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68화 (268/444)

제268화. 귀인 (5)

“전하. 언가의 용운이 들었습니다.”

“들라 하게.”

초왕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안내해주던 환관이 몸을 빼며 문을 열어주었다.

“드시지요.”

그런 환관의 모습에 사부님께서는 물음을 던져오셨다.

- 한데, 왜 검은 거두어 가지 않는 것이냐? 그만큼 공손가 녀석을 믿는다는 것인가?

‘그 이유가 크겠지요. 젊어서 구명지은을 맺었음에도 이렇다 할 청탁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는 말, 사부님도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사부님의 물음에 답하며 나는 안으로 이동했다.

내실엔 초왕과 맹주님이 술잔을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아, 이번엔 꼼짝없이 죽겠다고 했는데. 거기서 공손 맹주가 도와주었지.”

“누구라도 응당 하였을 일 아닙니까.”

“누구라도 할 일은 아니지, 그 물살이 보통 물살이었소? 당시 나는 변복을 하고 있었고. 공손 맹주의 협심이 고(孤)를 살린 것이지.”

“뵐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시니 민망합니다.”

“그야 공손 맹주가 자주 찾지를 않으니 추억이 그것뿐이라 그런 것 아니오. 좀 자주 찾아오시오.”

“신경 쓰겠습니다.”

내가 들어와 고개를 숙이자, 나를 확인한 초왕이 근처의 환관에게 눈짓했다.

환관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내실에 있던 가구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와 내밀었는데.

그것은 귀한 진상품 중 하나인 사슴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망극합니다.”

나는 의례적인 말과 함께 주머니를 받았다.

그러자 초왕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열어보게.”

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패가 하나 들어 있었다.

상아(象牙)를 재료 삼아 가장자리에는 용(龍)을 조각하고, 복판에는 붉은 말 한 필이, 뒷면에는 초왕부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패였다.

- 마패(馬牌)가 아니냐?

‘…그렇네요?’

전생에서 마패라 하면 암행어사의 상징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상은 재상부터 말단까지 출장을 가게 된 관인(官人)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나, 나는 관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과거에 합격한 바가 없는 소인이 이런 걸 받아도 될지요?”

그에 초왕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관인들이 사용하는 마패와 착각을 한 모양이군. 그건 귀인들에게 주는 것이다.”

“귀인이요?”

“그래. 때깔부터 다르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

“고의 봉지는 남해의 소국들이 북경에 조공하러 가는 길에 반드시 거치는 곳이라, 주로 타국의 사신들이 받아 가곤 하는데… 내 특별히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내리기도 한다. 강호인들이 주고받는 은원패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지.”

전혀 안 비슷하다.

그려져 있는 말 한 마리가 대수가 아니다.

이 마패는 초왕부가 건재하다는 전제하에 천하 어디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음. 소인이 전하께 귀인이라 불릴 자격이 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생생한 강호의 이야기, 백성들의 삶을 전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

“말만 그럴싸하게 한 것인가? 고를 능멸한 것이야?”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게 말을 한 초왕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가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좋다 자부한다.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알고 주는 것이니, 자네가 그 마패를 사용하여 생기는 일은 초왕부에서 책임을 질 것이다.”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말을 덧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사족이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마패를 갈무리했다.

맹주님과 초왕은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셨는데.

마패를 갈무리한 내가 자세를 바로 하자, 초왕이 맹주님을 향해 물었다.

“공손 맹주. 지난여름에 한철길 문제로 요동에 다녀온 일이 있지 않소?”

“예. 모용세가와 담판을 지으러 다녀왔습니다.”

“건진 것은 있고?”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모용세가에는 경고를 하였고, 근처의 세가들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몇 개 취하고 온 것이 다입니다.”

그렇게 나온 모용세가 이야기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모용세가.

놈들은 강호 곳곳에서 일어난 혼란 및 북해빙궁에서 일어났던 난리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원흉이었다.

“맹주가 직접 갔는데 수확물이 그뿐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 같소만?”

“무림맹주라는 직함이 이름만 번드르르하지, 오대세가로 분류되는 세가를 찍어누를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라….”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잖소.”

“…….”

