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그렇게 나오시겠다? (3)
합동훈련을 추진하기 위해선, 학관 그리고 다른 기숙사 자치회와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를 위한 공문작성을 은하연에게 맡겼는데, 그녀답지 않게 공문 완성이 상당히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은 소저. 협조 공문은 아직이오?”
내 질문에 은하연은 서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완성이야 아까 했죠.”
가져오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으나, 은하연은 되레 서류를 본인 쪽으로 감추며 입을 열었다.
“언 공자. 이 활동 정말 해요?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생각해보시는 게 어때요?”
“은 소저도 방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나? 갑자기 뭐 걸리는 거라도 생겼소?”
“그때는 정현 도장이 제갈 소저랑 남궁 소협 그리고 하성이 이야기를 꺼내니까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향란관 생도들은 저번에 징계의 일환으로 언 공자 밑에서 굴렀는데도 저렇게 나오잖아요?”
은하연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향란은 권위자가 시키면 어지간하면 따르는 관풍이 있는 곳 아니오. 이번 일은 향란의 뜻이라기보다는 지도부의 결정이라고 봐야지. 생도 하나하나는 생각이 또 다를 것이오.”
그런 내 말에 남궁윤이 입을 열었다.
“언용운의 말이 맞다. 우리 기숙사의 관풍 자체가 그러하다. 향란의 후기지수들에게 후보를 아니 내는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고, 낸 이상 진심으로 언용운을 이겨보겠다고 궁리를 하다 그런 전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 남궁윤의 말에 제갈설지는 턱을 매만졌다.
“흐음.”
그러자 남궁윤이 근엄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소속 기숙사라고 편을 드는 것은 아니다.”
“윤님?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냥 그렇다는 거다. 아무튼. 징계가 끝났을 당시. 자존심 상해하는 고학년 선배들도 계셨지만, 그간 내력과 검세를 뽐내는 것에만 치중했음을 깨닫고 그날부터 체력 단련에 힘쓰기 시작한 생도들도 더러 있었다. 당장에 나부터가 그랬고.”
이어서 나도 한마디를 더했는데.
“궁윤이가 그렇다지 않소? 그리고 향란관의 징계 때는 처벌의 일환이니 올바른 정신을 세우는 것에만 집중했소. 이번에는 지도를 해주겠다는 목적이 있으니 전혀 다르지.”
내 말에 사부님과 은하성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 그게 차이가 있느냐?
“…뭐가 다르지. 결국 구르는 것은 똑같은 거 아닌가요 형님?”
“말이 나온 김에 너도 참여해서 뭐가 다른지 체험해 보면 되겠다. 그렇지 하성아?”
“…….”
그것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장고를 마친 은하연은 작성한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이건 각 자치회로 보낼 거고요. 이거는 총장실, 이거는 양호처에 보내면 돼요.”
“자치회는 부회장 입후보자인 제갈소저가 도는 걸로 하고, 양호처는 하성이가, 총장실은 내가 다녀오는 걸로. 나머지는 학관생 식당 앞에서 표어랑 푯말 들고 우리 공략사항들 홍보 좀 하고 있어.”
그렇게 흩어진 뒤.
총장실에 찾아가니, 내 생각을 들은 경혜사태가 흐뭇한 표정으로 계획을 승인해 주셨다.
“빈니조차 총장 선거를 할 적에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했던 것 같은데, 자칫 원성을 살 수도 있는 길을 가려 하다니.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언용운 생도는 그릇이 참 큽니다.”
“제가 당선될 수 있는 길이라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겸손이 너무 과하면 밉상이 되기 마련인데요?”
“진심입니다만….”
“아무튼 빈니는 허락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심으로 언용운 생도의 당선을 응원하겠습니다.”
양호처의 허락은 양식만 갖추면 떨어지는 것이었기에 바로 승인되었다.
다른 기숙사의 협조는 운매와 윤국은 거부할 리가 없다고 보았는데, 실제로도 거부하지 않았고.
향란관이 어찌 나올지가 사실 미지수였는데.
내가 경선 중에 빨간 모자를 쓰는 일이 그쪽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협조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렇게 절차적인 준비는 끝났다.
찾아온 이튿날 새벽.
선거 도우미를 해주고 있는 언동생들이 가장 먼저 연무장에 모인 가운데, 나는 훈련 일정을 확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소릉은?”
“우 소협은 제가 옥기한테 준비가 얼마나 됐는지 물어봐 달라고 연구실로 보냈어요. 마침 저기 오시네요.”
나는 당옥기의 연구실 쪽에서 달려오는 우소릉을 향해 물었다.
“당옥기는? 준비됐대?”
“…욕을 하시던데요?”
“뭐라던데?”
“캭! 언용운 은하연 죽어! 이걸 하루 만에 어떻게 다 준비해! 라고 하셨어요.”
“그 말만 하든?”
“어. 네.”
“다시 가서 물어봐. 그래서 언제까지 되겠냐고.”
“네!”
금세 되돌아온 우소릉은 재차 당옥기의 말을 전했다.
“미시(未時)쯤이면 될 것 같다고 하시네요!”
