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복귀 (3)
내가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우두둑-
대접이 형편없다며 길길이 날뛰던 천장호가 얌전히 자리에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찬밥에 간장. 생각해보니 이게 또 은근 별미긴 합니다? 물에 싹 말아서 먹으면 꿀떡 넘어가는 맛이 있고, 일결개 시절 생각도 나는 그런 추억의 식단이랄까요?”
“그럼 너는 남아 있던지. 나 혼자 가면 되니까.”
녀석을 보며 내가 피식 웃자, 은하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해왔다.
“음? 천 소협 꼼짝 못 하게 하시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고 정말로 따지러 가시려고요?”
“단순히 반찬 투정을 하러 가겠다는 건 아니고.”
“제가 언 공자를 모를까요. 이런 대접의 기저에 깔린 모용세가의 태도 때문에 가시려는 거잖아요?”
나는 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하연이 아미(蛾眉)를 좁히며 우려를 표해왔다.
“흐음. 방금도 말했지만, 재물 뜯기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텐데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요?”
“그럼 불이 꺼질 정도로 세게 부채질을 해야지.”
그렇게 운을 뗀 나는 남궁윤을 보며 남은 말을 마쳤다.
“지금 서류상으론 모용세가가 쥐고 있던 것을 내놓은 형국이지만, 사실 마음만 먹으면 모용세가 쪽에서 충분히 훼방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오. 안 그러냐 남궁윤?”
그런 내 말이 비난으로 들렸던 것일까?
“…갑자기 나한테 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냐.”
남궁윤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궁윤아. 너한테 화살을 날린 게 아니라, 너희 가문이 천하제일세가 소리를 듣는 곳이니까.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잘 알지 않냐고 물은 거잖아.”
“아, 그 이야기였나. 나는 또….”
“또 뭐?”
“작은할아버지의 일을 잊지 못해서 나에 빗댄 줄 알았다.”
“거기 빗댄 건 아니지만. 그 일은 잊지 않았긴 해.”
남궁윤은 헛기침을 하며 급히 대화의 주제를 돌려놓았는데.
“…큼. 언용운의 말이 맞긴 하다. 우리 가문이 같은 조치를 당했다 치더라도 안경(安慶)의 사람들이 남궁세가를 괄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가의 힘은 재보와 장원뿐만 아니라 근거지에 뿌리내려온 역사에 있으니까.”
그 말에 우소릉과 천장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역사요?”
“후. 소천 형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나만 못 알아먹은 거 아니었구만. 궁윤 형은 하여간에 같은 말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어. 뭔 소린지 더 모르겠네.”
“…….”
팽소진과 은하연이 연이어 입을 열었다.
“내가 쉽게 말해줄게. 모용세가가 요령에서 수백 년 터줏대감 역할을 해왔잖아. 여기 사람들의 마음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용세가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말이야.”
“예를 들면 점포나 무관을 언 공자가 받아온 서류대로 무림맹에서 거둬갔다손 쳐도, 정작 그걸 운영하고 이용할 사람들이 등을 돌릴 수가 있다는 이야기죠.”
정현은 나를 보며 물었다.
“하면, 언 소협께서 어렵게 얻어오신 그 문서가 다 부질없는 것 아닙니까?”
정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사실 한철길의 운영만 모용세가가 마음대로 못 하게 하는 것만 해도 이번 외유는 성공이지. 지금 모용세가가 내놓기로 한 것은 덤 같은 거니까.”
“그건 또 그렇습니다.”
“하지만. 덤이든 뭐든 일단 내 손안에 들어온 걸 다시 내줄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모용세가의 복심을 꺾어 놔야겠어.”
“…복심이라시면? 아! 태가주님! 요령호옹 어르신을 말하는 거군요?”
“그래.”
* * *
나는 곧바로 모용세가의 태가주전을 찾아갔다.
분위기가 분위기이다 보니 나를 향한 모용세가 가솔들의 눈초리가 곱지는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내 걸음을 막아서지는 않았는데.
이 댁 둘째 아들.
“멈춰라 언용운.”
나랑은 입관 동기가 되는 모용길은 태가주전에 도착한 나를 가로막았다.
태가주전 바로 앞을 지키고 있던 녀석은 진중한 어투로 경고를 해왔다.
“돌아가라. 조부님께서는 지금 자리보전하고 계셔서 누굴 만날 상태가 아니시다.”
