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화. 보여주자고 (2)
합종군 중 인원이 가장 많이 배치된 곳은 남문 방면이었다.
그곳에는 나와 당옥기를 제외한 청죽관의 언동생들, 맹주님이 이끄시는 직속 타격대가 있었으며.
북해빙궁의 무인들과 각궁보의 전사들도 있었다.
“소릉아.”
“예. 언형.”
그중 공손무결의 지시에 움직인 것은 나와 소릉이 그리고 맹주님의 직속 타격대원들이었다.
샥-
샤샤샥-
우리가 맡은 바는 조용히 남문을 장악하고 성벽을 여는 것이었는데.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은밀하게 성벽에 다가선 이때.
- 공손가 녀석이 너더러 본인을 발판삼아 뛰어오르라는 것 같은데?
공손무결이 나를 응시하며 자세를 낮추더니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발판을 자처했다.
나는 곧바로 전음을 보냈다.
[…맹주님을 밟고 올라가라는 겁니까?]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새파란 후기지수를 선봉장으로 삼았는데, 이 정도는 자처해야지.]
[그건 제가 익힌 술법 중 하나가 은신에 최적화가 돼 있어서 그러기로 한 것일 텐데요?]
[그것과는 별개지, 내가 내켜서 하는 거니까.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네.]
[맹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런 것보다 현물이 좋습니다.]
[하하하. 그 또한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 걱정 말고 오르게.]
[옙.]
[조심하고.]
공손무결을 발판삼아 뛰어오른 뒤.
휙!
손에 강기를 감아 성벽에 지긋이 쑤셔 넣었다.
석-
진한 강기가 어린 손가락은 성벽을 이루는 벽돌을 헤집으며 자리를 잡았는데.
그러자마자, 내 뒤를 이어 우소릉이 뛰어올랐다.
척!
나는 뛰어오른 녀석을 침착하게 낚아챘다.
[여기 틈에 손을 넣어,]
[예!]
그리고 조금 전에 만들어놓은 성벽의 틈을 양보하고는, 새로이 손가락을 성벽에 박아 넣으며 슬금슬금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렇게 기척을 죽이고 침착하게 성벽을 기어오르기를 잠시.
고지에 다다랐는지 마교의 경계병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군주님은 괜찮으실까.”
“글쎄. 북해에서 잃었다는 강시 전력이 꽤 될 텐데 엄벌이 뒤따르지 않겠나? 그중에 혈강시가 네 구고 마라강시도 한 구 있었잖나.”
“혈강시. 아깝긴 해.”
“아깝긴 마라강시가 더 아깝지.”
“내가 아깝다는 건 혈강시 만드는데 들어간 동남동녀들을 말하는 거야. 그 야들야들한….”
잠시 호흡을 고른 나는 성벽을 마저 올랐다.
사하학-
그리고 암흑동화를 시전하며 회한을 뽑아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성벽의 경비병들은 누구한테 베이는지도 모르고 쓰러졌고.
스걱-
스거억-
나를 부지런히 따라오던 우소릉은 그사이 아래를 향해 줄을 내렸다.
공손무결과 타격대원들은 그 줄을 붙잡고 성벽을 달리듯 올라왔다.
타타타타탁!
그리고 공손무결의 수신호에 따라 열 명쯤 되는 인원은 남문의 성루로, 나머지 인원은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향해갔다.
회(回)자 모양으로 생긴 성벽의 특징을 이용하여 동문을 열기 위함이었다.
타격대가 그렇게 흩어질 때, 나와 우소릉은 성문 쪽으로 내려와 빗장을 치우고 성문을 열었다.
끼이이이!!
이후 본대를 향해 신호를 보내자, 언동생들과 각궁보 그리고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달려왔는데.
“언 소협! 우 소협!”
“어디 다치신 곳은 없죠?”
“딱 봐도 둘 다 멀쩡하네!”
언동생들에 이어 각궁보의 소보주 야율위가 나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북해에 다녀온 뒤로 눈동자가 좀 깊어진 것 같긴 했는데, 확실히 무공이 더 고강해진 것 같구만. 벽돌이 두부라도 되는 듯이 손가락을 박아 넣더군?”
“여러 일이 있다 보니 내력이 좀 늘었습니다.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야율 형님.”
나는 담용주에게도 같은 내용의 말을 전했다.
지금부터 이 남문 근처는 각궁보와 북해빙궁이 맡아줘야 했으니까.
“담 형.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조심하십시오. 미리 말씀드리긴 했지만, 아마 이 남문이 가장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바라던 바요. 마교 놈들에게 북해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오.”
그렇게 짧은 대화가 이어지고 있던 사이, 성루 장악을 끝낸 공손무결이 나를 불렀다.
“용운아.”
나는 야율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야율위가 남문의 성루를 향해 불화살을 쏘았다.
