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빙궁의 기둥 (3)
담경주를 향해 일갈하며 정청으로 들어선 담창규 어르신.
어르신은 주변인의 부축을 떼어내고 걸음을 옮기셨다.
“아버….”
어르신이 담경주를 싸늘하게 지나치는 동안.
북해빙궁의 진정한 주인을 마주한 백관들은 경악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가? 궁주님께서 어떻게?”
“그러게 말일세. 애초에 궁주님의 령이 담긴 교서를 보고 정청에 나온 참이긴 하지만. 홀로 거동을 하실 정도로 병세를 회복하셨을 줄이야….”
“의약단주. 궁주님께서 기력을 되찾으시는 일은 힘들 것이라 하지 않았소? 아, 힘들 것이라 했으니… 가능은 했던 것인가? 방법을 찾은 것이오?”
“…그럴 리가요. 말이야 그리했지만,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궁주님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치를 한 게 아닙니다.”
“의약단주가 한 일이 아니라고? 그럼 누가 궁주님을 일으켜 세웠단…. 설마 중원인들이?”
“그러고 보니 정무학관의 사절단 중에 파서독제의 여식이 있었습니다. 사천당가가 흔히 독의 명가로 알려져 있으나,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가문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의약단주?”
“사천당가? …설마?”
그런 술렁임은 담창규 어르신이 옥좌에 앉으시자 뚝 끊어졌다.
백관들이 소매를 붙여 들며 읍을 했기 때문이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다만 그중에 의약단주라 지칭되던 중년인은 다른 신료들의 틈새를 헤집고 나오더니 담경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궁주님. 당가에는….”
“전음으로 하라.”
“예.”
이후로는 전음이 오갔기에 무슨 말을 나누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 허, 담경주 저놈 저거 눈깔 좀 보거라.
‘안 그래도 보고 있습니다.’
하나, 고까움을 넘어 엷은 살기마저 느껴지는 담경주의 시선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회광봉침에 대해 들은 모양이네요.’
원기를 잠시 돌려주는 대신 남은 생명력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대법을 후계자인 자신과 상의도 없이 시전했다.
효심 혹은 자존심, 둘 중 하나라도 있다면 화가 나는 게 정상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냐.’
아니나 다를까, 담경주는 들고 있던 검을 검집으로 돌려놓더니.
곧바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님의 건강한 모습을 뵈니 소자가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하나, 지금 의약단주에게 듣자 하니 중원인들이 아버님의 몸에 극독을 투약한 듯합니다.”
정청에는 또 한 번 경악이 들어찼다.
“극독?!”
“허. 그럼 독 기운으로 몸을 일으키신 것이란 말인가?”
“말씀하시는 투를 보니 소궁주님은 모르셨던 일 같은데?”
“그야 당연하지, 소궁주께서 그런 것을 허락하실 리가 있나?!”
“허, 그렇다면 감히 중원인들이 허락도 없이 궁주님의 몸에 손을 대었단 말인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담경주는 계속 말을 이었다.
“소자가 말씀을 올리기도 전에 신료들이 용주와 중원인들의 죄상을 고하는군요. 아버님. 의약단주가 몸을 살피는 것을 허락하시고, 아울러 용주와 중원인들을 추포하라는 명을 내려 주십시오!”
놈이 말을 마치자.
정청의 백관 중 다수가 담경주의 마지막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명을 내려 주소서!”
하나, 담창규 어르신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내가 허락한 일이다.”
어르신의 말에 빙궁의 백관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담경주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락을 하셨다고요?”
“오냐.”
“용주와 중원인들이 소궁주인 제 허락도 없이 북해빙궁의 내궁을 제집 안방처럼 헤집고 다녔고, 아버님의 몸에 극독을 투하했습니다!”
하나, 어르신은 또 한 번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용주와 중원의 손님들이 행한 일은 소궁주인 너에 대한 결례이자 부당한 행동이다. 하나, 그 행동들이 대의 아래 이루어졌다면 사소하다 할 것이다.”
