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해볼까 합니다 (2)
“총학생회장? 그게 무슨 말인가?”
경룡이 형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근처에 있던 제갈 설지가 입을 열었다.
“총(總)이라 하셨으니 사대 기숙사를 아우르는 회장직을 맡아보시겠다는 말씀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용명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알기로 그런 직함(職銜)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이보게 장호,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용명이 너 내가 가운데 있는데, 왜 건너뛰고 장호한테 물어보냐?”
“학관 역사에 대해 좀 아십니까 소천 형님?”
“아니. 전혀 모른다.”
“…….”
그 모습에, 사부님께서도 물어오셨다.
-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총학생회장이라는 자리는 본디 없는 자리인듯하구나?
‘예. 정무학관은 개관한 이래 사대기숙사를 중심으로 운영돼왔으니까요.’
운매, 향란, 윤국, 청죽.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수학하고 있지만, 사대기숙사는 설립 이념부터가 달랐다.
생도들의 기질부터가 다른데다, 평화까지 지속돼왔으니 사대 기숙사를 아우르는 회장직이 필요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정무학관에는 총학생회장이라는 직함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때.
천장호가 내게 물었다.
“내 알기로도 없는데? 용운 형. 없는 자리를 어떻게 꿰차시겠다는 겁니까?”
“만들어서.”
난 씩 웃으며, 경룡이 형에게 말했다.
“경룡이 형. 그런데 일단 청죽관으로 달려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아!”
그 말에 경룡이 형은 청죽관 방면으로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정문에 놓여있는 해시계의 시각을 확인한 뒤.
다른 기숙사의 언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대충 유시(酉時)쯤이면 청죽관을 점검하는 일이 끝나겠네. 너희는 돌아갔다가 그때까지 마방연 회의실로 와라. 사절단 해산.”
* * *
연무장으로 이동한 나는 외유를 다녀온 사이 청죽관 생도들이 거둔 성취를 확인해보았다.
‘허송세월을 한 것은 아니구만.’
하나되어 펼쳐내는 채작진은 더욱 정교하고 숙달되어 있었다.
‘마교 놈들의 성채에서 싸울 적에, 선배님들이 우리를 보고 그대로 각을 하나 만들어도 되겠다고 하셨는데.’
그 자리에 청죽관 생도 중 아무나 넣어도 될 것 같았다.
무위의 차이들이 있어서 그렇지, 손발 자체는 척척 맞았다.
“오. 경룡이 형. 성취가 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반응속도도 훨씬 좋아지셨고, 월도에 감기는 진기 또한 진해지셨는데요?”
“언 부회장 자네에 비하면 달빛 앞에 반딧불이 수준이긴 하지만, 진전이 있긴 했다네.”
경룡이 형을 비롯해 개인적으로 성취를 본 생도들도 몇 보였다는 점이 무척 고무적이었다.
그렇게 합격진과 개개인의 무력을 확인한 뒤, 모두 녹초가 된 시점에 정신력도 한번 점검해보았는데.
삑 삐빅! 삑삐빅삐빅!!
하나같이 이를 갈면서도 자세만큼은 칼같이 유지해내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본 교관이 만리타향에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학관에 있는 식구들은 잘 있나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모두 시간을 허투루 쓰지는 않은 듯하여 참 기분이 좋습….”
“…으으으. 은 형. 학관에 계셨던 분들을 점검하는 시간인데, 저희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요? 여정에서도 밤마다 이런 거 했는데요.”
“…그보다도 저런 말씀은 쉬어 자세라도 시켜주고 하셔야 하는 거 아냐? 우리 형님이지만! 매번 느끼지만! 진짜 인간이 아니야!!”
호루룩!!
“…누가 잡담을 합니까?!!”
호룩!!!
“…응용이 저 새끼가?!”
“우소릉과 은하성입니다! 제가 들었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선배님들 마저? 아니 선배님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 양반들 감 잃었….”
“동작 그만!”
“!”
“…그걸 또 고자질을. 다 좋았는데, 청죽은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 올빼미들이 망각한 것 같습니다. 청죽관. 엎드려 뻗칩니다. 내려가면서 청죽은 올라오면서 하나다.”
삑!!!
“청죽으으은!!”
삐이익!!!!!!!!!
“하나다아아앜!!!!”
* * *
그렇게 화목하게 점검 시간을 마친 후.
