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73화 (273/444)

제273화. 호가호위 (1)

내가 세 번째 눈을 활용해 궤장이 옮겨지고 있는 경로를 살피고 있은 지 잠시.

정현이 내게 전음을 해왔다.

[…언소협. 모용 가주님이 이쪽으로 오십니다.]

나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언동생들과 함께 다가온 모용상을 맞았다.

“가주님.”

“다들 앉게, 불편하게 하려고 온 게 아닐세.”

모용상은 우리를 향해 손사래를 치더니, 의례적인 말을 해왔다.

“어떻게, 음식은 입에들 맞나?”

그러자 천장호가 손가락을 빨다 말고 입을 열었다.

“쫍쫍. 맛있습니다! 특히 이 꿩고기 육회가 일품이네요! 새큼하면서 쫀쫀한 게 아주 그냥 별민데요?!”

“하하. 딱 여기 태가주 전의 손님상에만 나가고 다른 곳은 닭고기가 나가고 있는데, 그걸 알아보는구만? 많이 들게.”

그렇게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마친 모용상은 정확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 학생회장님이랑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나?”

기껏 예의 바른 후기지수의 모습을 보여놨는데, 여기서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고.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후원으로 향하는 길에 모용상은 질문을 해왔다.

“조금 전에는 눈을 감고 있던데, 연회가 한창인 와중에 명상을 했을 리는 없고. 뭘 하고 있었나?”

그 질문에 사부님께서도 입을 여셨다.

- 이 자가 지금 궤장에 새겨 놓은 술식을 발동한 것을 알아채고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재간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저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자 하는 의례적인 물음일 터였다.

나는 핑곗거리를 떠올려 입을 열었다.

“준비하신 술이 워낙 미주(美酒)라 목구멍에 털어 넣자마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는데, 때마침 들려오는 풍악의 곡조가 일품이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적당히 팔순연의 준비를 칭찬하자, 모용상의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듣는 귀가 있군! 하기야 정무학관에 입관하기 전까지만 해도 풍류 공자로 이름을 날렸었지?”

“…예.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아, 이건 칭찬일세. 사내대장부라면 응당 풍류도 즐길 줄 알아야지! 아무튼 지금 연주를 하고 있는 악공은 황상폐하 앞에서 금을 탄 적이 있는 예인(藝人)이라네. 연왕부에서 보내주셨지.”

“그렇습니까?”

“흠흠. 아까 축하를 해주러 온 환관을 봤겠지만 연왕 전하께서 우리 모용세가를 참으로 각별하게 생각하셔서 말이야.”

그렇게 모용상이 연왕과의 인연을 넌지시 자랑하는 사이 도착한 후원의 정자(亭子).

나는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저를 따로 보자고 하신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준비한 선물에 아버님이 참으로 기꺼워하셨네. 내 자식 된 도리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자 불렀네. 아울러 제안도 하나 하고 싶고.”

“말학에게 감사 인사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한데… 제안이라시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우리 모용세가와 진주언가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말이야.”

“경청하겠습니다.”

“우리 가문과 팽가는 돌이키기엔 워낙 멀리 와버렸네. 하나, 진주언가는 사정이 다르지.”

나는 잘 듣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상은 씩 웃으며 계속해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 아버지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야. 팽가와 돈독하게 지내는 거 좋지… 그러나 하북 무림의 선두 자리는 결국 하나뿐일세. 병법에는 원교근공이라는 말이 있네, 당금수석 자리를 꿰찬 자네가 그 뜻을 모르지는 않겠지?”

“먼 곳과는 손잡고 가까운 곳과 싸우라는 말입니다.”

“자네 가문에 대입해보면 그야말로 우리 모용세가와 팽가를 말하는 것 같지 않나?”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저는 쫓겨났다가 막 가문에 복귀한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차를 두고 하는 말일세, 언젠가는 자네의 시대가 오겠지.”

“아하.”

“진주언가가 오대세가로 복귀를 하려면 결국 기존의 다섯 가문 중 어느 한 곳이 빠져야 하네. 누구를 적으로 삼을게 수월할지 잘 생각해 보시게.”

그런 모용상의 말에 사부님께서는 혀를 차셨다.

- 그냥 제 놈들이 빠지면 되는 것 아니냐? 용운이 네 백부 되는 위인이 풍기는 기도로 보나 사람의 그릇으로 보나 훨씬 낫구만. 대관절 뭘 믿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 정자에 와서 처음 한 소리에 넌지시 말하지 않았습니까? 연왕부와의 인연을 믿는 거죠.’

- 그야말로 호랑이를 뒤에 둔 여우가 따로 없구나.

호가호위(狐假虎威).

나도 딱 그 생각을 했다.

하나, 지금은 좋은 꿈을 꾸게 내버려 둘 때였다.

‘치부책이 우리 손에 들어오면 연왕부에서도 손절할 테니까.’

나는 씩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가주님의 제안.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     *     *

모용상과 이야기를 마친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 번째 눈을 개안해 보았다.

‘…창고인가? 천장에 야명주를 박아 놓은 것을 보니 지하군.’

