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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256화 (256/444)

제256화. 최선 (1)

콰콰콰콰콰콰!!!

만년설이 얹혀있는 설산에서 발생한 눈사태를 단순히 눈이 좀 밀려온다고 생각해선 오산이다.

‘수백 수천 년을 얼어붙어 있던 눈들은 바위와 강철처럼 단단하지.’

그것들이 밀려 내려오며 흙, 나무, 바위들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그렇게 끝도 없이 불어난 눈사태는 닿는 모든 것을 쓸고 내려가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추게 된다.

문자 그대로 대자연의 진노가 되는 것이다.

그런 대자연의 힘 앞에선 신공절학이나 일신의 내력 따위는 무의미해진다.

딸랑딸랑딸랑!!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지, 마교의 술사들이 흔들어 대는 방울 소리가 급해진 가운데.

나도 급히 성루에서 뛰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도망가! 이 정도 성벽으론 눈사태가 넘칠 거다!”

내가 일갈하자, 나와 함께 온 언동생들이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남궁혼과 당호태 등 서문을 맡고 있던 사람들도 다급히 성벽에서 뛰어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얼마 되지 않아 얼음과 눈더미로 이루어진 해일(海溢)이 서문을 집어삼켰고.

콰아앙!!!

그리고도 모자라, 대략 백여 보쯤 되는 거리를 더 밀고 내려왔는데.

콰콰콰콰!!!

눈사태에 쫓겼던 걸음이 멈추고 나자, 남궁혼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당옥기 생도가 자네를 불러야 한다고 하길래, 언가의 술법으로 무슨 수를 낼 줄 알았는데… 이런 수를 두는가?”

이어서 당옥기가 꽥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캬악! 진짜 큰일 날뻔했잖아. 우리 중에 누가 성벽 밖에서 싸우고 있었거나 동작이 굼떴으면 어쩔 뻔했어?!”

“성벽 밖에 누가 있었으면 그 방법을 안 썼지.”

“…아?”

“천하의 사천당문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굼뜰 리도 없고.”

“…흐, 흐흠. 그건 그렇지만!”

당옥기를 진정시킨 나는 남궁혼을 향해 답했다.

“조금 과격한 수이긴 했습니다. 하나, 나름대로 최선의 수라고 생각했습니다.”

- 네 녀석이 자랑하는 술법을 제쳐놓고 눈사태를 이용한 게 최선이었단 말이냐?

사부님의 말씀에 나는 눈사태를 일으켰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강시들로 가득한 협곡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쳤던 수는 격이 낮은 강시를 일거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흑마법이었다.

“격이 낮은 강시들은 그 혼을 사멸시키는 수가 있긴 했습니다.”

그런 내 말에 우소릉과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산서에서 사용하신 적 있는 그 술법 말씀하시는 거죠?”

“그때 언 공자가 술법을 발동하니까, 강시들이 마치 실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줄줄이 쓰러졌다던… 그거 말씀이시죠?”

정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그런 술법을 쓰시긴 했습니다. 하나,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병서에 지형지물을 활용하라 하였지요. 이번에 사용하신 방법이 그러한 도(道)와….”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남궁혼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런 수가 있는데 눈사태를 일으키는 쪽이 최선이었다라…. 그 술법이 내력을 많이 사용하나 보군?”

“예. 정신력과 내력 소모가 상당합니다. 적의 병력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다른 강시 창고가 더 있을 수도 있고.

괴왕부의 간부 중 누가 남아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여, 서문의 지형을 이용한 것이었다.

“학관에서 배우기를 강호에서 본 실력의 삼할을 숨기라고 배웠습니다. 그건 스스로를 너무 드러내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여력을 항상 남겨두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내 말에 남궁혼은 알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일전에 내가 했던 질문에 자네가 했던 답과도 맥이 통하는군. 윤이가 했던 말이 틀린 게 아니야.”

어째선지 남궁윤은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 궁윤이 저 녀석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느냐?

‘…그러게요?’

이쯤 하여 당호태가 헛기침을 하고 나섰다.

“허험! 틀리지 않은 건 우리 옥기 판단이 틀리지 않았지! 어쨌거나 언용운이를 불렀더니 강시들이 싹 쓸려나가지 않았소! 솔직히 말해서, 적은 검으로 베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뇌운검 그대는 떠올리기 힘든 생각 아니오?”

“가주님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텐데요?”

“나는 다르지, 우리 당문 사람들은 어딜 가면 딱 지형지물부터 살피거든. 경황이 없어서 그렇지 분명히 떠올려냈을 거요.”

“아. 예.”

그렇게 우리가 잠시 호흡을 돌리고 있는 그때.

내 귀에 희미한 방울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딸랑-

“…당 가주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싹 쓸려나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살아남은 술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 눈더미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팍!

