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빙궁의 기둥 (2)
제목도 적혀 있지 않은 비급서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역천의 묘리.
나는 회한을 품에 끼고, 사부님께 물었다.
‘이거 저희 사문의 심결과 묘리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 일단 책장을 계속해 넘겨 보거라.
‘옙.’
그렇게 사부님과 함께 비급서를 탐독한 지 잠시.
절반 정도 넘어간 책장을 두고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내공을 단전 안에서 조화시키는 방식의 결이 우리 파천검문의 심결과 비슷하긴 하구나.
‘사부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죠?’
- 오냐. 한데, 채기법(採氣法)이 괴이하구나.
채기법은 진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말했다.
- 자연의 진기나 영약에서 얻은 내력을 조화시키는 방법이 아닌듯하다. 음기는 가라앉히고 한기는 남긴다는 구절과 체내에 가라앉혀 놓은 음기로 인해 탈이 날 때 누르는 법 같은 것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게 꼭….
‘꼭. 시체에서 음한진기를 흡수하는 방식 같지 않습니까?’
- 내가 보기에도 그렇구나. 허. 련금이 녀석에게 일러준 몇 구절이 이런 무공들을 낳았는가?
본인의 행보가 낳은 결과물을 마주하신 사부님께서 뒷말을 흐리시는 가운데.
나는 담용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건 마공(魔功)이오.”
“…그게 무슨?”
담용주는 눈을 크게 키우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기억해둔 장들을 펼치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이 장을 보시오. 진기를 받아들이는데 손을 펼치는 동작이 왜 필요하겠소?”
“운기 방식이 조금 독특한 심법이 있을 수도….”
“그럼 여기 이 장을 봐봅시다. 본디 한기와 음기는 동의어처럼 쓰이는데, 굳이 나눠놓은 이유는 무엇이겠소? 폭주하는 음기를 누르는 방법이 적힌 이유는 무엇이고?”
“…그건 설명이 안 되는구려.”
“답을 알려드리지. 자연에서 받아들인 한기를 한빙진기로 정제하는 게 아니니까. 이건 시체에서 흡수한 음한의 진기를 그대로 단전에 가두는 방법을 담은 마공이고….”
“…….”
“그렇게 기운이 빨리고 나면 백골밖에 남지 않겠지. 이름은 흡음백골공 정도 되겠군.”
담용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홀로 중얼거렸는데.
“설마하니 형님께서 정말로 마교와? …왜?”
이 사실이 끝내 믿기지 않았는지,
담경주를 애써 대변해보려 했다.
“마, 마교가 어떤 놈들인지 모르고 그러셨을 것이오. 북해빙궁은 기본적으로 소식이 느리지. 중원에서 일어난 일들도 남의 이야기로 여기는 풍토가 있고 그러니….”
담경주는 아둔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은, 확인한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교와의 일은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되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 마공이라면, 체질이 맞지 않은 자도 한빙진기를 몸에 쌓을 수 있겠지. 그건 북해빙궁의 숙원 중 하나 아니오?”
“…….”
“등용산장의 신입생도가 열 배나 많이 뽑힌 것과도 맥이 통하는군.”
내 물음에 담용주는 답을 하지 못했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까 재경부에 다녀와서 말씀하시길, 빙궁의 행사를 모두 떠벌릴 수는 없으니 기밀은 제외하고 말씀하신다고 하셨지. 그 기밀까지 포함해서 잘 생각해 보시고. 일단 우리는 예서 나갑시다.”
“알겠소.”
나와 담용주는 마공서를 챙겨 등용산장을 나섰다.
그렇게 돌아온 객관엔 재혁 숙부가 계셨다.
“숙부. 제 방으로 좀 건너와 주시겠습니까?”
“알겠…. 근데 복장이 왜 그러느냐? 둘째 공자랑 산책을 나갔다더니.”
“아, 이건 경황이 없어서.”
“아니, 경황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고 꼭 도둑놈 같은…. 끙. 나 몰래 뭔 짓을 벌인 모양이구나?”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재혁 숙부와 담용주, 그리고 언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나는 각궁보에서 실마리를 잡았던 일부터 등용산장에서 흡음백골공을 찾아낸 일까지 쭉 늘어놓았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은하성이 흡음백골공이 적힌 마공서를 펼쳐 보려 했다.
“이게 그러니까 그 마공서란 말씀이시죠?”
나는 녀석에게 딱밤을 돌려주었다.
따악!
“아!”
“쓰흡. 어딜 마공서를 함부로 펼쳐 보려고 그래? 덜 여문 녀석이 잘못 봤다가는 구결이 머릿속에 남아서 주화입마로 빠질 수도 있어.”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내 말에 우소릉이 아예 표지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재혁 숙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셨던 건지 아까부터 눈을 감고 계셨다.
