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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254화 (254/444)

제254화. 보여주자고 (1)

- 궁윤이의 아비 되는 자는 꼭 반대할 것처럼 굴더니만 찬성표를 던졌구나?

‘그러게요?’

당호태야 원래부터 거점을 공략하자는 의견에 찬성했으니 그렇다 치고.

간밤에 의견을 밝히지 않은 사람 중 제갈규와 남궁혼이 찬성표를 던졌다.

‘사실상 결정이 났군.’

직함은 무림맹주라도 제 뜻을 밀어붙일 수는 없는 사람이 공손무결 이었다.

하나, 진주언가, 사천당가, 제갈세가, 하북팽가, 남궁세가가 힘을 실어준 지금이라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반대파에 서 있던 장손립과 덕여도 그 사실을 아는지, 그들은 동시에 남궁혼을 보며 입을 열었다.

“뇌운검! 어젯밤과 말씀이 다르시지 않습니까?!”

“괜한 부스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 공감하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남궁혼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어제 회의장에서도 숙고해보자 하였고, 두 분이 제 처소를 찾아오셨을 때도 같은 말을 돌려드렸습니다. 아닙니까?”

“…그런!”

그에 담여 도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장손립은 아직 포기를 못 했는지 표적을 공량 대사로 바꿨다.

“대사. 한 말씀을 해주십시오.”

간밤에 의견을 밝히지 않았던 세 사람 중 하나이자.

세간에 이름 높은 소림의 고승 공량이라면 이 결정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 본 모양이었다.

“무엇을 말하라는 것입니까?”

“대사께서도 반대 의견을 심중에 품고 계시기에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것 아닙니까?”

“…허허.”

“찬성표를 던지신 분들은 다 세가의 분들이십니다. 자제들이 위험에 처했던 일로 감정들이 날카로워지신 것 같은데, 감정을 앞세워 이런 결정을 내리면 아니 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자제들도 다 무사하고요.”

공량대사가 돌리고 있던 염주를 멈추고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어쨌거나 무사하다…. 말씀을 너무 쉽게 하시는 것 아닙니까? 당장에 장손 부회주 본인도 마교의 거점을 치는 일을 두고 고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 쉽게 말씀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건.”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이 늙은 중이 가만히 있는 것은 불법을 받드는 자로서,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는 일에 감히 첨언하기가 저어되어 그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 속세의 일에는 살계를 열어야 하는 일이 있음을 내 모르지 않습니다.”

“…….”

“이 늙은 중의 생각이 여기 모인 사람들 보다 무거울 리가 없는데 제가 뭐라고 말을 한단 말입니까?”

공량대사는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불호를 중얼거리며 말을 맺었다.

“아미타불.”

하나, 그 행동 자체가 우리의 뜻에 동의하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에 장손립은 헛웃음을, 덕여는 긴 한숨을 내뱉었는데.

“하.”

“후우.”

“두 분의 의견에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이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 결정이 났습니다.”

이쯤 하여 공손무결이 입을 열었다.

“이젠 적을 섬멸하는 일에 머리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 이상 딴죽을 거시면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말은 타이르듯 하고 있었으나 분명한 엄포였다.

“…….”

“…….”

장손립과 덕여는 벌리고 있던 입들을 다물었고.

공손무결은 국도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밀직원장은 이 근방부터 용운이가 말한 지점 그리고 십만대산까지의 지도와 지금까지 확인된 마교의 군세에 관한 정보를 가져와 주게.”

“예.”

“그럼 밀직원장이 자료를 준비해 올 동안 잠시 휴회하겠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잠시간의 휴회.

어른들은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눴다.

“장손 부회주님 그리고 덕여 도장님, 밀직원장님이 지도를 가져오시면 이 제갈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 설명을 다 듣고 나시면 생각이 조금 바뀌실 겁니다.”

그 사이 언동생들의 틈바구니에서 배곯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꼬르륵.

범인은 천장호였다.

내가 쳐다보자 녀석이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밥부터 먹고 하자고 하면 안 될 분위기죠?”

“되겠냐?”

그런 천장호를 향해 팽소천이 말했다.

“말린 닭가슴살 있는데 먹을래?”

