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사천당가 (5)
회한이 틀어박히며 도올월마의 목에서 한줄기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걸 뒤집어쓴 순간.
촤악!!!!!!
한계를 넘어있던 몸의 긴장과 집중력이 풀렸다.
그에 온몸의 근육과 뼈마디가 비명을 질러왔고, 몸속에선 혈맥이 요동쳤다.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잠시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어서 뒷일을 맡겨야 했다.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정현을 찾은 뒤.
쿵! 하고 넘어가는 도올월마의 머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거 성도대로로!”
그러자마자 겪어본 적 없는 탈력감이 온몸에 휘감기더니, 몸이 허물어지듯 꼬꾸라졌다.
“나는 좀 자야겠….”
“언 소협!”
“야!!!”
“용운 형님!”
“언용운!”
“언 형!”
그렇게 나는 귀에 울리는 언동생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수마에 빠져들었는데.
“!”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나를 반긴 건 방안에 자욱한 약재 냄새 그리고 도끼눈을 뜬 언동생들이었다.
“…….”
“…….”
그렇게 녀석들의 시선과 내 시선이 얽힌 지 잠시.
예해수 선배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후배님이 정신을 차렸다고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그러고도 언동생들과 나 사이엔 정적만이 흘렀는데.
“…….”
“…….”
가만히 뒀다간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것 같았기에.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고들 째려봐?”
그러자 당옥기가 길길이 날뛰며 입을 열었다.
“째려봐? 째려봐아아아?! 너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줄 알아?”
“모르지.”
“닷새야 닷새!”
“좀 길게 자기는 했네.”
“좀 길게 자기는 했네에? 내 침통 어디 갔어! 내가 오늘 언용운 인중에 장침 꼽고 만다! 캬아아악!!”
우소릉과 은하성은 그런 당옥기를 뜯어말렸다.
“당 누님 참으세요!”
“예! 누님이 참으십쇼! 원래 인간 자체가 저런 인간입니다.”
나는 하성이 입에서 나온 말을 되뇌었는데.
“…저런 인간.”
그 사이 정현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번에는 너무하셨습니다. 저희를 믿어 달라 하였고 그러겠다 하셨습니다.”
“…….”
“한데,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시며 나서시다니… 저희가 그리 못 미더우셨습니까?”
정현을 시작으로 언동생들의 성토는 계속 이어졌다.
응용이 녀석은 내 머리 위에 올라왔고.
빼액!!
“…응용이 너마저?”
남궁윤도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벗 사이엔 신뢰가 있어야 한다. 붕우유신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우리는 네가 혼자 도올월마를 유인한다고 할 때도 믿었는데, 왜 언용운 너는 우리를 믿지 못하는 거냐?”
“…호랑이 똥 뿌리기 싫다고 징징거리던 녀석이 벗 사이의 신뢰를 논하네. 지금 느껴지는 이 기분을 두고 격세지감이라 하는 건가?”
“그 이야기는 또 왜….”
남궁윤을 보며 잠시 헛웃음을 흘린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너희를 못 믿어서 나선 게 아니다. 그냥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아서 나선 거지.”
그런 내 말에, 우소릉이 고개를 갸웃했고.
“그 둘이 무슨 차인가요?”
당옥기는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저거 봐! 쟤는 그냥 장침 맛을 좀 봐야 한다니까?! 은하성 우소릉 이것 좀 놔봐! 내가 저 입을 꿰매 버리고 말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언동생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너희를 믿지 못했으면 되레 나서지 못했을 거다. 여차하면 소릉이 네가 가장 먼저 달려와 줄 거라 생각했다.”
“…아?”
“정현 남궁윤 너희 둘은 그런 소릉이 앞에 서서 버텨주었겠지. 그 뒤는 하성이 네가 받쳐주었을 거고. 그리고 옥기 너를 비롯해 당가 사람들의 의리와 의술을 믿었다. 너희를 믿었기 때문에 내가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도올월마를 빨리 처단하는 게 낫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런 내 말에 당옥기를 제외한 언동생들은 머리를 긁거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해왔는데.
“헤헤.”
“당연하죠. 저 은하성입니다.”
“큼.”
“흐흠.”
그런 녀석들을 보며 당옥기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좋단다.”
그리고 나를 응시하며 아미를 좁혀왔는데.
“말은 잘해가지고 사람 화도 못 내게 만들어. 그래서 더 열받아. 진짜 입을 꿰매 놨어야 하는데!”
녀석 역시 정말로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손이나 내봐! 맥 좀 보게!”
나는 당옥기를 향해 팔을 내주며 입을 열었다.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은데? 단전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내력도 좀 늘어난 것 같고?”
