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빙궁의 기둥 (1)
내가 연무장에서 내려오자.
재혁 숙부가 입을 열었다.
“용운이 너는 동기들 데리고 객관으로 돌아가 있거라. 나는 빙궁의 고관들과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대충 마무리하고 따라가마.”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북해빙궁이 준비해준 환영연이 끝났다.
객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은하성은 분이 덜 풀렸는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아. 그놈 새끼들 싹 후드려 팼어야 했는데!”
“후드려 팰 실력은 있으시고?”
호루룩?
“…용운형님. 응용이 얘 지금 코웃음 친 겁니까? 허. 저거 진짜 언제 기강 한번 잡아야 하는데!”
“아서라. 쪼일라.”
“…크흠. 아무튼 형님도 계시고! 정현 도장이랑 윤형 그리고 누님들도 계시고. 줄줄이 붙었으면, 오늘 그냥 북해빙궁 후기지수들은 씨가 말랐죠!”
주먹이 운다는 듯이 손을 꽉 쥐는 은하성.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는데, 곁에 있던 남궁윤이 입을 열었다.
“선봉으로 우소릉이 나선 것은 이해했다. 근데 차봉으로 언용운 네가 나설 필요가 있었나? 연무장에서 시간을 끄는 일이라면 우리 중 누가 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가 해도 하는 일이면 내가 해도 되는 거잖아?”
“…너는 우리 중 최고로 강한 녀석이다. 정무학관의 얼굴이고. 굳이 그런 역할을 맡을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남궁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가 있었어.”
“달리 이유가 있었다고?”
“그래. 백웅대주 그놈이랑 변죽을 울려대던 빙궁의 개구리 놈들은 뇌에 서리가 낀 거 같긴 했지만, 소궁주는 바보가 아니다. 왜 우리한테 시비를 걸었겠냐? 비교를 해보려는 거잖아.”
그러자 은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쪽에선 제일 약한 우소협과 제일 강한 용운 공자가 나갔으니 판단이 어렵겠네요.”
이어서 제갈설지도 말했다.
“바람맞힌 것부터 포함하면, 일부러 신경을 긁는 느낌이기도 했죠. 근데 용운 님이 그런 식으로 싸우셔서 흥분한 빙궁의 무인들이 온갖 소리를 한 덕분에 빙궁 쪽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되었네요. 걸음 하나에 몇 수를 생각하시는 건지…. 고모님이 왜 탐을 내시는지 알겠어요.”
“제갈 소저도 생각했잖소?”
“우 소협은 생각 못 한걸요?”
“…모든 수를 고려한 건 아니오. 백웅대주 놈의 뺨을 치면서도 이거 몇 놈을 더 패야 하나 생각했으니. 뭐, 적절한 때에 외부경 어른이 나서주셔서 빙궁과 감정이 너무 상하기 전에 마무리된 것 같소.”
내 말에 대부분의 언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천장호는 입을 댓 발이나 내밀며 툴툴거렸다.
“어른은 무슨! 외부경 그 양반도 용운 형 무위를 보니까 더 진행됐다간 자기 식구들이 속절없이 피떡이 될 거 같으니 그런 거겠죠!”
천장호의 말에 사부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 저 젊은 거지 놈이 웬일로 저런 식견을 다 보이….
한데, 그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천장호의 본심이 나와버렸다.
“말릴 거면 진즉에 말릴 것이지! 설계 백숙을 한쪽 다리밖에 못 먹었는데! 원통하다!”
- …….
여기저기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가운데.
소천이 형이 더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천장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그쪽으로 가자. 가서 남은 거 먹고 오면 될 거 아니냐.”
“소천 형. 그건 아니죠.”
“아니야?”
“예.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용명이는 두 사람의 대화에 머리가 아픈지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팽소진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러는데, 거지가 지킬 체면이 있어? 맹에 적을 두고 계시는 분들은 신경 안 쓰시던데?”
“저는 없죠! 형님, 누님들 체면 말입니다! 가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계속 말하지 마십쇼. 생각나잖습니까!”
덕분에 한바탕 웃음이 터진 가운데.
정현이 나를 향해 물었다.
“언 소협. 그 붕우유신의 글귀는, 소궁주에게 항의를 하신 겁니까?”
“두 가지 의미지. 그런 측면도 있고, 혹여라도 마교와 선이 닿아있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뜻도 있고.”
* * *
담경주는 팽재혁과의 뒷일은 고관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본인은 소궁주전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문득 언용운이 연무장에 새겼던 글자가 머릿속에 스쳤다.
‘붕우유신이라….’
담경주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믿음? 그 믿음을 배반한 게 누군데.’
산서의 길이 막히며 곡식과 약재, 그리고 옷감들의 수급이 반 토막이 나 북해의 사람들이 곤란을 겪었을 때.
물자와 수레들을 산더미같이 재어두고 추악한 잇속을 챙긴 게 누구였나?