화륵!
화르르륵!
성루에서 불길이 치솟자, 적들은 이제야 우리가 침입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청들을 높였다.
“적습이다! 적습! 남문에 불이 붙었다!”
이건 치밀하게 계산된 수였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필연적으로 남문 쪽으로 적의 병력이 몰려오겠지만, 남문을 제외한 다른 곳들은 그만큼 허술해질 것이다.
‘이것 자체가 합종군에게 남문 장악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신호이기도 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성채 내 요인(要人)들의 움직임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필시 보고 체계가 발동되고, 간부들은 중요한 것들을 챙기러 가기 마련이었으니까.
나는 성벽 위로 다시금 올라온 뒤, 마교 놈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여기를 어떻게?! 아니 알았다손 치더라도 진법이 발동했을 텐데 아무런 징후도 없이 남문에 불이 붙었다고?”
“지금 어떻게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미 일이 벌어졌습니다! 간부님들께 알려야 합니다!”
“네가 가서 알려라. 어찌할지도 묻고. 나는 남문으로 가겠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보였다.
“맹주님.”
“나도 봤네.”
공손무결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공손무결은 수하들을, 나는 언동생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우리는 성채의 건물 중 중요한 곳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렇게 처음 도착한 곳에서 마주한 적들은 중간 간부로 보이는 자가 이끄는 한 무리의 검수들이었다.
“적이다!”
놈들은 입고 있는 무복의 때깔부터가 오는 길에 처치한 졸개들과는 달랐는데.
“역천귀살검진을 펼쳐라!”
본인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 중요한 곳이기라도 한 듯, 제법 매서운 합격진을 펼쳐냈다.
쌔액!
쌔애애애액!!
놈들이 펼치는 검진은 상대를 살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검진이었다.
채챙!
채채채채챙!!!
하여, 초식 하나하나가 살벌하기 그지없었는데.
수장 되는 놈의 눈썰미도 제법이었다.
“…청홍검? 무림맹주신가?”
“그렇소. 혹시 순순히 포승(捕繩)을 받을 생각이 있으신가?”
“죽어라!”
쌔애애액!
하나, 공손무결은 놈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그리 나올 줄 알았소.”
이미 여러 번 견식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공손무결의 검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십수 명의 적중 기도가 약해 보이던 녀석을 골라 검초를 펼치니.
캉!!!
촤아아악!
마교 놈이 어쭙잖은 기운을 감은 검으로 그 초식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검이 깨져나가며 통째로 베어져 나갔고.
쌔애애액!
검사를 감은 검으로 적의 투로를 막아내는가 싶다가.
캉!
최소한의 검기만 감은 검을 적들의 빈틈을 향해 지체없이 찔러넣었다.
푹! 푹!!!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이만이 해낼 수 있는, 강자의 품격이 보이는 검술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싸움에 취하지 않고 있어.’
함께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걸 토대로 넘길 상대는 확실하게 넘겼다.
힘과 내력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된다는 느낌이 될 정도였다.
“용운아.”
“예!”
물론, 그 과정에서 나와 언동생들도 한 팔 거들긴 했다.
본디 청죽관이 배워 익힌 합격진이 타격대의 채작진이였던 만큼, 공손무결의 직속 수하였던 것처럼 그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촤악!
촤아악!!!!
역천귀살검진을 펼치던 마교 놈들은 결국 푸른 공작의 날개에 휘감겨 불귀의 객들이 되었다.
그렇게 놈들을 해치우고 나서 잠시 숨을 돌리는 틈.
공손무결은 우리를 기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같이 채작진을 펼쳐보는 것은 처음인데, 이거 참 전수해준 보람이 있구만? 떨지도 않고 말이야. 하기야 이미 이래저래 실전경험들이 많지?”
그리고 다른 타격대원들을 향해 장난스레 삿대질하며 씩 웃었다.
“이거, 이 친구들이 자네들보다 나은 거 아닌가?”
공손무결의 말에 타격대원들 역시 씩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참에 타격대의 각을 하나 늘려도 될 것 같습니다.”
잠시 웃음이 번지고 있던 때.
타격대원 중 몇이 마교 놈들이 지키고 있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공손무결과 나를 불렀다.
“맹주님! 괴룡! 여기 이것들 좀 봐주셔야겠습니다!”
나와 공손무결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건물 안에는 묵은 피 특유의 쇠 비린내와 함께 약재 냄새들이 나는가 싶더니, 강시를 만들 때 사용하는 옥관과 수조들이 보였다.
나는 떠오른 감상을 바로 말했다.
“여기서 혈강시를 만들었나 본데요?”
“음. 그럼 여기 말라붙어있는 피들이 자네가 말한 원혈(怨血)인가 보구만. 그래선지 건물 전체에 한기가 느껴지는 듯하군.”
“그런데 정작 강시가 없습니다.”
