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63화 (263/444)

제263화. 그렇게 나오시겠다? (4)

철통같은 보안 아래 치러진 초대 총학생회장 선거.

“투표가 끝났군.”

“그렇네요.”

가장 마지막에 투표하러 들어갔던 생도가 밖으로 나오자, 경룡이 형이 입을 열었다.

“부정 탈까 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이제 개표만 남았으니 묻겠네. 간밤에 좋은 꿈 좀 꿨나?”

“그냥 푹 잤습니다.”

“역시 언 부회장은 대범해.”

“뭘 그런 걸로 대범까지.”

“…내가 한숨도 못 잤으니까.”

어쩐지 눈가가 퀭하더라 했는데.

경룡이 형이 나를 향해 재차 물었다.

“꿈은 안 꿨다니, 그럼 느낌은 어떤가?”

“느낌이랄 게 있습니까.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를 기다리면 되는 거죠.”

“그래도, 될 것 같다 아니다 하는 감이 있지 않나? 자네 감은 대체로 맞는 편이고.”

“저 아니면 당준기 선배인데. 제가 당선되면 되는대로 이끌어나가면 되고, 당 선배가 당선된다면 지금의 청죽관처럼 이끌어나가면 되죠. 향란관에서 인정했듯 그동안 잘해왔지 않습니까? 물론, 당준기 선배든 누구든 경룡이 형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그러던 중, 예해수 선배가 열심히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게 보였다.

“예 선배는 뭘 그렇게 적고 있습니까?”

“후배님, 죄송한데 지금 말 시키지 마세요. 소식지 제목이 생각날락말락 하니까요.”

사부님께서 한 마디를 하신 건 이때였다.

- …예해수가 문제가 아니라, 경룡이가 또 우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경룡이 형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회장님은 왜 또 글썽거리고 계십니까? 꽃가루도 없고 하늘은 높고 날만 좋고, 아직 개표 결과를 발표한 것도 아닌데요.”

“모르겠네. 그냥 잘해왔다는 이야기가, 누구와도 나를 비할 수 없다는 그 말이 사람 심금을 울리는구만.”

“…본인이 울보라는 말을 길게도 하십니다.”

행정처장님께서 투표장 밖으로 나와 입을 여신 건 이때였다.

“곧 개표를 시작할 것이니. 참관하기로 한 사대기숙사의 자치회장들은 안으로 들어오시오.”

경룡이 형은 눈가를 훔치며 투표장 안으로 들어갔다.

“크흥. 그럼 다녀오겠네.”

그렇게 참관인 역을 맡기로 한 자치회장들이 투표장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개표가 끝난 것인지.

경혜사태와 행정처장님을 제외한 운영위원들과 자치회장들이 우르르 투표장 밖으로 나와 단상 위에 섰다.

“…….”

한데 그 무리에 섞여 있는 경룡이 형의 표정이 안 좋았다.

“…어, 언형. 회장님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신 것 같은데요?”

그에 우소릉이 흙빛을 한 얼굴로 입을 열었고.

곁에 있던 소천이 형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가.

“용운이가 낙선을… 읍.”

천장호의 손에 입막음을 당했다.

“쓰흡. 부정 타게.”

“읍읍읍.”

“왜요.”

“짜다!”

술렁이는 언동생들의 모습에, 제갈설지도 미간을 좁혔다.

“청죽관 생도들은 다 용운 님을 뽑았을 거고, 다른 생도들의 분위기도 좋았어요. 질 수가 없는데? 진 회장님이 뭘 잘못 보셨거나 표정 관리를 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

남궁윤은 그런 제갈설지에게 말을 붙였는데.

“내가 본 바로는 진경룡 선배님은 사람이 진중하신 분이었다. 정이 많은지 이런 상황에 곧잘 우시던데. 그런 장난을 치실 분이 아니니 눈시울이 멀쩡한 것을 보면….”

“윤 님이 진 회장님을 보면 얼마나 봤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방금 우시다 올라갔으니 눈물이 말랐을 수도 있죠!”

싸늘한 눈초리를 돌려받았다.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러나.”

경혜사태와 행정처장님께서 투표장 밖으로 걸어 나오신 것은 이때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행정처장님이셨다.

“그럼 정무학관의 총학생회장 경선 개표 결과를 발표하겠소이다.”

그 말에, 좌중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지자.

행정처장님은 슬쩍 비켜서며 경혜사태를 향해 두루마리를 전하셨다.

경혜사태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아 펼치며 입을 여셨다.

