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53화 (253/444)

제253화. 결정 (2)

우리는 일단 후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무림맹 시찰단과 합류하기 위해 각궁보로 보낼 전서를 준비했다.

“응용이 네가 고생이 많다.”

호룩?

“별거 아니라고? 크. 니가 청죽의 정신을 아는구나!”

- …청죽의 정신이 그게 맞느냐? 협을 마주할 마음가짐을 먹은 자는 누구든 가르친다가 아니고?

사부님의 말씀은 못 들은 척을 하기로 하고.

응용이는 날려 보냈다.

“갔다와.”

호루룩!

공손무결이 시찰단을 이끌고 있다는 것만은 정황상 확실했으나, 시찰단에 포함된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자세한 사정은 적지 않았다.

그저 우리도 남하하는 중이니 길이 엇갈리지 않도록 집결지를 정하자는 이야기만 적어 보낸 뒤.

북해인들이 산물을 교환하는 창구인 북시(北市)를 염두에 두고 남하했다.

호루루룩!

아니나 다를까.

북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외딴 마을이 합류 지점으로 선택되었고.

“언공자. 저기 저 마을인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소. 누가 나와 계시는…. 밀직원장님이시군.”

그곳에 도착하자.

무림맹주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국도진이 마을 어귀에 나와 있었다.

그는 예법대로 담용주와 야율위 그리고 재혁 숙부에게 포권을 취한 뒤,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고생이 많았네. 맹주님을 비롯해 시찰단에 참여한 명숙들께서 자네들을 기다리고 계신다네.]

말을 마친 국도진은 앞장서서 우리를 인솔했다.

그렇게 민가가 밀집해있는 곳으로 향했고,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가니.

진법의 묘리를 살려 숨겨 놓은 큼지막한 가옥이 나왔다.

“북해의 무인들과 각궁보의 전사들은 저쪽에서 대기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소궁주님과 소보주님 그리고 정무학관의 사절단원들은 이쪽으로.”

무림맹에서 사용하는 거점인 모양이었다.

“맹주님. 북해빙궁의 소궁주님과 각궁보의 소보주님 그리고 정무학관의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들어들 오시라 하게.”

그중 국도진이 가리키는 방안에 들어서니.

상석에 앉아 있는 공손무결과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 네 아비도 와있었구나?

‘…그렇네요?’

- 그나저나 하나같이 기도들이 대단한데?

사부님의 말마따나, 아버지도 아버지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면면들이 대단했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규.’

정무 학관이 습격당했던 때.

한달음에 달려와 주셨던 제갈설지의 아버지도 있었고.

‘종남파의 장손립,’

궁윤이네 작은할아버지에 이어 백본회의 좌장이 된 양반도 있었다.

면식이 있는 얼굴은 이렇게가 전부였으나, 다른 사람들도 대략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특유의 넓은 소매를 보면 곤륜의 도사인데, 장손립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백본회에 적을 두고 있는 덕여 도사겠고. 그 옆의 누더기 같은 승복을 입고 있는 노승은 수련에 매진하고 있을 공덕 신승이 오셨을 리는 없고….’

정진대회 때 만난 바 있던 방장스님이랑 비슷한 연배로 짐작건대.

‘공량 대사 이신가?’

백성들을 직접 돌보는 데 평생을 바쳐 민초들 사이에선 소림의 방장인 공효 보다 유명한 그분 같았다.

그러고도 초면인 사람이 둘이 더 있었는데.

이건 나를 따라 방에 들어선 남궁윤과 당옥기가 나란히 입을 열며 확인이 되었다.

“…아버님?”

“아빠?”

각각 남궁가의 소가주인 뇌운검 남궁혼.

그리고 사천당가의 가주 파서독제 당호태인 모양이었다.

모두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하자, 공손무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빈객들과 담용주를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무림맹주 공손무결입니다. 백도 무림을 대표하여, 북해에서 일어난 사태에 위로와 사과를 전합니다.”

“예. 너무도 큰 홍역이었습니다. 하나, 팽 교수님, 괴룡과 여기 계신 중원의 벗들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 계기가 된 만남이 바로 맹주님께서 주선해주신 정진대회였습니다. 저 역시 북해인들을 대표해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북해는 강인한 땅입니다. 그리고 곧 정식으로 궁주직을 이으실 소궁주님께서 이리 강건하시니. 반드시 딛고 일어날 겁니다. 이 사람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담용주와의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공손무결은 우리를 향해 다시 한번 포권을 취했다.

“정말로 고생이 많았네. 어려운 문제였고 위험한 일이었네. 하나, 자네들의 헌신 덕에 북해 땅에 똬리를 틀고 있던 마수를 걷어 낼 수 있었고, 이렇듯 신뢰도 회복이 되었네. 자네들이 내 후배라는 게 너무도 자랑스럽다네.”

우리는 그런 공손무결을 향해 가만히 포권을 돌려주었다.

