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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267화 (267/444)

제267화. 귀인 (4)

쐐액-

내가 히죽 웃는 순간에도 양진무의 창은 찔러져 들어왔다.

‘언제나 공격의 시작은 저거구만.’

가슴을 겨누는 듯한 중단세에서 시작되는 찌르기.

시작은 가슴을 찌를 듯이 시작하나, 창날이 정말로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는 알기 힘들다.

양진무가 창대를 어떻게 쥐고 비트느냐에 따라 창대가 이무기처럼 꿈틀거렸고.

그 끝에 달린 붉은 술이 춤을 추며 현혹하고, 그 와중에 날이 선 창날이 방향을 가리지 않고 틈을 노려오니.

창날이 아슬아슬한 거리에 들어왔을 즘에야 판단이 서는 것이다.

챙!!!

그걸 막아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마교 놈들을 대하듯 살초를 기반으로 싸울 수는 없는지라, 내 쪽에서 몰아붙일 틈을 잡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하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혈륜을 통과하여 경맥에 흐르기 시작한 파천의 내력은 육신의 모든 기능을 순간적으로 강화시켰다.

‘단박에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초왕 내외와 꼬마 왕자가 지켜보고 있는데 개 패듯이 팰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방식으로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마.’

억겁같이 느껴지는 찰나 속에.

쐑! 쐑! 쐑! 쐑!

휙! 휙! 휙! 휙!

나는 딱 반걸음씩을 내딛는 것과 몸을 슬쩍 비트는 것으로 양진무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창대를 꼬나쥔 양진무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확인한 뒤.

막아내기 급급하던 전과 달리 상대의 공격을 정확하게 쳐냈다.

‘란(攔)?’

아무리 변화무쌍한 창술이라도 그 기본은 란나찰(攔拿扎).

즉 창을 돌려 밀어내는 동작과 창대를 안쪽으로 당겨 눌러내는 동작, 마지막으로 찌르는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진무의 손동작에서 녀석의 마음이 읽히니.

쐐애애-

양진무의 창은 더는 수십 갈래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찔러져 들어오는 창날과, 한 올 한 올 휘날리는 붉은 술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걸 쳐내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는데.

채애앵!!!

잠깐 사이 자신을 완전히 초월한 내 움직임에, 양진무의 얼굴엔 경악이 들어찼다.

“어, 어떻게?”

“느려. 그래서 보여. 이번엔 끝단을 잡은 찰(扎)이네.”

채애애애앵!!

“……!”

대화는 여기까지.

양진무를 완벽히 압도한 상태에서 이 대련을 끝내려면 여유는 딱 여기까지만 부려야 했다.

“망신을 당해도 원망 안 하기로 했다 너?”

나는 씩 웃으며 파천의 검초로 양진무의 창대를 사정없이 튕겨내며 놈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챙! 채챙!!

채채채챙!!!

물론, 양진무도 어쭙잖은 창수(槍手)는 아니었다.

‘사부님의 말마따나 신창양가 출신의 향란관 동기생 녀석보다 훨씬 낫긴 하다.’

놈은 발작을 하듯 걸음을 물렸는데.

보법의 근간이 되는 하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물리는 걸음이 칼 같았고.

그러면서 이를 악다물고 회한을 향해 미친 듯이 창대를 휘저었는데, 그게 마구잡이는 아니었다.

채챙!

채채채챙!!!

밀리는 와중에도 양진무의 창초에는 군더더기 없는 란나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건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자가 부단한 노력을 해온 증거였다.

‘끽해야 서른 줄밖에 안 돼 보이는데.’

초왕이 왜 왕부의 총아라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양가창법도 왜 이화창(梨花槍)이라 부르는지 알겠고.’

하나, 화려한 꽃도 매달려있는 나무 밑동을 자르면 쓰러지는 법.

양진무가 밀려난 창으로 당겨 누르는 나(拿)의 동작을 전개했을 때.

놈의 창에 회한을 붙인 나는 창대를 긁어 올라가며 삽시간에 거리를 좁혔다.

카카카캉!

그리고 경악한 놈의 면상에 진주언가의 운등류에서 비롯된 파천의 일 권을 꽂았다.

빠악!!!!!!

그렇게 내지른 주먹은 정확하게 양진무의 인중에 있는 경혈을 가격했다.

녀석은 코피를 뿜음과 동시에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쿵!

나는 회한을 집에 돌려 넣은 뒤.

손을 털며 말했다.

“어떻게, 이제 납득이 좀 됐나?”