차오르는 노기에 담경주의 입에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대들 중원인이었다.”
담경주가 그리 따져 묻는다면.
아마 중원인들은 그건 모용세가의 잘못이라 하겠지.
하나, 담경주로서는 모두 똑같은 이들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흥. 그래서 우리가 모용세가에 원한을 갚겠다 나서면, 가만히 있으실 텐가?”
아닐 거면서.
“붕우유신. 삼강과 오륜. 모두 호의호식하는 이들이나 읊을 수 있는 소리다.”
담경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궁주전 한쪽에 걸어둔 지도로 눈을 돌렸다.
빙궁을 중심으로 그려진 그 지도엔, 이른바 한철길이라 불리는 초원과 산서 그리고 요동의 요지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요지들을 북해빙궁이 장악하고 관리한다면, 그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북해의 사람들 모두가 호의호식을 누릴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조금 전 있었던 일로 상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도 같았다.
담용주는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언용운이 했던 말을 복기해 보았다.
붕우유신.
그 의미가, 무엇일지에 대해서.
“드러난 의미로 쓴 게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설마 뭔가를 알아챈 건가?”
마공방어학 연구회의 실장이라 하니, 천마신교에 대한 식견이 있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냄새를 맡기 전에 북해에서 더욱 빨리 내보내야 했다.
하나, 그것도 지금 빙궁의 사정으로선 최소한의 예의와 절차를 지켜야 했다.
“당장은 중원의 산물이 필요하니. 결국 방문 일정을 빨리 소화시키는 수밖에 없나? 하여간에 용주 이 녀석은 왜 중원의 후기지수들을 불러들여서는…. 하는 행동마다 마음에 안 드는구만.”
담경주가 골머리를 썩히고 있던 그때.
소궁주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소궁주님. 외부경이 들었습니다!”
“드시라 해라.”
“소궁주님.”
“오셨소. 신담도객이랑은 이야기 잘했소?”
“내부경과 자리를 마련해주고 이 늙은이는 빠져나온 참입니다만, 팽 교수가 성정이 모난 사람은 아니니 오늘 일은 잘 마무리될 것입니다. 그것 말고 이 늙은이가 감히 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잔소리를 하시려고?”
“예. 소궁주께서 중원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로 하신 판단이 틀린 길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간은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오늘은 좀 해볼까 합니다.”
담경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외부경 설우형이 말을 이어갔다.
“강건한 북해빙궁은 소신 또한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하나, 한철과 빙정을 씹어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먼 길을 온 중원의 후기지수들을 너무 박대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계속해 보시오.”
“힘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부리는 용기는 만용이고 객기입니다.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부국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중원과는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일신의 무학 대성에 심혈을 기울이시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
“이건 기실 제가 생각해낸 말이 아닙니다. 영명하시던 어린 시절의 소궁주님께서, 당시 스승 노릇을 하고 있던 제게 직접 하신 말씀 아니십니까?”
잠시간의 정적.
먼저 입을 연 건 담경주였다.
“당장에 강병을 갖출 방도가 있다면?”
“…예?”
“망상을 한번 해봤소. 내가 절세의 신공을 얻고. 빙궁의 백성들이 단숨에 강병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부(富)야 중원에 있는 것을 가져오면 되는 일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일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빙백신공과 다른 빙궁의 무학들 또한 대성을 하면 천하에 따를 자가 없는 신공절학들입니다.”
“그야 그렇지. 선택받은 소수만 익힐 수 있다는 게 흠이지만.”
“…소궁주께서는 젊습니다. 심마에 사로잡히지 마시고 초석부터 착실히 다져 대계를 이루시면 되는 것입니다.”
“심마는 무슨. 애초에 망상이라 하지 않았소.”
그렇게 말하는 담경주의 시선은, 어느새 지도를 향하고 있었다.
* * *
객관으로 돌아온 우리를 가장 먼저 맞아준 건 우소릉이었다.
“언 형!”
이어서 당옥기와 담용주도 우리를 맞았는데.
당옥기는 자신들이 빠져나간 뒤의 일이 궁금했는지 나를 채근하며 물었다.
“언용운! 우리 나간 다음엔 어떻게 됐어? 지근지근 밟아줬어?!”
“…야. 담 형이 계신데.”
“앗. 미, 미안합니다. 아니, 근데 솔직히 그 백웅당주랑은 좀 맞을 만했잖아요?!”
“괜찮소. 내가 생각해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소.”
“아무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렇게 당옥기의 질문을 일축한 나는 담용주를 향해 물었다.
“다녀오신 일은 어떻게 됐소?”
“이상한 정황은 몇 개 발견했소. 그런데 명백한 증거로 삼을만한 건 또 아니라, 자료를 가지고 오지는 않고 머리에 넣어왔소.”
“잘하셨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옮긴 자리에서 담용주는 자신이 알아 온 정보를 설명해 주었다.