창고에는 각양각색의 비단과 금은이 가득 든 궤짝과 산호 같은 보물들이 가득했고.

그 창고의 한 편에는 장부(帳簿)들을 모아놓는 책장이 보였다.

‘연호가 적혀있는 책장이면 꽂혀있는 책은 빼박이지. 하, 근데 모용상 이 양반 하필이면 왜 그때 말을 걸어가지고.’

문제는 모용상이 찾아온 바람에 궤장이 어디를 통해 저 창고에 들어갔는지를 못 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볼 만해.’

그리로 통하는 문이 정확히 어디에 달린 지를 몰라서 그렇지, 창고의 위치는 확실히 알았다.

내겐 이쪽 방면에 특출난 언동생들이 있었다.

녀석들과 함께 창고의 위치를 토대로 추적을 하면 됐다.

떠오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나는 곧장 눈을 뜬 후, 천장호에게 전음을 보냈다.

[천장호.]

[…예?]

[지금 거지들한테 은밀히 가서 모용장의 구조도(構造圖) 좀 알아 와 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은밀히 다녀옵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만날 거지 짬밥 허투루 먹은 게 아니라는 놈이 그런 것도 못 해?]

[…시작됐네, 시작됐어. 이럴 줄 진즉에 알고는 있었지만, 좋은 시절이 이렇게 끝이 나는구만. 아이고 내 팔자야.]

천장호는 잠시 슬픈 눈을 했지만, 이내 곧 너스레를 떨며 음식을 나르고 있는 시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예!”

“내 가주님께 듣자 하니, 이쪽 상에 올라오는 음식이랑 밖에 올라오는 음식이랑 차이가 좀 있다면서요?”

“큰 차이는 없는데, 여기는 꿩고기가, 밖은 닭고기가 나가고 있습니다.”

“거듭 실례하겠소. 이거 나만 먹기 미안해서 여기 분타 거지들한테도 맛 좀 보여줘야겠는데. 거지 새끼들이 밥 처먹고 있는 곳이 어디요?”

“아, 따라오시어요.”

마지막으로 꿩고기 한 접시를 야무지게 챙긴 녀석은 요란하게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거지 짬밥 허투루 먹은 게 아니긴 하네.’

행동은 요란했으나, 그걸 통해 진짜 의도를 숨겼으니 은밀하다 할만했는데.

그렇게 천장호가 자리에서 빠져나가자.

맹주님께서 전음을 보내오셨다.

[장호가 움직이는구나? 일단 주술로 치부책이 있는 곳을 가늠해보겠다고 한 일이 잘 풀린 것이냐?]

[대략적인 위치 파악은 했습니다만, 만전을 기하려면 세부적으로 검토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면 해 질 무렵쯤이 좋을 것 같고요.]

[그래?]

[예. 장호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때쯤, 맹주님께서 저희를 객관으로 돌려보내자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시면서 시선을 잡아둬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 그리하마.]

그렇게 천장호가 태가주전을 빠져나간 지 한참.

녀석이 다시금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맹주님께서는 딱 약속한 대로 행동해 주셨다.

“태가주님, 불민한 이 사람을 뜻깊은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맹주님이 이 늙은이에게 하실 말씀이 있나 보구료.”

“예. 이 사람이 조금 서운하실 수도 있는 말씀을 올리려 합니다. 한데, 애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후기지수들은 객관에 따로 상을 봐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덕에 연회장을 뒤로하고 객관으로 돌아온 나와 언동생들은 곧바로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천장호. 모용장의 지도는?”

“여기 있습니다.”

“수고했다. 그럼 장호는 나가서 망 좀 보고.”

“옙!”

“소진 누님, 그 뒤에 붓 좀 줘 보십쇼.”

“여기.”

붓을 건네받은 나는 궤장이 있는 창고가 있는 위치를 지도 위에 찍었다.

“궤장은 지금 여기에 있고. 그걸 들고 간 녀석이 여기 태가주전에서 출발해서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것까지는 내가 확인했다.”

그러자 정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언소협의 주술은 언제봐도 참으로 신통합니다. 한데, 이곳은 연못 아닙니까? 연못에 궤장을 던졌다는 말씀은 아니실 테고….”

그 말에 답을 한 것은 팽소진 이었는데.

“그 아래 있다는 소리지. 궤장을 가지고 나가던 무사의 보폭과 돌아온 시간. 그리고 창고와의 거리를 감안하면… 여기 이렇게 세 곳이 유력해 보이는데?”

듣고 있던 은하연이 내게 붓을 넘겨받았다.

“건물에 지하실을 만들거나 안가를 배치한 적이 많아서 아는데. 세 곳 중에 여기는 절대 아니에요. 기관진식을 깔아 놨을 텐데, 이쪽 건물에는 공간이 안 나와요. 여기도 좀 애매하고.”

은하연은 팽소진이 선택한 세 전각 중 한 곳에는 가위표를 다른 한곳에는 세모를 그리더니.

남은 한 곳에는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을 마쳤다.

