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03화 (303/444)

제303화. 쉽지 않다 (3)

‘이거 완전히 외통수구만.’

외통수란 장기(將棋)에서 비롯된 말로, 어떤 수를 내도 지게 되는 상황을 이른다.

언용운의 제안이 백리겸에겐 딱 그렇게 느껴졌다.

‘저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천마신교와 연이 있다고 인정하는 꼴인데,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대로 문제… 무림맹의 검증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 거지? 나와 상우청이 그걸 무사통과할 수 있을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

백리겸은 자기도 모르게 적을 향한 감탄을 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보다 언용운을 조심하라더니.’

귀왕부가 태원이가를 차지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간 이래, 천마신교의 행보는 그야말로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그 말은 백도무림 쪽이 매번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였다.

그중엔 대첩이라 부를 법한 승리도 있었다.

‘후성을 공략한 일이나 사천에서 도올 월마님을 참살한 일.’

언용운은 그런 승리를 들먹이는 대신 학관이 불에 탄 사건을 언급했다.

동시에 백리겸과 상우청을 위한다고 말해서 들끓던 분위기를 단박에 가라앉혔다.

그리고 저런 제안을 해왔다.

‘우리로서는 꼼짝할 수 없고, 다른 응시생은 환영할 수밖에 없는 제안.’

마뇌부의 내사가 교수들보다도 언용운을 조심하라더니.

사람의 탈을 쓴 여우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한데, 이 정도면 단순히 의심의 수준을 넘어서 확신을 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천마신교에 귀의한 것을 어떻게 알았지?’

성정에 불같은 구석이 있어, 무위 단계에서 약간의 돌발행동을 한 상우청 혼자라면 모를까.

백리겸은 특별히 돌출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나까지 싸잡았는지 모르겠군.’

첫날 언용운이 갑급 응시생들을 이끌고 등산과 왕복 오래달리기라는 것을 했을 땐, 딱 중간 정도로 버텨냈고.

‘응시생들끼리 패를 이루는 것은….’

애초에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이 유도하는 바이자, 호북에 산재한 입시 무관들도 권장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응시생들도 이미 많이들 무리 지어 있었다.

‘그런데 왜 나를 꼽는단 말인가? 혹시 투서를 넣은 익명인이 천마신교의 이번 계획을 아는 자인가?’

그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언용운이 그저 구실삼아 던진 이야기에 생각이 사로잡히려는 찰나.

백리겸은 입술을 씹어 정신을 다잡았다.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 건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미 사태는 벌어졌다.

그런 생각을 곱씹고 있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언용운의 제안에 대답을 잘해서 살아남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그래야 장차 가문을 일으키는 일도 꾀할 수 있고.’

백리겸은 다른 생각을 털어버리고 언용운의 제안 자체에 집중했다.

그러자 곧 답이 나왔다.

‘무림맹의 검증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그 자체가 항복선언이니 택할 수가 없다.’

기실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리겸은 급히 상우청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우청 형. 우선은 무림맹의 검증에 임하라는 제안에 따릅시다.]

[뭐? 그랬다간….]

[거부한다는 선택은 그 자체로 우리가 천마신교의 교인임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단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여 시간을 법시다.]

[…….]

[이후에 틈을 봐서 탈출을 하든, 교단에서 지원이 있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한 백리겸은 언용운을 향해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무림맹의 검증 절차에 성실히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리겸을 따라 상우청도 일단 포권을 취했다.

하나, 상우청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나와 백리겸이 천마신교에 귀의한 사실을 콕 찝은 것을 보면… 투서를 넣은 익명인이 이번 계획의 내부사정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순간.

상우청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천마신교가 자신과 공동파를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백리겸이 냉정히 판단을 내린 데 반해, 상우청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이유는 증오의 형태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백리겸이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천마신교의 손을 잡았다면, 상우청은 사문의 치욕을 되돌려 주기 위해 천마신교의 손을 잡았다.

‘…구파일방.’

그중 공동파가 위치한 감숙성과 지리적으로 닿아있는 섬서성의 종남파는 ‘공동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분하에 지난 정마대전 이후 서안의 서쪽 땅을 넘어 감숙성의 동쪽을 야금야금 본인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인접한 화산파도 백도무림의 의결기구인 백본회도 그런 종남파의 행보에 이렇다 할 제지를 하지 않았으며.

