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귀인 (3)
서른 줄쯤 되어 보이는 젊은 장수가 보인 행동에 꼬마 왕자의 걸음이 우뚝 굳었고, 내 표정도 굳었다.
그러자, 은하연이 급히 내 소매를 붙들며 전음을 보내왔다.
[안 돼요.]
[뭐가 말이오?]
[뭐가 됐든요.]
눈앞의 젊은 장수와 한바탕 싸움을 벌일 것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초왕 전하의 알현을 앞두고 끽해야 총기(總旗) 정도로 보이는 자와 드잡이질을 하겠소?]
[혹시나 해서요.]
젊은 장수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만남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니까.’
알현을 허락받았다 하나, 서류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허락받은 자의 신원에 대한 검문과 소지품을 확인하는 검색이 뒤따라야 했다.
그런데 꼬마 왕자님이 뛰어나오는 바람에 그런 과정들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호위하는 입장에서는 경악할 일인데, 그렇다고 왕자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
하여, 우리 쪽을 물러나게 한 것이리라.
‘좋은 마음으로 초왕을 알현하러 온 사람이라면 이해를 해줄 테니까.’
다만, 응당 이어져 나와야 할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곧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장이 우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송구합니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거기 있는 친구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양 총기는 사죄하지 않고 뭐 하는가?! 전하의 손님이시다!”
노장의 호통에 젊은 장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여 왔다.
내가 받고 싶은 건 이런 억지 사과가 아니었다.
젊은 장수의 눈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있었다.
나는 그걸 물었다.
“나한테 불만 있소?”
“있지.”
돌아온 우직한 답에,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질 무렵.
환관으로 보이는 이가 달려와 입을 열었다.
“초왕 전하와 왕비 마마께서 납십니다!”
그러자마자 열 명쯤 되는 무장이 순식간에 대문가에 시립했고.
이어서 후덕하지만 눈매가 부리부리한 중년인과 함께 아름다운 외모의 귀부인이 문가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 저들이 초왕과 왕비인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강남 상계에서 왕이라 불리는 은하연의 아버지도 보았고, 천하제일 세가라 불리는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윤의 아버지도 보았다.
그들에게서 느껴진 유복한 느낌은 절대 범상치 않은 것이었지만.
다가오는 부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귀티 앞에서는 새 발의 피일 것 같았다.
저 두 사람이 아마 초왕과 왕비인 모양이었다.
“초왕 전하와 왕비마마를 뵙습니다!”
예상이 맞았는지, 무림맹주님은 곧바로 절도 있는 자세로 입을 여셨다.
나와 언동생들도 뒤따라 목청을 높였다.
“초왕 전하와 왕비마마를 뵙습니다!!!”
초왕은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고는, 맹주님을 향해 말을 붙였다.
“공손 맹주. 오랜만이오.”
“예, 전하. 한데 어찌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소인들이 찾아뵐 것을요.”
“반가운 손님이 오기로 했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에 나와봤소.”
그렇게 운을 뗀 초왕은 조금 전의 노장에게 근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석 총관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고하라.”
그에 석 총관이라 불린 노장이 군례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총관 석숭. 빠짐없이 고하겠습니다. 아직 손님들의 확인을 덜 마친 상태에서 왕자마마께서 평소 흠모하시던 소영웅들이 당도했다는 소식에 달려 나오시는 바람에, 총령제기(總領緹騎) 양진무가 왕자님을 호위하고자 손님들께 창대를 들이대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초왕의 엄한 눈초리가 꼬마 왕자를 향했다.
“왕자.”
“…예. 아바마마.”
“왕자의 행동이 지금 몇 사람을 곤란하게 한 지 아느냐?”
그에 꼬마 왕자가 풀죽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찾으신 손님들을 곤란케 하였고, 초왕부의 무장들을 곤란케 하였으며,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곤란케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똘똘한 대답 같았으나, 초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아비가 민가의 초부(樵夫)더냐?”
“아니십니다.”
“손님들은 누구시더냐?”
“무림맹주님과 정무학관의 후기지수님들입니다.”
“이 일로 황실과 강호에 틈이라도 생기면 어쩌려느냐? 왕자는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일지라도, 그 행동의 결과는 여기 있는 사람뿐 아니라, 위로는 폐하를 아래로는 천하 만민을 곤란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소, 송구합니다.”
그에 꼬마 왕자는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하나, 초왕은 여전히 엄격한 어조로 남은 말을 뱉었다.
“황족의 걸음은 그런 것이다.”
‘저런 것을 두고 제왕의 풍모라고 하는 건가.’
무예를 제대로 닦은 것도 아닐 테고, 언성을 높이는 것도 아닌데도 위압감이 대단했다.
