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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276화 (276/444)

제276화. 복귀 (2)

잠깐 사이 족히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이 된 모용상.

고민에서 오는 번민이 엄청났던 모양인지.

그는 내가 가주전에 어떻게 들어왔었는지를 잊고 문밖의 호위무사의 이름을 불렀다.

“학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 호위무사분은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제가 들어오면서 재워드렸지 않습니까?”

“…아.”

“지필묵이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그건 제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내게 마음을 읽혔다 생각했는지 흠칫 놀라는 모용상.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인 나는, 지필묵과 서진을 가져와 떨고 있는 모용상 앞에 하나하나 깔아주었다.

벅- 벅-

그리고 위협적으로 먹을 갈기 시작하니, 사부님께서 질문을 해 오셨다.

- …방금은 어떻게 알았느냐? 모용가 놈이 지필묵을 찾는다는 것 말이다.

‘뻔하죠. 손에 쥔 것을 놓기로 마음먹었으면 지필묵이 필요해지는 법이죠.’

- 대충 때려 맞췄다는 말이로구나. 근데 저놈은 본인이 네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줄 알고 저리 낯이 질린 것이고?

‘대충이라뇨. 본디 사람은 큰일을 맞닥뜨리면 처음에는 부정하고 분노도 하지만, 답이 없다 싶으면 협상하려 들고. 그것도 잘 안되면 우울해하다 수용하는 법입니다. 제자는 그런 심리를 파악하여….’

- …오냐. 네 똥 굵다.

그러고 있는 사이.

모용상은 떨리는 손으로 모용세가가 내놓을 것을 적기 시작했다.

슥- 스윽-

모용상이 가장 먼저 써넣은 내용은 모용세가가 가지고 있던 백본회 상원의 발언권을 진주언가에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 호오? 이러면 너희 진주언가가 오대세가로 복귀하는 것 아니냐?

‘오대세가라는 묶음 자체가 좀 추상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백본회의 상원에 드느냐가 그 기준 중 하나이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 한데 네 말투가 썩 반기는 느낌이 아니로구나?

‘오대세가로의 복귀야 강시종의 복원과 더불어 진주언가의 오랜 염원 중 하나였긴 합니다.’

백도무림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백본회에서 진주언가의 발언권이 세진다면 장차 다가올 위난들에 좀 더 수월하게 대처할 발판도 되어줄 것이니.

내용 자체는 두 팔 벌려 환영할 내용이었다.

- 한데?

하나, 모용상이 저 내용을 가장 먼저 쓴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한데, 우리 가주님께서 최후의 수단으로 간을 보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관무 양측의 적이 되게 생긴 상황에서 어차피 오대세가 자리는 내놓아야 할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모용세가의 덩치를 조금이라도 더 지켜내고자 내 비위를 맞추려고 저걸 가장 먼저 적은 것이겠지.

그러니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됐다.

나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한철길을 막으며 취한 폭리를 토해내겠다는 이야기부터 쓰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요. 뭐 종이에 여백은 많으니까요?”

“…….”

“다음 항목으로 쓰시면 되겠네요. 아울러 요동 방면 한철길의 관리를 무림맹에 맡기겠다는 단서(但書)도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그, 그럼 우리 모용세가는 무엇으로 먹고살라는 말인가?!”

“모용세가가 한철길만 바라보고 사는 북해빙궁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광활한 요서와 요동을 아우르는 이 땅의 패자 아니십니까?”

“그건….”

“그리고 무림맹의 관리 속에 모용세가의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맹주님과 대군사님이 현지의 형편을 나 몰라라 할 분이 아님을 아실 텐데요?”

그렇게 꿈틀하려던 모용상의 말문을 막은 나는 다시 한번 경고했다.

“가주님. 지금 제가 나섰기에 그나마 이렇게 한 말씀도 하시고 스스로 모용세가의 미래를 결정하고 계신 겁니다. 맹주님이나 동창의 태감 어른과 마주하시겠습니까?”

“…….”

“관무 양쪽을 설득할 진심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제야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던 모양인지.