곁에 앉아 있던 노승이 허허롭게 웃으며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맹주님. 그 후배라는 말씀은 강호의 후배라는 뜻이겠지요? 정무학관의 후배라는 뜻이면, 소림의 부속 무관 출신인 이 늙은 중이 소외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장난스레 눈을 흘겨 오셨는데.

배분이 배분이다 보니 천하의 공손무결도 급히 입을 열어야 했다.

“당연히 강호와 백도 무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공량 대사님.”

“아미타불. 이거 웃자고 한 말인데, 맹주님을 난처하게 해버렸습니다. 늙은 땡중이 속세에 너무 머무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격 없이 군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다른 분들께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공손무결의 말에 공량 대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다가, 좌중을 향해 반장을 하셨다.

그러더니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여셨다.

“그대가 언용운 시주인가 보구료?”

“예. 대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꼭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저를요?”

“허허허. 세간의 민초들 사이에서 괴룡이라는 이름이 파다하고, 이번에 숭산에 들리니 방장 사형과 젊은 제자들도 시주이야기로 노래를 부르더이다.”

“…아.”

“참으로 기특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정중히 반장을 해오셨다.

배분이 배분인지라 받기는 받았으나 사부님이 좀 신경 쓰였는데.

사부님께서는 먼저 이런 말씀을 해오셨다.

- 흥.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저분이 그래도 소림의 승려 중엔 가장 인격자이시긴 합니다.’

- 나도 보면 안다 인석아. 그나저나 네 아비는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냐? 꼭 입 주변에 경련이 난 사람 같구나?

‘…기쁘신 것 같은데 북해 사람들도 있고 다른 명숙들도 있어서 참고 계신 모양입니다.’

공손무결이 주위를 환기하며 나를 응시한 것은 이때였다.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건 뭔가?”

*     *     *

공손무결의 물음에.

나는 북해빙궁에서 있었던 일과 직접 보고 온 성채에 대해 간추려 말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 말을 들은 공손무결은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혈강시와 활강시 그리고 그만한 크기의 거점이라. 일단 자네들끼리 공격하지 않고 우리와 합류한다는 판단은 잘 내린 판단일세.”

“예.”

그리고 다른 명숙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비상시국인지라 판단권이 제게 있습니다만, 일단 의견들을 들어보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그러자, 백본회를 옮겨온 듯한 회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버지셨는데.

“당장 쳐야 합니다.”

여기에 사천당가의 가주 당호태도 한마디를 더했다.

“언가주님의 말씀에 이 사람도 찬동합니다! 우리 옥기가 죽을 뻔했으면 그놈들은 골백번을 죽어야 마땅하지! 당문은 원한을 갚을 것이오!”

백본회의 부회주 장손립이 미간을 좁히고 나선 건 이때였다.

“다들 생각을 좀 하시고 말씀을 하십시오.”

“아이들이 죽을 뻔했고, 북해의 벗들이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그만한 거점을 발견했습니다. 달리 무슨 생각을 더 하란 말씀이십니까?”

“언 가주! 그 이후를 생각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정마대전이 시작될 수도 있는 일 아니오?! 하북땅 진주야 저 동편에 치우쳐있지만 여기 덕여 도장의 곤륜은 십만대산이 지척이오! 그다음은 우리 섬서고! 아니 그렇소 덕여 도장?”

“예. 저도 반대입니다.”

그렇게 찬성과 반대가 각각 둘씩 나온 상황.

공손무결은 아직 의견을 내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다른 분들은요?”

하나, 아직 뜻을 정하지 못한 모양인지.

제갈규와 남궁혼은 팔짱을 끼고 있었고.

공량 대사께서는 눈을 감고 손에 쥔 염주만 돌리실 뿐이었다.

그에 공손무결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세분 명숙께서는 생각 중인 모양이시고. 괴룡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말학이 이런 자리에서 감히 입을 열어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허락하겠네. 우리가 배분이 높다 하나 마교 놈들과 맞붙어본 경험은 자네 쪽이 많지 않나? 거점을 직접 보고 온 것도 자네고.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눠봐야 어찌 보면 탁상공론일걸세, 세간의 예법은 내려놓고 솔직하게 말해보게.”

공손무결의 허락에 힘입어 나는 운을 뗐다.

“쳐야 합니다. 부회주님께서 정마대전을 말씀하셨는데, 정마대전이 두려운 것은 마교 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아직 저희에게 싸움을 걸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음지에 숨어 천하에 혼란을 일으키는데 주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왜 말을 하다 마는가?”

“생각해보니 지극히 제 사견이기도 하고. 입에 올릴 말이 아닌 것 같아서요.”

“세간의 예법은 내려놓자 하지 않았나. 하려던 말을 계속해보게.”

이 정도로 판을 깔아 주셨는데 하고 싶은 말을 더 참을 필요는 없지.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재차 입을 열었다.

“명분을 찾고, 당위성도 챙기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그런 뒤에야 복수를 다짐하며 나서는 것이 정도입니까? 저희가 그렇게 배우면 되겠습니까?”