“저는 여기가 가장 유력해 보이네요.”

“거기 가서도 입구랑 장부를 찾아야 하니. 그러면, 나랑 소릉이랑 은소저 이렇게 들어가면 되겠군. 두 사람은 야행복으로 갈아입으시오.”

창량 교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어딜 들어가고 뭘 갈아입느냐?!”

*     *     *

언용운 치고 너무 예의가 발랐다.

창량이 봐온 언용운은 모용세가의 대문 앞에서 당한 수모를 마주했을 때 가만히 있을 녀석이 아니었다.

궤장 같은 선물을 그리 예의 바르게 전할 녀석도 아니었다.

그럴 녀석이었다면 창량이 애초에 인솔자를 자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여 애초에 이 녀석이 무슨 속셈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언용운을 관찰한 창량은.

공손무결과 언용운이 짜 맞춘 듯 한쪽이 시선을 끌고 다른 쪽은 객관으로 향할 때.

“저도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가보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객관으로 돌아왔다.

“?!”

그리고 천장호를 발견하자마자, 화산파의 상승 신법인 암향표(暗香飄)를 내리밟으며 쇄도해 그 입을 막은 뒤.

안에서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들어가면 되겠군. 두 사람은 야행복으로 갈아입으시오.”

생도들의 대화는 끝물이었으나, ‘들어간다’, ‘야행복’ 두 단어면 상황을 추론하기에 충분했다.

창량은 호통과 함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나, 언용운은 담담하게 자신을 맞았다.

“교수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나누던 이야기는 무엇이냐? 설명해라.”

그리고 차분하게 그간 모용세가가 벌인 행동이 천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초왕부를 다녀온 일까지 말해오더니.

말미에는 받아왔다는 마패를 내보였다.

“이게 그때 전하께 받은 마패입니다.”

“…….”

“전하의 말씀도 말씀이지만 왕자마마와 약속을 했습니다. 백성들이 사마외도에 신음할 때 도와주겠다고요.”

“…….”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지만, 교수님께서 저희를 걱정하시는 마음에 반대하실 것 같아 숨겼습니다. 그만두시라 하면 그만두겠습니다.”

그런 언용운에게 창량은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여태 숨기다가 들키고 나서야 실토를 한 게 괘씸하긴 했지만.

남부러울 것이 없는 녀석이 스스로 세운 뜻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기특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창량 본인이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는가 싶어 반성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설득을 당한 것이다.

“말씀드린 김에 혹시라도 저를 찾아오는 모용가의 손님이 있으면 교수님께서 둘러대 주시면 딱이겠네요.”

“……?”

“천하의 창량 교수님이 거짓을 말한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저희가 더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언용운과 두 명의 생도는 야행복을 입고 객관을 빠져나갔고.

창량은 남은 생도들과 객관에 남아있게 되었는데.

팔자에 없던 거짓말을 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객관 밖을 서성이고 있던 이때.

결코 바라지 않던 모용가의 사람이 객관을 찾아왔으니, 다름 아닌 창량의 직속 생도인 모용길이었다.

“교, 교수님?”

“…모용길 생도가 아닌가? 오랜만에 보는구나.”

“예? 어제 대문가에서 뵙지 않았습니까?”

“…하룻밤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매일매일 한 시진 한 시진을 소중히 쓰도록 하거라.”

“아하. 그런 말씀이셨군요.”

“여긴 어쩐 일이냐? 한창 바쁠 텐데.”

“아버님께서 언용운 생도와 시간을 좀 보내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그렇군. 그나저나 여기 오기 전에 대체 과제들은 잘 제출했는가?”

“예? 교수님께서 최종 승인을 해주셨지 않습니까?”

창량이라 하면 향란의 생도들은 일단 경외와 겁을 집어먹고 시작하는지라, 모용길의 태도에는 일말의 의심도 섞여 있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 창량의 서툰 거짓말은 조마조마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남궁윤이 급히 객관 문을 열고 나가 입을 열었다.

“서, 섭섭하구만! 남궁세가보다 진주언가가 더 귀한 손님이라는 건가?”

*     *     *

나는 창량 교수님에게 뒤를 맡겨 놓고 보물창고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향해 사부님께서는 한마디를 해오셨다.

- 한데, 창량이 잘 해내겠느냐?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지만, 거짓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래서 통할 겁니다. 창량이라는 도사가 쌓아온 인생이 있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조차 못 할 겁니다.’

- 그 말코 놈도 잘못 걸렸어. 단단히 잘못 걸렸어.

‘제자를 무슨 역병 취급을 하고 그러십니까.’

그렇게 사부님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내 걸음은 은밀하고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멈춰.’

우소릉과 은하연도 내 수신호에 맞춰 침착하게 뒤를 따라왔다.

‘다시 간다.’

거기에 어둠이 몸에 스며들게 만드는 암흑동화.

그리고 은하연의 통찰력이 곁들여지니.

[언 공자. 여기 이 벽돌 혼자 색깔이 많이 달아있어요.]

[밀어보시오.]

드르르륵-

‘찾았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모용세가의 보물창고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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