“말씀을 아끼시니 내가 입을 열어야겠군. 연왕(燕王). 내 동생 되는 녀석이 은밀히 모용세가의 뒷배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잖소?”

“그렇습니다.”

“연왕은 내게 살수를 보냈던 전력도 있는 녀석이지, 요동의 관무 관계는 그간 지켜지던 불문율의 선을 완전히 넘었고…. 모용세가와 연왕부가 천하에 끼치는 영향을 더 두고 봐서는 안 된다는 게 내 결론이오. 하여 제안을 하나 할까 하오.”

여기까지 들은 맹주님은 나를 응시하며 연왕을 향해 말했다.

“전하.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용운이가 없는 자리에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계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오? 공손 맹주가 하던 칭찬이 허풍이 아니라면 머리 돌아가는 것도 비상하고, 군략에도 능하다면서?”

“그야 그렇습니다만….”

“나는 괜찮소. 젊은 인재의 의견도 들을 수 있다면 듣고 싶기도 하고, 언가의 용운. 부담스럽나? 그렇다면 나가도 좋다.”

그에 초왕의 물음에 나를 향했다.

나는 곧바로 답했다.

“아닙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소인도 이 자리에 있고 싶습니다.”

그러자, 맹주님의 시선이 다시금 초왕을 향했다.

“…경청하겠습니다.”

“고가 직접 움직이면 연왕 쪽에서 먼저 움직일 터라 먼저 나설 수가 없소. 하여 맹주가 조금 도와주면 좋겠소.”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곧 있으면 모용세가의 태가주의 팔순연이 있다고 알고 있소.”

“맞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해서 모용세가 측의 증좌들을 확보해 줬으면 하오. 그 일을 도와주면 내가 연왕을 맡아주지. 요동에서 관무 불가침의 선을 다시금 그어 봅시다.”

*     *     *

제법 길었던 이야기가 끝나고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은하성이 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초왕 전하께서 따로 불러서 뭐라 하시던가요? 뭐, 좋은 거라도 내리셨습니까?”

“궁금하냐? 왕명을 궁금해하다니, 알면 다칠 수도 있는데 알려줘?”

은하성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고.

곁에 있던 우소릉은 아예 눈과 귀를 막으며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안 보고 안 물었어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무리 중 은하연이 보이지 않았다.

“은소저는?”

내 물음에 당옥기가 답했다.

“하연이는 왕비마마 쪽에 불려갔어.”

“왜?”

“나야 모르지. 같이 가자는데 예법도 어렵고 해서 안 갔어.”

“잘했다.”

“캭! 거기서 잘했다가 왜 나와?!”

그러고 있는데, 정현이 내가 나온 건물의 오른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는데.

“저기 오십니다.”

은하연 쪽에서 먼저 나를 발견하고는 만면에 화색을 띠고 달려왔다.

“언 공자!”

“기분이 좋아 보이오?”

“좋죠! 왕비마마께서 광서의 초왕부까지 소식지 규모를 넓혀달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것은 다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광서 쪽은 유력 문파가 달리 없어서 깊숙한 곳은 전서구망을 어떻게 확보해야 하나 싶었는데 잘됐군.”

“그것도 그렇지만 초왕부에서 받아 본다는 것도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거, 눈동자가 은원보 모양으로 바뀔 것 같소.”

“기분 탓이세요.”

“…침이나 닦고 그런 말을 하시오.”

그렇게 하룻밤에 지나갔다.

찾아온 이튿날 아침.

융숭한 아침 대접을 받은 우리는 맹주님 뒤에 늘어섰다.

맹주님은 초왕을 향해 읍을 올리며 말했다.

“전하. 소인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더 있자고 하고 싶으나, 공사다망한 사람들을 잡고 있을 수는 없겠지.”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는 따로 연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그렇게 맹주님이 대표로 인사를 마치자, 왕비 마마가 꼬마 왕자를 향해 말했다.

“왕자. 소영웅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지금만큼은 체통이나 예법에 어긋나도 좋습니다.”

그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꼬마 왕자가 눈을 질끈 감으며 목청을 높였다.

“이다음에 커서 저도 괴룡같은 협객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소식지에 삽화 많이 넣어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두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꼬마 왕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장원을 빠져나온 우리는 단강구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렇게 오른 배에서 나는 선수에 자리를 잡았는데.

