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71화 (271/444)

제271화. 선물 (1)

빨간모자를 꺼내 은하성에게 던져주자, 제갈설지가 물었다.

“잠시만요. 그럼 장호 님, 윤 님, 하연 님, 소릉 님, 정현 님에 용운 님 이렇게 가신다는 건가요?”

“그렇소만?”

“매난국죽 중에 윤국이 빠졌는데요? 윤국이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게 아니라, 방금 구색을 갖춘다고 하신 것 같아서요. 괜찮은 건가요?”

“맹주님께서 소진 누님을 데리고 오실 거요. 휴학 중이긴 하지만 적(籍)은 윤국에 두고 있으니 구색은 맞지.”

“음? 하지만 소진 님은 하북팽가… 아, 소진 님은 소천 님과 달리 모용세가에서 환영을 하겠군요. 팽가의 도를 내려놓고 맹주님의 제자로 들어가셨으니까요?”

하북팽가 사람으로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던 이야기였다.

다른 언동생들의 시선이 자연히 팽소천에게 향했다.

“왜 그렇게들 보냐?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용명아?”

“뭐, 묻어서 그런 게 아니라. 소진 누님이 모용세가에 가신다니까, 다들 걱정하는 거 같습니다.”

한데, 정작 본인이 천하태평이었고.

“누님은 똑똑하니까 뭐가 됐던 알아서 잘할 테고. 우리 아버지를 걱정하는 거면, 그거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천장호는 그러다 말고 팽소천을 향해 말했다.

“그렇네. 딱 소천 형만 잘하면 되겠수.”

“나는 잘하는데? 너나 잘해라 천장호. 이번에 과제 내고 받은 학점, 나보다 아래잖냐?”

“아, 아니! 그건 소천 형이랑 용운 형이 겹치는 과목이 많아서, 그 조에 낀 덕분에 날로 먹은 거 아니요!”

“응. 안 들려. 천장호는 나보다 허접이야.”

“귓구멍까지 근육이 찼나 왜 안 들려!”

할 말을 마친 팽소천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제 귀를 틀어막았다.

“아이! 힘은 세 가지고 진짜!”

천장호는 그 손을 떼어내려 달라붙었으나 역부족이었다.

“푸흡.”

“하하하.”

“큽.”

덕분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이때.

은하연이 나를 불렀다.

“언 공자.”

“말씀하시오.”

“팔순연이면 공개적으로 선물을 받는 자리가 있을 텐데요? 그럼 선물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겠지.”

“흐음. 각지에서 명숙들과 온갖 정보통들이 다 모일 테니, 어떤 선물을 하느냐에 따라 언 공자는 물론이고 정무학관의 명예도 걸려있을 텐데… 따로 생각한 바가 있으신가요?”

“있소. 한데 제작을 해야 해서…. 일단 탁가철방에 가서 대야장이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잠시 철방에 다녀오겠소.”

“아, 철방에 가실 거면 맡길 무구도 좀 챙겨가세요,”

“알겠소. 그럼 각자 맡은 바 일들 마무리 좀 하고 있으시오. 하성이랑 옥기는 나랑 같이 간다.”

“넵!”

내 말에 다른 언동생들은 우렁차게 답을 했는데, 당옥기는 홀로 답하지 않고 눈을 흘겨왔다.

“나는 왜? 연구하기 바쁘거든?!”

“건운이랑 부인이 올라왔다더라.”

“…건운이? 아, 신임 대야장님네 아기?!”

“어. 듣기로는 건강하다던데. 네가 그 녀석 태어날 때 산파 노릇을 하지 않았냐. 가서 한번 봐주면 좋을 것 같은데, 싫으면 말고 다른 의원 불러도 되긴 하니까.”

“누가 싫대?!”

하나, 건운이가 올라왔다는 소식에 후다닥 왕진 보따리를 챙겨 들었다.

그렇게 총학생회실을 나온 우리는 모용세가에 들고 갈 선물의 도안과 은하연이 맡겨 달라던 무구를 챙긴 뒤, 탁가철방으로 향했다.

“대야장님! 언 소협이 오셨습니다!”

탁가철방에 도착하자 일꾼 하나가 우리를 알아보고 목청을 높였다.

아기를 안은 대야장 내외는 바쁘게 나와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탁장명 대야장은 아기에게 말을 걸며 인사를 대신했다.

“건운아. 이분들이 너와 네 어미를 구해주신 분이다. 네 이름 중 운자는 여기 언용운 공자님께 받았다.”

“아부. 아부부.”

이어서 부인도 입을 열었다.

“인석도 생명의 은인을 알아보나 봅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데 오늘은 울지를 않습니다. 한번 안아 보시렵니까?”

그러면서 건운이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녀석을 조심스레 받아들자, 은하성과 당옥기가 내 옆에 바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와, 막간산에서 봤을 때는 말 그대로 핏덩이었는데, 이 녀석 이거 오동통해진 것 좀 보게? 엄청 컸네. 기억이 날 리가 없겠지마는, 형아가 너 태어날 때 물 엄청 끓여서 도왔다.”