“대의라 하셨습니까? 아버님의 몸이 회복되셨다면 대의를 위한 행동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하나, 지금 아버님께서는 지독한 독기 덕에 잠시 기력을 되찾으신 것이지, 병세를 떨치신 것이 아닙니다. 저자들이 아버님의 수명을 다 태워버린 겁니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를 반편이로 아느냐? 그 역시 알고 있느니라. 병상에 누워 무기력하게 죽어가느니, 찰나를 살더라도 빙궁의 주인으로 살다 갈 것이다.”
“…….”
“그리고 방금 말한 대의는 내 몸의 안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주, 네 독선(獨善)에 관한 것이지.”
어르신의 말에 담경주는 흠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독선이라니요?”
하나,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용주와 중원인들이 어떤 요사스런 말로 아버님의 눈과 귀를 흐리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소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소궁주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친위대를 향해 명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극독의 영향으로 정신이 없으신 모양이시다! 아버님은 궁주전으로 뫼시고! 재경부 부경과 중원인들은 추포하라!”
담경주의 명에 뒷열에 있던 친위대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나, 곧바로 담창규 어르신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소궁주는 유고 시 나를 대리하는 자일 뿐 북해빙궁의 주인이 아니다!”
그 기백에 친위대의 무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걸음을 멈췄다.
그사이 어르신은 담경주를 보며 마른 웃음을 지으시더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라.”
시선을 내 쪽으로 옮겨오셨다.
그 눈빛은 일종의 신호였다.
나는 흡음백골공을 품 안에서 꺼낸 뒤, 목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등용산장에서 찾은 마공서입니다.”
* * *
나는 마공서의 초반부와 후반부의 몇몇 장을 펼쳐 보이며 흡음백골공이 왜 마공인지를 쭉 설명했다.
“…그런고로, 이 무공은 마공입니다. 수련 초기에는 체질에 상관없이 한빙지기를 쌓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오직 시체에서만 한음의 기운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장차 음기에 사로잡히게 될 수가 있지요.”
내 설명이 끝나자 북해빙궁은 백관들은 또 한 번 술렁였는데.
그중 외부경을 비롯한 몇몇 고관은 본인들의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 비급서를 우리가 직접 봐도 되겠소?”
그 와중에 마공서라는 표현 대신 ‘비급서’라고 하는 것이, 마주한 현실을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어떤 심정인지 알 것도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단서는 붙였다.
“이쪽으로 오셔서 보십시오. 훼손의 염려가 있으니, 책은 제가 쥐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내 쪽으로 다가온 몇몇 고관이 마공서를 확인하는 사이.
담창규 어르신이 담경주를 향해 질문을 던지셨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더니, 저 마공서는 무엇이냐?”
“…….”
담경주는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서 있던 담용주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 마공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북해빙궁의 무학의 장벽을 확 낮출 수 있습니다. 그건 얼마 전 평시보다 열 배 넘는 청년을 받아들인 등용산장과 맥이 통할 것입니다. 소궁주님, 아니 형님. 솔직하게 답해주십시오. 마교와… 손을 잡으신 겁니까?”
담용주의 말에 담경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 용주 네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얄팍한 정에 휩쓸려 네게 궁의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형님!”
“그래! 손을 잡았다!”
“…모르셔서, 그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잘 모르셔서 그러신 것일 겁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기 계신 괴룡은 마공방어학 연구회의….”
“모르는 건 너다! 마공서? 저 비급서는 북해빙궁의 숙원이다!”
그렇게 운을 뗀 담경주는 담창규 어르신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버님도 저런 무학을 만드시려다 주화입마에 드셨던 것 아닙니까?! 빙공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자들이 만들어 흠이 있는 것이지, 빙궁의 무학과 접목하면 방금 저 언용운이라는 자가 말한 흠은 없어질 것입니다!”
어르신은 그런 담경주를 착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시더니.
“…네 녀석이 망령된 자들에게 완전히 물이 들었구나.”
고관 중 몇몇을 꼽으며 입을 여셨다.
“외부경. 집법경. 빙백당주. 경주와 내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겠지만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러니 그대들을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삼겠다.”