“…….”

“…….”

“…….”

“…….”

그런 내 말에 회의장에 정적이 내리깔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남궁혼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입을 열더니.

“잘 들었네.”

공손무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태가 중합니다. 여유를 부릴 일은 아니나, 급박하게 결정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최소한의 숙고는 필요할 성싶습니다. 그만한 성채가 하룻밤 사이 사라질 수는 없을 겁니다. 다들 머리를 좀 식히면서 하룻밤만 고민들을 해보시고 내일 결정을 내리면 어떻겠습니까?”

*     *     *

공손무결은 남궁혼의 제안을 받아들여 휴회를 선언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처소를 배정받아 흩어졌다.

처소는 청죽관 생도들과 천장호가 진주언가의 처소에서 묵기로 한 것을 제외하면, 가족 단위로 배정이 되었는데.

사천당가의 처소에선 당호태가 당옥기에게 쩔쩔매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빠가 여기서 왜 나와요?”

“왜 나오냐니? 옥기 네가 걱정돼서 온 아비한테 그게 할 소리냐?!”

“사천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어떻게 알고 왔냐는 거죠.”

“무림맹주랑 의논할 일이 좀 있어서 왔다가, 옥기 네가 마교 놈들과 얽힌 것 같다는 소리에 달려왔지.”

“아, 아무튼 내일 다시 개회하면 언용운 걔 말에 힘 좀 제대로 실어주세요.”

“왜? 옥기 너 설마 언용운 그 녀석을 좋….”

“캭! 이상한 소리 하면 아빠 안 봐요?”

“…….”

“그냥 걔 말이 맞잖아. 왜 죽고 다치고 그런 뒤에야 그러는데. 그리고 나 빙궁의 궁주님한테 회광….”

“궁주님?”

“아니, 소궁주. 소궁주님한테 빙백환도 받았다고. 우리 가훈이 은원 철저 아니에요?”

“애초에 이 아비는 찬동을 했잖느냐?”

“우리 옥기 같은 말 좀 넣지 말고 조리 있게 하시라고요. 팔불출 같잖아!”

제갈세가의 처소도 사정이 비슷했다.

“아버님. 아까 회의장에서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문제니까 그렇지. 당장에 이곳 사정만 판단할 게 아니지 않느냐. 천하라는 바둑판 전반을 두고 생각해….”

“생각 다 끝나셨잖아요. 어차피 빙궁의 소식이 전해지며 무림맹의 파발과 개방의 선이 닿는 곳에는 비상이 다 떨어졌을 텐데요? 용운 님의 말마따나 마교도 정마대전이 버거울 것이라는 판단도 하셨을 거고요.”

“그거야….”

“저 때문이시죠? 성채를 치러갔다가 제가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 봐 그러신 거잖아요. 저만 이 인원에 껴있지 않았어도 찬성하셨을 거잖아요?”

“누, 눈 좀 그렇게 뜨지 말 거라.”

“그것만 아세요. 어른들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저희끼리라도 갈 거라는 거요.”

“…….”

한편, 남궁세가의 처소에는 남궁혼과 남궁윤 부자 외에, 장손립과 덕여가 찾아와 있었다.

“그 언용운이라는 녀석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었는데. 뇌운검 덕분에 일단 한고비를 넘긴 기분입니다.”

“빈도도 그랬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예. 밤사이 주장을 좀 다듬어보겠습니다. 뇌운검. 내일 회의에서 다시 한번 힘을 실어 주십시오.”

“예. 괜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 일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숙고해보겠습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돌아들 가십시오.”

장손립과 덕여를 돌려보낸 남궁혼은 남궁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구나?”

“저분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실 요량이십니까?”

“숙고를 하겠다 했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

“그러는 너야말로 찬성표를 던져달라는 것 같구나?”

“예.”

“왜냐.”

“혹 남궁세가의 입장이 있어서 찬성하실 수 없으시다면. 최소한 저분들에게 힘을 실어주시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남궁세가가 어디 누구 눈치를 보는 가문이더냐? 그보다 네 생각에 이유를 묻고 있지 않으냐.”

“누가 정말로 천하를 근심하는 사람인지 아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언용운 그 녀석 앞에서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습니다.”

“숙고해보마. 가서 쉬거라.”

서로 다른 세 가주는 자신들의 자녀가 이렇게까지 선망하는 언용운이라는 녀석에 대한 궁금증을 키우며 밤을 보냈다.

그리고 찾아온 아침.

다시금 개최된 회의에서 당호태와 제갈규 그리고 남궁혼은 모두 같은 의견을 냈다.

“칩시다. 우리 옥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이건 치는 게 맞습니다.”

“저도 신중히 판단해봤는데, 적이 정말로 우리가 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명분도 당위도 승산도 충분합니다.”

“이 사람도 찬성하겠습니다.”

마교의 거점을 공격하기로 결정이 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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