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티가 나게 돼 있어 (4)
때는 바야흐로 봄.
문과 응시생이 시험을 치르기 시작하며 정무학관의 입관시험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어느새 무과 시험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이때.
나는 경혜사태를 뵙기 위해 총장실을 찾아갔다.
“앉으세요. 언 회장.”
“예. 총장님.”
경혜 사태께서는 자리를 권하셨고, 대학원생 선배님은 차 한잔을 내주셨다.
쪼르륵-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 사이 경혜 사태께서는 입관 시험을 치르기 위해 바깥에 모여든 인파를 응시하며 입을 여셨다.
“문과의 합격자들은 윤곽이 나왔고. 내일이면 무과의 시작이군요.”
그 음성에 심려가 묻어났기에, 나는 슬쩍 속내를 물어보았다.
“걱정이 많이 되시나 봅니다.”
“이렇게 언 회장과 둘이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걱정이야 되지요.”
이 순간, 경혜사태의 표정엔 멸마사태의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화도 나고요. 마인들이 백도무림의 요람을 넘본다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습니다.”
하나, 사태께서는 이내 곧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창밖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다만 언용운 생도와 마방연이 보여준 그간의 활약을 믿고, 또 정무학관의 인재 선발 절차를 믿을 뿐입니다.”
“총장님의 믿음에 부응할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평소보다 축 내려간 거 보이십니까.”
“호호호. 빈니의 걱정을 풀어주려고 그리 너스레를 떨지 않아도 됩니다. 한데, 한창 바쁠 때 어쩐 일입니까? 단순히 빈니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 다른 게 아니라. 제 기억으론 원래 접수된 원서 중엔 혜정의 이름이 분명 있었습니다. 한데, 오늘 총학생회실에 보내주신 확정 명단에는 그 이름이 빠져있어서요.”
혜정은 아미파의 삼대제자 중 가장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검수였고.
원작에서는 딱 이 시기에 후배 기수로 주인공 세대에 합류하는 검수였다.
‘원작에선 은 소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존재가 되지.’
그 재능은 은하연과 치렀던 신구대면식에서 일부 확인했었고.
얼마 전에 사천의 난리와 합동 수련에서도 확인한 바 있었다.
한데, 얼마 전만 해도 있었던 그 이름이 최종 명단에서 갑자기 빠져있었다.
내가 그 점에 관해 묻자, 경혜사태께서는 바로 답을 주셨다.
“아하. 그 일을 물으려고 온 모양이군요. 며칠 전에 장문 사저가 제게 보낸 서신이 당도했습니다.”
“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고. 총장님께서 원서를 빼셨나 보군요? ”
“맞아요. 사천의 일로 장문 사저도 깨달은 바가 있고, 혜정이 그 아이도 느낀 바가 있던 모양입니다. 아미에서 검을 수련하겠다기에 제가 원서를 파기하라 했습니다.”
경혜 사태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나, 정현, 제갈설지, 남궁윤 같은 녀석이랑 일찍부터 부대끼다 보니. 은 소저는 혜정 없이도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고.’
혜정은 사매들과 절치부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사천의 경민 사태도 그렇고, 눈앞의 경혜사태도 그렇고 담담히 말씀하시지만, 아미는 많은 제자가 죽고 다쳤다.
‘속으론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겠지.’
잃은 목숨은 돌아올 수 없겠으나.
가슴에서 흐르는 피눈물은 남은 사람들이 절치부심하게 하는 동력이 될 터였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점은 이런 나비효과가 일어났다는 그 자체였다.
‘…역시 원작의 정보만 맹신해선 안 돼.’
애초에 그러려고 했지만, 응시자들을 더욱 유심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총장실을 나왔다.
* * *
총학생회실로 돌아온 나는 입관시험의 진행을 돕기 위한 일들의 최종 점검을 진행했다.
“제갈 소저. 내일 갑급을 받은 응시생들은 짐을 푼 뒤. 동윤관 앞에 모여있도록 하는 거 잊지 마시오.”
“제가 뭘 잊는 거 보셨나요?”
“소저는 안 잊지만 밑의 도우미들은 바쁘면 정신 놓을 수가 있다는 이야기요. 필히 챙기시오.”
“예.”
“그런데 은 소저가 안 보이는데?”
내 물음에 답한 건 당옥기였는데.
“하연이는 돈 벌러 갔어.”
“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너는 다른 양호 도우미들 다 챙겼냐?”
“다 챙겼고. 하연이는 호원단철장으로 갔어. 호원단철장의 대야장이 회한 벼린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서, 기 받는다고 거기서 병장기를 사는 사람이 많데.”