“우선 북해빙궁의 행사를 모조리 떠벌릴 수는 없는 일인지라, 기밀에 해당하는 것은 제외하고 특히 수상한 곳만 말씀을 드리겠소.”
“좋소. 그걸로 충분하오.”
“우선 전반적으로 부서들이 사용하는 비용들이 늘었고, 형님 친위대의 덩치가 커졌소. 새로운 조직들도 생겼고, 한데 가장 이상한 곳은 등용산장(登龍山莊)이오.”
등용산장.
그곳은 빙궁의 기초 교육기관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요?”
“북해빙궁은 삼 년에 한 번 호구조사를 하고. 빙공을 익힐 수 있는 체질을 타고난 청년들을 등용산장으로 보내 키워낸다오.”
“한데?”
“본래라면 내년에 해야 할 조사를 정진대회가 벌어지던 기간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했소. 그리하여 신입 생도들이 입소했는데. 그 숫자가 평소의 열 배나 되오.”
빙공은 북해빙궁의 체질과 근골이 맞아야지만 익힐 수 있는 무학이었다.
그런 재목이 갑자기 열 배나 넘게 늘어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거, 이상하긴 하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럼 오늘 밤에 한번 가봅시다.”
“함께 가자는 말씀이시오?”
“빙궁 내의 지리와 전각들의 역할을 잘 아시는 분이 담 형이니… 부탁드리고 싶소만.”
“아니,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그저 내가 은신술은 따로 익힌 바가 없어서 그렇소. 밤에 여기로 다시오면 형님께서 눈치를 채실까 도 걱정이고.”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계속 여기 계시다가 가는 거로 합시다. 어차피 연회도 중간에 중단된 차고…. 위무해 준다는 명목이면 적절하지 않겠소?”
“아. 그러면 될 것도 같구려.”
“용명아.”
“예. 형님.”
“장호랑 가서, 아까 쟤가 원통하다고 한 음식이랑 술을 좀 얻어와라.”
언동생들에게 일부러 소란스레 술을 마시라는 명을 내린 지 한참.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밤이 찾아왔다.
나는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담용주와 함께 객관을 나섰다.
[이 벽을 돌면 등용산장인데, 번을 서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내 뒤로 붙으시오.]
담용주는 본인의 은신술을 걱정했으나, 괜한 생각이었다.
내게 암흑동화가 있으니.
본인은 기실 발걸음만 죽일 줄 알면 됐다.
그리고 그건, 고수 반열을 넘은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샤학-
[…은신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이런 술법이? 괴룡의 명성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된 게 없는 것 같소.]
[별거 아니오. 장부나 숨겨야 할 물건은 어느 쪽에 두지? 지하실 같은 곳은 없소?]
[저 건물 아래 그런 곳이 있긴 한데….]
그렇게 도착한 등용산장에서, 나는 담용주의 안내에 따라 웬 지하실을 찾아 들어갔다.
제법 긴 복도를 걸어 들어가니,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다른 기관은 없었고, 열쇠 구멍만 있을 뿐이었다.
나로서는, 웃음이 나오는 순간이었는데.
‘하여간에 만년한철이면 장땡인 줄 알아요.’
담용주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 소협을 모시고 왔어야 했던 거 아니오?]
[그건 걱정 마시고….]
나는 왼 손가락에 피를 낸 뒤 열쇠 구멍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혈조술을 일으키며 남은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 검병에 손을 대고 계시오.]
[…그건 왜?]
[산서에선 이런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강시가 있었거든.]
[……!]
그에 담용주가 긴장된 표정으로 검병에 손을 가져갔고.
나는 혈조술로 만든 열쇠를 돌렸다.
그러자,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드르르륵-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간 공간엔, 아쉽게도 별것이 없었다.
낡은 책장과 비급으로 보이는 서책들이 있는 게 전부였다.
“비급동인가 보군.”
“등용산장에서 사용하는 장부와 생도들의 명부 입문자용 비급들을 모아두는 곳이오.”
“나는 여기 있을 테니 담 형이 살펴보시오. 입문자용이라도 내가 살피면 안 되잖소?”
“배려 감사하오.”
그렇게, 담용주가 책장 사이를 돌아다닌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담용주가 새 책처럼 빳빳해 보이는 서책 한 권을 들고 중얼거렸다.
“음? 이건 빙주심법(氷柱心法)이 아닌데?”
“빙주심법?”
“빙궁의 무학을 처음 익힐 때 배우는 심법이오. 당장은 고드름처럼 미약할지라도 찬찬히 쌓아 내라는 의미와, 문자 그대로 장차 빙궁의 기둥이 되어달라는 의미가 있소.”
“내가 한번 봐도 되겠소?”
“내가 모르는 빙궁의 무학은 없소. 빙공이긴 한데… 이건 확실히 빙궁의 것이 아니오. 보셔도 될 것 같소.”
나는 담용주가 내미는 비급서를 받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한데, 이 이름 모를 빙공에서 익숙한 역천의 묘리가 느껴졌다.
‘…이거 마공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