*     *     *

내가 손을 털고 있던 때.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사지육신이 노곤해졌을 텐데 여유로운 척하기는.

‘후. 표정 관리해야 하니까 그런 말씀은 참아주십시오. 그래도 처음 노삼 교수님을 상대로 사용해봤을 때보다는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 근래 몸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는 시간을 늘리더니만, 효과가 있긴 한 모양이구나.

초왕이 손뼉을 친 것은 이때였는데.

짝 짝 짝 짝 짝.

“놀라운 무위로다! 용운은 이리 다가오라.”

초왕이 그렇게 나오자, 꼬마 왕자도 참고 있었다는 듯이 물개 같은 박수를 보내왔다.

짝짝짝짝짝짝짝.

‘지체가 나보다 높아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귀엽긴 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긴 지 잠시.

어느새 앞에 다다른 나를 향해 초왕이 재차 입을 열었다.

“총기 양진무는 대대로 명장을 배출해온 신창양가의 직계 중 하나로, 내 어렵게 후사를 얻은 터라 폐하께 특별히 보내주십사 청한 인재인데… 말 그대로 압도를 하더군? 고(孤)가 무를 직접 닦아본 것은 아니지만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말이 과언이 아님을 보았다.”

지켜보고 있는 다른 무관들이 많았다.

양진무야 본인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고 싶다고 하길래 도와줬지만.

여기서 괜히 우쭐하여 금군의 미움을 살 이유는 없었다.

“본디 금군의 창술은 여럿이서 진을 이뤄 사용할 때 본 실력이 나오는 법이니, 기실 제가 몇 수쯤 양보받았다 할 것입니다.”

하여, 적당한 말을 던지자, 초왕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 나이에 그 정도 성취와 명성을 얻었는데 겸손하기까지?”

그는 씩 웃으며 맹주님을 향해 말했다.

“이거 공손 맹주가 오늘 큰 실수를 한 것 같소이다.”

“예? 소인이 전하를 언짢게 하였습니까?”

“그게 아니라, 이 친구가 탐이 나서 말이오. 공손 맹주와의 인연을 확 없던 걸로 해버리고, 이 친구를 초왕부로 납치해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예?”

그 말에 맹주님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는데.

초왕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어떤가? 고를 따라 초왕부로 가겠나?”

그런 초왕의 말에.

꼬마 왕자는 기도하듯 합장했다.

- 네놈은 조정에 출사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더니, 정말로 기회가 왔네… 어쩔 테냐?

‘어쩌기는요. 사부님 생각엔 제가 정말로 관부랑 어울릴 것 같습니까?’

- 하기사 마음에 안 드는 자가 있으면 묵사발을 내놓을 텐데, 그랬다간 신하들이 남아나지를 않겠지. 진지하게 생각하면 안 맞는 거 같긴 하구나?

‘?’

권력의 화신들이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는 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 겪을 만큼 겪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이 세계에 체류하게 된 이유부터가 주인공 세대의 앞날이 궁금해서였다.

‘하루하루 살다 보니. 이젠 지키고 싶은 게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꼬마 왕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초왕부든 조정이든 출사의 형태로 엮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전할지 떠올린 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말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합니다. 하나 세 가지 이유로 그 말씀을 받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유가 세 가지나 되는가? 어디 들어나 보세.”

“첫째로 소인이 마도의 무리와 악연이 많습니다. 그런 악연이 만에 하나라도 초왕부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흐음. 둘째는?”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이번에 정무학관의 모든 생도를 아우르는 회장 자리가 신설되었습니다.”

“듣기는 했네.”

“전하를 모시는 영광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소인은 장부로서 약속을 했습니다. 생도들과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지게 돕겠다. 그리 약조를 했습니다.”

“장부의 약속이라. 이것 참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구만. 그래도 마지막 이유까지 들어봐야겠지. 세 번째는?”

“제 짧은 생각으로는 백성들 곁에 남아 생생한 강호의 이야기를 전해드릴 사람이 있는 게, 전하나 왕자마마께도 낫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 내 말에 초왕은 다시 한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걸물이로다. 더욱더 데려가고 싶구나.”

“…….”

“하나, 내 욕심을 차리자고 강호의 백성들에게서 이런 젊은이를 앗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자, 술이나 한잔 받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절한 채 병졸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던 양진무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입고 있던 갑주를 벗어던지고 안에 입는 백의 차림으로 다시 나타난 녀석은, 머리를 쿵! 하고 땅에 찧으며 목청을 높였다.

