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 복귀 (4)
태가주전을 나와 객관이 있는 소원으로 향하는 길.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사부님이 입을 여셨다.
- 음? 용길이 놈이 뛰어오는데?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녀석이었다.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왜 쫓아와? 자세한 사정은 너희 할아버지께 들으라고 했을 텐데?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두 번 말하게 하는 동생 싫어해.”
내 말에 모용길은 손사래를 쳐왔다.
“…그게 아니고.”
“아니면?”
“할아버님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셨다.”
“나만?”
“아니, 모용장에 남은 손님들한테 다 전하라 하셨다.”
녀석의 말에 사부님께서 물어오셨는데.
- 지금 모용장에 남은 손님이라고 해봐야, 네 아비의 벗들과 너희들뿐 아니냐?
‘그렇죠?’
그 말에 답을 하는 사이 모용길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너한테 이야기했으니 다른 동기들한테는 전한 것으로 쳐도 되는 거지?”
“그래. 근데 다른 동기라고 하지 말고 언동생들이라고 해야지 이제.”
“…그, 그래. 아무튼. 나는 바빠서 가볼게.”
그리고 나를 앞질러 사라졌다.
맹주님과 일을 돕고 계시는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과 다른 길로 언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객관으로 돌아왔는데.
소원의 입구에 언동생들이 모두 나와 있는 와중에 정현이 나를 반겨왔다.
“언 소협! 가신 일은 잘 풀린 모양입니다?”
“내 표정이 읽혀?”
“아. 그런 것은 아니고,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었는데, 무언가가 깨지거나 부서지는 소리 없이 돌아오셔서 말입니다.”
“…내가 무슨 파괴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리는데?”
“워, 원시천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언 소협께서 이 댁의 복심을 꺾으러 가신다고 하니, 여차하면 도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결심은 가상하네. 일은 잘 풀렸다. 해결 보고 왔어. 그리고 태가주님이 저녁을 함께하자고 초대를 하셨다.”
그런 내 말에 천장호는 반색했다.
“오! 그럼 이제 찬밥 안 먹어도 되는 겁니까?”
“은근 별미라며? 너는 객관에 남아 일결개 시절 추억하면서 남은 찬밥 마저 먹지 그러냐?”
“별미는 어쩌다 먹어야 맛이죠. 조금 전에 먹은 걸로 끝났습니다. 한 몇 년은 생각 안 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같이 가겠다고?”
“예! 꼭 가고 싶습니다!”
나는 녀석의 말에 어울려 주다가, 따라오겠다는 말이 나왔을 때.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몸 좀 풀자.”
“…예?”
“저녁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다들 몸 좀 풀자고. 방금 정현이 유사시를 이야기했는데, 나도 혹시나 해서 너희 체력 보존시킨다고 풀어줬는데 이제 해결이 다 됐네?”
“…….”
“수련. 해야겠지?”
* * *
언동생들과 한바탕 땀을 흘리고 목욕을 하니 딱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초대에 응해 가주전으로 향하는 길에서, 맹주님이 내게 질문을 해오셨는데.
“낮에 태가주님을 뵈었다던데? 이 식사 자리가 그 때문에 하게 된 것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답하자, 아버지께서 입을 여셨다.
“그 어르신이 매사 허허 웃는 것 같아도 성격이 보통이 아니신데. 별일은 없었느냐? 무슨 이야기를 했더냐?”
“팔순연을 하는 댁에 와서 초를 친 거 같아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 협조를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러시겠다던데요?”
그런 내 말에 팽무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기로 했다고?”
“예. 협조해주시기로 했습니다.”
“…그 노린재 같은 영감탱이가 그럴 위인이 아닌데?”
아버지와 석가장의 장주 석금필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했다.
중간에 생략한 이야기가 조금 있긴 했지만, 그걸 떠나서 오랜 시절 모용세가를 겪어온 하북삼협으로서는 본인이 알던 모용회가 할 행동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런 분들에게 모용회와 나눈 이야기를 일일이 이야기하기는 뭐 했는데, 이쯤하여 맹주님께서 입을 여셨다.
“팽 선배. 일단 가보시지요. 가보면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가주전으로 도착하니.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는 가운데, 모용세가의 직계 삼대가 모여앉아 있었다.
“…….”
“…….”
“…….”
그중 가주 모용상과 두 아들 모용해, 모용길 이렇게 삼부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태가주 모용회는 우리를 반겼다.
“허허. 어서들 오시오.”
그런 모용회 앞에는, 하북삼협이 모용회에게 물러나라는 뜻으로 만든 장식용 보도가 놓여 있었다.