하나, 나로서는 코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저주에 걸린 것도 아니고. 며칠 전만 해도 기운이 펄펄하던 무공 배운 노인네가 하루아침에 어떻게 병석에 들어?’
나는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싫다면?”
모용길은 내 기세에 흠칫하면서도 자기주장을 해왔다.
“…그럼 더는 너를 손님이라 여길 수 없겠지.”
“그래?”
그 주장이 허울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내가 태가주전으로 들어서려 하자, 녀석은 허리에 찬 도갑에서 칼을 뽑으려 했다.
하나,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팟!
나는 곧바로 비영파천보를 시전해 모용길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금나수의 수법을 응용하여 오른손으로 슬쩍 삐져나온 모용길의 칼을 도갑 안으로 돌려 넣은 뒤.
딸깍-
왼손으로 녀석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용길아. 이쯤 하자. 나한테 안 된다는 거 너도 알잖아?”
“…….”
“할아버님을 소중히 여기는 네 마음은 알겠는데, 너희 할아버님을 무력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온 게 아니야. 애초에 나보다 윗줄의 고수시잖냐? 그리고 너도 학관생활 꼬이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
내 말에 마른침을 삼키는 모용길.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뒤.
태가주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르신. 무림 말학 언용운이 뵙기를 청합니다! 사실 멀쩡하시지 않습니까?!”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이내 안에서는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시게.”
* * *
돌아온 답에 내실로 들어서니.
좋은 일을 마주하든 나쁜 일을 마주하든 ‘좋다.’ 하며 웃는다고 이름난 요령호옹 모용회가 웃는 낯으로 나를 맞았다.
“허허허. 자네였구만.”
“대뜸 그리 말씀을 하시니, 말학으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누가 하루아침에 우리 모용세가를 이렇게 궁지에 몰 수 있는가, 궁금하던 차였네.”
“아하. 그러셨군요.”
“그런데 아범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입을 꾹 닫고. 공손 맹주의 솜씨라기엔 또 석연치가 않아서 맹주 뒤에 숨어서 판을 쥐락펴락하는 위인이 누구인가 고심하고 있었거든.”
“팔순연을 하는 댁에 와서 초를 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허허. 그저 무림맹주의 복심을 전하는 전서 배달꾼인 줄 알았는데. 자네였어. 이런 핏덩이에게 당했으니 아범이 내 앞에서 마저 입을 꾹 다물었던 게로구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맞네. 우리가 졌어. 아주 외통수야. 아범은 물론이고 이 늙은이도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네.”
그런 모용회를 향해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모용세가가 순순히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을 넌지시 알려오셨던데요?”
“허허허.”
“원하시는 게 뭡니까?”
“아범이 내어주기로 한 것 중에 첫 항은 지워주시게, 오대세가의 지위는 모용세가에 남겨달라는 말일세.”
모용회는 내가 협상을 해온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면요?”
내가 단호한 어조로 답을 하자, 모용회 역시 단호한 어조로 서리가 내려앉은 눈썹을 구겨왔다.
“이 늙은이를 요령 땅에서 이겨낼 자신이 있으신가?”
“그러는 어르신은 자신이 있으십니까?”
“무어라? 허허허. 내가 늙어빠졌기로 서니 내 집 앞마당에서 하룻강아지에게 물려 죽을까.”
“그러시겠죠. 요령 일대의 사람들은 태가주 어르신의 말을 무겁게 여길 테니. 어르신께서 입만 뻥긋하시면 가주님이 수결해주신 서류는 한낱 종이 쪼가리가 되겠지요. 제 공은 날아갈 것이고, 맹주님께서는 곤혹에 빠질 겁니다.”
늙은 호랑이도 호랑이인 것이다.
모용회에게는 정말로 이 일을 훼방 놓을 힘이 있었다.
“허허. 그걸 알면서 내게 자신이 있냐고 되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해볼 만했다.
“그다음은요?”
“다음?”
“어르신이 시작한 싸움이 끝끝내 모용세가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자신하십니까?”
거기까지 말한 나는 모용길이 시립해 있을 밖을 향해 잠시 시선을 옮겼다.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모용회라면 장차 다가올 미래에 나와 싸울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모용길이나 그 형님 되는 녀석이라는 말뜻을 알아챌 테지.’
당신 손주들이 내 상대가 될까?
예상대로 모용회는 내 말을 알아듣고 만면에 띄고 있던 웃음기를 거둬들였다.
“…젊은 시절 사람들이 나더러 소리장도(笑裏藏刀)라 부르곤 했는데, 기실 웃는 얼굴 뒤에 칼을 품은 사람은 따로 있었구만. 이 나이 먹고 겁박을 당할 줄이야.”