“소장이 우물 안 개구리인 줄도 모르고, 무엄하게 지레짐작으로 손님들을 능멸하여 전하의 체면을 상하게 하였으니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내 머릿속엔 참 요령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쨌거나 꼬마 왕자를 걱정해서 한 행동인데, 처맞았다는 핑계로 우리가 갈 때까지 드러누워 있으면 될 텐데. 저걸 머리를 찧네.’

그런 양진무의 모습에 초왕은 나를 보며 물었다.

“저 친구가 죽여달라는데 어찌하면 좋겠나?”

“소인은 연무장에서 날린 일 권에 감정을 털었습니다. 전하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면 될듯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두 사람이 장차 서신도 주고받고 하는 벗이 되었으면 좋겠네. 나이도 동갑이고. 아무튼 내 뜻대로 하라 하였으니… 총령제기 양진무는 내가 그만하라 할 때까지 마구간 청소를 도맡으라!”

잠깐만.

저 얼굴이 나랑 동갑이라고?

역시 금군 이런 곳은 들어가는 게 아니다.

초왕부를 택하지 않는 게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     *

나와 양진무의 대련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금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왕의 허락을 받은 꼬마 왕자가 수줍은 얼굴로 나와 언동생들이 모여있는 자리로 향해왔다.

“와, 왕자마마께서 오시는데요?”

우소릉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은하연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일어나 있을까요?”

“하연이 말대로 하자. 후. 예법은 어려워.”

그에 당옥기를 필두로 나와 언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꼬마 왕자가 바쁘게 걸어오더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모두 앉으세요. 그리 서 계시면 제가 민망합니다.”

왕자의 뒤에 있던 무장 한 명이 내게 전음을 보내온 것은 이때였다.

[조금 엿보셨겠지만, 한창 뛰어놀 민가의 또래와 달리 엄한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더군요.]

[그나마 작은 낙이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이야기나 협객의 이야기들을 읽는 정도인데, 근래에는 괴룡과 동기분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계십니다. 전하와 왕비마마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니, 폐가 되지 않는다면 너무 예를 차리지 마시고 어울려주십시오.]

말을 듣고 보니 꼬마 왕자가 손에 쥔 ‘괴룡협행록’이란 책이 애처롭게 보였다.

‘황족이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구나.’

무장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언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왕자마마 말씀대로 앉자. 사실 인사는 아까 했고. 이렇게 서 있으면 되레 눈높이가 맞지 않잖아.”

그리고 나부터 자리에 앉자, 꼬마 왕자가 화색을 하고 방긋 웃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왕자마마. 한데 아까 소인에게 수결을 해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여기다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펼친 책장에는 내가 원철스님을 꺾은 날, 예해수가 그려 넣은 삽화가 있었다.

“큼.”

마음 같아선 찢고 싶었지만 꼬마왕자가 보물같이 쥐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언용운 석 자를 써넣으며 왕자를 향해 말했다.

“소인이 초왕부를 따라가지 않기로 해서 섭섭하시지는 않으신지요?”

“섭섭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 섭섭합니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괴룡의 세 가지 이유가 옳다고 느껴졌고, 아바마마의 말씀도 옳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도와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계시고 오늘은 무엄했지만 양 총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없잖습니까. 사마외도가 괴롭힐 때 괴룡이 없으면 안 됩니다.”

“…….”

초왕이 나더러 할 말 없게 만든다더니.

정작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었네.

내가 잠시 말문이 막힌 이때.

입을 연 건 정현이었다.

“원시천존. 왕자마마, 참으로 도기가 흐르는 말씀이십니다.”

그런 정현의 말에 꼬마 왕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알은체를 해왔다.

“정현 도장! 소림의 무승 둘을 홀로 꺾은 무당의 검룡! 괴룡의 오른팔!”

그 말에 원시천존을 찾던 정현의 얼굴이 벌게진 이때.

은하성이 입을 열었는데.

“왕자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 말씀은 섭섭합니다. 언용운의 오른팔은 뭐니 뭐니해도 용운 형님이 학관에 입학하기 전부터 보좌해온 이 은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괴룡은 왼손잡이인가 보죠?”

돌아온 물음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언동생들 모두가 꼬마 왕자의 서책에 수결을 했고.

왕자가 물어보는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시간을 가진 지 한참.

“왕자마마 이제 침수에 드실 시간이십니다.”

꼬마 왕자는 잠을 자러 가고, 연회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 갈 즈음.

초왕의 환관이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전하께서 드리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합니다. 내실로 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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