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빙궁의 기둥 (4)
내가 명을 내리자, 기수식을 취하고 있던 재혁 숙부와 언동생들이 각자의 무구에 기운을 둘렀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궁주 어르신을 등지는 대형을 갖췄다.
그렇게 우리가 싸울 태새를 갖추자.
“…우리도 돕겠소.”
“저희도 가세하겠습니다!”
고명대신들을 비롯해 궁주 어르신의 뜻을 받들기로 한 빙궁의 무인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고 우리 곁에 늘어섰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직면한 내전(內戰)의 위기 속에 심경들이 얼마나 복잡하실지 짐작이 갑니다. 하나, 궁주 어르신과 소궁주님을 지키고 역도들과 그 뒤에 있을 마교 놈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냉정한 말을 전하겠습니다.”
“…말씀하시오.”
“지금부터는 일말의 주저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쪽 소매를 뜯어 주십시오.”
그런 내 말에 외부경 설우형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적군과 아군의 구분을 확실히 하자는 말씀이시구려.”
“예. 난리 통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저희가 승기를 잡는다면 그 자체로 승리를 상징하는 행동이 되기도 할 것이고요.”
말을 마친 나는 솔선하여 왼쪽 소매를 뜯어냈다.
부욱-
이어서, 재혁 숙부와 언 동생들도 왼 소매를 뜯어냈고.
우리 편에 가담한 북해빙궁의 사람들도 굳은 얼굴로 한쪽 소매를 뜯어냈다.
북-
부욱-
그런 사람들 중에는 당연히 외부경 설우형이 있었는데.
담경주에게는 그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는지, 입술을 짓씹으며 설우형을 향해 물었다.
“내가 그린 강건한 북해빙궁을 당신도 진심으로 바란다고 하지 않았나? 외부경! 아니, 스승님! 그 결정에 후회가 없으시겠소?”
“소궁주… 님. 아니, 이제 폐위가 되셨으니 공자님이라 해야겠지요. 공자님, 당신의 고뇌는 이해하나 방법이 틀렸습니다. 스승 된 자로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르침을 드릴 것입니다.”
설우형은 할 말을 마치자마자 기수식을 취했다.
그에 담경주가 목청을 높였다.
“반역의 무리들이 알아보기 쉬우라고 손수 소매들까지 뜯어주시는구만! 뭣들 하는가? 담용주를 비롯해 중원에 빌붙기로 한 무리를 쓸어내라!”
그 말에 담경주를 따르기로 한 빙궁의 무인들이 덤벼 들어왔다.
“쳐라!”
“막아라!”
그렇게 성난 벌떼처럼 달려 들어온 무리가 한빙진기를 휘어 감은 무공을 일제히 쏟아내니.
설상가상(雪上加霜).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는 그 말이 문자 그대로 펼쳐졌다.
쌔애애액!!
투로를 얼어붙게 만드는 얼음장 같은 검초가 눈앞에 날아들었고.
휙!
허리를 뒤로 굽혀 그걸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나니.
곧바로 시퍼런 한빙장이 가슴 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쐐애애액!!!!
나는 항룡장으로 날아드는 한빙장에 맞불을 놓은 뒤.
꽝!!!!!!!!
그 틈에 측면을 노리던 놈들의 어깻죽지에 지체없이 회환을 찔러 넣었다.
푹! 푹!!!
그러고도 쉴 틈은 없었다.
곧바로 다른 이의 싸늘한 살초가 날아들었으니까.
합을 헤아릴 시간도 없었다.
그럴 사이에 밀려드는 적들을 하나라도 더 무력화시켜야 했으니까.
“은하성! 숙여!”
“옙!”
촤악!!!!!!
정신없이 회한을 휘두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채채챙!!
왼 날개를 지휘하고 있던 은하연이 검초들을 튕겨내며 다가왔다.
“언 공자!”
“듣고 있으니 말하시오!”
“당장은 잘 막아내고 있긴 한데,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얼마 안 가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곧 재혁 숙부도 다가왔다.
내가 상대하고 있던 적들을 자연스럽게 넘겨받은 재혁 숙부는 우리 이야기에 한마디를 보탰다.
“동감이다. 활로를 뚫어야 하지 않겠느냐? 동작이 기민한 소릉이가 궁주님을 업든지 하고 용운이 네가 전방을, 내가 후방을 맡으면 능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찾아온 잠시간의 숨돌릴 틈.
나는 빠르게 주변을 응시했다.
정청에 모인 빙궁의 백관 모두가 이 상황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까지 포함해서 정청에 있던 사람의 총합이 넷이라 친다면….’