“…쓰던 거 쓰는 게 나을 텐데 시험 하루 전날에 왜 그런 짓을?”
“나는 모르지. 아무튼 하연이가 맡은 일 해놓고 가는 거니까 들들 볶지 말아 달라고 그러던데?”
“볶기는 내가 뭘 얼마나 볶았다고.”
녀석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자, 사부님께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쯧쯧쯧. 양심이 없어 양심이.
그리고 야행복 차림의 천장호가 총학생회실 문을 열고 나타나 입을 열었다.
“용운 형. 저희 차례입니다.”
“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옙. 용명이랑 소천이 형은 먼저 출발했는뎁쇼.”
마교의 잠입 시도가 확실시되는 만큼 우리는 번을 짜서 단강구 일대를 순찰하고 있었는데, 내 차례가 된 것이다.
나는 빠르게 야행복을 걸치고 방립을 눌러 쓴 채, 단강구로 향했다.
“가자.”
“옙.”
그리고 순찰을 시작했다.
붐비는 사람들의 행태와 대화들을 유심히 살피고.
건물 등에 못 보던 표식이 생기진 않았나를 신경 쓰며 단강구를 배회한 지 얼마 후.
샤샥-
시커먼 방립에 잠행복을 갖춰 입은 존재가 시선에 스쳤다.
하여, 그 뒤를 쫓아보았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멈춰선 흑의인이 굵은 목소리를 내왔다.
“나를 눈치채다니 보통 눈썰미가 아니군.”
한데 그 굵은 목소리가 내겐 어색하게 들렸다.
굵은 소리는 흉내 낸 기색이 역력했고, 귀에 익은 음성이 섞여 있었다.
나는 단박에 흑의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명태성 각주님이시군요.”
이맘때면 맹주 직속 타격대는 신입을 모집하고자 단강구에 사람을 보내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명태성이 파견을 나온 모양이었다.
“티가 나던가?”
“완전히요. 어디 잠입은 못 하시겠는데요?”
“크흠.”
“그래서 신입 영입은 좀 하셨습니까?”
“꽝이야 꽝.”
“작년보다 사람은 많이 몰린 것 같은데, 실적이 안 좋습니까?”
“사람이 많이 몰리면 뭐 하나, 다들 학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데. 우리 후배님 때문에 내가 아주 고역일세.”
나 때문이라는 소리에 기억을 곱씹어 봤지만, 간접적으로라도 명태성의 업무를 방해한 기억은 없었다.
“제가요?”
“돌아다니면서 응시생들 떠드는 소리 못 들었나?”
“워낙에 많은 소리를 들어놔서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정급 무사로 학관에 들어가서 당금수석에 천하제일후기지수 자리까지 꿰차는 바람에. 다들 풍운의 꿈을 안고 또 다른 언용운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네.”
“…아.”
“그 바람에 작년에 비해 영 허탕일세. 이거 어떻게 할 텐가? 책임지게.”
“대신 청죽관 선배님들을 많이 보내드렸지 않습니까.”
“하기야. 채작진도 미리 익혔고. 마교와의 실전도 경험해본 데다가, 자네 밑에서 굴러서 그런가? 아주 빠릿빠릿해.”
“잘 적응 하고 계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래. 작년 이맘때 자네를 무림맹으로 데려와서 함께 부대꼈으면 참 좋았겠다 싶더라니까?”
그렇게 명태성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자, 천장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각주님. 용운 형이랑 제대로 부대껴보신 적 없으시면서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닙니다….”
천장호의 말은 무시하고.
나는 명태성을 향해 질문했다.
“영입하러 돌아다니시면서 발견한 사마외도와 관계된 특이 동향은 없으십니까?”
“놈들이 학관에 잠입할 수도 있다는 분석을 우리도 받아보았기에, 유심히 그 점도 보고 다녔는데 당장에 특이한 것은 없었네.”
“흠. 그렇군요.”
“아, 약왕 어르신이 조언해주시기를 놈들이 학관에 생도를 잠입을 시키려면 세뇌나 고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니 그 점을 고려해보라고 하셨네.”
* * *
별일 없이 입관 시험의 전야는 지나갔다.
찾아온 이튿날 아침.
오랜만에 굳게 닫힌 정문 뒤에서, 나와 언동생들은 다른 입관시험 도우미들과 입관처장을 맡은 임태옥 처장님이 나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소릉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작년에는 저 문밖에서 엄청 초조해했던 기억이 있네요. 그 생각을 하니 지금도 떨리는데, 밖의 응시생분들은 얼마나 떨릴까요?”