강시군단을 총괄하던 늙은 술사가 눈 덮인 서문의 성벽을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 허여멀건 기생오라비 같은 놈아. 네 녀석이 언용운이라는 놈이로구나? 군주님과 조 내사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만, 실로 희한한 놈이로구나…. 정파의 후기지수 놈이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이야.”

조금 전에 비해 몰골이 상당히 추레해진 놈의 뒤엔 시뻘건 혈강시들이 시립해 있었다.

나는 뒷짐을 지고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섰다.

“수작이라니? 대자연의 힘을 빌렸을 뿐이다. 하늘도 너희 같은 마교 놈들이 싫으시다고 천벌을 내리신 거지.”

“뭐라?”

“근데 어떻게 당신이 천벌을 빗겨나갔지?”

그리고 적당히 아무 말이나 하며, 우리 편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공격을 위해 자리를 잡자는 신호였다.

“아슬아슬하게 지형과 강시들을 이용해 방벽을 쳤느니라. 네놈의 주장대로라면 하늘이 본교를 굽어살피는 것 아니겠느냐?”

“응. 아니야. 염라부에서 전서구가 왔는데 몇 명이 누락 됐다고 빨리 처리 좀 해달라네?”

“주둥이도 듣던 대로고. 내 오늘 너희 중 몇몇은 반드시 데리고 저승으로 갈 것이다!”

내 신호대로 우리 편이 딱 자리를 잡았을 때.

늙은 술사가 방울을 흔들며 혈강시들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딱 노른자위처럼 모여주었구나! 망자들이여, 저기 저 햇병아리 놈들을 지워버려라!”

크아아아아!!!

나는 뛰어드는 혈강시들을 향해 마주 달려가며 언동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빙혈산에서 했던 방식으로 간다.”

언동생들은 하나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뒤이어 당호태와 남궁혼에게도 말을 전했다.

“당가주님과 남궁소가주님은 술사를 공격해주십시오.”

두 사람은 언동생들과 달리 우려의 말을 전해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내가 강시를 다루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까.

“그래도 되겠는가?”

“위험하지 않겠느냐?”

하나, 남궁윤과 당옥기가 나란히 목청을 높였고.

“아버님!”

“아빠! 그런 말 할 시간에 빨리 술사를 잡으세요!”

“그게 최선입니다.”

나도 한마디를 더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교의 술사는 두 분께 맡기기로 했으니 머릿속에서 밀어 놓고, 언동생들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

“빙혈산보다 강시들은 많아졌고 우리는 적어졌다. 내력들 좀 늘었다고 절대 방심하면 안 돼! 특히….”

“저요?”

“그래 하성이 너. 어떻게 알았냐?”

“왠지 저일 것 같았습니다.”

“온다.”

달려드는 혈강시들을 맞아, 나와 언동생들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정현과 남궁윤이 좌우 양익을 맡아 주었고.

“정현. 내가 오른쪽을 맡겠다.”

“예. 남궁 소협!”

캉! 카아아앙!!!

은하연과 우소릉은 혈강시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언공자!”

“여기요오!!”

그 틈을 파고 들어간 내가 역적의 낙인과 파천검법을 번갈아 사용하며 강시들을 무력화했고.

촤아아악!

은하성과 당옥기는 그런 내 뒤를 지켰다.

그렇게 우리가 혈강시의 숫자를 줄이고 있던 지 얼마나 되었을까?

우르르르릉!!!!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독향이 희미하게 전해진다 싶더니, 남은 혈강시들이 우뚝 멈췄다.

남궁혼과 당호태가 마교의 술사를 죽여 없앤 모양이었다.

*     *     *

서문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딱 숨 한 모금을 돌렸을 때.

피융!

이번에는 북문에서 신호탄이 올랐다.

북문은 아버지와 용명이 그리고 하북의 무인들이 맡기로 한 곳이었다.

- 용운아?

‘저도 봤습니다.’

사부님을 시작으로 언 동생들이 일제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남궁혼과 당호태를 향해 말했다.

“저희는 이만 저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윤이랑 우리 가문의 무사 몇을 데려가게.”

“옥기 너도 따라가거라.”

하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사태로 길이 막혀서 아래에서 올라오는 놈들은 없을 테지만, 성 내에서 이리로 도망치려는 자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적은 서문의 전력을 더 뺄 수는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원군을 보내 줄 겁니다.”

그런 내 말에 당호태는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남궁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어서 가보게.”

두 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한 나는 언동생들과 함께 곧바로 북문 쪽으로 내달렸다.

북문에 다다를 즈음, 우리는 맹주님과 공량대사를 길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다들 무사했구나!”

“아미타불. 고생들이 많소이다.”

나는 내달리는 와중에 서문의 상황을 한마디로 간추려 전했다.

“서문은 위기를 넘겼습니다.”

“알겠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듣지.”

그렇게 도착한 북문에는 본디 북문을 지키기로 한 전력의 절반 정도와 용명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손무결은 거두절미하고 용명이를 향해 물었다.

“언 가주님은?”

