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그렇게 나오시겠다? (1)
“학칙을 손볼 필요는 없는 건가요?”
경혜사태의 질문에 답한 사람은 제갈민 교수였다.
“제가 다 외우고 있어서 압니다. 언용운 생도의 말대로 생도들은 대표를 직접 뽑는다고 돼 있으니, 직을 설치하는 것 자체는 따로 개정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권한과 직무에 관한 세세한 사항은 논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럼 행정처장님. 경선(競選)을 진행한다고 치면 차질은 없겠습니까?”
“건물을 신축하는 일들이 끝난 터라, 행정력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공실들도 제법 있으니 그중 하나를 총학생회에서 사용하면 될 것이고요.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렇군요. 하면, 다른 의견을 더 듣는 것보다는 우선 총학생회장 설치에 관해 찬반 표결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부결이 나면 더 의논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조교 선생님들은 위원님과 자치회 간부들에게 지필묵을 가져다주세요.”
곧 찬반 표결이 진행되었고, 투표 결과 만장일치 찬성이 나왔다.
총학생회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일단 모두가 공감한 모양이었다.
“모두가 찬성했습니다. 그럼 정무학관의 생도 자치회의 상위기관으로 총학생회를 설치할 것을 공인하며, 초대 총학생회장을 선출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단, 경선을 장난으로 삼거나 본인의 명성을 높이려는 후보가 난립하는 상황을 미리 막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 경혜사태는 인자한 얼굴로 나를 보시더니.
이어서 후보 등록에 관한 공지를 하셨다.
“입후보는 타인의 추천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타인이란 교수 한 명과 생도 열 명의 동의를 의미합니다. 다만, 교수의 경우 소속 사감 교수는 불가하며 생도의 경우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의 구성원은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이 사람도 중립을 지킬 것이고요.”
그런 경혜 사태의 말씀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경혜라는 비구니가 하는 말대로 하면 어째 너한테 불리한 이야기 같은데? 네 계획은 궁윤이를 추천인으로 세우는 것 아니었더냐?
…그렇긴 했다.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의 구성원에게 동의를 받지 못한다면, 내 경우 청죽관과 마방연의 언동생들에게선 후보 추천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요?’
- 한데, 어째 너를 대견한 표정으로 보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냐?
‘모두를 대표하는 자리이니 추천을 받아 뽑는 게 옳다고 한, 제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신 것 같습니다.’
뭐, 저렇게 하는 게 맞긴 했다.
‘초대인 만큼 저런 건 확실히 해두는 게 맞긴 하지.’
경선이 진행되면 어차피 언동생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다른 생도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하는 일이었고.
그간 내가 해온 일이 있는 만큼, 다른 기숙사의 생도라고 할지라도 열 명의 동의를 얻는 일쯤은 쉽게 해낼 수 있을 듯했다.
‘향란의 남궁윤이 추천한 청죽의 언용운이라는 그림을 못 쓰는 게 아쉽긴 한데….’
이건 교수님 중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면 될 것 같았다.
‘재혁 숙부는 인척 취급을, 비슷하게 모용린 교수님도 은 소저의 스승이시니 제외하더라도… 한영, 영환, 정극경 등등 동의해 주실 분이 있으니까.’
다들 나를 본인의 대학원생으로 만들고 싶어서 환장하신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 * *
학관의 운영위원들과 사대기숙사의 간부들이 모여 진행한 총회에서 ‘총학생회’를 설치한다는 결정이 나왔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청죽관의 자치회는 차분히 다음 행보를 위한 준비에 나섰지만.
다른 세 개 자치회에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석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의논했다.
그중 운매관은 이 사태를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하하! 총학생회장이라니 이거 가슴이 뛰는구만! 아니 그런가?”
자치회장 호연찬의 호탕한 웃음에, 자치부회장 계운열이 입을 열었다.
“흠. 후보를 내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내야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언용운이 입후보할 텐데 상대가 되겠습니까? 소림의 원철을 꺾은 뒤로 천하제일 후기지수 소리를 듣는 녀석인데요?”
“부회장. 우린 운매관이야. 이런 기회가 왔으면 되든 안 되든 일단 뛰어들어 보는 거야. 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얻는 것이 있겠지. 그리고 길고 짧은 건 대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닌가?”
언용명이 입을 연 것은 이때였는데.
“회장님. 저는 근데 형님을 도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한번 붙어보자고.”
호연찬이 호방하게 언용명의 이탈을 이해해주자.
천장호와 팽소천도 은근슬쩍 손을 들었다.
“뭐, 자네들도 언용운이를 도와주러 가려고? 안돼! 용명이야 친형제가 출마하는데 적이 될 수는 없으니 보내주는 거지만, 자네들은 운매관의 후보를 도와야지! 아주 청죽관으로 갈 거면 허락해주고.”
“…소천 형. 아주 가는 건 좀 그렇죠?”
“많이 그렇지. 용운이는…. 지독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내렸다.
윤국관의 사정도 운매관과 비슷했다.
다만 이쪽은 조금 냉철한 구석이 있었다.
