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69화 (269/444)

제269화. 이런 방법이 있었군 (1)

엄포를 놓는 듯했지만, 기실 당연한 말씀이셨다.

‘모용세가가 있는 심양이 하루 이틀거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 생신연이 열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쪽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던 터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이 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지금, 남은 학사 일정들이 밀렸다간 내년도 입관시험에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까? 생도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을 것이고, 맡은 바도 완벽히 단속하겠습니다.”

그런 내 말에, 경혜사태께서는 한숨을 푹 쉬며 답하셨다.

“후. 빈니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무엇이든 의협심에서 비롯되었을 테고, 사람이 이리 똑 부러지니… 더 나무랄 재간이 없네요. 바쁠 텐데 가보도록 하세요. 장담한 대로만 된다면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옙.”

“아, 운영위원회와 총장 이름으로 나간 서류들은 총학생회실로 보내놨어요. 앞으로 언용운 생도에게 보낼 문건은 그쪽으로 다 보내겠습니다.”

“옙!”

우렁차게 대답한 나는, 담소를 나누는 사이 미지근해진 차를 후르륵 들이마시고 총장실을 나왔다.

‘어려울 것은 없다.’

수강과목들은 애초에 높은 학점을 따낼 수 있는 것 위주로 선택해두었다.

어떤 과제를 내주든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터.

사실상 교수님들께 사정을 설명하고 기말고사를 대체할 과제를 내달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었다.

‘소식지 사업을 광서까지 늘리는 일이 생기긴 했지만. 이건 뼈대가 딱 잡혀 있기도 하고, 은소저가 신이 나서 하겠지.’

다른 총학생회장의 업무는 별거 없었다.

사대기숙사의 차기 자치회장을 승인하는 일과 마방연의 자료를 각 자치회에 할당하는 일 정도만 쳐내면 됐다.

총학생회장이야 새롭게 설치하고 재학 중인 모든 생도가 투표를 해야 하니 난리가 났지만.

사대기숙사의 자치회장은 각 기숙사에서 알아서 하는 거였다.

내가 자치부회장을 맡고 있는 청죽을 제외한 다른 곳은 말 그대로 최종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방연의 자료는 지금쯤 제갈소저가 분류를 끝내 놨겠지.’

그것 역시 최종 승인만 하면 될 터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총학생회 건물로 향했다.

한데,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마방연의 연구생들이 저마다 책과 서류들을 이고 바쁘게 총학생회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또 뭔.’

내 걸음이 급해지는 순간이었다.

급히 총학생회실로 달려가보니,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 탑과 그 탑을 계속해 늘리고 있는 연구생들이 나를 맞았는데.

연구생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실장님 오셨습니다!”

그러자, 서류 탑 사이에 파묻히듯 앉아 있던 언동생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는데.

그중 당옥기가 제 죽마고우를 빠르게 고자질했다.

“언용운! 설지가 사고 쳤어!”

“…제갈 소저?”

“용운님! 오셨군요?!”

“가고 싶어졌소.”

내 표정이 심상치 않자.

언용명과 남궁윤이 급히 변명했다.

“형님 저는 말렸습니다.”

“이쪽은 말린 정도가 아니다. 언용운 네 승인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두 녀석의 말은 무시하고, 나는 제갈설지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이게 다 무슨 일이오?”

“음. 마방연에 관한 일과 총학생회실의 직제 편성에 관한 일은 제게 일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지도교수님들이랑 마방연의 자료를 자치회실에 나눠주는 이야기를 하다가, 총학생회실 소속 부서로 마방연을 붙이기로 했어요. 마방연은 어차피 용운님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 많은데, 지금 연구실 위치는 청죽관이랑은 가까워도 여기랑은 멀잖아요?”

“멀기도 하고….”

내가 권한을 주기도 했고, 효율적인 조치긴 했다.

하나 단순히 마방연을 이사시키는 것 만으론, 언동생들이 책상 위에 서류를 산처럼 쌓아놓고 붓을 놀리고 있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닌 것 같은데? 이사를 하면 빈방에 책장과 서류들을 쌓을 것이지, 붓들은 왜 잡고 있는 거요?”

“설지 얘가 글쎄 서고를 하나 더 늘리기로 했어!”

“…해명하시오.”

“겸사겸사 불에 타거나 할 때를 대비해서 서고 하나를 더 늘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당산에 보관하기로 했어요.”

“…옮겨적는 중이었군.”

“네. 무당산 서고의 경비는 무당파에서 서주기로 이야기는 끝났어요. 그걸 문서화하는 약간의 작업과 필사해서 옮기기만 하면 돼요!”

마방연의 자료들은 모두 다 보안(保安) 등급이 매겨져 있는 자료들이었다.

아무한테나 맡길 수가 없었다.

마방연의 교수님과 연구생들끼리 해야 한다.

“약간의 작업이 아닐 텐데.”

처음만 해도 자랑을 하듯 이야기하는 제갈설지였으나, 내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싶었는지.