둘은 담경주에게 가담했고.
하나는 궁주 어르신의 뜻을 받들어 담용주 쪽에 섰다.
‘…아직 편을 고르지 않은 한 무리가 남았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숙부의 말씀대로 하면 당장에 정청은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러자고 한 말이다!”
“하나, 그렇게 되면 저희가 도망친 꼴이 됩니다. 그럼 아직 편을 정하지 않은 무리가 담경주 휘하로 흡수될 텐데,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물음에 답한 건 난리 통에 걸음을 물리다 근처를 지나치던 제갈설지였는데.
“그렇게 되면 북해빙궁의 전력의 절대다수가 담경주의 손에 들어가요! 게다가 저희는 지금 섬 안에 있으니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되겠죠!”
그녀의 말을 들은 사부님께서 내게 질문하셨다.
- 일리가 있는 말이나, 하연이의 말대로 이대로는 여기도 사지가 될 것이다. 달리 생각해둔 활로가 있느냐? 시체들이 계속해 늘어나니 혹 방술을 쓸 생각이냐?
‘그 생각도 없지 않아 있긴 합니다만…. 그건 최후에 써야 하는 수입니다.’
- 그건 어째서냐?
‘담경주가 중원인이야말로 악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판국에 시체들을 일으켜 세워 싸우면 북해 사람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악당으로 보일 것이다.
‘담경주 뒤에 있을 마교 놈들도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면 곤란하죠.’
- 말하는 투가 그 외에 다른 활로도 있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예. 제가 생각하고 있는 활로는 담용주입니다.’
나는 궁주 어르신 곁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담용주를 응시했다.
- 이 판국에 저러고 있는 녀석이 활로라고? 용운아, 뭘 잘못 생각한 것 아니냐?
‘활로가 되어 줘야 합니다. 아니, 반드시 되어 줄 겁니다.’
하나, 오래 지켜보고 있을 새는 없었다.
일진(一陣)이 지지부진하자 담경주와 놈에게 붙은 빙궁의 고관들이 직접 덤벼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중 내 상대는 담경주였다.
“언용운! 나는 처음부터 네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할 소리. 나도 처음부터 네 눈깔 마음에 안 들었어. 잔말 말고 들어와라, 담경주.”
* * *
북해빙궁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아비와 자식이 검을 겨누고.
형제와 자매가 검을 맞댄다.
촤아악!!!
“끄악!!”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가 튀고 단말마가 이어진다.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됩….”
담용주는 싸우면 안 된다는 말을 하려다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형님의 행동을 떠나, 나도 북해빙궁의 죄인이지 않을까?
‘정말 이 방법밖에 없었던가?’
그러고 보니 언용운이 북해빙궁의 옥좌를 차지하고 싶다는 야망을 품어 본 적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담용주는 야망이 아니라 소망이라고, 그저 북해의 사람들을 어찌 먹여 살릴까 근심해봤을 뿐이라 답했었다.
‘그 답은 순수했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담용주의 의식이 침식되고 있던 그때.
누군가 담용주의 손을 건드렸으니, 그는 다름 아닌 담창규였다.
“…아버님?”
“북해빙궁을 지키고자 경주 편에 붙은 자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건 신료들이 있다.”
“…….”
“중원의 벗들 또한 피를 흘리고 있고. 한데, 너는 어찌 눈을 감고 있느냐. 궁주전에서 북해 땅에서 마교를 몰아내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더냐?”
“그랬습니다.”
“일이 이리될 줄 몰랐다 할 것이냐?”
“…이리될 수도 있다 생각은 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나, 이리되었다. 너는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이 순간 담용주의 뇌리에, 너는 중요한 순간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담창규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이 보였다.
‘내 목을 형님에게 내어드리고 내 편에 선 사람들을 살리는 길. 그리고… 내 편에 선 사람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첫 번째 선택지는 애초에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었고.
‘괴룡도, 외부경 어른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빙궁을 마교의 손에 고스란히 넘기는 선택이었으니까.
‘싸우면 안 된다, 가 아니다.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을 마친 담용주는 곧바로 왼 소매를 찢어냈다.
“형님…. 아니, 폐주(廢主) 담경주의 말은 그 전제부터 틀렸소! 이건 중원인과 북해인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요!”
그리고 내력을 실어 입을 열었다.
“왜 중원 사람들은 어두운 면만 비추고, 마교 쪽은 밝은 면만 비추는 것이오? 마교도들은 사람도 내력 증진의 재료로 여기는 이들이오! 그런 자들과 무엇을 함께 도모할 수 있단 말이오?!”
