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귀인 (1)
상처에서 베여 나온 핏방울이 내 의지에 따라 뭉쳐진다.
그렇게 핏방울이 조그마한 구(球)의 형태를 이루자.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스스로의 성취를 끌어올릴 고민을 하고 있구나. 혈조술을 강화하려는 것이냐?
‘귀신이시네요? 아, 귀신 맞으시지 참.’
- ?
‘?’
사부님께 장난을 거는 것은 여기까지.
나는 사부님께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쪽 계열은 잘 모르실 텐데요?’
- 내 방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만, 용운이 너를 알지 않느냐?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게 오늘인데… 정작 본인은 술도 요리도 입에 대지 않고 핏방울을 움직이고 있으니. 오늘 얻은 승리보다 다가올 내일을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내 물음에 사부님께서는 담담히 답을 해주시면서, 칭찬을 해주셨다.
-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강해질 방법을 궁리하는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겠지….
한데, 마지막 마디가 흐려진다 싶더니.
곧바로 엄한 어조가 이어졌다.
- 한데, 왜 하필이면 혈조술이냐? 혈조술에 의존하다 벽에 막힌 경험을 벌써 잊었느냐? 쉬워 보이는 길을 택했다가 같은 실수를 답습해서는 아니 되거늘.
그 말에 나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쉬운 길이라서 혈조술을 택한 게 아닙니다. 혈조술에 의존하다가 벽에 막혔던 경험도 잊지 않고 있고요.’
- 한데?
‘언젠가 사부님께서 제게 해주셨던 말을 떠올려봤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잠시 말이 없으셨다.
어떤 말을 두고 하는 이야긴지 고민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답을 말했다.
‘그것조차 과정이었다던 말씀 말입니다. 그 말을 떠올리고 나니, 역으로 제가 가진 장기 중에 하나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그래서 떠올려 본 것입니다. 쉬운 길이라서 하려는 게 아닙니다. 화경이란 경지를 고민해보니 그저 망망대해를 홀로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당장에 해볼 수 있는 것은 뭐라도 해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제자가 잘못 생각한 것입니까?’
사부님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신 건 이때였다.
- 흠허허. 바로 그것이다.
‘……? 꾸중을 하시려는 것 아니셨는지요?’
- 마음가짐을 물었을 뿐이다. 그 길에 왕도는 없다. 화경이라는 경지를 넘어서고자 노력하던 시절. 나도 안 해본 짓이 없느니라.
‘상상이 잘 안 갑니다만?’
-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몸을 움직여도 보았고, 검 위에 찻물이 담긴 잔을 올려놓고 움직이기도 했지. 그 외에도 온갖 짓을 다 했다.
‘그런 것들도 다 해봐야겠네요.’
-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강해지고자 하는 무인의 마음이 조바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걸 경계하며 스스로의 강점을, 약함을, 집착을 마주하고 또 마주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검과 육신 그리고 기운과 자연이 조화(造化)를 이루는 경지가 찾아오는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의 조언에 답한 나는 피구슬을 가닥가닥 해체해 회한에 감았다.
그리고 파천검법의 초식들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쌔액! 쌔애애액!
쌔애액!
어느 순간 인기척이 느껴져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니.
교수님들끼리 회의가 있어 연회에 늦게 참석할 것 같다시던 노삼 교수님이 서 계셨다.
* * *
“교수님? 연회장은 뒤편의 건물입니다.”
“안다. 지금 거기서 나온 참이다.”
“엥.”
“뭐냐, 그 엥 소리는?”
“교수님께서 잔치를 마다하고 나오시다니, 별일이다 싶어서요. 천장호가 벌써 술이랑 요리를 다 먹었을 리는 없을 텐데?”
“나 정도 되는 거지는 한 번씩 마다하기도 하느니라. 그러는 너야말로 연회의 주인이 예서 뭐 하는 것이냐? 술을 치러 갔다더니 검을 휘두르고 있구나? 당선된 게 기쁘지 않으냐?”
“기쁘죠. 한데 결국 총학생회를 설치한 이유가 어지러운 천하에 대처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검에 술을 치다 보니 자연히 내 한 몸 건사할 재주를 더 갈고닦아야겠구나, 쪽으로 흘렀습니다.”
“용운이 너 정도면 전례를 찾기 힘든 천재다. 이미 천하제일 후기지수 소리를 듣고 있거늘 너무 조바심을 내는 것 아니냐?”