모용상은 체념한 표정으로 엷은 한숨을 내 쉬더니, 다시금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슥- 스슥-

그렇게 적혀 나오는 항목들엔 장부만으로 파악하기 힘들었던 모용가의 비위(非違)와 횡포의 산물들이 있었고.

모용세가가 남모르게 하북에 깔아놓은 점포들과 무관들도 있었다.

그렇게 넓고 하얗던 백지장이 빽빽해졌을 무렵.

모용상이 울상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 내가 지금 진심이라는 사실은, 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고 있는 자네가 더 잘 알 것 아닌가?”

나는 잠시 뜸을 들여 모용상의 오해에 어울려 주었다.

“흠.”

“여기서 더 내놓으라는 것은 모용장을 헐라는 이야기인데, 그건 모용세가의 현판을 내리라는 말일세. 이렇게 기회를 주는 것을 보면 자네나 맹주님도 그걸 원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러다 그의 하소연이 끝났을 때,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일단 수결 해서 이리 주십시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     *     *

일종의 항복문서를 받아 가주전을 나온 나는 팽소진에게 물었다.

“소진 누님. 소릉이가 어디로 오라는 말 없었습니까?”

“언동생들은 우리가 쓰던 숙소로 갔다고 했고, 맹주님은 곡마단이 숙소로 사용하던 객관에 계실 거라고 했어.”

“맹주님이 계신 쪽으로 갑시다.”

그렇게 계신다는 객관으로 찾아가 보니, 맹주님과 은세평 대인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만추 곡마단이라….”

“대인도 들어보셨지요?”

“들어보았다마다요. 동춘 곡마단과 함께 천하에 이름을 널리 알린 몇 안 되는 곡마단 아닙니까? 이들이 천마신교와 긴밀한 관계였다니.”

맹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오셨다.

“용운아. 소진아.”

나는 그리로 가서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맹주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셨다.

“소릉이에게 들었겠지만, 여기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더 숨어든 자는 없는 것 같구나. 용운이 너는 해보겠다 자신한 일을 마쳤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용상에게 받아온 서류를 내밀었다.

“예. 모용 가주님께 모용세가가 백척간두에 처해있음을 잘 이해시켜드렸고, 이런 다짐을 받아왔습니다.”

“다짐?”

맹주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받은 서류를 펼쳐 드셨는데.

그러자마자 입을 쩍 벌리시더니, 곁에 있던 은 대인에게 그 서류를 넘기며 말씀하셨다.

“…은 대인. 이것 좀 살펴 봐주시오.”

“예? 아, 예.”

그 서류를 받은 은 대인은 미간을 한껏 좁히고 그 서류를 꼼꼼히 들여다보았는데.

어느 순간 감탄하며 맹주님을 향해 답하더니.

“허. 이걸 다 토해낸다면 모용세가의 시계는 백 년 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한철길이 요동에서 막히곤 하던 문제도 앞으로는 걱정을 덜어도 될 것이고요.”

나를 응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봐도 모용상 가주님의 필체와 수결이 맞는데. 자네가 적어가서 도장을 받아온 것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직접 적게 만들었나?”

이어서 맹주님도 고개를 끄덕여 오셨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위로 해결을 볼 수도 없는 상대였을 텐데? 뭘 어찌한 것이냐?”

나는 두 분의 질문을 피식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건 영업비밀입니다. 어쨌거나 받아온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가 지낼 곳이 없어 내 집에 왔던 때. 억만금을 써서라도 곁에 뒀어야 했는데. 이거 내가 찻값을 적게 써도 한참을 적게 썼군.”

“이 공손 모는 귀신에 홀린 기분입니다. 내 용운이 너를 높이 평가하기는 해왔다만, 이번에는 내가 나설 틈도 없이 네 손에서 일이 다 풀렸구나. 허허. 이렇게 되면 대군사님의 그 말씀이 맞는 건가?”

“예? 어떤 말씀 말입니까?”

“용운이 네가 나보다 낫다는 말 말이다. 그냥 무림맹주 자리도 네가 하는 게 어떠냐? 너만 좋다면 내 양보하마.”