나는 청죽관의 간부들과 함께 마방연 회의실로 향했다.
당도한 회의실에서, 은하연은 쓰러지듯 각탁에 몸을 기대앉았다.
그러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제발. 언 공자의 마음에 양심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오늘은 일 같은 거 시키지 말아 주세요.”
“나를 도와달라는 외조부님의 말에는 이를 말씀이냐고 하더니?”
“…그건!”
다른 기숙사의 언동생들이 얼굴을 내민 건 그때였다.
“저희 왔습…. 허미. 몰골들이 말이 아니신데?”
녀석들이 얼굴을 비추자, 은하연 옆에 똑같은 자세로 널브러져 있던 당옥기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배신자들아! 너네는 왜 쏙 빠져나갔어!”
당옥기의 말에 남궁윤과 제갈설지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언용운이 집합을 건 대상은 청죽관이다. 학관에 남아있던 청죽관 생도들을 점검하겠다고 그런 것 아닌가?”
“그래, 옥기야 우린 애초에 해당 사항이 없었는걸? 배신이라는 말은 맞지 않지. …아. 그런데 옥기 너 향란관 소속 아니니?”
“캬아아악!”
그 말에 마른세수를 한 당옥기는 나를 보며 목청을 높였다.
“언용운! 다음부터는 ‘정무학관은 하나다’라고 해!”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자고 이렇게 회의실로 오라고 한 거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총학생회장 이야기를 못 들은 사람들은 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북해에 다녀온 사람들이 시험을 치지 못한 관계로 일학년 성적공시가 안 돼서 미뤄졌지만. 원래 이 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면, 각 기숙사의 자치회에서 다음 해를 이끌어갈 자치회장을 선출하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 내 말에 예해수 선배가 후들거리는 팔로 수첩과 세필붓을 꺼내더니 입을 열었다.
“청죽관의 자치회장에 출마하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후배님?”
“아뇨, 사대기숙사의 생도들을 대표하는 총학생회장을 해볼까 합니다.”
“예?”
“다들 그렇게 눈을 뜨실 줄 알았습니다. 맞습니다. 없는 직함이죠. 그런 직함이 필요하지 않았고, 만들자는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런 내 말에.
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천하가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있습니다. 생도들 사이에서도 정명하고 강한 구심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학관이 습격당했을 때만 해도 명령체계를 두고 크고 작은 다툼이 있지 않았습니까? 언 소협이라면 적임이시기도 합니다. 당장에 여기 모인 사람들만 해도 매난국죽이 골고루이지 않습니까?”
“학관의 특성상 적임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생도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렇게 정현의 말을 받은 나는 씩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응시했다.
“나 혼자 입을 열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모두의 공감 속에 의제가 나와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랑 일들 하나 합시다.”
* * *
나와 언동생들은 그날부터 어떠한 분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학관 내에서 허락되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고.
생도들이 익명으로 제 생각을 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대자보를 이용했다.
『북해빙궁의 변고, 혼란스러운 초원, 강호의 위기에 대처하는 정무학관 생도의 자세.』
우선은 당장에 백도무림이 처한 상황과 정무학관의 현황 등을 짚는 내용을 써 붙였다.
“이보게들! 방금 무림맹에서 온 전언의 내용을 들었나?”
“방금 들어온 소식을 여기 있던 우리가 어찌 들었겠나?”
“글쎄 북해 땅에 시찰단으로 갔던 명숙들이 각궁보 그리고 북해빙궁과 합종군을 구성해 천마신교의 성채 하나를 공략했다는군!”
그러다 무림맹에서 공식적으로 발송한 후성 공략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는 조금 더 구체적인 주장들을 실었다.
『후성 공략은 어떻게 성공했나? 합심과 협동을 가능하게 한 무림 맹주님의 통솔력.』
『우리는 과연 교훈을 얻었는가?
정무학관이 습격당한 초유의 사태 이후 단강구에서 바뀐 것은 새로 지어진 학관의 건물과 호원단철이 탁가철방으로 바뀐 것뿐.
같은 위기가 찾아왔을 때, 과연 우리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정무학관 생도들에게도 구심점이 필요하다.』
그랬더니.
생도들이 모일 때마다 그러한 문제들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게 되었고.
“새로 나붙은 대자보 봤나? 생도 대표가 필요하지 않냐는 주장 같던데?”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긴 하더군.”
