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82화 (282/444)

제282화. 장씨네 첫째아들 (3)

장선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조목조목 반박한 말들을 듣고, 그간 얼마나 착취를 당해 왔는지를 새삼 깨달은 모양이었다.

“…….”

나는 녀석을 내버려 두고, 숙부 내외를 향해 물었다.

“두 분. 이의 있으시오?”

지위, 무력, 논리 모든 것이 내 쪽이 앞서는 상황.

장이도 그 부인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

“…….”

“없겠지. 염치가 한 톨이라도 남아있다면 있어선 안 되지.”

그렇게 한 번 더 엄포를 놓은 나는 흑양방에서 받아온 전낭을 열었다.

“이 정도면 민가에서 반년은 밥을 먹고 사는 돈이오. 숙부님 되시는 양반이 노름만 끊으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은자 열 개를 꺼내 땅에 던졌다.

“이쪽이 한참 밑지는 장사지만, 계산은 이것으로 끝내는 것으로 합시다.”

그런 내 모습에, 사부님께서는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오셨다.

- 더 뜯어내지는 못할망정 저런 자들이 뭐가 이쁘다고 은자를 열 냥이나 주느냐? 집구석을 개 박살을 내도 시원찮구만.

‘사부님. 저도 저 인간들이 이뻐서 주는 게 아닙니다.’

- 하면?

‘장선 저 착해빠진 녀석이, 더는 저 작자들에게 마음 쓰지 말라고 주는 겁니다.’

사부님께 답을 한 나는 장이 내외와 집안을 구석구석 훑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혹여라도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하시오. 내가 아는 은휘상단의 전문가가 있는데. 그 친구가 개입하면 어떻게든 이백 냥을 토해내게 될 테니.”

“…큼. 크흠.”

그러자 장이가 부인과 함께 장선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내가 던진 은자를 줍기 시작했다.

그들을 향해 비소를 날린 나는 장선에게 말했다.

“너는 짐 챙겨서 나와.”

“…어. 예!”

그렇게 장선이 헛간으로 달려간 지 잠시.

녀석은 조촐한 보따리 하나를 딸랑 들고나왔다.

“…짐이 그게 다야?”

“예. 뭐 농기구 같은 건 숙부님이 쓰셔야 하니까 옷가지랑 수저랑 챙겼습니다.”

나는 장이 내외를 향해 혀를 찬 뒤, 몸을 돌렸는데.

“가자.”

장선은 들고 있던 보따리를 땅에 내려놓고는 그자들을 향해 깍듯하게 읍을 했다.

“숙부님 숙모님. 그간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 나왔다.

나는 녀석을 향해 물었다.

“뭔 그렇게까지 인사를 하냐? 저 집이 그간 너를 얼마나 벗겨 먹었는지 못 들었어? 아니지, 못 알아들었어도 돈 달라고 하던 거랑 은자 줍는 거랑 봤잖아?”

“…그래도 가족이니까요.”

돌아온 답에, 열이 뻗치는 느낌이 들었다.

“저런 인간들이 무슨 가족….”

“……”

막상 풀이 죽어 보이는 장선의 모습을 보니.

가족이라는 주제를 놓고 내 뜻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이 내외가 호인이 아님은 확실하지만….’

장선 입장에서 나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다.

반면 장이 내외는 평생을 같이 산 사람들인 것이다.

‘가족이라, 어렵긴 하다.’

전생에는 아예 연이 없었기에 장선 같은 경험을 해볼 일이 없었고.

현생에는 너무 좋은 분들을 만났다.

그런 내가 장선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엷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효. 너 알아서 해라, 이런 벽촌이 아니라 학관에 가서 다른 녀석들이랑 어울려보고 하면 너도 눈이 뜨이겠지.”

*     *     *

신법은커녕 심법도 알지 못하는 장선이었기에 단강구로 복귀하는 데는 이틀이 소요됐는데.

“여, 여기가 정무학관이군요?!”

“그래. 저기 보이는 저게 사대기숙사다.”

“와!”

“너는 정식으로 입관한 생도가 아니니까 저기서 지낼 수는 없고. 몇 가지 일처리만 하고 거처를 잡아줄게.”

“저는 아무 곳이나 괜찮습니다! 지붕만 있으면… 아니 지붕이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산적 같은 얼굴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뿜어내는 장선과 함께 총학생회실로 향했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사람은 우소릉이었다.

“언형 오셨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쭉 살펴보니, 청죽관 출신 언동생들이 각자의 책상에 앉아있는 가운데.

중앙에 놓인 각탁에 경룡이 형과 천장호가 끼어있는 게 보였다.

나는 경룡이 형에게 물었다.

“시험 다 치셨나 봅니다?”

“나는 어제부로 끝났네. 끝나자마자 얼굴 보러왔었는데. 자네는 일을 보러 양양에 갔다고 하더구만.”

“예. 맞습니다.”

“그래, 양양에 간 일은 잘 보고 왔나?”

“일단은요.”

“하기야 누가 갔는데 어련히 잘 풀렸겠지. 흠. 그나저나 함께 오신 선생님은 무슨 일로?”