심중에 천하가 들어있는 사람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 초왕이라는 자. 그저 황실의 피를 나눠 받았을 뿐인 쭉정이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걸물로 보이는구나.
‘그러게요. 당금 천자가 가장 아끼는 황족이라더니. 왜 아끼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런 초왕의 풍모에 사부님과 함께 놀라고 있는데.
초왕비가 꼬마 왕자의 어깨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왕자. 여기서 눈물을 보이면 아바마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또 좋아하는 괴룡은 왕자를 어찌 생각할까요? 의젓함을 보이셔요.”
“…크흥. 네에.”
“손님들과 왕부의 무장들에게도 사과를 하셔야지요.”
“…모두 미안합니다.”
꼬마 왕자는 눈물을 참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포권을 취해왔고.
그와 함께 초왕도 사과의 말을 꺼냈다.
“왕자가 천방지축이라 우직한 친구를 붙였는데. 이거 미안하오.”
맹주님과 우리는 그런 초왕 부자를 향해 입을 모아 예를 돌려드렸다.
“망극합니다.”
하늘에 닿아있는 지체에도 스스로의 행동을 경계하고, 머리 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황족이라.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았다.
* * *
대문 앞에서의 소란이 일단락된 뒤.
우리는 초왕 부부의 뒤를 따라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연회장에는 황실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주사가 만든 요리들이 있었는데.
접시에 담긴 모양새가 용, 봉, 현무, 백호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의 영역에 걸쳐있었다.
맛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은휘상단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은하성이 순수하게 음식으로 호들갑을 떨 정도였고.
“입에서 녹네 녹아. 와… 이거 천장호 그 친구가 함께 왔으면 눈 돌아갔겠는데요?”
처음에만 해도 잡혀가는 게 아니냐며 벌벌 떨던 우소릉도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려 드리면 땅을 치며 후회를 하실지도요?”
그러는 중에 나온 후회라는 말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후회라. 그러고 보니 용운이 네 녀석이 분명 식도락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면서 나를 꾀었었는데.
‘…제가 술은 어떻게든 한 병 챙기겠습니다.’
- 두 병.
‘두 병.’
그렇게 사부님을 위로한 나는, 유일하게 굼뜬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녀석에게 나직이 말을 걸었는데.
“당옥기 너는 왜 그렇게 깨작거려. 뭐 들었을까 봐?”
“캭.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그냥 음식이 대체로 달아서 내 입맛에 좀 안 맞아. 매운 것도 없고.”
곁에 있던 은하연이 나를 향해 질문을 해왔다.
“그런데 맹주님은 초왕 전하와 무슨 인연이신 거래요? 처음만 해도 그냥 무림맹주 하시다가 아시게 된 사이인가 싶었는데, 보통 사이가 아니신 것 같던데요? 아까 전하 본인이 사과하신 것도 그렇고요.”
“자세히는 나도 모르오. 젊었던 시절 이야기라던데. 수영을 하실 줄 모르는 초왕 전하가 물에 빠졌는데, 맹주님께서 구해주셨다더군.”
“원시천존. 초왕 전하의 인품이 훌륭하기로 정평이 났지만, 그걸 감안해도 대접이 너무 극진하다 싶었는데 구명지은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상석에서 맹주님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초왕이 나를 부른 것은 이때였다.
“괴룡. 이리 와서 내 술 한잔 받겠나?”
어찌 거절할까.
나는 초왕 앞으로 향했다.
앞서 대문가에서는 상황도 어수선했고 맹주님이 우리를 대표하고 계셨기에, 기실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꼴이었다.
나는 초왕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갖췄다.
“진주언가의 용운이 초왕 전하를 뵙습니다.”
초왕은 다시 한번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갑네. 언가의 용운. 아까 봤겠지만 우리 왕자가 자네를 아주 좋아한다네.”
그 말에 초왕의 좌측에 앉아있던 꼬마 왕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겸양의 말을 꺼냈다.
“세간의 이야기가 과장된 것이 많은데, 전하께서도 마마께서도 좋게 봐주시니 소인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왕자가 하도 좋아해서 나도 자네의 행적을 좀 알아봤는데, 행동에 거침이 없는 친구 같더군. 직접 보니 반듯하기 그지없어 보이는데… 그 거침없는 성정은 악인에게만 향하는가 보지?”
그렇게 말을 한 초왕은 껄껄 웃으며 공손무결을 향해 말했다.
“맹주는 이 친구를 후계자로 보고 있는 것이오?”
“그저 눈에 띄는 후기지수가 있어 초왕 전하께 알현시켜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오. 부탁은커녕 내가 먼저 서신을 하지 않으면 생전 연락도 안 하는 사람이, 소개해주고 싶은 젊은이가 생겼으니 보자고 할 정도면 후계로 보고 있는 게지.”