“아기는 원래 눈 깜짝하면 쑥쑥 커. 건운아 까꿍. 누나야 누나.”

“…형아 누나는 무슨. 얘가 우리 나이 되면 너희 몇 살인 줄 아냐? 아저씨나 이모라고 해야지.”

그런 내 말에 당옥기가 살쾡이 같은 눈을 떠왔으나.

“죽….”

“어헛, 옥기 누님 아기 앞입니다. 고운 말 쓰셔야죠.”

은하성이 말리자 이를 물며 애써 미소를 짓고는, 건운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후. 건운아. 나중에 크면 우리한테는 누나 형아 부르고 여기 이 눈매 사나운 아저씨한테는 꼭 아저씨라고 하렴.”

“…아무튼 당옥기는 대야장님 댁에 가서 건운이랑 부인 진맥 좀 해주고. 하성이는 옥기가 시키는 거 있으면 옆에서 거들어.”

“넵!”

“안 시켜도 할거거든? 누나가 알아서 할 텐데 용운 아저씨가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 그치 건운아?”

그런 당옥기를 뒤로하고.

나는 탁장명과 함께 대야장실로 향했다.

“…대야장님은 잠깐 저 좀 봅시다.”

도착한 대야장실.

탁장명이 내게 따끈한 차를 내주는 동안 나는 가져온 도안을 펼쳤다.

“머리 장식을 새 모양으로 한 지팡이에 팔걸이를 높이 한 의자. 이건 궤장(几杖)이로군요? 연로(年老)하신 무림 명숙이 생일을 맞으셨나 봅니다?”

“맞습니다.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여기 그려 놓으신 매난국죽 문양은 상감기법(象嵌技法)으로 처리해 달라는 겁니까?”

“홈만 파주시면 됩니다. 파서 제게 잠시 보여주시고 그다음에 옻칠을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옻칠을 하고 말리는 시간을 빼면 한 시진, 아니 반 시진도 안 걸립니다. 여기 잠시 계십시오. 바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렇게 탁장명이 대야장실을 나가자.

사부님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 네 녀석이 저 도안을 홀로 그리고 있을 때만 해도, 그냥 사대기숙사의 문양을 새긴 의자와 지팡이를 모용세가의 늙은이에게 주려는 줄 알았는데…. 탁장명이 한눈에 연로한 명숙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달리 무슨 뜻이 있나 보구나?

‘예. 궤장이라고 보통은 천자나 군왕들이 휘하의 노신에게 은퇴하지 말고 계속 천하의 일에 힘써달라고 내리는 상징적인 물건입니다.’

- 엥, 저번에 초왕과의 대담도 그렇고, 네 녀석이 언동생들과 나눈 말도 그렇고. 천하에 이바지한 일이 해악밖에 없는 늙은이 인성 싶은데. 뭐가 이쁘다고 저런 선물을 한단 말이냐?

‘그건 대야장이 궤장을 만들어 오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탁장명이 도안에 그려진 모습대로 만든 의자와 지팡이를 들고 대야장실에 들어섰다.

“어떻습니까?”

“도안이랑 똑같네요.”

“하면, 이제 옻칠을 할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연 뒤.

“아뇨. 그 전에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매난국죽 문양처럼 보이게 짜놓은 진의 술식에 핏방울을 흘려 넣으며, 사부님께 조금 전에 드리지 못한 답을 전했다.

‘이 궤장이 모용세가의 보물창고가 있는 곳으로 저를 안내해 줄 겁니다.’

*     *     *

탁가철방에 궤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지, 사흘이 지났을 때.

철방의 도제가 비단보에 쌓인 궤장을 총학생회실로 가져다주었다.

“대야장님께서 옻칠이 끝났다고. 공자님께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고생했소.”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대학원생 선배님이 찾아와 운영위원회에서 나를 찾는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맹주님께 전언이 도착했나 보네.’

그에 본관으로 향해보니.

예상대로 경혜사태께서 맹주님에게서 도착한 서신을 내보이며 입을 여셨다.

“무림 맹주님께서 주신 서신입니다. 얼마 뒤에 열리는 모용세가 태가주님의 팔순연에 참석할 생각이신데. 혹여 정무학관에서 생도대표를 보내겠다 하면 여정의 길잡이를 자처하시겠다 하시네요.”

경혜 사태와는 이 일에 대해 언질을 나눴으나, 학관의 결정은 절차가 필요한 법이었다.

나는 위원들 앞에서 모용세가에 가야 하는 그럴싸한 명분을 입에 올렸다.

“정무학관은 이번에 총학생회라는 조직을 신설했습니다. 모용세가에서 열리는 팔순연엔 각계의 명숙들이 많이 모일 텐데, 초대 총학생회장을 맡게 된 저와 사대기숙사의 생도 몇이 대표로 그 자리에 참석하면 여러모로 뜻깊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 말을 들은 경혜사태께서는 주위의 교수님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남은 학사일정에 문제는 없을까요?”