선생님이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나 했는데, 이제 보니 장선이었다.

나는 장선을 돌아보며 총학생회실에 모여있는 녀석들을 소개했다.

“이쪽부터 진경룡 청죽관 자치회장님, 총무부의 은하연 소저, 선도부의 정현, 공보부의 예해수 선배와 은하성 우소릉 그리고 운매관의 천장호. 이제 너도 소개해라.”

하나, 장선은 하라는 소개는 하지 않고 입을 틀어막았다.

소식지에서 접해온 이름들이 줄줄이 나오자, 어지간히도 설렌 모양이었는데.

그사이 은하연과 정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어, 언 공자? 무슨 사연으로 모시고 왔길래 웃어른께 그렇게까지 하대를 하세요?”

“그, 그러게 말입니다. 언 소협께서는 장유유서를 아시는 분이시라, 마교와 엮인 자가 아니라면 일단 웃어른께 예의는 깎듯이 취하시는 분이신… 헉! 설마?!”

나는 녀석들의 생각이 억측으로 번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마교랑 엮인 거 아니다.”

“아닙니까? 하면 왜?”

“내가 연장자니까 하대를 하지. 얘가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 겉늙어서 그렇지 나보다 어려.”

“네에에에?”

“예에에에?”

총학생회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나는 말을 이어서 했다.

“소릉이랑 동갑이야. 올해 열여덟, 내년이면 열아홉.”

언동생들의 입이 더 벌어지는 순간이었는데, 그중 은하성과 우소릉의 입에선 말이 새어 나왔다.

“…저보다도 동생이라고요?”

“…저랑 동갑이고요?”

“그래. 양양에서 온 장선이다. 선이 너도 입 그만 틀어막고 인사해.”

“형님, 누님들. 안녕하세요. 장선입니다.”

그에 뜻 모를 정적이 총학생회실에 내려앉았는데.

“…….”

“…….”

“…….”

나는 그 정적을 깨고 양양에서 있었던 일과 장선의 인생에 관해 추려 말했다.

“…그래서 은자 열 냥을 그들에게 줬고, 이 녀석은 나랑 같이 여기로 오게 된 거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은하성은 고개를 끄덕였고.

“원래 노름판에서도 개평을 안 주면 피곤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런 사람들은 얼마쯤 쥐여주는 게 나아요.”

천장호는 열을 냈다.

“아니 내가 다 열받네. 이보쇼 선 형!”

“…제가 동생이라고 들었는데요.”

“아, 그렇지 참. 내가 마음의 준비가 덜 됐네. 아무튼 잘 왔수. 나였으면 진작에 뛰쳐나갔어, 그딴 친척 집은.”

“…그래도 숙부님 숙모님이 안 계셨으면, 구걸을 하며 살았을지도 모르니까요.”

“구걸이 뭐가 어때서!”

예해수 선배는 무리 중에 유일하게 반색하는 사람이었다.

“이거 그림 나오네요. 모용장에서의 일은 극비사항을 다 빼고 나니까 너무 건조했는데, 정무학관을 꿈꾼 초부와 괴룡의 만남. 그림이 너무 좋은데요?! 아… 근데 삽화를 어쩌지?”

그리고 은하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그랬군요.”

그런 은하연을 향해 나는 말했다.

“은 소저는 그렇게 감상만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오면서 생각해봤는데 말이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요.”

“일단 정무학관에 입관 원서를 낸다는 것은 나름대로 바르게 살겠다는 뜻을 세운 거 아니겠소?”

“그런데요?”

“지금의 입관시험은 미래의 가능성을 평가하긴 하지만, 기실 당락에 영향을 주는 것은 현재의 실력이오. 예컨대 은소저가 작년에 무과를 쳤으면 합격을 했겠소?”

“못했겠죠.”

“근데 장선이 같이 형편마저 어려우면 영원히 그런 기회가 없지 않겠소?”

“…듣고 보니 학보(學寶)를 하나 만들자는 말씀 같네요?”

“맞소.”

이 시대엔 장학재단을 학보라 했는데, 단어가 생각이 안 나던 것을 은하연이 말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졸업하시는 사학년 선배님들 중에 아직 진로를 못 정하신 분들을 모아서 시범적으로 운영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내 물음에 언동생들은 저마다 좋다고 입을 모았다.

딱 한 사람, 은하연만 빼고.

“자, 잠깐만! 생각 자체는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런데….”

“그런데?”

“초기자금이 필요한데 그건 어디서… 아니 그거야 해결을 한다 치고. 어떤 방식으로 지원을 해주실 건데요? 무관과 제휴를 하나요, 아니면 현물을 직접 주나요? 나중에 되돌려 받을 때는 어떤 식으로 받고요?”

“내가 생각은 떠올렸으니까 그런 건 이제 은 소저가 알아서 해야지.”

“???”

나는 혼이 나간 표정을 짓는 은하연을 뒤로하고 총학생회실을 나서려 다시금 문을 열었다.

“흠흠. 그럼 나는 이만 장선이 이 녀석을 소개시킬 곳이 있어서, 가봐야겠군. 제갈 소저 오면 나 왔다고 이야기 전해주고. 아, 은 소저.”

