언가가 있을 것도 같은데. 이걸 자를 수도, 들고 나갈 수도 없고. 이거 참. 방법이 없는….”
그때였다.
담용주가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재경부경의 집무실 한쪽에 난 창이 스륵- 열리더니.
누군가 담용주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
“?”
“우… 소협이 여긴 어떻게?”
“아, 언 형이 응용이를 시켜서 담형이 어디로 가시는지 지켜보고 있게 하셨나 보더라고요. 얘가 길을 알려줬어요.”
호루룩!
“…아니 그게 아니고. 여기 오층인데? 경비병도 있고?”
그러자 우소릉이 씨익 웃었다.
* * *
우소릉은 신법이 남다른 녀석이다.
제 실력을 펼쳤다면 아마 회피만 했더라도 시간을 한참 끌었을 것이다.
하나, 나는 첫 합에 절초를 펼치라는 명을 내렸고.
그 결과 우소릉은 한 합만에 우리 쪽으로 튕겨 날아왔다.
나는 녀석에게 담용주에게 가보라는 밀명을 내린 뒤, 쉬게 한다는 명목으로 당옥기와 함께 객관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연무장에 올랐다.
쌔애애애액!
연무장에 오른 나는 백웅대주와 적극적으로 합을 섞지 않고 공격을 피해 다녔다.
슉! 슉!
슈슈슉!!
그런 내 모습에.
빙궁의 젊은 후기지수들은 비웃음과 조롱을 쏟아냈다.
“저런 게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니. 하여간 중원 사람들 허풍하고는?”
“그러게 말이야. 우소릉이라는 자가 날아가고 나서 몸이 달았는지 직접 연무장으로 튀어나오더니만…. 보법 빼고는 별거 없구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부님께서는 혀를 차 오셨다.
- 저저 동태 눈깔들하고는. 그 보법이 대단한 거고, 본 실력을 한참 숨기고 있구만 그걸 구분도 못 하는 녀석들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 대는구나.
‘우물 속 개구리들이 다 그렇죠.’
사부님의 음성에 맞장구를 치는 와중에 나는 담용주와 우소릉을 떠올려 보았다.
‘빙궁을 다 뒤지란 것도 아니고 재경부만 살펴보는 건데…. 끝날 때 안 됐나?’
백웅대주는 내가 번번이 자신의 검초를 피해내자, 내 걸음을 묶기 위해 연무장에 한기를 깔아댔다.
그 결과 연무장 위에 빙판이 늘어나서 슬슬 발 디딜 틈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슬슬 도망치는 데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호루룩-
그때 마침 돌아온 응용이가 연무장 위에서 맴도는 게 보였다.
‘해냈군.’
나는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걸음에 제동을 걸었다.
그런 내 모습이 궁지에 몰린 사람 같아 보인 것일까?
백웅대주는 씨익 웃더니.
“끝이다. 그 별호는 중원제일로 고치도록 해라.”
한기를 있는 대로 감은 검초를 휘둘러왔다.
쌔애애애액!
지나가는 자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백웅대주의 검초.
‘소릉이를 날리고, 연무장 전체에 한기를 뿌려내고도 저 정도 한기를 뿌려내다니. 내력 자체는 심후하긴 하다.’
북해빙궁의 무학은 정예의 무학이다.
명문으로 이름난 방파들의 무학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빙궁의 경우는 정도가 심하다.
한기를 쌓을 수 있는 체질이 타고나야 하고 근골도 받쳐줘야 한다.
하나, 그렇게 입궁할 자격만 얻게 되면.
지천에 널린 영초와 한기를 쌓을 수 있는 특수한 지위를 얻게 된다.
그렇다 보니 무인들은 내력만큼은 소림의 후기지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림의 중들도 내 앞에선 얼빠진 표정들을 지었지.’
나는 파천의 내력을 끌어올려 진각을 밟았다.
콰자작!!
그에 연무장에 내려앉은 서릿장이 와르르 깨어졌다.
연무장에 디딤발을 때려 박은 나는 백웅대주의 검을 향해 파천단악의 초식을 내질렀다.
쌔애애애액!!!
마침내 교차된 검초.
캉!!!!!!!!!!!!!!!!!!
튕겨 나간 건 백웅대주 쪽이었다.
놈은 내 초식을 온 힘을 다해 버티려 했지만, 쥐고 있던 검은 공중으로, 본인은 뒤로 튕겨 나갔다.
물론, 나는 그가 얌전히 장외로 나가게 두지 않았다.
팍!
곧바로 비영파천보를 시전해 녀석을 따라잡았고.
멱살을 움켜쥔 뒤, 연무장 안쪽에 메다꽂았다.
쾅!!!
그리고 연속 뺨치기를 먹여주었다.
짝! 짝! 짜악악!! 짝!!!!!
그렇게 북해빙궁의 개구리 한 마리를 개구리포(脯)로 만들어준 나는 다른 무인들이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 약한 척하기도 되게 어렵네.”
놈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존심이 걸린 싸움에서 실력을 숨기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기세를 몰아 말을 이어갔다.
“아까 백웅대주 말에 곁에 계시던 분이 크게 동조하시던데… 직위가 뭐라고 하셨지? 설표대주라 하셨나?”
내가 다음 상대를 지목한 이때.
재혁 숙부와 인연이 있는 북해빙궁의 외부경 설우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외부경 설우형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 외부경은 담경주와 재혁 숙부, 그리고 나를 향해 차례차례 포권을 취해 보인 뒤.
재차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가 소궁주님과 팽 교수님 그리고 괴룡과 우리 빙궁의 후기지수들을 위해 감히 한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나와 포권을 받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설우형은 연무장 위로 걸어 올라오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스릉-
그리고 뽑아 든 검으로 연무장에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했다.
석. 서억.
서거걱.
“조심성 없이 뱉은 날이 선 말 몇 마디에, 빙궁과 정무학관 후기지수들의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어 손님을 맞이하고 친교를 다져야 할 자리가 너무도 험악해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설우형이 연무장 바닥에 새긴 글자는 말씀 언(言) 자였다.
“이 늙은이가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한 글자를 써보았으니. 이 대련은 이쯤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런 설우형의 말에 재혁 숙부는 나를 응시하셨다.
어쩌고 싶냐는 것으로 보였다.
‘흠. 마음 같아서야 다 패주고 싶지만, 빙백당도 못 가봤고 마교 놈들이 어느 정도 규모로 어디에 숨었는지도 파악을 못 했으니….’
오늘은 이쯤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만 그냥 연무장에서 내려올 수는 없었다.
나는 설우형이 써놓은 말씀 언 자를 잠시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좋은 말씀이시고 검으로 쓰셨는데도 필체가 참 좋으시네요. 외부경 어른이 쌓은 무학이 어느 정도인지 감히 짐작해 봅니다.”
“허허허. 별거 아닙니다.”
“괜찮으시면, 저도 몇 글자 보태도 되겠습니까?”
“…음? 보태고 싶은 글자가 있으면 그리하십시오.”
서걱.
서걱.
나는 우선 설우형이 써놓은 글자에 두 획을 더 새겨넣어 말씀 언(言) 자를 믿을 신(信) 자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앞에 세글자를 더 써넣었다.
서걱.
서걱 서거걱.
그렇게 완성된 네 글자.
붕우유신(朋友有信).
“…….”
“…….”
나는 담경주를 뚫어지라 응시하며 연무장을 내려왔다.
벗 사이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
이 정도면 아무리 동태 눈깔이어도 못 알아듣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