약해진 공동파는 구파일방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모산파가 차지했다.

‘정파를 자처하고, 구파일방이라는 이름 아래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자들도 그렇게 공동의 몰락을 외면했다.’

천마신교가 무슨 의리가 있어서 상우청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단 말인가?

게다가 천마신교는 지금 시간이 필요했다.

‘연이은 실패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야.’

백도무림에 혼란을 야기할 불쏘시개로 삼고자 상우청과 공동파를 던질 만도 한 것이다.

‘설령 교단이 우리를 불쏘시개로 삼을 생각으로 투서를 넣은 게 아니라 하더라도… 어차피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끝이다.’

무림맹의 검증 절차에 응하는 순간 천마신교와의 관계가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백리겸은 우선 시간을 벌고 탈출이든 뭐든 꾀하자 했지만.

애초에 정무학관에 입학해,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을 죽여없앨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상우청으로서는 끝났다는 생각만 뇌리에 맴돌 뿐이었다.

‘이렇게 끝이란 말인가? 내 손으로 공동의 피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는데!’

원수보다 더 원수 같은 놈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천마신교의 손을 잡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마교의 환단과 신공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와신상담하여 간신히 종남과 화산에 비수를 들이댈 수 있는 목전까지 왔건만 여기서 끝이라 생각하니, 상우청의 이가 절로 갈렸는데.

까드득.

이 순간.

상우청의 시선에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종남의 제자들이 들어왔다.

“이보게 화산. 운이 좋으시구만. 앞의 관문에서 죽을 쒔던데, 백리겸 상우청 응시생이 열외자가 되면 등수가 올라가겠어?”

“시끄럽다. 종남.”

*     *     *

백리겸과 상우청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오자.

입관 처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후속 절차를 입에 올리셨다.

“하면, 백리겸 상우청 두 생도는 비색 의복을 입은 대학원생 도우미들과 함께 본관으로 가주시면 되겠소이다.”

그러자 장내에 들어차 있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는구나? 영혼에 피 냄새가 말라붙어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혹 용운이 네가 잘못 짚었을 가능성은 없겠느냐?

사부님께서 이러실 정도였고.

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검증에 응하겠다고 하는군요. 언 소협의 감과 추론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백리세가와 공동파 같은 곳의 전인이 마교에 넘어갔다는 결론은 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남궁윤도 한마디를 더했다.

“동감이다. 무슨 망신이냐. 천하가 웃을 일이다.”

아마 다른 교수님들도 내심으론 정현이나 남궁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마교에 의해 멸문 직전까지 갔던 곳들이 백도무림을 등지고 마교에 귀의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을 테지.’

장내의 분위기가 일순 풀어진 듯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본디 사건 사고라는 것은 이렇게 긴장이 풀어진 상황에 터지는 법.

나는 정현과 남궁윤을 비롯한 언동생들에게 긴장을 놓지 말라는 하고자 입을 열었다.

“정현.”

“예.”

“뭐든지 좋게 보는 네 성정이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아. 되레 내 쪽이 조금 뒤틀린 감이 있지.”

그런 내 말에 사부님과 언동생들이 한마디씩을 했다.

- 조금?

“…조금이라고 하셨나요 언공자?”

“진짜 언용운 너는 양심이 없어?”

“그래. 한참 혹은 왕창이라고 해야 맞지, 솔직히 친동생인 용명이 자네도 이건 인정하지?”

“…큼.”

이것만 봐도 긴장들이 풀렸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녀석들을 다잡고자 미간을 좁혔는데.

“아무튼. 다들 긴장 놓지 마. 기실 해소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일은 보통 이런 때….”

입관처장님의 말씀에 따라 얌전히 학관생 식당을 나가나 싶던 두 사람의 열외자 중.

상우청이 종남파와 화산파의 응시생이 모여있던 자리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공동의 울분을 전하니 달게 받아라!”

입으로는 언동생들을 다그치면서도 시선은 두 놈에게서 떼놓지 않고 있던 나였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튀어 나갈 수 있었는데.

쐐애애애액!!!!

양 주먹에 내력을 휘감고 있는 상우청을 향해 달려가는 이 순간.

사부님께서 조언을 해주셨다.

- 너보다 몇 수 아래의 상대이나 결코 만만히 봐선 안 된다. 내가중수의 극의에 닿아있는 지독한 권법이 공동파의 칠상권이다. 허용케 되면….