그에 언용명이 북문에서 내려다보이는 어떤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저곳에 틈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 무리의 사람이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성채와 연결돼있는 모양인데, 그 무리를 아버님께서 쫓아 내려가셨습니다.”

공손무결은 곧바로 명을 내렸다.

“밀직원장과 두 개 각은 여기 남는다. 동문에 계신 제갈 가주님과 이곳의 상황을 전하고 조언을 구해 성내를 총괄하라.”

“예.”

“나머지 두 개 각은 나를 따르고. 공량대사님. 손을 보태주시겠습니까?”

“하북권웅 같은 협의지사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당연히 거들어야지요.”

“감사합니다. 너희도 따라오겠느냐?”

“예!”

그렇게 용명이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뛰어 내려온 지 잠시.

“맹주님! 갈림길입니다!”

우리는 갈림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에 공손무결이 인원을 나누려는 이때.

“인원을 절반으로 나눈다. 반은 나를, 반은 공량대사님을…. ”

호루룩!!

응용이가 날아와 머리 위에서 방향을 인도했다.

“맹주님 인원 나눌 필요 없습니다! 저쪽입니다!”

“그래?!”

“예!”

“좌측으로 간다!”

그렇게 응용이의 안내를 받아 산길을 내려간 지 얼마 후.

꽝! 콰앙!

일대에 메아리처럼 울리던 기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싶더니.

꽈아앙!!!!!!

마교의 무리와 대치하고 있는 아버지와 하북의 무인들이 보였다.

우리가 등장하자 단숨에 형세가 역전됐기에.

마교 놈들은 걸음을 뒤로 물리며 대형을 고치는 모양새였다.

그사이 아버지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용운아?”

“예.”

무사한 아버지의 모습에 내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

나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께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마냥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때가 있었는데, 이런 마음이 들다니.

이런 내가 신기해서 입에 헛웃음이 걸리는 찰나였지만.

간질거리는 마음은 밀어두고 아버지가 마주한 마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겸?”

원작에서 연옥란을 수족처럼 보좌하던 내사의 이름이 조겸이었다.

하여, 던져본 것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나는 곧바로 공손무결을 향해 말했다.

“마옥군주 연옥란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던 자입니다.”

그러자 조겸이 이를 갈며 말했다.

“언용운. 역시 네놈이 원흉이었구나. 여기는 어떻게 찾았지? 군주님을 바로 쫓지는 않았을 텐데?”

“구천서 그 늙어 비틀어진 마두랑 연옥란이 어디 있는지 말하면 나도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려줄게.”

“큭큭. 두 분이 어디 계시느냐고? 지금쯤 십만대산에 있는 본단에 도착하셨을 것이다. 자신 있으면 모시러 가 보거라!”

그러더니 나를 향해 출수를 해왔다.

쌔애애애액!

동시에 다른 마인들도 우리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하나, 아버지가 이끄는 하북의 무인들과 백중세를 펼치고 있던 녀석들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순간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꽝!!!!!!!

공량대사가 나서시며 놈이 뻗은 장력을 금빛 장력으로 튕겨내니.

놈의 공격은 내게 닿지도 않았다.

이어서 뛰어든 공손무결의 검초를 피하기 위해 조겸이 몸을 뒤튼 이때.

쌔애애애액!

휘릭!

놈의 갈비대에 아버지의 권초가 작렬했다.

빠아아악!!!!!!!!!

그사이 타격대가 펼치는 채작진의 한 축이 된 우리는 조겸이 이끌던 마인들을 베고 있었는데.

촤악!

촤아아악!!!

저쪽이 조용하다 싶어 시선을 옮겨보니.

잠깐 사이 피투성이가 된 조겸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와 공손무결 그리고 공량대사가 일정 거리를 띄우고 서 있는 가운데.

공량대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보시오. 조겸이라 하였소? 나는 그대가 모시는 천마라는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오.”

“…….”

“하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 않소. 포로가 되는 게 어떻소? 통하지도 않는 동귀어진의 수를 그쯤하고, 수하들도 멈추시오. 애꿎은 죽음들을 멈추게 합시다.”

뭔 소리를 하시는가 했네.

천마신교의 고위 간부가 항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럴 일은….”

그에 내가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려는 그때.

조겸이 공량대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그에 조겸쪽으로 다가서는 공량대사.

위화감을 느낀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그리고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조겸의 앞쪽으로, 녀석들을 밀어 넣었는데.

“천마재림!”

이 순간.

조겸의 동공이 넓어진다 싶더니, 혈맥이 부풀어 오르며 터져나갔다.

퍼어어어엉!!!

내가 급히 보낸 시체병사 덕분에 완충이 되었으나, 공량대사는 한 장 정도 밀려났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는 급히 달려온 나를 향해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미타불. 어찌 저리 교인들에게 지독한 마음을 심을 수 있는 것인지. 아무튼 이 아둔한 중이 시주 덕분에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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