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장씨네 첫째아들 (1)
응용이를 먼저 돌려보내고 우리도 부지런히 남하했다.
그렇게 도착한 정무학관엔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사람이 조금 적었다.
우소릉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늘은 마중 나온 사람이 적네요? 총장님도 안 계신 것 같고. 청죽관 생도도 은 형밖에 안 보이는데요?”
이어서 천장호와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총장님은 모르겠고, 청죽관 생도들은 용운 형이 복귀할 때마다 선착순을 시키시니까. 에라이 하고 안 나온 거 아니요?”
“언 공자 성격을 제일 잘 아는 기숙사가 저희 청죽인데요? 그랬다간 거꾸로 정문이나 무당산을 찍고 올 일이 생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절대 아니죠.”
우리가 정문 앞에 다다르자, 나와 계시던 행정처장님은 우리가 궁금해하던 것을 설명해주셨다.
“창량 교수님. 학생회장. 생도대표들. 모두 고생 많으셨소이다. 총장님께서는 내년도 입관 시험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무당에 가셨는데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시는 모양이오.”
생도들에 관해서는 하성이가 이야기해주었다.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셔서, 대체 과제를 제출한 저희 말고 다른 생도들은 시험과목이 한두 개씩 남았습니다. 설지 누님이 공부에 집중들 하라고 해서 오늘은 저만 나왔습니다.”
그러자 창량 교수님이 입을 여셨는데.
“그렇군. 총장님도 안 계시고, 다들 노곤할 텐데… 전체보고는 생략하도록 하자.”
그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원리, 원칙,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담마진이 돋는 창량 교수님이 보고 생략이라니.
“…….”
내가 놀라움에 입을 벌리고 있자, 교수님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여셨다.
“뭐냐 그 표정은?”
“아, 죄송합니다. 보고를 생략하시자는 교수님이 조금 낯설어서 그만.”
“…내가 그 정도 융통성도 없는 사람인 줄 아느냐?”
“…없으셨을걸요?”
나는 답을 하며 남궁윤을 가리켰다.
“보십쇼. 남궁윤 생도도 고개를 주억이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남궁윤은 자기도 모르게 끄덕이던 목을 급히 가눴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다. 융통성, 있으셨죠. 모용장에서 저희를 위해….”
그러자 창량 교수님은 크게 헛기침을 하셨다.
“…크흐흠! 그 이야기는 왜 갑자기 끄집어내느냐! 결과가 좋게 나오긴 했지만 백도의 무림인이라면 지양(止揚)해야 할 일이거늘 동네방네 떠벌릴 참이더냐?!”
그런 교수님의 말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하셨다.
- 동네방네 떠벌리고 있는 것은 본인 쪽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러게요.’
* * *
나는 생활관으로 돌아와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 뒤 한숨을 돌렸는데, 얼마 지나자 생활관 안으로 서신이 하나 들어왔다.
스윽-
재실 중이니 아무 때나 들르라는 경혜사태의 전언이었다.
나는 의복을 바로 하고 곧바로 총장실로 향했다.
“이런. 쉬는 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닙니다. 익힌 심법 덕분에 여독도 없습니다.”
“아하. 그럼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챵량 교수님께 대강 이야기는 들었어요. 진주언가의 오대세가 복귀,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소가주 자리는 거절했다죠? 학관에서 중임을 맡아 어렵겠다고요.”
“아… 교수님이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까?”
“가문에서 쫓겨난 적이 있으니, 소가주 자리가 지니는 의미가 참으로 클 텐데, 정무학관의 총학생회장 자리를 무겁게 여겨 거절하다니. 언용운 생도는 참으로 된 사람입니다.”
살짝 오해가 있으신 듯했지만, 딱히 바로잡아야 할 이유는 없을 듯했다.
“그건 그렇고. 곧 있으면 겨울방학인데 어찌 보낼지는 정하였나요?”
다행히 총장님께서 먼저 화제를 바꾸신 덕에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사천에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사천이라. 겨울방학이 길어 보여도 금방이에요. 이후에는 신입생을 받아야 한다는 것 알고 있지요? 본디 자치회장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젠 총학생회장이 신경을 써줘야 해요.”
“예. 가게 되면 해야 할 일들도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정도 여유를 두고 잡도록 하겠습니다.”