“…당장엔 좀 힘들어도 앞으로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빨리 끝날 것 같아서 추진한 건데 잘못한 건가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 눈치를 살폈다.

“잘못한 건 아니오. 방향은 나도 동의하는데, 조만간 우리가 야유를 나갈 일이 좀 생겼소.”

“무슨 일인데요? 조만간의 야유면….”

“쉿.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기말고사를 대체할 과제를 미리 받아서 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으시오.”

“아, 알겠어요.”

그 모습을 보며 사부님께서는 혀를 차셨다.

- 쯧쯧. 사고를 치긴 했구나. 뭐, 용운이 네가 초왕을 만나 요동의 일을 알아 올 줄 알았겠냐만.

‘후. 제갈소저는 똑똑한데, 너무 똑똑한 게 문제입니다.’

일머리가 없달까?

‘취지 자체는 좋긴 한데, 이런 건 너무 극단적으로 효율을 따지면 안 되는데. 제가 권한을 주긴 했지만 두 개를 합쳐서 쓸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 그 모용가의 영감탱이가 팔순연인가 뭔가 하기 전에 완벽하게… 가능하겠느냐?

‘가능하게 해야죠.’

이미 엎질러진 물을 보고 한탄만 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 언동생들은 각자 수강과목 목록 써서 나한테 제출해.”

하나씩 하자, 하나씩.

*     *     *

언동생들에게 마방연의 자료를 필사하는 일을 맡겨놓고.

나는 교수 연구동을 돌아다니며 대체 과제들을 받으러 간 뒤, 교수님들께 대략적인 사정을 말씀드렸다.

“정 교수님. 조만간 무림의 큰 어른의 생신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모용세가의 태가주님이 팔순이시지.”

“예. 이번에 총학생회장이 신설되기도 했으니, 저를 포함해 정무학관의 생도 대표가 그 자리에 참석하면 어떨까 하는데, 과제와 기말고사들이 걸립니다.”

“괜찮은 생각이구만. 그러면 내 대체 과제를 내줌세. 내 과목은 어차피 공통과목이니 함께 가려는 생도들과 조별 과제를 해오면 되겠군?”

나와 언동생들은 함께 듣는 과목이 많았고, 사정을 들은 교수님들께서는 조별과제를 내주셨다.

일반적인 조별과제는 지옥의 다른 말이었으나 우리의 경우엔 사정이 달랐다.

언동생들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맡아 자료를 찾았으니까.

“언 공자. 하오문과 개방의 맹점(盲點). 이건 저랑 천 소협이 맡아서 할게요.”

“그러시오.”

“…아니, 난 이걸 왜 하고 앉아 잇는지를 모르겠는데.”

“천 소협!”

“장호야.”

“…합니다. 해요.”

거기다 총학생회장의 끗발도 활용할 수 있었다.

“한철길과 현철길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미친 영향력. 한철길 쪽은 내가 정리하면 되겠고, 현철길은 점창파가 그 목구멍인 운남에 있으니 매진악 선배가 도와주시면 쉽겠는데? 궁윤아.”

“말해라.”

“향란관 가서 매 회장님 좀 총학생회실로 와달라고 전해줘.”

“네가 불렀다고 하면 오시기야 하겠지만… 성적이랑 연관되는 과제인데 괜찮은 건가?”

“무림을 위한 일이니까 선배도 도와주시겠지.”

“……?”

“아무튼 모셔와 줘.”

“알았다.”

그렇게 작성된 과제와 소논문들이 엉성할 리는 없었다.

“이걸 벌써 다했다고? 대충한 거 아닌… 아니군. 자료조사가 완벽한데?”

“그럼 통과입니까?”

“통과일세. 그런데, 내후년쯤 말일세. 내 연구실에 들어올….”

“우선은 맡은 바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인데, 추후에 다시 이야기해보시면 어떠실지요?”

“그래, 좋네. 추후라면 언제….”

“추후에요.”

“…….”

나는 그렇게 과제부터 해결했다.

“이러면 과제는 끝이 난 건가?”

“예. 용운님.”

“그럼 제갈소저가 마방연 자료 필사하는 일 좀 지휘하고 있으시오. 나랑 청죽관 간부들은 내년도 자치회장 선임 건을 처리하고 오겠소.”

“알겠어요!”

그리고 청죽관의 간부들을 자치회실에 불러 모은 뒤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도 다 오셨고.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언동생들은 다들 과제한다고 수고 많았다. 그런데, 총학생회 건물의 대회의실에 쌓여 있는 마방연 자료들을 봤을 거다.”

그런 내 말에 정현이 마른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절로 원시천존을 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 그 난리를 사흘 안에 정리해야 한다.”

은하성은 농담하지 말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에이. 형님도 참. 옮겨적기만 하면 되니 엮을 때보다야 시간이 적게 들겠지만, 사흘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저희가 온종일 거기에만 매달리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래.”

“예?”

“그럴 거라고.”

“…잠은 언제 자고요?”

“죽으면 영원히 잘 수 있는데 벌써부터 너무 챙겨 먹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

그렇게 운을 뗀 나는 경룡이 형을 향해 물었다.