보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광경이었는데.
그걸 부정적으로 해석한 팽무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찬밥을 먹다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데요.”
그러자 모용가의 삼부자가 팽무혁을 쏘아보았다.
일촉즉발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가주전의 분위기.
“…언 형. 먹은 것도 없는데 얹힐 것 같아요.”
“…얹히는 사람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은 취소하겠수.”
우소릉과 천장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은하연은 내 소매를 당기며 전음을 보내왔다.
[해결된 거 맞죠? 모용 소협을 머슴… 아니 신입 언동생으로 받아주는 대신 협조해주기로 하셨다면서요?]
[그랬다니까.]
답을 한 나는 팽무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백부님. 어쨌거나 초대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기왕 걸음을 하셨지 않습니까.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흥.”
그 말에 팽무혁은 거칠게 의자를 빼 앉으며 팔짱을 꼈다.
나는 모용회와 모용상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태가주님과 가주님도 이해를 해주십시오. 찬밥 대접은 솔직히 조금 심하셨지 않습니까?”
그런 내 말에.
모용회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허허. 이 늙은이가 원래 속이 좁지 않나. 젊은 자네들이 이해를 좀 해주게.”
그러자 모용상이 미간을 좁히며 언성을 높였다.
“아버님!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어달라는 것을 다 내어줬는데 내 집에서 축객령도 못 내린단 말입니까?!”
지지 않고 팽무혁도 말했다.
“거, 우리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도 아닌데,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찬밥을 내놓는가 말이야!”
모용회가 다시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아범은 그만하거라. 그리고 팽 가주. 내 나이가 팔순일세.”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축하드리러 온 것 아닙니까?”
“나이가 많다고 유세를 떨려는 게 아닐세. 공자께서 나이 일흔이면, 마음 가는 대로 하여도 어긋나는 일이 없다고 종심(從心)이라 하셨는데. 이 늙은이는 아둔하여 열 살을 더 먹고도 어긋나는 일이 많다네.”
“…크흠.”
“우리 모용세가와 자네의 가문은 견원지간으로 다퉈왔지, 하나 개도 원숭이도 십이지(十二支)가 멀쩡해야 그 속에서 싸울 수 있음을 내 이번에 병석에 누워있다 깨달았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십니까?”
“나는 팽가가 싫어.”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고 팽 후배 자네 이름 앞에 붙은 도제(刀帝) 소리가 우리 가문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바랄 것이야.”
“바라는 것이야 자유겠지요.”
“하나. 지금은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님을 내 인정하지.”
여기까지 말한 모용회는 장식용 보도를 허리에 찼다.
그건 팽무혁이 준 선물을 받겠다는 뜻이었고, 요령과 하북을 좌지우지하던 것을 멈추고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 늙은이가 주는 술을 한잔 받을 텐가?”
팽무혁은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그 제안을 물리지는 않았다.
“받지요.”
하북팽가와 모용세가가 휴전하는 순간이었다.
* * *
모용세가가 적극적으로 우리 일에 협조해주기로 한 이상.
우리가 모용장에 더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언 가주님. 저는 여기 일을 매듭 지으려면 며칠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언가장에 가 계십시오.”
“예. 맹주님. 그럼 수일 내로 뵙겠습니다.”
우리는 모용세가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은 맹주님께 맡기고, 하북땅 진주로 향했는데.
“용운아!”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께서 물기 묻은 손으로 튀어나와 맞아 주셨다.
아무래도 내가 온다는 소식에 또 주방에 들어가 계셨던 모양이었다.
“예. 어머니.”
“어디 다친 곳은 없더냐?”
“모용세가에서는 딱히 제가 몸을 쓸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근래 온 천지를 헤매고 다니고 있지 않으냐.”
“음. 북해에서의 일을 말씀하시는 거면… 아버지께서 말씀을 안 해주셨나요?”
“네 아버님이 어디 말을 조리 있게 할 줄 아는 분이시더냐? 실실 웃기나 하시지 영양가라고는….”
그에 어머니의 날이 선 눈빛이 아버지 쪽으로 향하기를 잠시.
“…크흠. 부, 부인. 함께 오신 손님이 많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손님들께 다소곳한 태도로 예를 표하셨고.
“진주언가의 안주인 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은 대인을 소개하셨다.
“이쪽은 강남상왕 은세평 대인이시오.”
“은세평입니다.”
“은 대인. 우리 용운이가 집을 나가 지내던 시절에 돌봐 주셨지요.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감사라니요. 남는 방을 하나 내어준 것일 뿐인데요, 되레 언 소협이 제 자식들 목숨을 구한 것이 여러 번입니다.”