“개표 결과. 정무학관의 초대 총학생회장은, 재학 중인 육백이십 네 명의 생도에게서 총 사백예순아홉 표를 획득한… 언용운 후보가 당선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러자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입후보한 뒤 처음 포부를 밝혔을 때만 해도 주로 청죽관 생도들 사이에서만 저런 함성이 나왔었는데.

“언용운! 언용운!! 언용운!!!”

이번에는 내게 표를 던진 이들이 함께 목청을 높이는 것인지.

그야말로 학관이 떠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언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갈설지는 거보라는 듯이 남궁윤을 향해 말했고.

“거보세요! 제가 뭐랬나요!”

곁에 있던 정현과 우소릉이 연이어 목청을 높였다.

“원시천존! 저는 제갈 소저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언 소협이 낙선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습니다!”

“저도요!”

“…….”

그 틈바구니에 껴있는 남궁윤의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는데.

그러자마자 은하성이 내 옆구리를 찔러왔다.

“조금 전에 경룡이 형이랑 예 누님 앞에서는 겸허한 척하시더니, 입꼬리가 씰룩거립니다 형님? 좋으십니까?”

“뭔. 너희가 좋아하는 모습 때문에 웃은 거다. 구체적으로는 궁윤….”

그 말에 답을 하자, 남매 아니랄까 봐 이번에는 은하연이 헤실거리며 옆구리를 찔러왔다.

“늬에늬에. 그러시겠죠. 이럴 때는 또 가주님이랑 똑 닮으셨다니까요?!”

조금 억울하기는 했지만.

다들 신이 나서 저러는 거였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이래저래 준비한다고 고생한 녀석들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데.

그사이 단상에서 내려온 경룡이 형을 향해 용명이가 물었다.

“회장님. 방금 표정은 왜 그러신 겁니까?”

“아, 그거 말인가? 내 감수성이 조금 예민한 것을 두고 언 부회장이 만날 놀리니까 나도 한번 놀리고 싶어서 표정 관리를 좀 해봤네. 어떻게, 잘 먹혔나?”

“형님께 그런 게 먹힐 리가 있습니까? 저희만 가슴을 졸였죠. 남궁 소협만 억울해졌고요.”

“……? 남궁 소협은 왜?”

“…그런 분이셨습니다. 다시 봤습니다. 진 회장님.”

*     *     *

쏟아지는 함성과 언동생들의 틈바구니에 둘러싸여 있기를 잠시.

행정처장님께서는 좌중을 진정시키시더니, 이쪽을 보며 입을 여셨다.

“언용운 생도는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시오.”

그에 보무도 당당하게 단상 위로 향하니.

경혜사태께서 살포시 웃으며 개표 결과를 담은 두루마리를 내게 주셨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생도들을 잘 이끌어 주세요.”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옆으로 빗겨서는 게, 나더러 당선사를 하라는 투셨다.

나는 생도들 쪽으로 몸을 돌린 뒤.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쁩니다. 단순히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합동 훈련들을 겪어보셨음에도 제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이 제게 표를 던져주셨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운매, 향란, 윤국, 청죽을 차례대로 훑으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고단한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 저와 함께하는 고단한 오늘이 내일 여러분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킬 힘을 줄 것입니다. 강해집시다.”

그렇게 말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단상에 계시던 교수님들도 저마다 한마디씩을 해오셨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윤국관의 제갈민 교수님이었다.

“청산유수구만. 혜아가 대군사부로 데리고 가려고 벼르고 있던데 당분간은 요원하게 되었어.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렇게 제갈민 교수님께 답을 하고 있자, 노삼 교수님께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의기양양하게 말씀하셨다.

“정무학관의 초대 총학생회장이 누구인가?! 바로바로 청죽관의 언용운! 크하하! 누가 저 친구를 청죽관으로 데려왔게?!”

그런 노삼 교수님의 말씀에 창량 교수님은 미간을 좁히셨다.

“생도 본인의 자질과 그릇이 뛰어난 것을 왜 노 교수님이 생색을 내십니까.”

“흥이다. 용운이가 향란관 생도였으면 너도 이랬을걸?”

“저는 그러지 않습니다. 애초에 언용운 생도의 추천인이 저입니다만?”

“지금! 방금! 생색을 내지 않았나?!”

“이건 노 교수님이….”

재혁 숙부는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경사구나. 정웅 형과 형수님 산서금붕 어르신… 그리고 네 백부 되는 우리 형님도 좋아하실 것이다. 여기 두 사람은 내게 맡기고 너는 동생들에게 돌아가 보거라.”

“옙.”

그렇게 나는 교수님들의 축하 속에 단상을 내려왔다.

“형님! 총장님이 주신 두루마리는 뭡니까?! 임명장입니까?”