“제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할 때 은소저가 청죽관을 맡겠다고 했는데, 출마를 하겠다 주장한 다른 생도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답을 한 건 은하연이었다.

“아뇨. 달리 입후보한 사람은 없는데, 제가 맡겠다는 말이 자치회장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었어요.”

“그럼?”

“저는 진 회장님이 회장직을 한해 더 맡아주시고, 제가 그 아래에서 자치부회장으로 청죽의 살림 전반을 조율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다른 기숙사는 삼학년생들이 회장을 맡을 텐데, 이학년이 자치회장으로 나서면 어쨌거나 한 끗발 밀리는 거였고.

‘다 떠나서 경룡이 형이라는 인재 하나를 놀리는 꼴이지.’

은하연이 회장이 되고 경룡이 형이 그 아래 간부로 들어가는 것은 그림이 좀 이상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하연이 경룡이 형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남은 말을 뱉었다.

“근데 회장님께서 그만하고 싶다 시네요?”

그녀를 따라 나도 시선을 옮기자.

경룡이 형이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두 번이나 했잖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기숙사는 자치회장이 명예로운 자리였다.

하나, 청죽은 나와 언동생들이 입관하기 전만 하더라도 볕 뜰 날이 없었다.

하여, 다들 기피를 하는 바람에, 책임감과 애사심이 남다른 경룡이 형이 이미 두 해째 자치회장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청죽에는 사람이 없다는 그런 소리도 나올 거 같고 그래서 말이야.”

“그런 소리를 하는 놈이 나오면 제가 혀를 뽑… 아니 태도를 고쳐주면 됩니다. 예절을 주입하면 되는 것입니다.”

“…….”

“자, 둘 중에 선택하십시오. 청죽의 자치회장직을 한 번 더 맡아주실지. 아니면 내려놓고 제 직속으로 총학생회 간부로 구르실지.”

“…선택지가 그 둘밖에 없나?”

나는 우두득 목을 풀며 말했다.

“하나 더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는데 만들까요?”

“회, 회장직을 한 번 더 하는 것으로 하겠네.”

“결정 났네. 박수.”

짝짝짝짝짝.

박수갈채를 주도한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경룡이 형이랑 고완산 선배는 재학 중인 청죽관 생도들 대상으로 한 회장 선임 찬반투표 준비를 해주시면 되겠고. 예해수 선배?”

“네?”

“선배는 정말로 총학생회에서 간부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네에?”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뜨, 뜻밖의 제안이라 저도 모르게 놀랐네요?”

“이제 소식지에 담을 이야기도 사대기숙사로 범위로 늘려야 할 테니, 총회에 필히 참석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제갈 소저가 일을 벌이는 모양새를 보니까 총학생회실에서 제 비서역을 해주실 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무림맹에 파견을 가 계실 때 공보부의 비서각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해수는 기도하듯 합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혹시 아침 수련을 빼주시나요?!”

“그건 절대 안 되고.”

“…….”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예해수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소식지 관련 예산도 확 늘려드리고, 전담 화공과 판각 기술자를 수배해 드리겠습니다.”

하나, 소식지를 밀어주겠다는 말을 꺼내자 곧바로 화색을 띠더니.

“아울러 지금까지는 제가 최종 승인을 해야 발행했는데, 그것도 선배가 알아서 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조, 좋아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한 뒤,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럼 경룡이 형이랑 고완산 선배 말고는 다 총학생회실로 달려간다. 실시.”

*     *     *

언동생들을 먼저 총학생회실로 보낸 나는 경룡이 형, 그리고  고완산 선배와 자치회장 선임을 위한 찬반투표 서류 몇 개를 꾸렸다.

“두 분은 이거 들고 본관 가서 승인받아 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이만 총학생회실로 가보겠습니다.”

“그리하게.”

양식에 맞게 작성했으니, 승인은 날 것이고.

해온 게 있으니 청죽관 생도들은 찬성해줄 것이다.

급한 것은 제갈설지가 벌린 일을 마무리 하는 것이었다.

하여, 서둘러 총학생회실로 달려왔는데.

한영 교수를 필두로 우소릉과 은하성이 등짐을 짊어지려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 뭐하십니까?”

“아, 제갈설지 생도가 기일이 촉박해졌다면서 도움을 요청해서 말이야. 일을 좀 효율적으로 하자더군. 자기들이 필사를 하는 동안 무당산에 마련한 서고에 자료들을 옮겨달라던데?”

생도들과 무당산까지 뛰었던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이건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나까지 힘을 보탠다고 해도 이 자료들을 넷이서 옮겨서는 한세월이 걸릴 듯했다.

“이걸 언제 이런 식으로 다 옮깁니까?”

“그렇긴 한데, 보안을 요하는 자료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지 않나? 달리 방법이 있나?”

“있죠. 우리끼리 이럴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설명하려던 그때.

열심히 집기들을 옮기던 연구생 중에 모산파 출신 선배들과 솔거 거지들이 강시가 든 관을 옮기고 있는 게 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나는 지체없이 그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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