“점심 먹고 나서네. 그럼 일단 오전에는 무당산 자락 한 바퀴 돌면서 생도들의 내공과 체력 단련 상태를 좀 살펴보고, 이후에 정신력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진 다음에… 오후에 화생방 훈련을 진행하면 딱이네. 여기까지 견뎌낸 사람들은 이어서 지도 대련을 하고.”
그런 내 말에 교관으로 발탁된 용명이가 옆에 선 정현을 향해 물었다.
“형님의 뜻이 옳다고 생각해서 저도 찬동하긴 했는데, 일정을 쭉 들으니까 아찔한 느낌이… 정현 도장. 이거 괜찮겠지요?”
“사실 언 소협의 말씀에 찬동할 때만 해도 화생방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는지라….”
그런 녀석들을 뒤로하고 단상 앞으로 나아간 나는 빨간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사대 기숙사를 향해 내력을 실은 목소리를 내 질렀다.
“정무학관! 집합!!!!”
* * *
신창양가의 양성무, 석가장의 석호열, 창읍만가의 만벽.
세 일학년 생도는 소속 기숙사가 각기 달랐다.
양성무는 향랑관이었고, 석호열은 운매관이었으며, 만벽은 윤국관이었으니까.
하나, 정무학관 입관 시험의 마지막 관문을 함께 돌파한 것을 인연으로 세 사람은 친우로 지냈다.
이중 석호열은 아버지 되는 사람이 언용운의 아버지인 언정웅과 하북삼협으로 묶이는 이였다.
직접적인 친분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의 아버지가 언가와 교류한다는 사실은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만벽과 양성무는 합동훈련을 하러 가는 길에 석호열에게 질문했다.
“이보게 호열. 자네가 딱히 언씨 형제나 팽씨 남매와 어울리지도 않고, 이야기도 안 하길래 나도 언급을 안 했다만 오늘은 좀 물어야겠네.”
“무엇을 말인가?”
“벽 저 친구가 묻는 게 뭐긴 뭐겠나. 언용운에 관한 것이겠지.”
“맞네. 언용운 그 친구가 이 시점에 이런 걸 추진하는 이유가 뭔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성무 저 친구가 예전에 언용운 밑에서 굴러보고는 학을 떼던 것을 내 기억하는데, 경선 중에 왜 이런 일을 추진하는 거지?”
“글세. 아버님들끼리 친하시기는 한데… 나는 언용운 그 친구랑 왕래가 없던 지 오래되어 모르겠네.”
“흠. 그래도 호열이 자네는 언용운 그 친구를 뽑기는 할 테지?”
“그 역시 아직 모르겠네. 언용운이 추진하는 훈련도 해보고 당준기 선배가 한다는 세부공략 설명회도 참가해보고 결정할 생각이네. 자네들은?”
“나도 고민 중이긴 하네. 제갈 소저가 언용운 쪽 총학생 부회장으로 나섰으니 우리 윤국에 콩고물이 좀 떨어질 것 같기도 한데….”
“벽 자네는 만사에 콩고물을 너무 찾아. 총학생회장이 장난인가? 정무학관을 능히 이끌어 나갈 사람을 택해야지, 당준기 선배같이 경륜이 있는….”
“고작 한 학년 선배인데 경륜은 무슨. 그 정도 차이로는 마교랑 제일 많이 붙어본 언용운이 경륜이 있는 거 아닌가? 성무 자네의 계산식이 영 틀린 것 같은데?”
언용운의 사자후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정무학관! 집합!!!!”
그 소리에, 언용운 밑에서 굴러본 경험이 있는 양성무가 파리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고.
“빠, 빨리! 빨리 가야 하네! 늦으면 큰일이 나네!”
세 친구는 부리나케 달려가 연무장에 섰다.
하나 사람이 수백 명 모이다 보면 분명히 동작이 굼뜬 사람이 있기 마련.
“본 교관은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보살이 될 수도, 악귀가 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곧바로 언용운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데, 방금 생도들이 보인 행동은 도저히 마교의 발호에 사대기숙사가 불타는 경험을 한 정무학관의 생도라고는 믿기지 않는 굼뜬 행동들이었습니다. 본 교관은 기꺼이 악귀가 되겠습니다. 지금부터 복명복창을 제외한 모든 대답은 악! 으로 통일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앜!!!!!!”
“아, 악?!”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표정을 짓는 생도들이 윤국관과 운매관 생도들 사이에서 속출했으나.
“뒤로 취침!”
이런 일상을 매일 경험하는 청죽관 생도들이 일사불란하게 뒤로 눕고.
“뒤로 취치이임!!!!”
한 번 당해봤다고 향란관 생도들도 움직이는 데다가.
“취침 모르쇼들? 누으라고 뒤로!”
“늦으면 큰일난다!”
운매관에서는 천장호와 팽소천이, 윤국관에서는 제갈설지가 채근을 하니.
“윤국관 생도님들. 언용운 후보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다면 지금 여러분이 보인 태도가 곧 이 제갈설지의 발언권이자 힘이 될 거예요! 다른 기숙사한테 지지 마세요!”