그런 우소릉의 말에 은하성은 제 가슴을 치며 입을 열었는데.
“나는 전혀 떨리지 않았는데?”
“정말요?”
“그럼. 그때 용운 형님께서 나한테 딱. 다음 관문에서 보자. 믿는다 하성아. 그러셨거든.”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왜곡이 좀 된 거 같은데? 내 기억으론 너는 네 생각보다 훨씬 약…”
“용운 형님. 미미한 오류 정도는 넘어가 주세요. 아무튼 여기 서니 그때 생각이 나네요. 다른 형님 누님들 제가 속이 좋아서 윗사람 대접을 해드리고 있지만, 기실 짬밥으로 치면 우리 누님 빼면 다 제 아래라 이겁니다.”
그 유치한 장단에 남궁윤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천에서 허가장을 탐방해야 하는 그 위험한 순간엔, 나를 데려갔지. 은하성, 정현, 우소릉 너희 셋이 아닌 이 남궁윤을 말이다.”
“뭔….”
어이가 없어서 한소리를 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임태옥 처장님이 쇠북을 든 대학원생 선배님과 함께 본관에서 걸어 나오셨다.
“…처장님 나오신다. 이제 잡담 그만하고 다들 제 위치로 가.”
“옙!”
정문에 도착하신 처장님께서는 나를 비롯한 도우미들에게 눈빛을 주시더니, 이윽고 문을 열고 나가 입을 여셨다.
“본인은 정무학관 입관처의 장을 맡고있는 임태옥이라 하외다.”
지잉~~~~
이어서 쇠북소리가 울리며 입관시험의 막이 올랐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을급무사 무위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대련을 통해 통과 불통이 정해지는 시험장이었다.
언동생 중엔 정현이 차출되어 있었는데.
쌔액! 쌔액!
쌔애액!
나는 열심히 태극을 그리고 있는 정현보다, 녀석이 상대하고 있는 응시생에 주목하고 있었다.
펑! 펑!
퍼퍼펑!!
- 칠상권. 공동파의 후기지수인가 보구나?
‘예.’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현이 상대하고 있는 상우청은 원작에서 마교에 넘어가 정무학관에 잠입하는 녀석 중 하나였으니까.
하나, 정현은 이렇다 할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모양인지 포권을 취하며 감독관인 모용린 교수님을 응시했다.
“통을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상우청 응시생. 합격입니다.”
그 말에 모용린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고.
그러자마자 상우청은 주변을 향해 고함성을 질렀다.
“공동에도 사람이 있다!”
그걸 확인한 나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 상우청의 이름을 기록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 저놈은 왜 따로 기록하는 것이냐?
‘일단 칠상권의 완성도가 너무 높습니다. 저런 인재가 작년에는 뭘 하고 있었는지 일차로 의문입니다. 그리고….’
- 그리고.
‘공동은 정마대전으로 인해 몰락한 곳 중 하나로 백도무림이 빚이 있습니다. 그 이름으로 갑급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을급으로 나와서 일부러 보란 듯이 저런 행동을 하는 게 좀 이상하네요.’
원작의 행보를 떼어놓고 봐도 내 기준에선 이상한 행동에 속했다.
뭐, 아무튼.
나는 그렇게 을급 시험장으로 들어오는 응시생들의 모습을 유심히 확인한 뒤.
“언용운 생도?”
“예. 검후 교수님.”
“을급 시험장을 배정받은 인원은 모두 시험을 치렀습니다.”
“예. 저도 방금 확인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위 관문을 면제받은 갑급 응시생들을 모아두라 한 동윤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당도한 동윤관에는 명문대파 출신 후기지수들이 질서 정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내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자는 없을 터.
나는 곧바로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언용운입니다.”
그러자 나를 향해 포권을 취하는 이들이 나왔고, 몇몇은 입을 열기도 했다.
“괴룡!”
“…저 사람이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이름을 가져간 언용운.”
“총학생회장.”
나는 그들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갑급은 첫 번째 단계가 별다른 시험 없이 통과이니 심심하실 것 같은데. 저랑 산 좀 탑시다.”
그런 내 말에.
모여있던 응시생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거절은 본인 자유입니다. 다만….”
“다만?”
“방금 제 별호나 직함이 이래저래 방금 흘러나왔는데, 한 개가 빠졌더군요. 저는 오늘 그런 이름이 아니라 마방연의 실장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
“다들 등급부여 단계에서 마방연이 최종선별 단계에서 소견을 달 것에 동의한다는 서류에 수결하셨을 겁니다. 그 점을 유의하시고 거절을 하시면 됩니다.”
- …그럴 거면 그냥 거절은 거절한다고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