그에 윤국관의 제갈민 교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언용운 생도와 함께 어울리는 생도들이 얼마 전 수강과목의 교수님들을 찾아가 대체 과제를 요청했습니다. 제출과 채점이 끝난 상태이고, 윤국관의 차기 자치회장을 승인하는 일도 처리가 됐습니다.”

이어서 다른 세 기숙사의 사감 교수님들도 나란히 입을 열었다.

“향란관도 차기 자치회장을 뽑는 일을 승인까지 마쳤습니다.”

“운매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경룡이가 맡기로 했지만… 우리도 승인이 끝났습니다.”

그렇게 사감 교수님들의 말이 끝났을 때.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울러 마방연의 자료를 무당산 서고로 나누는 일을 처리했고, 제갈설지 부회장을 도와 총학생회의 일을 살필 인력도 선정했습니다. 태가주님께 전할 선물도 준비했고요.”

“선물은 무엇을 준비했나요?”

“궤장을 준비했습니다.”

“…궤장? 으흠. 흠잡을 곳이 없군요. 외유를 허락하겠습니다.”

그러자, 경혜사태께서는 엷은 한숨과 함께 허락해주시더니.

다시금 교수님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셨다.

“그럼 인솔자로 나서실 분은….”

경혜사태께서 운을 떼자마자 창량 교수님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모용세가 태가주님의 팔순연입니다. 팽 교수님이나 노 교수님보다는 제가 적임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갈 교수님은 연구할 것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생도대표들이 예법을 지키고 안전하게 여정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서신에 적힌 내용 외에 따로 더 들은 게 있으신 모양인지, 경혜사태께서는 잠시 시선을 내 쪽으로 옮겨오셨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엷게 웃었다.

‘북해에 갈 때와는 사정이 다르지.’

우선 창량 교수님이 꽉 막히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여차하면 창량 교수님도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는 마패가 내게 있었다.

‘명분이 있으면 움직이시는 분이신데, 초왕 전하가 내어준 마패는 그야말로 가불기가 되겠지.’

*     *     *

정무학관의 학생대표단은 생도들의 배웅을 뒤로 하고, 요동으로 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뭘 그리 보느냐.”

“의외라서요.”

사실 여정을 출발하기 전만 하더라도 과연 창량 교수님이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내 지시나 제안에 잘 따라주실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하나, 창량 교수님은 내 요청에 군말없이 따라 주었고.

심지어 능숙하기까지 했다.

“뭐가? 불을 피우고 밥을 짓는 게? 소싯적에 표주를 안 해본 도사가 어디 있느냐? 내가 너보다 노숙밥을 먹어도 한참을 더 먹었을 텐데,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이냐?”

“그냥. 평소의 꼿꼿하신 걸음걸이와 빳빳한 옷매무새 그리고 궁윤이와의 추억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네요.”

“궁윤? 남궁윤 생도 말하는 건가?”

“예. 일 학기 때 무림맹 견학인원에 향란의 대표로 뽑아줬더니만 호랑이 똥 뿌리기 싫다고 아주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더니 그 일로 무림맹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 똥을 뿌리고 있던 남궁윤이 벌게진 얼굴로 고함을 지른 것은 이때였다.

“…그! 그 일은 왜 또 끄집어내냐!”

그렇게 챵량 교수님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하며 우리는 북상했고.

“창량 교수님. 인솔자를 맡아 주셨군요.”

“예. 맹주님. 살피실 곳이 많으실 텐데 정무학관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후기지수는 우리 백도무림의 미래인데 무엇보다도 신경을 써야지요.”

하남 땅에서 맹주님, 팽소진과 합류할 수 있었다.

“얘들아 안녕. 그런데 이번엔 돼지가 안 보이네?”

“모용세가로 가는 길 아닙니까. 본인이 싫다고 해서 학관에 남기로 했습니다.”

“하긴. 나도 걱정이다. 아버지도 오실 거고, 그럼 나를 이야깃거리 삼아 모용세가에서 이죽거릴 텐데.”

“그러니까 더더욱 누님이 가셔야죠. 그 이야기는 무조건 나올 텐데, 누님이 계시면 오히려 백부님께서는 당당하게 맞서실 겁니다.”

“그러려나.”

이후로는 황하의 뱃길을 이용해 하북 땅에 이르렀는데.

요동이 목적지인 상황에서 진주는 돌아가는 길이었기에, 진주언가에 들르는 것은 복귀 길에 하기로 하고.

개방에 하북삼협의 행보에 관해 의뢰하니 이미 심양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우리도 서둘러 가자.”

“예!”

그렇게 북경을 지나 산해관을 넘어.

마침내 다다르게 된 요동 땅 심양.

성문 밖까지 늘어선 손님의 행렬이 가리키는 거대한 저택이 모용세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정현. 이가장에 비견할 정도로 거대한 것 같지 않냐?”

“예. 그야말로 고래 등 같은 저택입니다.”

우리가 모용세가의 전경을 눈에 담고 있는 이때.

저편에서 마중을 나온 인물들이 우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주님과 정무학관에서 오신 손님들 되십니까요?”

한데, 마중을 나온 자의 행색이 영락없이 종복이었다.

‘하. 이 양반들이 초장부터 이렇게 나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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