고명대신.
유지(遺旨)를 받들어 유언을 집행할 신하를 일컫는 말.
그 말이 나오자 언급된 고관들과 다른 백관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받들기가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나, 담창규 어르신은 손을 저으며 말씀하셨다.
“빙궁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고,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허례허식으로 시간을 낭비치 말고 내 명을 받들라.”
그 말에 외부경을 비롯한 고명대신들이 입술을 짓씹는가 싶더니 일제히 부복하며 답했다.
“하명하소서.”
“소궁주를 새로 세울 것이다. 담경주를 소궁주의 위에서 폐하고 담용주를 새로이 소궁주로 새울 것이니, 담경주는 소궁주의 인을 내어놓고, 고명대신들은 담용주의 자질을 다듬어 내 뒤를 잇게 하라.”
담경주가 얼굴을 감싸 쥐며 웃음을 터트린 것은 그때였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어 젖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담경주는 일순 광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망령은 아버님께서 드셨습니다.”
“뭐라?”
운을 뗀 담경주는 이죽거리며 계속 말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오래 병석에 계시면서 세상을 보시는 눈이 어두워지신 듯합니다. 아니면 중원인들의 독에 당해 이지(理智)가 흐려지신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망령된 말씀을 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담창규 어르신은 담경주를 복잡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주위를 향해 명을 내리셨다.
“뭣들하고 있느냐? 친위대는 담경주를 추포하라!”
그런데 이 순간.
담경주가 다시금 검을 뽑아 들었다.
“아버님의 시간은 이제 채 반 시진이 채 남지 않으셨습니다! 북해빙궁의 기둥은 접니다! 소궁주 자리를 내놓으라는 말씀은 거절하겠습니다!”
그리고 친위대를 향해 말했다.
“누가 마(魔)고 누가 정(正)인가? 중원인들은 북해의 백성들이 굶어 죽어갈 때! 쟤 잇속들만 챙겼다! 그런 중원인들을 이끌고 와 북해빙궁의 대계를 망친 용주 녀석에게 위를 물려 주시겠다는 아버님이 정상이신가?!”
그 말에 우뚝 굳은 친위대의 발걸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재혁 숙부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내가 보기에도 그렇구나.]
[준비하겠습니다.]
[오냐.]
그리고 언동생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다들 준비해.”
언동생들과 나는 여러 순간을 함께 넘어온지라,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 사이 담용주는 담경주를 말려보고자 입을 열었다.
“형님!”
“누가 네 형님이냐! 중원인들의 힘으로 소궁주 위를 찬탈하려고 한 녀석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기는! 뭐, 그래도 아버님의 말씀 중에 빙궁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다는 말만큼은 맞는 듯하군. 정무학관의 사절단이 이 자리에서 들은 바를 무림맹과 본가에 전하면 그들의 군세가 북해로 진격을 해올 테니까.”
하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담경주는 뽑아 든 검을 우리 쪽으로 겨눴다.
“그렇게 되면 이 땅은 폐허가 되겠지! 저 녀석들을 죽여 없애면 시간이 벌릴 것이다! 북해 백성들의 사활이 걸렸다! 북해빙궁의 무인들이여, 나를 따라라!”
채채채챙!!
그 말에 빙궁의 무인 중 꽤 많은 수가 병장기를 뽑아 들고 우르르 담경주의 뒤에 가 시립했다.
하지만 해볼 만했다.
북해빙궁 사람들이 모두 담경주의 말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고명대신들을 필두로 담용주의 뒤에 서는 무인들도 있었다.
“…북해빙궁에 피바람이 이려 하는가.”
“…외부경! 궁주님의 명을 받들어야 합니다!”
“…….”
“집법부 경의 말씀이 맞소이다! 궁주님의 뜻을 받듭시다! 소궁주의 생각이야말로 빙궁을 멸망으로 이끌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재혁 숙부와 언동생들도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채채채채챙!
나도 회한을 뽑아 들었다.
“대형은 초원에서와 똑같이. 담경주를 제압하고, 마교 놈들의 마수로부터 북해빙궁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