‘심장, 폐장, 신장, 간장, 비장, 대장, 소장. 신체의 일곱 장기가 상하게 되지요. 그래서 칠상권(七傷拳) 아닙니까.’

나는 사부님께 대꾸하며 파천권법으로 상우청의 오른 주먹을 빗겨 올렸다.

빡!

그에 종남의 제자를 노리고 있던 권력의 궤가 틀렸지만.

남아 있던 상우청의 왼손이 내 복부를 노리고 뻗어져 나왔다.

쐐애액!

나는 발작하듯 배를 당김과 동시에 양손을 교차하며 상우청의 왼 주먹을 내려쳤고.

팍!

이어서 언가권의 운등류에서 비롯된 파천의 쾌권으로 녀석의 가슴팍에 속사를 하듯 주먹세례를 퍼부은 뒤.

퍼퍼퍼퍽!!!

비틀하는 녀석에게 곧바로 항룡장을 출수했다.

꽈르릉!!!!

그에 상우청은 한 장을 날아 벽에 틀어박혔는데.

쾅!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응시생들의 틈바구니에서 홀린 듯이 새어 나온 탄성이 울리는 이때.

“처, 천하제일 후기지수!”

반씩 갈려 달려온 언동생들과 교직원들이 벽에 박힌 상우청과 어색하게 웃는 백리겸을 포위했다.

“…하하하. 어쩌다 보니 면을 트게 되어 어울렸을 뿐 저 친구와는 깊이 사귄 사이가 아닙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     *     *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경혜 사태에 의해 조별 과제 전야는 마무리되었다.

“백리겸, 상우청 두 응시생은 입관 시험이 끝나는 즉시 무림맹으로 압송하겠습니다.”

“예! 총장님!”

“입관시험의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어수선한 사건이 벌어졌으나. 마교가 두려워 백도무림의 요람이 멈춰서는 일은 있을 수 없지요. 입관 시험은 강행합니다. 입관 처장님은 남은 고지를 해주시고 응시생 여러분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시험은 강행되었고.

당락자가 갈렸다.

“합격이다! 합격!! 나도 이제 정무학관 생도다!”

“…제기랄! 조별과제의 조원만 잘 만났어도 합격할 수 있는 점수였는데!”

누군가는 활짝 웃고.

누군가는 눈물을 쏟는 가운데 시작된 봄 방학 기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보안에 신경 쓰긴 했으나, 마인들의 움직임이 있을지 모릅니다. 각별히 조심하여 호송하도록 하세요.”

“예. 총장님.”

창량 교수님이 이끄는 삼엄한 호송 속에 백리겸과 상우청은 무림맹이 있는 낙양으로 떠났는데.

백리겸도 마교와 결탁한 게 확실하다는 전서와 함께 창량 교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선서!”

올해의 당금수석 남궁영의 선서와 함께 신입생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하나. 나는 마땅히 학칙을 준수할 것이며 스승과 동기, 선배와 후배를 존경으로 대할 것을 다짐한다. 둘. 나는 마도와 사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오직 정도를 걸어….”

총학생회장의 직함을 달고 내빈석에 앉아있다 보니.

단상 위에 올라 선창을 하는 남궁영과 성적우수자들뿐 아니라, 단상 아래에서 후창하고 있는 생도들의 면면들이 아주 잘 보였다.

‘화산의 진호. 종남의 두성연.’

개중엔 원작에서 나름대로 활약하는 후기지수들도 있었고.

절대적으로 준비기간이 짧았음에도 어찌어찌 턱걸이 합격을 해낸 장선도 있었다.

‘해남파에서 영단도 줬고, 정극경 교수님이 자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을 녀석에게 투자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시험이 쉽지 않았는데 짜식이 기특해.’

하나 나는 그런 장선보다도, 입관시험 단계에서 배제하지 않고 학관의 울타리 안으로 들인 독고철.

녀석의 표정을 주목하고 있었다.

‘마치 나는 살았다. 라고 말하는 것 같구만.’

기쁨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그 표정을 지켜본 지 잠시.

“……!”

녀석의 시선과 내 시선이 문득 얽히게 되었다.

그에 독고철은 급히 눈을 돌렸고.

나는 씩 웃었다.

‘뜨끔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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