“…그러니까. 각궁보부터 마교가 북해빙궁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숨겼고…. 다른 녀석들은 동조했다?”
말을 마친 순간, 숙부의 눈이 번쩍 떠지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녀석들이 아주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구나!”
…맞지, 정신 나간 거.
아무리 나라도 일말의 양심이란 게 있다.
숙부는 우리가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이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그런데도 숙부께 말씀을 드리기는커녕, 일을 모두 마친 뒤에서야 상황을 설명해 드렸으니 숙부가 화를 내셔도 할 말이 없었다.
하여, 숙부의 화가 수그러들 때까지 침묵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때.
용명이가 입을 열었다.
“숙부님. 아니 지금은 교수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항상 저희 운매관 생도들에게 협을 위해서라면, 설령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마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형님이, 그리고 저희가 보고 체계를 어지럽힌 것은 맞습니다. 하나, 그래야 마교 놈들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건!”
이어서 남은 운매관 이인방도 목소리를 보탰다.
“그 말은 맞지.”
“용명이가 한 말. 저랑 누님한테는 어린 시절부터 말씀하셨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누님?”
“…뭐, 그러시긴 하셨지.”
“…….”
재혁 숙부는 말문이 막히셨는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사부님께서 입을 여신 것도 이때였다.
- …언제 언변 교육을 따로 했느냐? 변명하는 솜씨가 슬슬 누구를 닮아 가는구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 …근묵자흑이라더니.
애들이 아가리술… 아니, 언변이 언제 이렇게 좋아졌을까.
감탄하는 것도 잠시, 나는 기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건에 대해서는 추후에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좋은 생각 있으십니까?”
“생각은 무슨 생각이냐! 증거도 찾았고 하니 무림맹에 알려야지.”
“예. 알려야죠. 근데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북해빙궁과의 전면전이 될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말을 마치자.
제갈설지와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북해빙궁은 저희를 완전한 적으로 인식하겠죠. 백본회에서 결론이 빠르게 나느냐는 둘째치고. 빙궁의 군세에 마교의 군세가 함께 한다면… 엄청난 피가 흐르겠네요.”
“아울러 북해빙궁과 중원은 영원한 적이 되겠죠. 한철길이 폐쇄될 거예요.”
말을 들은 재혁 숙부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내게 질문하셨다.
“끙. 그런데 용운이 너는 다른 방도가 있어 그 말을 꺼낸 것이냐?”
“소궁주만 배제하면 어떻습니까?”
내 말에 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적금왕(擒賊擒王). 적을 사로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으라 했으니, 소궁주가 딱 어울리긴 합니다. 한데, 가능하겠습니까? 여기 계신 담 소협이 친위대도 강화됐다 하셨지 않습니까?”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 안 되면 해야 하는 하책이고.”
“그럼?”
“여기 계신 담형의 아버님 되시는 북해빙궁주께서 나서주시면 되지 않을까?”
“그렇기야 하겠습니다만… 병석에 누워 계신 분 아니십니까? 아! 혹시 산서금붕 어르신 때처럼 저주에?!”
“직접 뵌 건 아니니까 확신은 없다. 만약에 저주에 걸리신 거라면 내가. 정말로 노환과 주화입마가 합쳐져 힘들어하시는 거라면 당옥기가 나서면 될 거야.”
그러자 당옥기가 펄쩍 뛰며 말했다.
“내가 뭘 나서? 명이 다해가는 분은 어떤 의원도 못 고쳐!”
“그래, 그건 신선이 와도 못 고치지.”
“캭! 알면서 뭘 나보고 나서래!”
“근데 잠깐 기력을 되찾게는 할 수 있잖아? 당문의 회광봉침(回光蜂針) 가지고 다니잖아, 너.”
“…어. 근데 그건.”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듣고 있던 담용주가 나섰다.
“저주? 회광봉침? 그게다 무슨 소리요?”
나는 담용주를 향해 외조부께서 마교에게 당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한 뒤.
“…그리하여 내가 해주를 한 일이 있었소.”
“허. 그런 일이 있으셨구려.”
회광봉침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회광봉침은 회광반조. 그러니까 죽어가는 사람의 힘을 일시에 모아내는 침이오. 정말로 가망이 없는 병자에게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을 때 사용하는 침이지.”
“…아.”
“다만, 극독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기에 허락된 시간이 끝나면 시침을 받은 자는 반드시 죽소.”
“…….”
“결정은 담 형이 하셔야 할 것 같소.”
나는 남은 말을 맺었고.
방 안엔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 속에서 고민하던 담용주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괴룡의 방법을 택하겠소.”
* * *
나는 담용주 그리고 당옥기와 함께 궁주전으로 향했다.
어떤 조치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우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하나, 세 사람 모두 당면한 일의 시급성을 알고 있었기에 그 걸음이 느리지는 않았다.