뱃머리에 서서 갈라지는 물살을 구경하고 있기를 잠시, 어느새 다가온 맹주님께서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어제는 왜 그랬나?”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초왕 전하께서 초왕부로 가자 하셨을 때 말이야. 뜸을 그렇게 들이고 말을 하니, 냉큼 따라가겠다는 줄 알았잖나?!”

“…….”

“그리고 그렇게 번드르르하게 말하면 더 데려가고 싶지, 이거 무서워서 어디 소개나 해주겠나?”

“참나. 무슨 말씀을 하시나 했네요.”

“그나저나, 후성에서 봤을 때보다 무공이 진일보했던데?”

“진일보까지는 아니고, 이래저래 고민하는 중입니다.”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는 말고. 이미, 전례를 꼽기 힘들 정도의 성취야. 저번에도 말했지만,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 해.”

“알겠습니다. 한데, 저도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뭔가?”

내가 하려는 말은 어제 내실에서 나눴던 이야기에 관한 것 이었다.

주변에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전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용세가 태가주의 팔순연 말입니다. 저희도 따라가면 어떨까요?]

[방금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만.]

[초왕 전하가 움직이면 연왕이 낌새를 차리듯, 맹주님이 직접 움직이시면 모용세가도 긴장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계속해보게.]

[맹주님의 그림자에 숨어 저희가 움직이면 일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후기지수니까요.]

맹주님께서는 턱을 만지시며 장고에 들어가셨다.

“흠.”

“총학생회장이 되기도 했으니, 나름대로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명분도 있는 셈입니다.”

“…일단 시일이 좀 남았네. 내 그 일은 면밀히 검토를 해볼 테니, 학관 생활에 열중하고 있게.”

*     *     *

외박 일정을 마치고 복귀하니.

경혜사태께서 차 한잔 나누자고 대학원생 선배님을 보내오셨다.

그에 총장실로 향하니, 경혜사태께서 사람 좋게 웃으시며 입을 여셨다.

“잘 다녀왔나요?”

“어디를 다녀왔는지 아시는 눈치십니다?”

“맹주님께서 귀띔을 해주셔서 알고는 있습니다.”

금군의 개구리 한 놈이 까불길래 코피를 터트려주긴 했지만, 그 정도면 별일 없는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예. 별일 없이 잘 다녀왔습니다.”

“그리고는요?”

“예?”

“맹주님이 언용운 생도 주변에 한번 왔다 가시면, 꼭 무슨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요?”

내 뜻을 지지해 주시는 경혜 사태셨지만, 초왕과 나눈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나, 모용세가에서 열릴 팔순연에 맞춰 요동에 가보려면 운은 떼 놓긴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경계하실 일은 아닙니다. 얼마나 안 있어 모용세가의 태가주님의 팔순연이 있다기에, 저도 참석하면 어떨까 맹주님께 물어본 정도입니다.”

내 말에, 경혜 사태께서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피식 웃으며 입을 여셨다.

“모용세가의 태가주님이 무림의 큰 어른이긴 하시죠.”

“그렇죠?”

“하지만. 언용운 생도가 그 모용세가에 축하를 하러 가겠다니, 빈니로서는 전혀 상상해본 적이 없는 그림이군요.”

“…….”

“빈니에게 털어놓지 않는 이야기가 분명 더 있지요?”

어쩐지 멸마사태로 불리시던 시절의 모습이 묻어나는 매서운 눈초리.

나는 이 상황을 어찌 무마할까 고민하다, 살짝 웃었다.

“하하.”

“웃음으로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

“어디를 다녀왔는지 아니까,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음을 압니다. 이건 맹주님과 대화를 해봐야 할 일이겠지요. 하지만!”

“…….”

“언용운 생도도 생도의 본분도 다해야 해요. 저번에 북해에 다녀온 일이 후성까지 이어지며 모든 학사 일정이 다 밀릴 뻔한 것을 언용운 생도도 알고 있겠지요?”

“그건….”

“이번엔 총학생회장이라는 감투까지 썼어요. 모든 안건을 다 처리해놓고 과제들도 모두 미리 제출해 놓도록 하세요. 그러고 나서야 빈니의 허락이 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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