언용운의 말 한마디에 수백의 생도가 이리구르고 저리구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물론, 그 틈바구니에서 구르고 있는 당사자들에겐 그건 그냥 고역일 뿐이었다.
“좌로 굴러!”
“좌로 굴러어어어!”
연무장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구르고, 족쇄를 차고 무당산자락을 달리고.
삑! 삐빅! 삑삐빅삐빅!!!!!
이어서 호각 소리에 맞춰 몸을 비틀고.
혼몽한 상태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점심을 먹고.
이제 좀 쉬는가 싶었더니.
쌩독을 마시는 시간이 찾아왔다.
“이 동작과 함께 이렇게 외칩니다. 독공! 독공! 독공!”
“독공! 독공! 독고오오옹!”
그에, 화생방 실을 나와 독기를 날리기 위한 팔 벌려 높이 뛰기를 마치자마자.
다리가 풀린 석호열은 털썩 쓰러지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는데.
“…이건 지옥이다.”
딱 이때.
언용운이 다가와 석호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석호열 생도. 다시 검을 쥡니다. 여력 있지 않습니까?”
여력이 있다고?
오전 내내 흙먼지를 들이마시다, 독을 들이마신 게 조금 전이었다.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석호열은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꼼짝할 힘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여력이 있는 겁니다.”
하나 돌아온 답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석호열은 이를 갈았다.
‘언용운. 어린 시절의 일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아버지들이 친하다 보니, 어린 시절만 해도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렸다.
하나 언젠가부터 언용운이 망나니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석호열은 언용운을 향해 입바른 소리를 했었다.
‘부모님 보기 부끄럽지 않냐는 말을 했었는데.’
당시 워낙에 망나니짓만 하고 돌아다니길래, 정신을 좀 차리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마교의 눈을 속이려고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어찌 예상한단 말인가?’
귀띔해 준 바가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 이후로는 왕래가 없었다.
석호열은 팽씨네 쌍둥이나 언씨형제와 달리 스스로를 범재라 생각했다.
하여, 정무학관 입관시험을 준비한다고 바빴고.
간신히 턱걸이 합격을 한 뒤.
언용명과 팽소천이 같이 다니자고 권해왔지만, 입관하기 전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녀석들과는 가는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언용운은 점점 더 멀어졌고 그때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 역시 함께 멀어졌다.
“…그래도 나는 네 녀석의 행보를 응원했는데. 얼굴에 젓살도 안 빠졌던 시절 일로 사람을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것은 좀 심한 것 아니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석호열 올빼미, 뭐 잘못 먹었습니까?”
“모르는 척하는 거냐?”
“모르는 척이고 자시고 교관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이 마인들과 싸우는 전장이었다면 그렇게 널브러져 있다간 올빼미는 죽습니다.”
“…….”
“방금 화생방실에서 나와서 정신이 혼미한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짚어주겠습니다. 본 교관이 보기에 석호열 생도에게 여력이 있습니다. 검을 쥐고 일어섭니다.“
“그래 일어난다 일어나!”
“대답은 악! 으로.”
“악!!!!”
네 녀석에게 표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석호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앜!!!!!!!”
지친 몸으로 분을 섞어 휘두르니 그 검초가 제대로일 리 없었다.
쌔액! 쌔애애액!!
쌔애애애액!
그렇게 엉망으로 휘둘러지기 시작한 검이었으나.
석호열의 검은 점점 자리를 찾아갔다.
챙! 채애앵!
언용운이 휘두르는 검이 석호열의 투로가 정돈되도록 이끌어주었고.
채챙!
채애애앵!
“의도를 가지고 휘둘러야 합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에 누가 맞아 주겠습니까.”
이따금 뿜어내는 살기는 극도의 피로 속에서 석호열이 집중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게.”
“!”
그런 시간 속에 석호열은 이른바 깨달음의 편린을 느꼈는데.
‘어?’
그러다 문득 주변이 다시 눈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언용운은 다른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석호열 올빼미는 잠시 운기를 하며 휴식을 취하도록 합니다. 거기, 향란관의 올빼미. 올빼미도 여력이 있어 보입니다. 애병이 창입니까? 창을 들어봅니다.”
그렇게 언용운이 추진한 합동훈련의 날이 지나갔는데.
언용운은 말미에 빨간 모자를 벗고서 딱 한 마디의 말을 남겼다.
“다들 수업도 들어야 하고 하니 계속 오늘과 같이 일정을 소화할 수 없겠지만, 아침 수련만큼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뜻이 있는 생도들은 연무장으로 나오십시오.”
그렇게 하루가 흘렀고, 이틀이 지났다.
하루 이틀은 이어 닷새, 여드레, 보름이 되었고.
마침내 후보들의 선거운동 기간이 끝나며 총학생회장 투표 당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찾게 된 투표장에서.
쾅.
석호열은 홀린 듯이 언용운의 이름 옆에 붙어있는 칸에 도장을 찍었는데.
밖으로 나와보니 기다리고 있던 양성무와 만벽이 있었다.
석호열은 벗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언용운 그 친구를 뽑았네.”
그러자 양성무와 만벽이 입을 모았다.
“…나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