“아버님이랑 할아범들이 있는 약 없는 약 다 썼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는 중에 언동생들을 달랜다고 잠시 잊고 있었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아버님, 할아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가주님이랑 장로님들 모두 별일 없으신 것 같긴 한데… 독괴 어르신은 어떻게 됐냐?”
이때, 전각 밖에서 인기척이 있다 싶더니.
“혈색이 괜찮았다고? 옥기는 아무 말이 없었소?”
“예. 제가 보기에는 그래 보였어요. 옥기 후배님도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요.”
당호태와 사천쌍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에 나는 침상에서 몸을 뺐는데, 당호태가 손사래를 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을 일으킬 필요 없다. 방금 눈을 뜬 녀석이 왜 예를 차리려 하느냐.”
몸은 정말 괜찮은데 말이지.
나는 기어이 몸을 일으킨 뒤, 포권을 취했다.
“방금 눈을 뜬 것은 사실이나,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합니다. 되레 내력도 좀 는 것 같고요.”
“그래?”
“예. 당문의 돌봄 덕분입니다. 옥기한테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제 회복을 도와주신다고 있는 약 없는 약 쓰셨다면서요? 당문의 친구가 되길 잘했다 싶네요.”
그런 내 말에, 당호태는 흡족한 듯 웃었다.
하나 이내 곧 웃음을 멈추고는, 양 소매를 붙여 들어 읍을 한 채 진지하게 말했다.
“기운을 차린 모습은 반갑기 그지없으나, 친구라는 말은 당치 않지. 용운이 너는 우리 가문의 은공이다.”
이어서 괴의도 읍을 하며 입을 열었고.
“당가타의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이리 감사를 표하네. 당문은 자네들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야.”
한쪽 소매가 축 늘어져 있는 독괴도 꾸벅 고개를 숙여왔으며, 당옥기도 그 옆으로 쪼르르 옮겨가 소매를 붙여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 *
격을 차린 인사가 오가기를 잠시.
낯간지러웠던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인지, 괴의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큼. 방금 용운이 네가 있는 약 없는 약 다 썼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러기는 했다.”
“그렇습니까?”
“오냐. 뭔 놈의 몸뚱이가 그렇게 게걸스러운지. 사천이고 운남이고 알뜰살뜰 캐서 간직하고 있던 영초를 무지막지하게 빨렸다!”
나는 괴의의 너스레에 잠시 어울리다가, 곁에 있던 독괴를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도올월마를 처단하던 그 순간 어르신께서 나서주셔서 제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됐다. 따지고 보면 너는 그때 마두 놈의 공격을 알아서 피하지 않았느냐.”
“그 순간에 도올월마의 목에 회한을 찔러 넣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되레 내가 고맙다. 그러고 나서준 덕분에 당가타의 목숨들이 많이 살았어. 아마 꽤나 죽어 나갔을 것이야.”
“그래서 다치신 팔 쪽은 덧나거나 하시지는 않은 겁니까?”
내 질문에 답을 한 것은 괴의였는데.
“괜찮다! 자진이 이놈은 어차피 만날 독만 주무르던 놈이라, 한 손만 있어도 돼!”
그런 괴의의 말에 독괴가 쌍심지를 켜고 나섰다.
“아니 이 자식은? 야! 네가 뭔데 괜찮데?!”
“치료한 자격으로 괜찮다고 했다! 그럼 애들 앞에서 다 늙은 놈이 징징거릴 것이냐?!”
“허. 자운이 이놈은 가주님께 대답할 적에는 지가 몸을 던지겠다 어쩐다고 해놓고, 결국 내가 나섰는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당당하지?”
“그건 그 순간에 내 위치가….”
“시끄럽고. 솔직히 사천쌍괴에서 이제 ‘쌍’자 뗄 때가 됐다고 본다. 용운아. 이놈을 부를 때는 앞으로 괴짜를 때고 그냥 노의(老醫)라고 불러라.”
“…예?”
“아니다. 그냥 의원 소리도 때버려. 무슨 의원이라는 놈이 성정이 저래? 옥기처럼 그냥 할아범 혹은 영감탱이라고 불러라!”
독괴가 잃은 팔은 검을 쥐는 팔이 아닌 왼쪽 팔이었으나, 무인이 팔을 잃는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기운이 펄펄해 보이시네.’
그 일로 나와 다른 언동생들이 마음을 쓰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 뜻을 존중해줘야겠지.’
여기서 더 걱정하는 것은 그날 독괴가 했던 선택을 무시하는 일이었다.
나는 티격태격하는 사천쌍괴의 모습을 보며 씩 웃은 뒤, 당 가주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마교 놈들과의 싸움은 어떻게 됐습니까?”