“그건, 얄팍한 인연에 기대 초왕 전하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민망해하시기는? 자자, 언가의 용운. 내가 주는 술 한잔 받게.”
그 말과 함께 초왕은 술잔에 술을 한잔 따라 주었고.
곁에 있던 환관이 그걸 내게 전해주었다.
그렇게 한잔 술을 마시고 나자, 초왕의 시선이 꼬마 왕자 뒤에 시립한 양진무에게 향했다.
“양 총기.”
“예. 전하.”
“자네도 내 앞으로 잠시 오게.”
“예.”
그렇게 양진무가 내 옆에 나란히 서자.
초왕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언가의 용운은 우리 공손 맹주님이 아끼시는 백도무림의 총아고, 양 총기는 우리 초왕부의 총아인데. 첫 단추가 잘못 꿰인 느낌이 드는구만.”
초왕은 나와 양진무 사이에 긴장감이 오갔던 직접적인 순간을 보지 못했음에도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하긴 북경의 암투에서 살아남아 봉작을 받은 사람인데 눈치가 평범할 리는 없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초왕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원만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술 한잔을 나눠 마시기에 앞서 골부터 메워야 할 테지. 고(孤)가 보기엔 참은 쪽은 괴룡 쪽 같은데. 양 총기. 아까는 왜 그랬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듣고 싶은 말은 송구하다는 말이 아니라 왜 그랬는가야. 자네답지 않게 왜 그런 행동을 하였나, 이래서야 왕자를 믿고 맡기겠는가?”
“왕자님이 너무 괴룡에 심취해 계시는데, 괴룡협객록이란 서책에 적힌 이야기란 것이 죄다 납득이 안 가는 이야기들투성이라…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제 약관을 막 넘은 나이에 그런 지모와 용기, 무위를 갖춘 자는 백만 금군 중에서도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기꾼 같다는 거였다.
양진무의 말에 화해를 주선하려던 초왕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하긴, 속마음을 저렇게까지 다 털어놓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우직한 게 아니라 외골수인데.’
이런 녀석은 똥인지 된장인지를 찍어 먹어봐야 아는 부류였다.
나는 초왕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왕자님께서 흠모해 주실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무인인지라 양 총기의 말에 호승심이 조금 동하긴 합니다. 마침 적적하시지 않습니까? 허락해주신다면 양 총기와 한번 어울려 보고 싶습니다.”
굳이 그게 소원이라면, 찍어 먹게 해주지.
* * *
뜻밖의 이야기에 초왕도 맹주님도 당황했으나.
내가 화난 기색 없이 양진무와 한번 겨뤄보고 싶다고 주장하자, 두 분 모두 고개를 끄덕이셨다.
장원 내에 연무장이 있었기에, 그저 자리만 옮기면 되는 터라 준비는 눈 깜짝할 새 끝났고.
쿵.
연무장에서 마주 선 양진무가 창대로 바닥을 찍으며 말했다.
“여기서 꼴사나운 모습이 되더라도 원망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어차피 그 소식지라는 것을 만든 사람이 너라면서?”
“그게 분업을 하는 거라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고, 딴소리는 그쪽이나 하지 마.”
스르렁-
나는 말과 함께 회한을 뽑았다.
그러자 양진무는 휘리릭 창을 꼬나 쥐더니 땅을 박차고 들어왔다.
쌔액! 쐑! 쐑! 쐑! 쐑!
그와 동시에 찔러져 들어오는 창날은 놈의 팔이 여섯 개는 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빨랐다.
- 양가창법! 일전에 향란관 놈 중에도 한 놈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극성에 가까운 것은 이놈 쪽이구나.
‘제자도 느끼고 있습니다!’
챙! 챙! 채채챙!
양가창법을 제대로 익힌 창수는 창대를 쥔 손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변화무쌍한 공격을 펼쳐내는데.
묘리를 제대로 익힌 자가 가문의 심법을 바탕으로 창초를 펼쳐내면, 배꽃이 흩날리는 풍경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 같다 하여, 달리 부르는 말이 이화창(梨花槍)이었다.
쌔액! 쐑! 쐑! 쐑! 쐑!
한데, 지금 내가 받는 느낌이 딱 그랬다.
경지가 둘 다 초절정에 이르러 있는지, 양자 간의 반응속도가 큰 차이가 없는데.
챙! 채채챙!
채앵!!
애초에 회한보다 사정거리가 긴 창대를 자유자재로 이용해 공격의 깊이를 바꿔가며 찔러 들어오고 또 거리를 벌리니.
‘덤벼들어 올 때는 까다롭고, 물러날 때는 진짜 속도보다 몇 배는 잽싸게 느껴지네?’
하지만 해볼 만했다.
내겐 녀석의 이점을 단번에 압도할 비술이 있었으니까.
나는 곧바로 파천의 내력을 혈륜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