정무학관의 회장이 되는데도 경륜 소리가 나오는 마당에, 농담 한번 살벌하게 하시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저는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웃고 비위 맞추고 이런 거 잘못합니다. 주먹이 먼저 나가거든요.”

“어제 보니 잘만 하던데? 팽 선배 때문에 잔뜩 골이 난 이 댁의 태 가주님 마음을 네가 풀어놓지 않았더냐?”

“그거야, 이런 서류를 받아 낼 때를 고대하며 꾹 참은 거고요. 맹주님께서 든든하게 계셔주시니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 거죠.”

“하하. 용운이 너는 같은 말을 해도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어.”

“사실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깔아둔 포석은 모용세가의 그림자를 파헤치려고 깔아둔 건데, 마교 놈들이 제 발로 걸려들어 줄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일의 아귀가 딱 들어맞은 감이 있네요.”

“하기야. 나도 백도무림의 명사들이 이렇게나 모여들었는데, 감히 사마외도가 어떤 수작을 부려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야기가 마인들까지 이어지자, 맹주님은 농담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

“고정관념을 이용한 것이야. 하여간에 방심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 모습에 나는 문득 궁금증이 하나 떠올라 맹주님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근데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초왕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이 일을 부탁하실 때 어투가 단호하셨던 것 같은데요?]

[초왕 전하께서는 황족의 걸음으로 발생하는 피는 적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시다, 되레 가장 바라시던 모습으로 일이 해결된 것이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군요.]

[그래. 치부책도 되레 공개하지 않는 편이 연왕부 쪽에 더 강한 억제력이 될 것이고. 흡족해하실 것이다. 상벌을 행하심에 철저하신 분이신데, 이거 네게 큰상을 내리시겠는데?]

궁금증을 해소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맹주님은 씩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일단 너는 소진이랑 동무들 있는 곳으로 돌아가 있거라.”

*     *     *

마교가 요동을 넘보려 한 정황이 분명한 상황.

맹주님은 모용상이 작성한 서류 목록 중 당장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실행에 옮겼다.

마인들이 준동했다는 이야기에, 맹주님의 조치까지 이어지자.

모용세가를 찾았던 구름 같던 손님들은 며칠 사이 썰물처럼 심양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팔순연이 반강제로 막을 내리게 된 여파가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손님 대접이 그야말로 형편없어진 것이다.

“…찬밥에 간장? 아니 말로만 찬밥 대접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찬밥을 주네?”

“이런 상황에서도 반찬 투정을 해?”

“아니 용운 형. 저는 마교 놈들도 물리쳐 줬으니 대접이 더 좋아질 줄 알았는데 당황스럽다는 이야기죠.”

그에 천장호의 얼굴이 죽상이 되었고, 남궁윤도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태 가주님이 몸져누우셨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이건 정무학관은 물론이고 우리들의 가문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런 남궁윤의 말에 우소릉이 동의를 하는 이때.

“맞아요!”

정현도 한마디를 더했다.

“며칠 전만 하도 정정하셨던 태 가주님이 몸져누우셨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사실상 축객령을 내린 것이라고 봐야 하는데… 언 소협께서 받아온 약속들이 대부분 이행될 때까지는 모용장에 계셔야 한다고 하시니. 다들 고정하십시오.”

은하연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연 것은 이때였다.

“사실 저는 모용세가가 이러는 거 이해해요. 어떻게 쌓았든 간에 일단 본인 손에 쥐어지고 나면 놓기 힘든 게 재물과 권력이죠. 모용세가는 이번 일로 오대세가라는 지위와 쌓아 놓은 재물들을 언 공자에게 다 뜯겼으니 속이 편할 리 없죠. 이 댁에서 먹은 밥중에 제일 고소한 맛이 나는 밥이겠는데요?”

그 말에 천장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을 때.

“하연 누님은 용운 형이 받아온 금원보를 보면 배가 부를 테니 그런 말이 나오겠지만. 나는 밥심으로 산단 말입니다! 이러고는 못삽니다. 따지러 가야겠습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래.”

“예?”

“따지러 가자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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