“천하제일 ‘후기지수’지 않습니까. 마교 놈들이나 흑도 놈들이 수준 맞춰가며 공격을 해올 것도 아니니, 허망한 별호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노삼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그리 말하니 또 그렇긴 하구나.”
“그리고 조바심 내는 게 아닙니다. 제가 가진 술법을 무학에 응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실천해볼까 하던 중이었을 뿐이니까요.”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해오셨다.
“좀 어울려 주랴?”
…노삼 교수님과 대련이라.
생각해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노삼 교수님은 화경의 반열에 든 고수였다.
내가 목표로 삼고 있는 절대고수이자, 여러 가지 의미로 부담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대.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상대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감사하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교수님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연무장으로 내려오셨다.
“어느 정도로 어울려 주면 되겠느냐?”
“봐주지 않고 해주시면 됩니다.”
“봐주지 말라고?”
“적당한 선에서요. 죽고 싶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듣는다 이놈아.”
“워낙에 철석같이 저를 믿어주시니, 혹시나 해서요.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오냐!”
노삼 교수님은 말을 마치자마자 땅을 박차며 장력을 내지르셨다.
꽈르르릉!
나는 교수님과 반대 방향으로 땅을 박찼다.
방향의 차이에서 오는 시간의 간극.
덕분에 나는 회한을 휘저어 쇄도하는 장력의 방향을 살짝 틀 수 있었다.
쾅!!!
하나 노삼 교수님의 공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좋구나!”
광풍투개로 변모한 노삼 교수님은 때려 붓는 소나기처럼 권장들을 쏟아냈다.
쌔액! 쌔액! 쌔액!
쌔애애액!
순식간에 쏟아지는 수십 초의 공격.
나는 그에 대처하고자 빠르게 보법을 밟았다.
하나, 모든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는 것에는 실패했다.
애초에 쏟아지는 공격 중 몇 초식은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쫓을 수도 없이 빨랐던 까닭이었다.
집중을 통해 시간을 느리게 하는 시도도 무용지물이었다.
교수님의 움직임은, 모든 사물이 느려지는 와중에도 빨랐으니까.
쌔애애액!!
그렇게 놓친 공격 중 하나는 내가 항룡장을 익히고 있던 덕분에 투로를 예측해서 막을 수 있었으나.
펑!!!
쌔애애액!!
동시에 이어진 일 권은 피할 수가 없었다.
‘!’
본래라면 갈비뼈가 몇 대쯤 나갔을 일 권.
하나, 지금 대련은 어디까지나 수련의 일환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교수님은 본인의 주먹이 내 몸에 닿기 전에 걸음을 뒤로 물리셨고.
팟!
나는 몰아치는 공방 속에서 참고 있던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우.”
그런 나를 향해 교수님께서 질문하셨다.
“천재는 천재야. 내가 네 나이 때는 빌빌거리기 바빴는데, 이 정도라니. 한데… 쓴다는 수는 쓰긴 한 것이냐? 잘 모르겠던데?”
“지금부터 써볼 참입니다.”
말을 마친 나는 상단전에 새겨놓은 혈륜에 내력을 밀어 넣었다.
‘지금까지 써왔던 혈조술의 방식은 두 가지. 강기 대용으로 쓰는 것과, 블러드골렘을 만드는 방식을 응용해 형상 변화를 시켰던 것.’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볼 요량이었다.
‘파천신공과 혈조술을 합쳐서 혈맥 안에서 달리게 만든다.’
얼토당토않은 발상은 아니었다.
이미 원작에서 이런 식으로 무공을 운용하는 자들이 있었다.
‘경천혈마(驚天血魔).’
천마신교 혈왕부의 마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극성에 가까워지면 이지를 상실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어 천마신교의 마인들조차 꺼리는 마공이었지만, 그 힘만큼은 확실해 주인공 일행도 처리하는 데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근데 그건 그놈들이 근간으로 삼는 심결이 파천검문에서 파생된 짝퉁에서 기인한 거라 그런거고. 순정을 사용하는 나는 사정이 다르지.’
그뿐이랴.
내겐 특수한 정신력이 있었고.
그간 얻어온 기연들로 인해 내력 또한 충분했으며, 부단히 해온 수련 덕에 혈맥 또한 튼튼했다.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혈조술이 내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없다.’
그런 생각 하에 나는 파천의 내력을 혈륜 안으로 밀어 넣었고.