“북해빙궁에서 사용한 것 아닌가? 한 구는 담경주가 흡수를 했고 나머지는 목을 베었다 하지 않았나?”
“그게 합쳐서 다섯 구였는데. 여기 있는 관은 스무 개입니다.”
내 말에 공손무결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본단이 있는 십만대산이나 다른 곳에 보냈을 가능성은?”
“역천괴마 휘하의 괴왕부가 노리던 지역이 북해빙궁과 초원 그리고 산서로 이어지는 한철길이었던 만큼 그럴 확률은 낮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 어디 있을 확률이 높겠군.”
“예. 어디 창고가 따로 있던지 한 것 같습니다.”
은하연이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입을 연 건 이때였다.
“맹주님! 언 공자! 옥기가 있는 서쪽 방면에서 신호탄이 방금 쏘아 올려졌어요.”
그 말에 건물을 나와 서쪽 하늘을 응시하니.
음산한 기운이 그 근방에 뭉쳐있는 게 보였다.
“맹주님. 그 창고 아무래도 저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서문이면 지형이 협곡이라 가장 적은 인력을 보낸 곳 아닌가?”
그랬다.
서문 방면은 협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여, 장악만 하면 적은 인력으로도 틀어막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배치된 인원이 열 명 정도밖에 안 됐다.
“저희가 가보겠습니다.”
“자네들끼리 가겠다는 말인가?”
“어차피 강시는 제 전문입니다. 도착하면 당가주님과 남궁소가주님도 계실 테고요.”
“…….”
“맹주님께서는 여기 계셔주는 게 맞습니다. 서문의 사정이 정말 어렵다면 이 성채 안이 퇴로니까 지켜주셔야죠.”
“후. 알겠네. 하나, 절대 무리는 하지 말게.”
* * *
딸랑! 딸딸랑!
음산한 방울 소리와 함께 등장한 강시군단.
서문 앞에 위치한 협곡을 메울 듯이 몰려 올라오는 순리를 거스른 시체들의 행진에, 당옥기는 지체 없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피융-
그런 당옥기의 행동에, 남궁혼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뭐하는 짓인가 당옥기 생도! 누가 신호탄을 사용하라고 허락했지?”
그에 당호태가 마주 미간을 좁혔다.
“이보시오 뇌운검. 같은 향란관 출신이고 하니, 내 어지간한 일은 참을 수 있소만. 지금 남의 집 귀한 딸한테 화를 내시는 것이오? 그건 내가 못 참는데?”
“예. 내는 겁니다. 혼을 낼 것은 내야 합니다. 짜놓은 작전이 있습니다. 정말 위험할 때 쓰자고 한 것을, 저렇게 썼다가 다른 곳이 위험에 빠지면 어쩔 것입니까? 심지어 어른의 허락도 받지 않았습니다.”
“…….”
하나, 남궁혼의 주장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는데.
당옥기 본인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뭐라?”
“크흠. 오, 옥기야?”
“이게 정말 위험한 순간이죠. 이거 사람, 아니 언용운 불러야 해요. 안 그래 남궁윤?”
“…동의한다.”
“저 강시들. 저들끼리 올라타서 성벽도 넘어요. 북해빙궁의 내성도 넘어왔다고요. 그리고 독도 잘 안 통해서 아빠랑 저는 큰 도움도 안 돼요.”
“옥기야. 말 잘했다. 역시 우리 딸이지. …근데 이 아비가 왜 도움이 안 되느냐? 이 아비가 마음만 먹으면 저런 시체 나부랭이들은 한 줌 핏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데.”
“…저만큼을 전부 다 처리하는 것은 무리시잖아요.”
“크흠.”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시각각 몰려 올라온 강시들은 정말로 성벽에 바짝 붙더니 성벽을 타 넘고자 겹쳐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턴 당가와 남궁가 사이에 불꽃이 튀길 일이 없었다.
촤아악!!!
성벽을 타 넘으려는 강시들을 베어내고.
치이이익!!
녹인다고 정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는데.
그 모습에 강시군단을 조율하고 있던 마교의 늙은 술사가 킬킬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올라라 올라! 성벽을 타 넘어서 살아 숨 쉬는 것들을 모두 지워버려라! 끌끌! 정파 놈들아! 네 놈들이 어디를 건드렸는지 보여주마! ”
언용운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보여주긴 뭘 보여줘?!”
일갈하며 나타난 언용운은 곧바로 서문의 사정을 훑는 듯하더니.
성루에 얹혀있는 지붕 위로 튀어 올랐다.
“저쪽으로!”
그리고 아군을 향해 한마디를 내뱉고는.
쐐애애애애액!!!
협곡 한켠에 처마 모양으로 얼어붙은 눈더미에 장력을 쏟아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협곡 양쪽에서 눈더미가 쏟아져 눈사태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