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9화. 축제로구나 (4)
나는 옹이구멍 안에 들어 있던 쪽지를 펼쳤다.
사락-
그러자 남궁윤이 검병에 손을 가져가며 사방을 경계하면서, 내게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냐?”
“몰라.”
“모른다고?”
“암어로 쓰여있다. 그냥 읽어선 아무런 뜻도 없는 글자의 나열일뿐이야.”
나는 쪽지를 들고 고민에 들어갔다.
그런 내 모습에 사부님께서는 질문을 해오셨다.
- 모르겠다면서 뭘 그렇게 보고 있느냐.
‘…최대한 내용을 해석해보려는 중입니다. 이 자리에서 해석해낼 수 있다면, 쪽지를 옹이구멍 안에 원상복구 시켜 놓는 게 상책이니까요.’
- 그렇기야 하겠지. 네가 무얼 봤는지 놈들은 모를 테니.
‘예. 그래서 당장에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나 꼼꼼히 보는 중입니다.’
나는 쪽지를 이리저리 뒤집어보고 햇빛에 비춰도 보았다.
하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
-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예. 이 자리에서 푸는 건 불가능하겠네요. 상책은 글러 먹은 것 같고. 원상복구를 시켜 놓고 가느냐, 대군사님께 가져가느냐 둘 중 하나인데….’
상책이 물 건너간 상황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개였다.
고민을 끝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대군사님께 보이는 게 나을 것 같다. 당가타로 가자.”
나는 남궁윤과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와, 당가타가 있는 성도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복귀하는 길에 습격을 당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성도의 어귀에 닿을 무렵, 행로의 좌우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샤샥-
그에 남궁윤과 나는 잠시 긴장을 했는데.
그렇게 튀어나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사천쌍괴였다.
“…어르신들이셨군요”
“허가장에 갔다던데?”
“예. 독괴 어르신.”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집구석에 뭐하러 걸음 하느냐. 발만 아프게.”
“꿍꿍이를 알기 힘든 곳이니 가본 거죠. 한데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내가 묻자 괴의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 너희가 허가장에 갔으니, 무슨 신호가 있으면 바로 대응할 수 있는 거리에 가 있으라 하시더구나.”
“그러셨군요.”
“한데, 딱히 신호가 없었던 것도 그렇고 너희들의 행색도 그렇고. 별일이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로구나?”
“있다면 있는데, 정빈각으로 가시죠. 가주님과 대군사님이 계시는 자리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정빈각에 당도해보니,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당호태와 대군사님이 계셨다.
“그래 잘 다녀왔느냐?”
“예. 가주님. 다녀왔습니다 대군사님.”
“약속은 지켰지? 혼자 무슨 판을 벌인 것은 아닐 거라고 믿어.”
“…음. 일단은요?”
“…일단은?”
* * *
대군사님과 당호태 그리고 사천쌍괴가 모인 자리에서, 나는 허가장에서 발견한 수상한 점들에 대해 말했다.
“순서대로 말씀을 드릴게요. 일단 허가장주 허만에게서 수상한 점이 좀 보였습니다.”
“어떤 점이 수상하든?”
“우선은 독살사건을 대하는 자세가 좀 이상했습니다. 저희를 마주한 이후로 허만은 쭉 당가가 독살사건의 흉수로 지목받는 상황이 곤란하다 주장했고, 자신은 절대로 당가가 배후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습니다.”
내 말에 당호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독살이라는 검시 결과가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가 그 댁을 찾아간 일이 있는데, 나한테도 그리 말했었다. 근데 그게 왜 수상한 것이냐? 나는 그냥 미안해하는구나, 하고 말았는데 말이다.”
“가주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들리셨을 겁니다. 하지만 제삼자인 제가 보기엔 당가를 의심해보는 게 정상인 상황입니다.”
“흠.”
“가문의 제일 큰 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애초에 독하면 사천당가고, 성도는 물론이고 온 사천사람들이 당가가 배후에 있는 거 아니냐 수군거리고 있는 데다, 예언까지 돌았습니다.”
“…계속해 보거라.”
“그러면 ‘혹시?’ 하는 생각으로 의심을 해보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문을 두려워할 법한 작은 가문이면 또 모르겠으나 허가는 문벌로 이름난 가문입니다. 당문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이쯤하여 대군사님께서 입을 여셨다.
“하지만 그 의심을 너희 앞에서 할 필요는 없잖니. 어쨌거나 너희가 옥기와 동기인 걸 알 텐데?”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국에 축제를 여는 당문에 분하다거나 야속하다고 여기는 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그런 기색조차 없었단 말이지?”
“예.”
“그건 좀 이상하네. 후기지수 둘이 딸랑 갔으니, 축제 이야기를 슬쩍 떠봐야 정상이긴 한데….”