“회장님. 윤국관 자치회의 입장을 정리하기 전에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제갈 후배. 언용운 생도를 돕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알고 있었네. 그렇게 하게. 어차피 그 친구가 당선이 될 확률이 높으니 학생회에 윤국관의 생각을 해줄 사람이 있는 편이 우리로서도 좋아.”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윤국은 이번 경선에 후보를 낼 생각이신가요?”
“그래야지. 언용운을 넘어서기 힘들겠지만, 내년에 받을 신입생들에게 윤국은 후보도 내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니 말이야.”
앞선 두 학관이 나름의 여유를 가지고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 향란관은 여유를 잃고 심각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언용운을 돕겠다는 남궁윤을 빼놓고 자치회실에 모인 이들은, 진심으로 언용운을 꺾고 총학생회장 자리를 가져올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총학생회장 자리를 우리 향란관에서 가져오게 되면, 아무리 언용운이라도 더는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학관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자치회장 매진악이었고.
다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공보부장 운혁이었다.
“예. 언용운이라는 야생마에게 고삐를 채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매진악은 그 말을 들은 체 만체하며 당준기를 향해 말했다.
“자네가 입후보해줘야겠네. 작년 당금수석이기도 하고, 얼마 전 정진대회에서 홀로 이 승을 거뒀기도 하니 그림이 괜찮아.”
당준기는 회의적인 표정으로 답했다.
“회장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입후보를 하기야 하겠습니다만… 제가 언용운을 누르고 총학생회장이 되는 게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그 말에 듣고 있던 향란관의 자치부회장 소선창이 몸을 떨며 말했다.
“가능하겠나가 아니라, 가능하게 해야 하네! 벌써 잊었나? 빨간 모자를 쓴 언용운 밑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구르던 나날들을?! 녀석이 총학생회장이 되면 남은 학관 생활이 흙으로 얼룩질걸세.”
매진악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이때였다.
“…어쩌면 해볼 만할 것도 같네.”
* * *
총학생회를 만든다는 결정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관 곳곳에 그 내용을 담은 공지가 붙었다.
공지 말미에는 후보 추천서의 양식이 완성됐으니, 입후보하고자 하는 생도는 행정처를 찾아와 서류를 받아 가라는 내용이 있었다.
“다들 먼저 자치회실에 가서 예해수 선배가 시키는 일 좀 돕고 있어. 나는 저거 받아서 갈 테니까. 혹시 모르니 소릉이만 좀 따르고.”
언 동생들을 먼저 보내고 우소릉과 함께 행정처로 향하니, 교직원이 웃는 낯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역시 언용운 생도가 입후보하시는군요?”
“예.”
“총학생회장이라. 언용운 생도라면 잘 해내실 것 같아요!”
“감사한 말씀인데, 그런 말씀은 당선이 되고 나서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따놓은 당상으로 보이는데 겸손도 하셔라. 자, 이게 추천서고요. 여기에다 언용운 생도의 성명을 써주시면 제가 확인하고 행정처장님의 인을 받아다 드릴게요. 그 아래 열한 개 자리 중 가장 위에는 교수님의 것을, 아래는 생도들의 수결을 받으시면 돼요.”
“옙. 여깄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렇게 추천서에 이름을 적어 직원에 돌려준 이때.
“언 가주님. 정말 이렇게 떠나셔도 괜찮은 것입니까?”
“예. 총장님. 두 녀석 모두 이해할 것입니다.”
“그럼. 먼 길 조심해서 가십시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몸을 돌리니.
창 너머로 아버지가 경혜사태를 비롯한 다른 교수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의 차림을 보니 길을 떠날 채비를 마친 모양새였다.
“……? 소릉아,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네! 언 형!”
나는 우소릉에게 서류를 돌려받는 일을 맡겨놓고, 행정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교수님들은 나를 향해 눈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비켜주셨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진주로 올라가시려고요?”
“오냐.”
“근데 뭐 그렇게 훌쩍 가시려 합니까? 미리 언질도 주지 않으셨는데, 식사라도 하시면서 말씀을 주시지 않고요?”
“그럴까도 했는데. 네가 요즘 바빠 보이더구나.”
“아. 그건 그렇긴 했죠.”
“사대 기숙사를 총괄하는 회장직을 만든다고 들었다. 용운이 네가 출마하리라는 것도 들었고, 내가 남아있으면 괜히 안 좋은 소리가 나올지 모른다. 누가 되기 전에 떠야지.”
“그런 소리 나올 게 뭐가 있습니까?”
“왜 없느냐. 이 아비가 나름대로 교수진들과 친분도 있고 운매관엔 이 아비를 존경하는 후배들도 제법 있는데, 아비를 동원한다는 이야기가 충분히 나올 수 있지.”
“그런 놈들은 멱을 확 비틀….”
“그런 용운이 네 성정까지 감안해서 몰래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었구나.”
“…….”
“아무튼. 기특한 생각을 했다. 아비는 돌아가 볼 테니 열심히 해보거라.”
“예.”
“어미한테 서신하고,”
“옙.”