“그딴 건 소천 형이나 많이 잡수…. 아니다 하나 줘보쇼.”

“여기.”

“돼지. 나도 하나 줘 봐봐.”

천장호에 이어 팽소진이 말했고, 언용명도 손을 내밀었다.

“소천이 형 저도 하나 주십시오.”

“용명이 얘까지만 준다. 내 것도 없어.”

그사이 제일 먼저 고기를 받아든 천장호는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무맛이네 무맛. 말 그대로 아무 맛이 없네. 근데 이거 작전 회의 시작하면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후, 천하오악도 십만대산도 모두 식후경인 것을….”

“자신 있으면 직접 제안해보든가?”

“지금의 제 넉살로는 무립니다.”

그 말에 청죽관의 언동생들이 한마디씩을 했다.

“저도 무리에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거 같은 분들인걸요?”

“그러니 용운 형님이 대단한 거지. 백본회 부회주님에 공량대사에 다 가주님들인데 그 앞에서 자기 할 말을 그냥! 크으으!”

“그 용기도 대단하시지만, 말씀 자체에도 도기가 흘렀습니다. 거기서 느껴진 진심에 제갈 가주님과 남궁 소가주님 그리고 공량 대사께서도 힘을 실어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뭔. 정현 너는 항상 해몽이 과해. 은 소저는 뭘 또 고개를 끄덕이고 있소.”

“정현 도장이 해석이 과하신 편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저도 동의하는걸요?”

“…가만 보니. 이거, 오랜만에 놀려 먹을 건수 하나 잡았구만.”

“진심인데. 저는 언 가주님이랑 당 가주님만 뜻을 같이하시는 가운데 어제와 같은 지난(至難)한 회의가 오늘도 이어질 줄 알았어요.”

당옥기가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아오. 우리 아빠 이야기는 하지도 마. 진짜 얼굴을 못 들겠네.”

실제로 당옥기는 귀까지 벌게진 상태였다.

나는 왜 그러나 싶어 물었다.

“왜? 호방해 보이시는데.”

“호방하기는 무슨. 말끝마다 우리 옥기는 소리를 도대체 왜 하는 거야…. 어젯밤에 그런 말은 빼고 하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어젯밤? 가주님께 따로 무슨 말씀 드렸냐?”

그런 내 말에 당옥기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헙.”

한데, 제갈설지와 남궁윤이 덩달아 움찔하는 기색이 내 눈에 잡혔다.

“제갈 소저도? 어쩐지 제갈 가주님이 회의 중에 소저 얼굴을 힐끔힐끔 보시는가 싶더니만….”

“그냥. 제 걱정을 좀 하시는 것 같아서,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지 마시라는 말씀 정도 가볍게 드렸어요.”

“…가볍게 드린 것치고는 눈치를 많이 보시는 것 같던데?”

“기분 탓이세요.”

“그나저나 궁… 아니 남궁윤 너도 아버님께 저런 소리를 했냐? 분위기가 그런데?”

“우리 아버님은 내가 몇 마디 했다고 마음을 돌리시고 그럴 분이 아니시다.”

“하기는 했구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언용운 네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셨기에 찬성해주신 것일 거다.”

“누가 뭐래?”

“…그냥 그렇다는 거다.”

뭐, 탓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잘한 행동이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잘도 했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

국도진이 돌아와 지도를 펼쳤다.

*     *     *

마교의 거점을 공격하자는 결정이 난 뒤.

행로와 작전을 수립한 합종군은, 하얀 무복들로 갈아입고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북상을 시작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청해로 넘어가는 산맥에 있다는 성채를 향해가는 행로.

그 행로는 필연적으로 야영을 동반했는데, 남궁혼은 토닥이는 화톳불 너머의 언용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명석한 녀석이다.’

들은 이야기야 있었다.

괴룡이라 불리기 전에 들었던 당금수석 소리부터가 머리 돌아가는 게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보니 느낌이 달랐다.

‘단순히 머리만 좋고 군략에 밝기만 한 게 아니야.’

작전회의 중에 냈던 안건은 군사 역할을 맡은 제갈규의 입에서 몇 번이나 감탄을 자아내게 했고.