그러는 중에 내가 나설 때가 되었다.
나는 은하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소저가 은 대인의 장녀. 은하연 소저입니다. 학관에서 저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은하연입니다.”
“반가워요. 나 역시 상계의 여식이다 보니 일찍이 은 소저의 이름을 귀에 담아 두었는데, 우리 용운이를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더 마음이 쓰였어요. 이렇게 직접 만나니 반갑네요.”
“저야말로 반갑고 또 영광입니다.”
“영광일 것까지야 있나요.”
“아닙니다. 오면서 보았는데 진주 사람들의 얼굴엔 밝음이 묻어났습니다. 또 두 분의 부부 사이엔 친애가 묻어나시며, 아드님들에게선 영웅의 풍모 묻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다 이화부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소녀는 생각합니다.”
“어머나.”
그런 은하연의 말에 어머니께선 내심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었는데.
영웅의 풍모 같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가 낯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뭔, 저런 소리를.’
심지어 은하연은 저런 소리를 온종일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기 위해, 무리 중 어머니가 처음 보는 녀석인 남궁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여기는. 남궁윤입니다. 남궁세가의 장남으로 친우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친우.”
그랬더니 이번에는 남궁윤이 입이 흐물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 * *
모용세가를 제압하는 일이 아귀가 들어맞은 덕분에 빨리 끝났고.
겨울방학에는 이래저래 바쁠 것 같아서 진주에 올 예정이 없었기에.
모용세가에서 벌게 된 시간만큼 진주언가에서 보내기로 하였는데.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해주시는 밥을 먹으며 수련을 하며 닷새를 보내니.
“부인. 또 뵙습니다.”
“숙모.”
맹주님과 팽소진이 진주언가에 당도해 언윤각을 찾아왔다.
“맹주님? 소진아? 어찌 가솔들이 기별도 하지 않았지?”
“제가 따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 한 사람 맞자고 우르르 나오실 필요 뭐 있습니까. 가주님은 뵙고 오는 길입니다.”
“…아하. 그럼 용운이와 하실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소첩이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자리를 비켜주셨고, 나는 맹주님께 궁금한 것을 물었다.
“모용세가의 일은 다 끝난 것입니까?”
“요령호옹 어른과 식사 자리를 갖고도 내심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시더구나. 내 손을 타야 하는 굵직한 것들은 다 끝났다. 나머지는 대군사부에 맡길 일들 뿐이다.”
돌아온 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팽소진이 질문을 해온 것은 이때였다.
“모용길을 받아주는 거로 일이 이렇게 풀리다니. 너 그 어르신이랑 뭔가 위험한 거래 같은 거 한 거는 아니지?”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팽가랑 인연 딱 끊고 앞으로 모용세가랑만 어울릴까 봐 그러십니까? 걱정 마세요. 누님께 받을 빚이 산더민데요.”
“아니, 나는 정말로 너 걱정해서 한 말이거든?!”
“농입니다. 농. 그냥….”
“그냥?”
“훗날 모용길이랑 그 형님 되는 사람이 전면에 나설 시대에 그 결판이 어떻게 날지 상기를 시켜드렸습니다.”
“…아?”
그에 팽소진은 입을 벌렸고, 맹주님은 껄껄 웃으셨다.
“하하하. 소진아, 이번 기회에 새겨두거라. 용운이는 네가 걱정할 사람이 아님을.”
“그러게요. 그럴 시간에 돼지 걱정이나 해야겠어요.”
나는 맹주님을 향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그 사로잡았다는 마교도는 어찌 됐습니까?”
“녀석의 입에서 무언가를 얻어낸 것은 없다. 독한 놈이야.”
“녀석의 입에서라면… 다른 방향으로 알아낸 게 있으신 겁니까?”
“곡마단. 만추 곡마단이라는 곡마단이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딱히 천마신교라는 것을 드러낸 적 없이 천하를 누비고 다녔더구나.”
“그러니까 모용세가도 스스럼없이 장원에 들였겠지요.”
“맞다. 그래서 누비고 다닌 곳들을 살짝 역추적해봤다. 맹이 있는 낙양이 아닌지라 개방의 정보력에 의존한 것이니, 교차검증도 하고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죽은 북해빙궁의 전 소궁주.”
“담경주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가 중원에 왔을 때도 공연을 한 적이 있었고. 가장 최근에는 사천을 돌아다녔던 것이 확인됐다.”
사천이라.
이놈들의 꿍꿍이가 뭔지 알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