“옥기랑 다른 동무들이 멀쩡한 것을 보고 너도 알았겠지만, 너희 쪽이 도올월마를 처단해 줘서 뒤의 일은 잘 풀렸다.”
“예. 그렇게 짐작은 했습니다.”
“네 몸이 괜찮다 하니, 자세한 이야기는 정빈각에 있는 대군사님께 가서 듣거라. 군사님도 네 걱정을 많이 한 사람 중 한 명인데 이번 일의 뒤처리를 하는 일이 급해 정빈각에 틀어박혀 계시다.”
* * *
의복을 바로 하고 정현에게 회한을 돌려받은 나는 곧바로 대군사님이 계시다는 정빈각으로 향했다.
“해수가 조금 전에 와서 방금 눈을 떴다고 하던데, 벌써 움직이니?”
“당가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신데다가, 제가 원래 좀 건강합니다.”
“그래?”
의례적인 질문이신 줄 알고 답을 했는데.
이 순간, 대군사님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며 시선이 정빈각에 쌓여있는 서류들로 향했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윽. 갑자기 머리가.”
“…안 시킨다 안 시켜.”
“그런 것 치고는 눈동자 움직이시는 게 심상치 않으셨는데요.”
“혹했는데. 방금 일어난 네게 일을 맡겨서 얻을 이득보다 여기저기서 들을 원성이 훨씬 클 것 같네.”
“그래서 뒤의 싸움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내 물음에, 대군사님께선 놀리던 붓을 멈추시고 본격적으로 입을 여셨다.
“싸움이 시작될 무렵에 내가 왕을 잡으면 이기는 싸움이라고 금적금왕을 말했던 것 기억나지? 그대로 되었다고 보면 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마교를 성도에서 몰아내어 성도 분지 서쪽으로 쫓아낸 순간까지 계속됐는데.
“…그런 식으로 섬멸을 하는 것보다는 이쪽의 전력을 지키면서 마교 놈들을 몰아내는 것에 집중했어.”
“매복을 경계해야 하니 그게 정석이죠. 현명한 판단을 하셨습니다. 역시 대군사님이시네요.”
“역시는 무슨. 솔직히 나는 천마신교의 호교법왕이라는 존재들이 그 정도로 강하리라곤 생각 못 했어.”
싸움을 복기하는 중에 한숨을 내쉬셨다.
“사천 백도무림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이 모두 달라붙어도 승패를 장담키 어려운 상대라니?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낭중마군 같이 배분이 낮은 녀석과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중에 서열도 가장 낮다고 봐야 할 텐데….”
“그 말씀도 맞습니다만, 교단에 협조적인 인물이 때에 따라선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우린 그런 대마두를 제거한 겁니다.”
“그래. 흘린 피가 적지 않으나 우리가 이겼다. 얻은 것도 있고. 다 떠나서 그들의 강함을 본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얻은 것이기도 하네. 이번 일로 최소한 사천 무림은 협력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을 테니.”
말을 마치신 대군사님은 다시 부를 테니 우선은 돌아가 쉬라며 축객령을 내리셨다.
그에 나는 정빈각을 나와 숙소로 사용하는 객관으로 향했는데.
예해수 선배가 객관의 문가에 홀로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누굴 기다리는 모양새여서 물었다.
“선배님? 누구 기다리시는 분이 있습니까?”
“아. 후배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를요?”
“예.”
“굳이 여기서 왜? 애들이랑 안에서 기다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다른 후배님들 앞에서 하기엔 부끄럽기도 하고, 또 죄송하기도 한 이야기여서요.”
“부끄럽고 죄송하다고요? 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솔직히 말해서 저는 후배님이 주도하시는 수련에 나갈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 나가는 소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운을 뗀 예해수는 멋쩍게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내심으론 나는 서무만 봐왔고 앞으로도 서무만 볼 건데. 왜 나까지 이런 걸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었죠.”
“흠.”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을 먹었던 과거의 제가 밉네요. 저는 발목을 잡는 짐덩이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거예요. 역시 외유를 다녀온 후배님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차이가 있었어요.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안전한 곳에서 걱정만 하고 있고 싶지는 않네요. 후배님 만큼은 당연히 무리겠지만,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그런 예해수의 말에 나는 도올월마와의 싸움을 잠시 돌이켜 보았다.
‘순수 실력으로는 턱도 없는 상대였다.’
호교법왕 중 하나를 잃은 마교가 앞으로 어찌 나올지는 이제 정말로 예상하기 어려워졌다.
‘나도 강해져야 하지만, 모두 함께 강해져야 한다.’
그러다 다시 한번 각오를 되새기던 이때.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해수 이 녀석도 아슬아슬하더니만, 팔자를 제대로 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