그의 말 한마디에 정신없이 부딪히고 있는 날붙이들이 멈춰서는 기적 같은 일은 없었다.
챙챙!!
채채채챙!!!!
하나, 담용주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북해의 백성들은 노예가 될 것이고, 이 땅의 산물은 풀 한 포기도 남지 않게 될 것이오!”
담경주 편에선 자들의 마음속에 일말의 주저를 심기 위함이었고.
아직 편을 정하지 않은 이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북해빙궁을 이롭게 하는 일이겠소? 진정으로 북해 땅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를 향해 검을 들어야 할지 생각해 보시오!”
빙궁의 진정한 후계자가 진심을 담아 뱉은 그 외침에.
조금이지만, 전장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 * *
눈을 뜬 담용주는 정말로 활로가 되어 주었다.
우리 쪽에 합류한 그는 계속해 북해빙궁의 무인들에게 호소했다.
그 효과는 강력했다.
“가세하겠습니다!”
“이 사람도 궁주님과 소궁주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담용주는 단순히 감정에만 호소한 게 아니었다.
계산적인 무리에게는 계산서를 들이밀었고.
“담경주의 계획은 최소 삼 년은 걸리는 계획이오! 지금 들통난 시점에서 이미 산통이 다 깨졌단 말이오! 미래는 없소! 역도의 무리와 마교도를 일망타진하는 것만이 북해빙궁이 살길이오!”
심지가 약한 이들은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강하게 얼렀다.
“여태 방관하고 있는 자들은 들으시오! 이 싸움이 우리의 승리로 끝난다면, 그대들 역시 역적의 무리에 동조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그 모습에 사부님께서는 혀를 내두르셨다.
- …용운이 너 정도는 아니지만, 협박을 하는 솜씨가 상당한데?
‘?’
- ?
‘…협박이라뇨. 인사관리라고 해주십시오. 뭐, 애초에 자질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아무튼 그 덕에 소매를 뜯어내고 우리 쪽에 가담하는 무리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리하여 최초에 담경주 쪽이 배는 우세했던 세력의 균형이 동등해졌고.
어느 순간 초월했다.
이때부터 담용주는 초월한 전력을 활용하여 담경주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압박해 나갔다.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반격을 해도 될 것 같소! 고명대신들께서는 아버님을 지켜주시고 설랑대는 후방을 들이치시오!”
덕분에 나는 담경주와의 싸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소궁주님! 백웅대가 뚫릴 것 같습니다!”
“설표대주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반대로 담경주는 신경 쓸 게 많아지며 손발이 어지러워지게 되었다.
“그럼….”
“어허, 경주야 한눈팔면 안 되지?”
그 틈을 타 나는 녀석의 가슴팍에 기다란 상처를 새겨 주었다.
촤악!
“큭!”
“에헤이. 좀 얕았네.”
북해빙궁 특유의 보법으로 회한이 몸에 닿는 순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목숨은 건졌으나, 철렁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피가 번져 나오는 가슴팍을 확인한 담경주의 입에서 퇴각 소리가 나왔다.
“…퇴각한다!”
“퇴각한다! 소궁주님을 지켜라!”
담경주의 세력이 정청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쫓는다!”
“예!”
우리도 그런 담경주를 쫓아 정청을 나갔는데.
팟!
비영파천보로 거리를 줄여 담경주의 지척에 이른 이때.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 달빛을 가리는가 싶더니.
‘응?’
한쪽 손이 피쳐럼 붉은 권사가 담경주와 나 사이에 뛰어들며 시뻘건 권강를 쏟아냈다.
쌔액! 쌔액! 쌔액! 쌔애액!!
나는 급히 걸음을 물리며 바쁘게 회한을 휘둘렀다.
쾅! 쾅! 콰콰쾅!!!!
그렇게 공격들을 쳐내고 보니.
권사의 얼굴이 꽤 낯이 익었다.
“경 노야…로 만든 강시인가?”
그리고 이어서 웬 정신 나간 여자가 깔깔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운아! 놀자아!”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강시들이 속속들이 담을 넘어온 건 그 순간이었다.
무수히 많은 강시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고, 그 수를 감히 어림잡을 수도 없이 합류는 계속해 이어졌다.
그에 언동생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응시했고.
이래저래 내 방술을 견식해본 담용주는 대놓고 물어왔다.
“무슨 강시가 저렇게나…. 괴룡, 무슨 방법이 없겠소?”
“방법이 있긴 한데, 정청 안의 싸움으로 내력이 좀 애매하오.”
“…하면 어쩌면 좋겠소?”
“빙백당으로 갑시다. 거기서 대환단을 흡수해야 할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