“겁박이라뇨. 말학이 어찌 무림의 큰 어르신을 겁박하겠습니까.”
“그래서, 기어이 모용세가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건가?”
“모용세가의 숨통을 끊으려면, 북직예를 끌어드리면 간단합니다. 한데 왜 굳이 이런 방법을 택했겠습니까?”
“그야 모용세가의 힘이 필요할 테니까. 천마신교 놈들이 설치고 다니는데, 한철길이 있는 요령땅을 지키고 있는 우리 가문이 필요할 수밖에.”
이 말은 맞았다.
모용세가를 뽑혀 나가면 요령은 말 그대로 마교의 잔치상이 될 터였다.
하나 여기선 아쉬울 것이 없다는 투로 나가야 했다.
“예.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용세가가 힘을 더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이겨낼 것입니다.”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반면 모용세가야 말로 저희의 힘이 필요할 텐데요. 백도무림의 도움 없이 모용세가 혼자의 힘으로 천마신교를 막을 수 있다고 보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우리에겐 연왕부가….”
“연왕부. 연왕부는 사실 계륵을 넘어 늪처럼 여겨지셨을 텐데요? 자존심을 지킬 뒷배를 얻으시려다 감당 안 되는 역심을 품은 밑 빠진 독이 생긴 형국 아니셨습니까?”
“…….”
“어르신. 오대세가도 도의 종가를 탈환하는 일도 백도무림의 천하가 굳건하고 가문이 살아남아야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이 끝났을 때.
나와 모용회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
“…….”
그렇게 태가주전에 고요함이 찾아든 지 얼마나 되었을까?
“…오대세가의 판도가 바뀌는 일은 애초부터 시간문제였던가.”
모용회는 모용길이 있을 밖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정적을 깨더니.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렵지 않은 부탁 두 가지만 들어주게. 그럼 이 늙은이도 협조하겠네.”
“일단 들어보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모용세가가 지고 있는 악명은 모두 내게 돌리는 것으로 하세. 그래야 자네가 말한 미래를 기약이라도 해볼 것 아닌가.”
“음. 알겠습니다. 다음은요?”
* * *
이야기를 끝내고 내실에서 나오자.
모용길은 까치발을 들어 안쪽을 슬쩍 살피더니 나를 향해 콧김을 뿜어왔다.
“…후.”
말은 없었지만, 표정에 생각이 드러나는 녀석이었다.
씩씩거리는 모습이 이래저래 분한 모양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문이 나 때문에 망한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못 하고 제압당해 태가주전에 나를 들였으니 분하기도 하겠지.’
나는 그런 모용길에게 다가가 왼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넌 오늘부터 언동생이다,”
“갑자기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내 말에 모용길은 미간을 와락 좁히며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목청을 높였는데.
내가 녀석의 어깨에 힘을 주자.
“끄아아악.”
“넌 오늘부터 뭐라고?”
곧바로 공손한 태도가 새어 나왔다.
“…어, 언동생이라고.”
“그래. 전후 사정은 할아버님한테 들어. 어르신 보필 잘하고 학관에서 보자?”
그렇게 태가주전에서 나오며, 나는 모용회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의형제가 많다지?’
‘의형제… 언동생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중엔 팽가의 쌍둥이가 모두 들어있다고 아는데, 우리 길이도 넣어주게.’
‘?’
‘자네가 팽가의 자제들하고만 돈독하게 지내는데. 이 정도도 못 해주면 어찌 내가 마음의 병을 털어내고 병석에서 일어나 협조를 하겠나? 어찌할 텐가?’
‘예. 뭐. 어렵지 않은 부탁이긴 하네요.’
마침 사부님도 그 순간이 떠오르셨던 것인지.
멀어지는 태가주전을 향해 혀를 차셨다.
- 쯧쯧. 모용회라는 늙은이도 언동생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있구나.
‘사부님? 꼭 못 들어올 곳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 스스로도 잘 알고 있구나.
‘?’
- ?
‘허. 궁윤이도 제갈소저도 사정사정해서 들어온 곳이거든요? 원래라면 용길이 같은 놈은 꿈도 못 꾸죠. 마침 총학생회도 생기고 해서 머슴….’
- …….
‘…이 아니고, 신입. 말이 헛나왔네. 아무튼 한 명 받아도 되겠다 싶어서 특별히 받아준 거라 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