아미를 좁히는 대군사님을 응시하며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수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댁 막내아들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갔는지라, 약왕 어르신을 소개해 드리겠다는 말을 꺼내 봤는데 호의는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픈 자식을 가진 부모의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안 그러냐 궁윤… 윤아?”
“예. 말로는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더는 아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고 하긴 했습니다만. 분위기가 좀 이상했습니다.”
“흐음. 그건 정말 이상하네? 약왕 어르신과의 인연을 마다하다니… 그래서 용운이 네 결론은 뭔데?”
“이미 치료를 받아서 효험을 봤다고 생각하면 말이 좀 맞습니다.”
괴의가 입을 연 것은 이때였다.
“그 댁 막내아들은 내가 직접 보았는데. 혈맥이 막혀있는 절맥을 타고난데다가, 음기나 한기가 강한 약재를 먹으면 담마진이 돋으며 숨구멍이 좁아지는 체질까지 겹쳐있었다. 영약으로도 나을 수 없는 몸이었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비정상적인 놈들이 있지 않습니까? 혈맥을 거꾸로 돌리고 터트리고 하는 연구를 근 백 년간 해온 자들이요.”
“…천마신교?”
“예. 정확한 자초지종을 알 겨를은 없으나, 막내아들을 고쳐주는 대가로 협조하기로 했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까? 낭중마군이라고 의원 흉내를 내고 돌아다니는 놈을 하나 알고 있기도 하고요.”
여기까지 말하자, 장내에 정적이 잠시 내려앉았는데.
대군사님이 그 정적을 깨며 말씀하셨다.
“가주님 그리고 두 분 장로님? 용운이의 말이 들어맞게 들리긴 하나, 제대로 된 증좌도 없이 허가장을 들이칠 수는 없습니다.”
“…….”
“…….”
“…….”
“용운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증이 있지도 않고?”
“예. 심증에 불과합니다. 다만, 허가장 주변에서 이런 쪽지를 발견하긴 했습니다.”
나는 말과 함께 허가장 주변에서 발견한 쪽지를 내밀었다.
“성화문. 이건 천마신교의 봉인(封印)법인데. 안은 암어로 되어있구나. 이걸 어디서 찾았니?”
“저희가 허가장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응용이가 근처의 숲에서 이 쪽지가 들어있는 옹이구멍이 있는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답을 하자, 대군사님은 쪽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시기 시작했는데.
그사이 잠자코 있던 독괴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흠. 그런데 그 쪽지를 안 들고 오는 게 나았던 것 아니냐?”
“생각을 해봤는데. 가져오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왜? 장소를 알아냈으니 숨어있다가 덮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마교 놈들이 네가 가져온 것을 눈치챘을 것 아니냐?”
“그렇게 덮쳐서 잡을 수 있는 놈은 결국 끄나풀인데다가, 그놈들조차도 입을 쉬이 열지 않습니다.”
내가 말을 하자, 곁에 있던 남궁윤도 한마디를 더했다.
“용운의 말이 맞습니다. 얼마 전 요령에서 잡았던 곡마단원도 결국 입을 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는 것보단 내용을 알고 대처를 하는 게 맞다 생각했고. 희박한 확률이지만 이걸 들켰다는 것으로 마교의 계획이 한풀 꺾이면, 그 자체로 적을 막은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쯤 하여, 대군사님께서 쪽지를 내려놓으며 입을 여셨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병서들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라 했지. 잘 가져왔다. 근데 애초에 이걸 우리한테 흘리는 것 자체가 마교의 계책일 수도 있어.”
“예.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후. 자, 정리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축제는 진행합니다. 이번 축제를 잘 마쳐야 당문이 관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어요.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 쪽지는 일단 제가 해독을 해보도록 할게요. 며칠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전까지는 경계 태세를 올리고 축제 운영에 전념합시다.”
* * *
성도의 성내에서 당가가 개최한 축제가 한창인 이때.
사천의 북편의 소화(昭化)땅에 위치한 외딴 장원에선, 낭중마군 송길준이 마교의 호교법왕 중 한 명을 상대하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쾅!!!
“낭중마군! 날더러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것인가?!”
“월마(鉞魔)님. 신교의 약진을 위해 이 사천분지가 얼마나 중요한 땅인지 월마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여 기다려주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저 도강언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닿는 비옥한 평야들과 수많은 사람을 본교에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그간의 손해들을 단숨에 만회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본교의 염원을 실현하는 큰 기반이 될 것입니다.”
매사 단순명료한 것을 선호하는 도올월마였으나, 호교법왕의 위를 받고 월왕부를 이끌고 있는 그였다.