“시간적 여유가 있거나, 중요한 이야기… 아니 꼭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내키면 아비한테도 뭐 몇 자쯤 써보내도 된다. 안 보내도 되긴 하고.”
“예?”
“큼. 나는 이만 가보마. 따라 나올 필요는 없으니 일 보거라, 경선 준비를 하려면 바쁘지 않으냐.”
그렇게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떠났다.
* * *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다 행정처에 돌아와 보니, 우소릉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언 형!”
“왜?”
“이것 좀 보세요!”
녀석이 내민 것은 교직원이 행정처장의 인을 받아다 주겠다고 가져간 추천서였다.
한데, 내 이름 바로 아래 위치한 교수님의 수결란에 누가 수결을 해둔 상태였다.
수결의 주인은 다름 아닌 창량 교수였다.
“창량 교수님?”
“네. 좀 전에 이리로 오시더니 수결을 해주시고 가셨어요!”
나는 곧바로 연구동 쪽으로 향했다.
서둘렀더니, 앞서 걸음을 옮긴 창량 교수를 따라잡게 되었는데.
“창량 교수님!”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추천서에 수결 말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난 또 뭐라고. 사대기숙사를 아우를 수 있는 후보를 추천한 것일 뿐. 따로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니다.”
정작 창량 교수는 이런 말을 남기고 휙 떠나갔다.
“…하여간에 종잡을 수가 없는 분이라니까.”
나는 피식 웃고는 청죽관의 자치회실로 향했다.
그렇게 자치회실에 도착하고 보니.
“언소협. 추천서는 잘 받아 오셨습니까?”
“여기.”
“창량교수님의 도호가 적혀있습니다만?”
“어. 해주시더라?”
“원시천존. 교수님께서도 누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지 아시는 것이지요. 매사 꼿꼿하시긴 하셔도 도를 아시는 분입니다.”
언동생들이 경선에 쓰일 대자보와, 현수막, 푯말들을 만든다고 한창이었는데, 그중 은하성은 볼멘소리를 내왔다.
“용운 형님! 제가 지금 형님 약력을 적은 대자보를 만들고 있는데요. 당금수석부터 시작해서 정진대회에서 빡빡이들을 족친 일까지 썼는데 종이가 부족합니다! 뭔, 써도 써도 끝이 없네!”
그리고 당옥기는 질문을 해왔다.
“언용운. 근데 이거 부회장 것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부회장은 누가 나가?”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하고 싶은 사람? 다른 사람을 추천해도 괜찮고.”
“큼.”
어째선지 남궁윤이 헛기침을 하는 가운데, 입을 연 것은 은하연 이었다.
“제갈 소저를 추천하고 싶네요.”
“저를요? 저는 하연님을 추천하려고 했는데요.”
“어차피 언공자가 당선되면 일이 있을 때마다 다 부르시겠지만, 일단 저는 청죽관을 챙기는 게 맞죠. 제갈소저는 윤국관 소속이시니 사대기숙사를 아우른다는 총학생회의 취지에도 맞고, 소저의 암기력이나 여타 재능들은 부회장의 업무에 적임이시라고 생각해요.”
“흠흠. 저도 사실 제가 적임이라고 생각은 해요.”
“…그런 부분은 조금 재수가 없게 느껴지긴 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정은 내가, 부는 제갈 소저가 나가는 걸로. 다들 이의 없나?”
“예.”
“응.”
“…….”
“옙!”
“네!”
그렇게 부회장 후보까지 결정을 했고.
열 명의 생도들의 수결을 받는 일도 어렵지 않게 끝이 났다.
난 그렇게 입후보 서류 제출을 마쳤다.
그로부터 칠일 정도가 흘러, 후보 등록 기간이 지나니.
사대 기숙사의 생도 전원이 본관 앞 광장에 모인 가운데, 입후보자들이 포부를 밝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입후보자께서는 앞으로 나와서 연설을 부탁드립니다.”
가장 먼저 입후보를 한 사람이 나였기에 첫 번째는 나였다.
단상 앞으로 나아간 나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한 언용운입니다. 빈말로라도 제가 이끌어 나가는 정무학관이 녹록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좌중을 응시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빡세게 구를 겁니다. 힘들겠죠. 하지만 여러분 옆에선 청죽관 생도들을 보십시오.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강해집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스스로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킬 수 있도록.”
그러자 누군가 목청을 높였다.
“천하제일후기지수!!!”
이어서 청죽관 생도들이 발을 구르며 내 이름과 별호를 연호했다.
“언용운! 언용운!! 언용운!!!”
“괴룡! 괴룡!! 괴룡!!”
나는 그 소리를 뒤로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그런 내 뒤를 이어 단상 위에 오른 사람은 향란관의 당준기였다.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한 향란관의 당준기입니다. 저는 제 포부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언용운 후보의 품행에 대해 짚어볼까 합니다.”
그에 내 머릿속엔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당준기가 재차 입을 열자.
“올라들 오시오.”
그간 나한테 처맞은 놈들이 줄줄이 단상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