휙! 휙! 휙!
권력과 함께 대부분의 친위 병력이 소궁주에게 넘어간 탓에 궁주전에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금세 궁주전에 도착했고.
퍽!
“?!”
퍽!
“!”
궁주전의 내실 앞을 지키고 있던 시위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북해빙궁의 당대 궁주 담창규 어르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살펴보마.”
나는 빠르게 어르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하나, 사특한 기운이나 주술의 인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바싹 마른 고목나무처럼 생명이 다해가는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저주에 걸리신 게 아닌 것이다.
“…저주는 아니오.”
그렇다면 이제 회광봉침을 사용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나는 담용주를 향해 말했다.
“강요는 하지 않겠소.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할 것이고,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것이니 이대로 돌아가도 상관없소.”
그런 내 말에.
담용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님은 평생을 북해빙궁의 안녕과 천하를 걱정하셨소. 북해땅이 마교의 군량고가 되고 사람들은 첨병과 주구가 되는 것을 결코 바라시지 않을 거요.”
“…….”
“저런 모습으로 병상에서 얼마 안 되는 천수를 누리시기보다는, 단 한 시진을 살아도 빙궁의 참된 주인으로 살겠다 하실 분이라오. 당 소저.”
“예?”
“시침해 주시오.”
“…예.”
담용주의 결정을 들은 당옥기는 굳은 얼굴로 침통을 꺼냈다.
그리고 기수식을 취하듯 호흡을 고르더니.
긴장된 얼굴로 어르신의 경혈에 침들을 꽂기 시작했다.
푹. 푹.
푹.
고작 열 개쯤 되는 침을 놓는 동안, 당옥기의 얼굴은 그야말로 땀범벅이 되었는데.
머리 정중앙에 있는 백회혈에 마지막으로 침 하나를 놓고 나자.
“흐.”
어르신의 입에서 한줄기 숨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번쩍 눈을 뜨셨다.
“아버님!”
“…용주? 이 밤에 그런 차림으로 내 방에는 어인 일이냐? 이분들은 누구고?”
그런 담창규 어르신을 향해 당옥기는 물을 한잔 따라 드렸고.
담용주는 그간의 일 중 어르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간추려 말했다.
“…그런 중에 이 마공서를 발견하게 되었고. 아버님께 조금 전에 말씀드린 시침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어르신은 퀭한 눈으로 마공서를 훑어보고는, 긴 한숨을 토해내셨다.
“허. 경주 그 녀석의 강건한 성정이 그리로 뻗어 버렸던가. 그래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라고?”
“…한 시진 정도입니다. 아버님.”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기실 이리 병석에서 눈을 감고 북해빙궁이 피로 물드는 광경을 보았다면, 내 죽어 빙백당에 들어가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두 분도 고맙소.”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니지. 자칫 잘못하면 온갖 누명을 쓸 수도 있는 일들인데 자기 일처럼 나서주어 고맙소.”
그렇게 나와 당옥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온 어르신은 다시금 담용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내 악몽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북해 땅에 마(魔)가 끼어 있었구나. …하여 어찌할 것이냐?”
“무엇을 말씀입니까?”
“내 시간이 다한 뒤의 일을 묻는 것이다.”
“…….”
“용주 넌 어릴 때부터 총명했지만, 위로 형이 있고 마음도 고와서 중요할 때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두 분은 자리를 잠시만 비켜 주시겠소?”
어르신의 말에 나와 당옥기는 꾸벅 포권을 취하고 내실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밖에 나와 있은 지 잠시.
백관을 소집하라는 명이 닮긴 교서(敎書)를 들고 담용주가 나왔다.
* * *
교서가 궁 안을 도는 동안, 나와 담용주, 그리고 재혁 숙부와 언동생들은 의복을 갈아입고 북해빙궁의 정청에 미리 들어 있었다.
이윽고 북해빙궁의 백관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의견을 나눴는데.
“궁주님의 령이 갑자기 어떻게 돈 거요? 중원의 후기지수들은 왜 정청에 들어 있고?”
“나라고 알겠소? 나도 그저 인이 찍힌 명령장을 보이길래 이렇게 온 것이오.”
“담용주 공자가 뭘 한 모양인데. 소궁주님 성정에 이거 잘못하면 큰 난리가 나겠구만.”
그 말들이 소궁주의 이야기로 귀결되기 무섭게.
장본인인 담경주가 정청의 문을 박차며 걸어 들어왔다.
쾅!
그리고 담용주를 향해 검을 뽑아 들며 노성을 내질렀는데.
“용주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아버님의 이름을 참칭하고, 중원인을 정청에 끌어들여? 지금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때, 담창규 어르신이 부축을 받으며 들어와 불호령을 내렸다.
“그러는 너는 뭐 하는 짓이냐?! 정청에서 검을 뽑아 혈육에게 겨누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