“그냥 당선 확인증이다. 개표 결과랑 총장직인이 찍혀있는.”

“좀 보여주십쇼!”

“저도요!”

언동생들은 다시 한번 나를 에워싸며, 경혜사태에게 받아온 두루마리를 구경시켜달라 청해왔는데.

이때, 당준기와 매진악 무리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당옥기를 향해 물었다.

“…너희 오라버니가 이쪽으로 오시는 것 같은데? 당옥기 너를 보러 오는 건 아닌 것 같지?”

“…어. 딱 봐도 언용운 너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경선기간 내내 실질적으로 나와 당준기의 이파전이 펼쳐지는 바람에, 기간 내내 전전긍긍했던 당옥기는 미간을 와락 구겼는데.

“아! 우리 엄마 아들 왜 저래?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오는 거야 사람 불안하게에에!”

당옥기의 행동이 무색하게.

당준기가 내게 다가와 건넨 첫마디는 승복의 말이었다.

“내가 졌네.”

“패자와 승자로 나눌 일이 아닙니다. 앞으론 함께 정무학관을 이끌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내 말에 답을 한 것은 당준기와 함께 온 향란관의 자치회장 매진악이었다.

“그와 별개로 진 것은 진 것일세. 옳다고 믿는 기치(旗幟)를 세워 최선을 다했지만, 향란관 생도들의 표조차 오롯이 우리를 향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네. 틀렸다는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겠지. 이런 결과가 나오니 부끄럽기 그지없군.”

생각지 않았던 깔끔한 승복에.

내가 잠시 할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

매진악은 당준기의 손을 잡아 내 손 위에 올렸다.

“축하하네. 그리고… 잘 부탁하네.”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정무학관 생도들이 정말로 하나가 되어 외치는 함성이 비로소 들려오는 듯했다.

*     *     *

총학생회장 경선 투표가 막을 내렸다.

먼저 축하의 말을 전해왔던 사감 교수님들은 각각 본인의 기숙사를 대표하는 미주(美酒)들을 청죽관으로 보내왔다.

이런 술은 바로바로 따는 게 예의였다.

하여, 선거 활동을 직접적으로 도왔던 언동생들과 청죽관 생도들을 모아놓고 조촐한 축하연을 열었는데.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당장에 내일 아침에도 수련이 있을 것이니 과음은 하지 말고 술보다는 기쁨에 취해봅시다.”

연회의 시작을 알린 뒤.

술병을 종류별로 챙겨 밖으로 나가려 하니, 천장호가 입을 열었다.

“아, 검에 술 치러 가십니까?”

“그래.”

“다녀오십쇼! 빨리 안 오면 제가 음식이고 술이고 다 먹습니다!”

“근데, 너랑 소천이 형은 도우미도 아니었으면서 여기 왜 있는 거냐.”

“마음으로는 도왔습니다! 애초에 용명이 이 친구가 용운 형 돕겠다고 손들었을 때 소천 형이랑 저도 같이 손들었다고요!”

“그렇다고 치자.”

“치는 게 아니라 진짜인데요?!”

그렇게 연회장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나는 사부님께 술을 올렸다.

‘술병이 네 개인데 뭐부터 올릴까요?’

- 윤국의 국화주부터 가자꾸나. 순한 것부터 가야지.

꼴꼴꼴꼴꼴-

그러면서 속으로는 장차 다가올 위협을 떠올려보았다.

‘천마신교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이제 그야말로 미지수가 되었다.’

굵직한 계획을 세 개나 좌절시켰고, 그 과정에서 본래라면 놈들의 자금줄 중 가장 굵은 것이 되었을 태원상단을 지켜냈다.

자연히 놈들의 교세는 약해질 수밖에 없을 테지만, 딱 그만큼 독이 올랐을 터였다.

그런 놈들의 수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 사대기숙사의 생도들을 휘어잡을 발판을 오늘 마련했다.

‘하나, 이것만으론 부족해.’

모르긴 몰라도 마교 놈들의 요주의 명단에 내 이름이 분명히 올랐을 터.

내 개인적인 성취도 분명히 동반돼야 했다.

‘그러나, 화경이라는 경지는 당장에 너무 멀다.’

멀다는 표현 자체도 맞는지 모르겠다.

어지간한 무인들의 눈이 돌아가게 만드는 초절정 고수의 경지에 올라있는 나였지만, 화경이라는 경지를 생각하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강해질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혈륜을 단련해 혈조술을 강화하는 방법.’

나는 사부님께 술을 올리기 위해 뽑아 들고 있던 회한으로 왼손에 자그마한 상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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