“출제 같은 것이야 우리 운영위원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언용운 생도는 일단 도우미로 참여해줄 생도들을 선별해 주기만 하면 되겠네요.”
“옙.”
“그래요. 고단할 텐데 가보도록 하세요. 쉬는데 불러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총장님.”
“말씀하세요.”
“혹시 모용길 생도가 복귀했습니까?”
“예. 이틀 전에 복귀해서 빈니에게 신고를 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총장실에서 나온 나는 향란관에 들러 모용길을 불러냈다.
“…나를 왜?”
“왜긴 왜야. 이제부터 너도 언동생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녀석과 함께 총학생회실로 향했는데.
안쪽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가지고설랑 모용세가가 찬밥을 대접이랍시고 내놓았는데! 딱 그때 용운 형이…. 흠.”
“…장호 님? 왜 거기서 말을 끊으세요?”
“목이 컬컬해서 말입니다. 거, 이야기 값으로 준비된 시원한 곡주 없습니까?”
“장호 이 사람아. 총학생회실에 술이 왜 있나. 그리고 형님이 아시면 경을 칠걸?”
“아, 용운 형이 오늘은 쉬어도 된다고 하셨어!”
천장호가 외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쉬라 그랬지 술 먹어도 좋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천장호는 들어선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웃음이 번지길 잠시.
용명이가 울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형님!”
진주언가가 오대세가로 복귀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난 용명이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 예해수를 향해 말했다.
“선배님. 그 수첩은 소식지에 쓸 내용 때문에 들고 계신 겁니까?”
“그렇지요?”
“장호 저 녀석도 이야기에 허풍을 숨 쉬듯이 집어넣는 녀석인데, 그게 선배님의 재능과 합쳐질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예?”
“아닙니다. 모용세가에 다녀온 건은 제가 서간으로 정리해서 드릴 테니 거기서 따서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하. 알겠어요.”
말을 마친 나는 은하연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쉬라고 하지 않았소?”
“오늘 쉬어봐야 내일 할 일이 두 배가 될 뿐이죠. 그래서 저희가 뭘 하면 되는데요?”
그런 우리의 모습에 사부님께서는 혀를 차 오셨다.
- 하연이 저것도 말로는 만날 도망치고 싶다 하더니 막상 일감을 손에서 못 노는 녀석이로다. 유유상종이라더니….
‘?’
- ?
사부님의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고, 나는 은하연과 제갈설지에게 말했다.
“곧 있으면 방학이잖소. 그 방학이 끝나면 신입생을 받아야 하고.”
운만 뗐을 뿐인데, 두 사람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럼 입관시험 도우미들을 선별해야겠군요? 아, 입관시험이 치러지는 기간엔 재학생이 아닌 응시생들이 기숙사를 사용해야 하니 그 부분도 처리해야겠네요.”
“일단 용운 님과 하연 님이 요령에 계시는 동안 제가 지원자를 받는다는 공고는 해두었어요. 행정처에서 지원자 명부가 오면, 성적과 평판 등을 고려해서 뽑으면 되겠죠.”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은하연과 제갈설지는 세부 사안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며 대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워낙에 일머리가 있는 두 사람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난 두 사람을 두고, 다른 녀석들에게 물었다.
“근데 당옥기가 안 보이네?”
그러자 우소릉과 정현이 연이어 입을 열었다.
“당 누님은 연구실에 계세요.”
“연구 중이시던 천독단의 간이 표본 중 몇 개가 좋은 반응이 나와서 근래 연구실에 틀어박혀 계신답니다. 방해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제갈 소저께서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급하게 회포를 풀 필요야 없었다.
‘녀석 성정에 왜 말 안 해줬냐고 투덜거릴 것 같긴 한데… 연구가 먼저지.’
겨울방학에 사천에 가는 일도 맹주님 쪽에서 연락이 왔을 때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이었다.
“잘했네.”
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있던 팽소천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근데 모용길 쟤는 여기 왜 와있는 거냐?”
아, 그러고 보니 용길이를 데려왔지 참.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모용길의 어깨를 감싸 쥐며 입을 열었다.
“언동생에 받아주기로 했어.”
“왜?”
내 말에 팽소천은 미간을 좁혔다.
“음. 백도무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심오하군.”
“천장호가 요령에 다녀온 일을 아직 다 못 풀어 놓은 모양인데. 백부님이랑 소진 누님도 아는 사실이야.”
“그렇냐?”