지금의 천마신교가 처한 상황과 사천 땅이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진 않았다.
“그 조금이 도대체 언제인가? 당가의 전력이 장강삼협으로 움직이도록 해보겠다던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가의 평판을 땅에 처박겠다는 계획도 저놈들이 축제인지 뭔지 하는 것을 벌이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애매해진 것이 아닌가?”
“…….”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것이야? 그러다 언용운이라는 놈이 쏙 빠져나가면? 나더러 허탕을 치라는 건가?!”
도올월마 역시 낭중마군, 아니 그 뒤에 있는 마뇌의 뜻에 공감했다.
하나, 그에게는 하나뿐인 제자였던 흑선마군 만우의 복수 또한 중요했다.
“단언컨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언용운이 그럴 녀석이 아닙니다.”
“비등비등한 싸움에 임할 때 승산이 보인다면 때로는 무모한 수도 던질 줄 알아야 해. 완벽한 때라는 것은 없음을 명심하게.”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내 인내심이 다 닳아 간다는 것 또한 명심하고.”
“…예.”
* * *
남궁윤과 허가장에 다녀온 지 이틀이 지났을 때.
대군사님께서는 내가 가져온 쪽지를 해독해 냈다며 나와 언동생 그리고 당가의 수뇌들을 불러 모았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어.”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천당가에서 축제를 열어 비전을 공개 민심이 회복중.
공작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
월왕부의 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
“허가장과 마교와의 관계를 증명할 증거가 되지는 못하겠다. 한데, 이 월왕부라는 이름이 마방연이 써올렸던 보고서에서 본 이름이더라? 학관을 습격했던 흑선마군이라는 자가 월왕부의 제자라고 하지 않았니?”
대군사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예. 흑선마군 만우. 맞습니다.”
곁에 있던 은하성이 빈손으로 허공을 베며 한마디를 더했다.
“용운 형님의 칼에 댕겅하고 목이 날아갔죠.”
나는 은하성의 너스레를 제지하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근데 월왕부의 주인 도올월마에게는 제자가 만우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만우가 죽고 새로이 제자를 들였다 하더라도 전면에 나설 실력을 갖췄을 리가 없고요.”
“…그 말은?”
“마교 내부에서 ‘마(魔)’ 라고 떠받들리는 호교법왕급 대마두가 사천 땅에 와있는 것 같습니다.”
당면한 위험에 정빈각 내에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렸다.
하나, 내 생각엔 마교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기회 같기도 했다.
‘도올월마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상징적인 사건이 될 테지만.
도올월마라는 위인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 교단과 따로 놀 때가 잦은 다른 호교법왕들과 달리 마뇌부나 교단에 협조적인 인물이었다.
‘마교라는 건물에서 기둥 하나, 아니 그 이상을 뽑아내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잠시 생각을 곱씹어 보다가, 대군사님을 응시하며 손을 들었다.
“한 가지 건의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축제 중에 가극(歌劇)을 공연하는 장소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제가 쓴 내용으로 공연을 하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공연?”
“예. 마교 놈들이 보면 속이 뒤집힐 수밖에 없는 내용의 공연을 보여주면 어떨까 합니다.”
“놈들이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니, 도발을 해보자는 거구나?”
“맞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이면….”
공연 내용을 들은 대군사님은 심사숙고 끝에 허락을 해주셨다.
나는 밤을 새워 예해수 선배와 각본을 짜고 공연의 내용을 정했다.
그리고 정리된 각본을 논의하기 위해 예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처음만 해도 탐탁지 않은 눈길을 보내왔다.
“우리를 예인이라 무시하는 것이오?”
“그런 게 아닙니다. 일단 공연 내용을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재미가 없어 보이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이 금액은 그냥 한번 살펴봐 주시는 대가로 드리는 겁니다.”
하나, 거절하기엔 너무 묵직한 은자 주머니와 함께 각본을 내밀자, 일단 각본을 받아들었고.
“…재밌겠는데?”
수락을 해왔다.
새로운 창작극이 아닌, 항우와 유방을 토대로 만든 이야기에 예해수 선배가 대사와 인물만 바꾼 극본이었기에, 극단이 공연을 준비하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했다.
그렇게 찾아온 다음 날.
『용우상박(龍牛相搏)』
용사비등한 필체로 깃발에 적어넣은 가극의 제목이 펄럭이고.
비파소리와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두구두구두구두구두!
화려한 분장을 한 예인들이 단상 위에 올랐다.
“이 만우라는 하룻 송아지 놈이, 창천을 유영하는 괴룡의 위엄을 물로 보고 멍청한 소대가리를 단강구에 들이미는데!”
도올월마, 보고 있나?
이거 참으면 내가 인정한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