혈륜을 통과한 내력은 혈조술의 영향을 받아 이전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혈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그에 전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나는 노삼 교수님을 응시했다.
“너….”
교수님은 내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 채셨는지 뭐라 말하려 하셨지만.
이번에는 내 쪽에서 먼저 땅을 박찼다.
팟-
그런 내 모습에 교수님도 벌렸던 입을 다물고 마주 달려오셨으나.
도저히 대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조금 전의 노삼 교수님은 더는 없었다.
빨라진 심장 박동만큼, 내가 교수님의 속도를 웃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슉! 슉! 슉! 슉! 슉! 슉!
나는 번개처럼 회한을 내질렀고.
처지가 바뀐 교수님은 바쁘게 걸음을 뒤로 물리며 권장을 내지르셨다.
펑! 펑! 퍼퍼펑!
콰아앙!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노삼 교수님께서 걸음이 연무장 밖을 향해 물리신 지 얼마나 되었을까?
“!”
일순 사지의 근육들에서 저릿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일신의 수준을 뛰어넘는 움직임을 펼치느라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대련은 승패를 가리는 대련이 아니었다.
나는 지체없이 검초를 중단하고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가쁜 호흡을 고르며 노삼 교수님께 말을 걸었다.
“하아. 하아. 하아악. 헤가 얼만하 이허호 있헣흡힉하?”
“네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냐고? 내가 그걸 어찌 아느냐?! 안 찔려 죽으려고 발버둥 치기도 바빴는데! 뭐냐 방금 그건?”
“…헐명, 설명하자면 길고… 그럼 시간을 다시 쟤 봐야 하겠는데요?”
은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때였다.
“반 다경이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언동생 들이 보였다.
싸우는 소리에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반 다경?”
“예. 언 공자 쪽에서 달려든 때로부터 딱 반 다경이 지났어요.”
은하연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당장은 그 정도가 한계인가? 앞으론 수련 강도를 더 올려야겠군.”
기실 나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었는데.
그걸 들은 언동생들은 잘못 받아들인 모양이었는지, 저마다 헛숨을 들이켰다.
“히익.”
“…여기서 더? 그건 아니지 않아요? 하연 님?”
“아니죠. 그건 진짜 아니에요.”
“미쳤나 봐.”
“워, 원시천존.”
“친형님이시지만….”
“사람이 아니죠? 용운 형님은 사람이 아니야.”
“…….”
“…역시 청죽관은 아주 눌러앉을 곳은 아닌 걸로. 오줌도 이리로는 안 싸야지.”
“천장호. 근데 용운이가 총학생회장이니까 이제 그거 의미 없는 거 아니냐?”
“…아이. 그렇네?”
“바보.”
그런데 생각해보니 딱히 잘못 받아들인 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나만 강도를 올릴 순 없지?’
나는 씩 웃으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 * *
내가 공식적으로 총학생회장의 임기를 시작하는 때는 내년이었다.
하나, 초대이기도 하고 천하가 어지러운 만큼 올해부터 사대기숙사가 학생회의 안정적인 출범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는데.
그를 위해 총학생회실을 미리 마련하고 그에 따른 활동 역시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총학생회실의 현판을 내거는 현판식을 하는 날.
무림맹주님께서 정무학관을 찾아오셨다.
“강호가 혼란스러운 이때, 사대기숙사 생도들이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모으고 학관 전체를 대표하는 생도를 뽑은 것은 고무적입니다.”
명목상으론 총학생회 출범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현판식에 참여하신 것이었지만.
“강호의 선배들이 느끼는 바가 많았을 겁니다. 이 공손 모는 무림의 밝은 미래를 본 기분입니다. 정무학관이 이리 견실하니 천하의 안정도 머지않았습니다.”
내게는 또 다른 볼일이 있었던 모양인지, 현판식이 끝나고 나자 전음을 보내오셨다.
[용운이 자네는 남은 일정이 어찌 되나?]
[자치회장들이랑 공식적인 첫 회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나도 교수님들과 나눌 이야기가 있긴 하니, 그럼 각자 볼일 마치고 나서 따로 좀 보지.]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큰일이 터진 것은 아니고. 저번에 후성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말일세. 자네가 뭘 주실 거면 현물이 좋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때 생각해둔 바가 있으시다던….]
[물건은 아니고 사람일세.]
[사람이요?]
[그래, 보통 사람은 아니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걸세.]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하시면….]
[황실 쪽 분이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