“공감? 총장님이 계시지 않나. 나는 굳이 그런 사람이 필요한가 싶은데?”
“총장님이 안 계시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우리의 뜻과 교수님들의 뜻이 다를 수도 있고?”
“애초에 사대기숙사를 아우를 수 있는 생도가 있을 수가 있나?”
“글쎄… 지금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인데.”
“누구 말인가?”
“청죽관의 언용운 생도 말일세.”
그 결과.
학관의 운영위원들과 사대기숙사의 자치회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하여, 참석하기로 한 사람들이 하나둘 회의장에 모이기 시작한 이때.
창량 교수는 미간을 좁힌 채로 나를 향해 전음을 보내왔다.
[…또 무슨 꿍꿍이냐.]
[꿍꿍이라뇨.]
[그 대자보들. 네 솜씨이지 않으냐.]
[저는 필체가 그렇게 유려하지 못합니다. 교수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네 녀석을 따르는 녀석 중 누군가가 옮겨적기만 했겠지. 당옥기 생도나 남궁윤 생도 같은.]
이래서 감이 좋은 교수는 싫다니까.
뭐, 무슨 꿍꿍이인지는 어차피 회의 중에 다룰 터였다.
나는 짐짓 딴청을 피웠다.
그러는 사이 회의장에는 경혜사태가 도착하셨다.
“학관 곳곳에 설치된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는 것은 늘 있어 온 일이지만, 근래 나붙은 대자보의 주장은 학관 곳곳에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라… 검토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행정처장님?”
“험험. 그럼 개회하겠소이다. 근래 나붙은 대자보들은 사대기숙사를 아우르는 생도 대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골자로 하고 있소이다. 각 위원들과 자치회 간부들은 이에 관한 생각들을 발표해주시면 되겠소이다. 예. 창량 교수님.”
그렇게 시작된 회의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창량 교수였는데.
“언용운 생도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습니다.”
창량 교수는 얻은 발언권을 곧바로 내게 돌렸다.
딱히 거리낄 것이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천하가 어지럽습니다. 정무학관의 기치(旗幟)는 ‘학관 안에서는 경쟁하더라도 정무의 깃발 아래에선 하나다.’입니다. 한데, 실상과는 다릅니다. 창량 교수님.”
“이야기하게.”
“지난날 학관이 습격을 당했던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
“총장님께서 마방연을 직제상 본인 바로 아래 두셨음에도 향란관 생도들과 저희는 큰 마찰을 겪었습니다. 다른 기숙사 생도들과도 자잘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위험을 마주한 순간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게 운을 뗀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저는 백도무림의 합종군이 마교의 성채를 공략한 일에 함께했습니다. 그 자리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명숙들이 다수 계셨고, 진퇴를 두고 열띤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선 노삼 교수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애들 앞에서 쪽팔린 짓들을 하셨구만.”
“진격하자는 주장도 하지 말자는 주장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구심점이 되어 결단을 내린 것은 무림맹주님이셨습니다. 맹주님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진격도 퇴각도 하지 못한 채, 논쟁은 의미 없이 평행선을 달렸을 겁니다.”
“흠.”
“하여, 저는 생도들 사이에도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정무의 깃발 아래 정말로 하나가 될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을 마치자.
챵량을 비롯해 여러 교수님이 저마다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는데.
그중 윤국관의 제갈민 교수가 나를 향해 질문을 해왔다.
“해서, 언용운 생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가?”
“학칙상 생도들은 직접 대표를 뽑는다고 되어있습니다. 한 개 기숙사의 대표로 국한한다는 말은 없죠. 사대기숙사 생도들을 아우를 수 있는 총학생회장 자리를 신설하고. 매난국죽이 함께 구르… 수련을 하다 보면 자연히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답을 돌려드리니.
이번에는 경혜 사태께서 입을 여셨다.
“여러 위원님과 자치회 간부들의 동의를 해서 총학생회장직을 만들었다 치면. 언용운 생도는 출마를 할 생각인 건가요?”
나는 곧장 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이 판을 내가 깔아놨다는 것을 알고들 있더라도 여기서는 겸양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선동의 마침표는 겸허로 이뤄지는 법이지.’
나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경혜사태께 답했다.
“중심에서 모든 생도를 돕고 이끌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입후보 단계에서부터 추천을 받아 뽑는 게 옳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좌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