이쪽에서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 것도 놀랄 만했다.

하지만 숱한 천재를 겪어온 남궁혼 입장에서는 그보다 놀라웠던 건 다른 것이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녀석이다.’

운매, 향란, 윤국, 청죽.

정무학관이 설립된 이래 견원지간이라는 말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는 사대기숙사의 생도들이 언용운의 동생을 자처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랬다.

이는 지도력이 조금 우수하다고 평가할 정도가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당호태의 모습만 봐도 그랬다.

“언용운. 언용운이 어디 갔어?”

“옙. 가주님.”

“자, 이거 하나 뜯어봐.”

“아이고. 감사합니다. 음? 으으음?”

“어때?”

“이런 걸 두고 미미(美味)라고 하나 봅니다. 허, 누린내가 하나도 안 나는데요? 가주님이 대단한 겁니까? 당문이 대단한 겁니까?”

“둘 다라고 볼 수가 있지! 음하하!”

금지옥엽을 넘본다 여긴 것인지, 언용운을 향해 도끼눈을 뜨던 당호태.

그가 태도를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들이라고 해도 믿겠군.’

그저 막무가내로 넉살이 좋은 게 아니었다.

사람을 사귈 때 격 없이 사귀는 당호태 같은 사람에겐 저렇게 살갑게 굴었고.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궁혼 본인 같은 사람에게는 또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다.

‘왜 사람이 모이는지 알겠다. 하나….’

한두 명 정도를 빼면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을 저 후기지수들이 진심으로 언용운을 선망하는 것만큼은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자존심 강한 우리 윤이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해올 정도였으니까.’

선망의 수준이 그저 세대마다 출현하는 특출난 인물에 호감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지옥 불에도 뛰어 들어간다 해도 함께하겠다고 할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윤이가 정말로 천하를 근심하는 녀석이라 하였지.’

남궁혼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언용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할 말씀이 있으십니까?”

“…….”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시선이 제 쪽에 머물러 계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남궁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닐세.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었네.”

“하문하십시오.”

“북해에서의 일이야 사태 자체가 급박했다 치더라도, 이번 거점을 공략하는 일은 결정이 난 이상 그냥 어른들에게 맡겨도 되는 일 아닌가?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려 하나?”

언용운이 어떤 생각으로 천하를 근심하고 있는지를 묻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언용운은 고민하는 기색 없이 명료한 답을 내놓았다.

“그냥 맡기기만 해선 안 될 거 같아서요?”

그 말에 남궁혼은 자신의 질문이 우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명숙들이 이렇게나 모였는데, 정말로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리는 없고.’

결국 자신들이 물려받아야 할 천하라 이건가?

‘당돌하구만.’

남궁혼은 생각했다.

장차 오대세가의 판도가 바뀔지도 모르겠다고.

*     *     *

무림맹 안가에서 출발해 다시금 마교 놈들이 세워놓은 거점에 도착하기까지, 이렇다 할 일은 없었다.

‘굳이 따지면 당옥기네 아버지랑 친해진 일이랑, 궁윤이네 아버지가 이상한 질문을 해온 것 정도인가?’

아무튼.

다시금 도착한 마교 놈들의 성채는 예상대로 우리가 공격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맹주님. 놈들은 저희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별다른 낌새는 없고, 늘 해왔던 일인지 시체들을 옮기고 있습니다.”

“수고했네 밀직원장. 그럼 작전대로 흩어지세.”

그 말에 합종군의 일원들이 각자 맡은 바에 따라 흩어졌는데.

남문을 맡은 나와 반대로 아버지와 용명이는 맡은 바가 북문에 있었다.

우리는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용운아. 조심하거라.”

“아버지도 조심하십시오. 용명이 너도.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오냐.”

“예. 형님.”

그렇게 맡은 임무와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흩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반짝-

제갈규와 제갈설지가 일개 조를 이끌고 사라진 부근에서 달빛과 동경(銅鏡)을 사용해 신호를 보내왔다.

“제갈 가주님이 진법을 해제하신 모양입니다.”

내가 그 말을 전하자.

나와 한 조가 된 공손무결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가세. 우리도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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