“또 왜요!”

“장선이는 단강제일객잔에 묵게 할 생각인데, 이 녀석 글자 좀 떼게 도와줄 시간 있소?”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있겠어요?!”

하나, 이내 곧 엷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우미 하시겠다고 방학 때 학관에 남기로 한 선배님들 계세요.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역시 은 소저밖에 없소.”

“…진짜 싫네요.”

*     *     *

총학생회실을 나와 교수연구동으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장선에게 말했다.

“선아?”

“예?”

“어쩌다 보니 내가 일 시키는 모습만 보여준 거 같은데… 항상 이런 건 아니다?”

그런 내 말에 사부님께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씀을 하셨다.

- …주로. 항상. 매번. 그렇지 않으냐?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 ?

‘난세니까 죽지 말자고 강하게 키우는 거고, 열심히 사는 거죠! 좋은 거 생기면 따박따박 애들 입에 먹이는 저를 어떻게 장선이네 숙부랑 비교하실 수 있습니까?’

-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괜히 제 놈이 찔려서는?

그러고 있는데 장선이 입을 열었다.

“저는 좋던데요?”

“응? 뭐가?”

“형님이 동기분들이랑 계시는 모습이요. 학생회실에 들어서시자마자 진심으로 반기는 눈빛. 그 은하연 누님이랑 하시는 말씀은 절반밖에 못 알아들었지만… 보기에는 티격태격하셔도 서로 신뢰하시는 느낌이 들었어요.”

“…큼. 그래?”

“예. 왜 저더러 일단 학관에 가보자고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네요.”

‘사부님. 듣고 계십니까?’

- …이젠 내가 이상한 건지 네 주위에 이상한 녀석들만 모이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러는 사이 도착한 정극경 교수님의 연구실.

‘풍찬검객 정극경.’

정극경 교수님은 해남파 출신이었다.

마교를 일차로 저지하는 게 곤륜이라면, 왜구와 해적을 저지하는 곳이 바로 해남파였다.

‘실전적인데다, 적은 내력으로 강력한 검초를 실현하는 해남의 검은 장선에게 알맞다고 원작에서도 나왔지.’

나는 안을 향해 지체없이 기별을 넣었다.

“교수님 언용운입니다.”

“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정극경 교수님은 웃는 낯으로 무서운 농담을 해오셨다.

“바쁜 사람이 어쩐 일인가요? 드디어 내 대학원생이 되겠다는 결심이 들었나?”

나는 바로 말을 돌렸다.

“교수님이야말로 바빠 보이십니다?”

“내가 맡고 있는 수업이 뭔가요?”

“강호생활백서입니다.”

“수업을 제대로 하려면 생생한 천하를 직접 눈으로 보고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말고사 채점이랑 이의제기 기간만 끝나면 강호행을 나갈 생각이라서요. 한데 대학원 일로 온 게 아니라면 어쩐 일입니까?”

“여기 이 녀석을 소개시켜 드릴까 해서요.”

“음?”

나는 장선을 정극경 교수님 쪽으로 슬쩍 밀며 입을 열었다.

“마교의 끄나풀이 입관시험에 응시하지는 않았나 싶어 연고가 애매한 응시생들을 훑어보던 중에 이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그런 내 말에 교수님의 시선이 장선에게 향했다.

그사이 나는 하려던 말을 맺었다.

“양양에서 만난 친군데, 심성도 착하고, 무재가 있더군요. 그 무재가 특히나 해남파의 무학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정극경 교수님은 틈만 나면 강호행을 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장선이 뭘 하며 살아왔는지를 한눈에 알아보셨는데.

“흠. 기골은 건장한 거 같으나. 자세를 보니 따로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고, 그을린 피부와 패인 주름을 보니 농사일만 한 것 같은데. 우리 해남의 무학과 어울릴 것 같다라….”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응?”

“저는 이 친구가, 저보다 교수님의 대학원생으로 더 어울리는 인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내 말에 정극경 교수님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셨다.

교수님의 말마따나 아직 무공을 배우지도 않은 것 같은 아이를 데려와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믿기지 않겠지.

황당한 것은 장선도 마찬가지였는지, 녀석은 ‘제가요?’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 장선이 훗날 얼마나 활약하는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다.

‘장선을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우리 쪽에 든든한 힘이 될 것이다.’

잠재력이 채 개화되지 않은 상태로도 강했던 장선이다.

그런 녀석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 배운다면, 그 힘은 어떠할까.

무엇보다, 이런 인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마교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변수가 될 것이다.

‘마교 놈들만 무기를 숨기라는 법은 없지.’

내가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자, 정극경 교수님은 침묵 끝에 입을 여셨다.

“내 다른 사람의 추천이었으면 해남파를 얕잡아보는 모욕으로 느꼈겠으나…. 다른 누구도 아닌 언용운 생도가 추천하는 것이니 일단 한번 보죠. 연무장으로 갑시다.”

“예, 감사합니다.”

나는 교수님을 따라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선의 등을 떠밀었다.

떡상이 보장된 코인인데.

이건 못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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