팽소천은 싫은 소리를 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가문 사이의 일을 두고 생도끼리 감정을 품는 건, 그의 성정상 맞지 않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모용길을 다른 언동생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오늘부터 한 식구가 될 용길이를 박수로 맞아줍시다.”
짝짝짝짝짝-
그에 한차례 박수 세례가 이어졌고.
모용길이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모용. 길이다.”
그런 녀석을 향해 은하성은 말했다.
“길 형님.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희는 일단 들어온 순으로 서열을 칩니다. 그러니까 본인 위치는 저기 응용이 보다도 아래라고 생각해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호룩!
“……?”
“아무튼 이제 모용길도 총학생회의 인력에 포함시키면 되겠소.”
모용길의 소개가 끝나고 언동생들이 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할 때쯤.
솔거거지 삼인방 중 복철이 총학생회실에 들어와 제갈설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제갈설지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말고 용운 님 드리세요.”
“옙.”
“용운 님. 응용이 편으로 접수된 원서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신 거요. 행정처에 물어보니까 주로 호북 출신 후기지수들의 것만 도착했다네요? 그 명단이에요. 마교인이 섞었을까 봐 확인해보시려고요?”
“그런 이유도 있지.”
제갈설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복철이로부터 서류를 받아들고는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맡은 일들 시작합시다.”
* * *
당장에 접수된 원서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용 자체도 이름과 사문 출신지 그리고 별호나 협명을 얻은 일들을 간략하게 적어 놓은 것이 끝이었다.
하여, 그것들을 훑어보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중에 내가 찾던 녀석이 있었다.
‘양양 남장현의 장선. 별호나 협명은 없음.’
양번광견(襄樊狂犬) 장선.
녀석은 원작의 주인공 세대가 삼학년에 이르는 시점에 정무학관에 입관하는 녀석이었다.
‘원작에 묘사된 무재만 놓고 보면 가늠이 어려울 정도의 천재였지. 잠재력을 모두 개화한 모습은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런데 인생이 박복했다.
든든한 가문이 있는 남궁윤, 은하연 같은 녀석과 달리 장선은 쥐뿔도 쥐지 못하고 태어났고.
어린 시절 역병으로 양친을 잃었다.
정현의 초년도 그와 비슷했지만, 그래도 태영자를 만나 무당에 거둬지는 복이 있었는데.
‘…녀석은 쓰레기 같은 친적집에 맡겨졌다.’
하여,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는 초부로서 무재를 썩히고 산다.
장선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친척집에서는 정무학관의 시험을 치르고 싶다는 장선의 요청을 당연히 묵살했고.
글자도 배우지 못했다.
되레 친척들 뒤치다꺼리를 해주다 흑도 바닥과 엮이기까지 한다.
덕분에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 검을 배우는 일이 늦게 되는데.
장선이 입관한 시기는 마교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시점이라, 녀석은 매번 부족한 실력을 몸으로 때우는 식으로 싸우게 된다.
‘…늘 처절했었지.’
찾을 수 있다면 더 빨리 찾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양번광견’이라는 훗날 얻는 별호를 통해 추론해보고자 했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양번은 양양과 번성이라는 넓은 땅을 합쳐 부르는 말이었고, 장씨는 장삼이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흔한 성씨였으니 말이다.
‘이름 또한 장씨네 첫째라는 뜻의 장선.’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인 것이다.
하여, 이 시점에 단서가 될 만한 거라고는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 원서를 내긴 냈었다는 것뿐이었는데.
다행히 뒤틀려진 사건들 틈에서도 그 일은 그대로 일어난 모양이었다.
‘번성이 아니라 양양 그리고 남장현. 여기까지 범위가 좁혀졌으면 무조건 찾을 수 있지.’
딱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개방의 준 제자 취급을 받는 나였다.
자세한 것은 그쪽 지부에서 얻어내면 됐다.
나는 삿갓 하나만 챙겨 쓰고 양양 땅으로 향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소.”
양양 땅에 도착해, 개방의 지부를 찾아가 장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는 일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는데.
‘흠. 숙부라는 자가 노름을 한다는 곳이 여기인가?’
장선이 입관시험을 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존재인 숙부.
그를 처리하고자 ‘성내루’라는 객잔을 발견했을 무렵.
쾅!!
콰아앙!!!
웬 노름꾼 둘을 내던지고 있는 장선 본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기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