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쉽지 않다 (4)
신입생 선서에 이어 내빈들의 축사가 있었고, 각종 장학생 선정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장이신 경혜 사태께서 입관 허가를 하셨다.
“일백예순다섯 명의 신입생도들이 정무학관에 입관하는 것을 허가합니다!”
이것으로 입학식은 끝이 났다.
“아버님!”
“장하다! 우리 아들! 하하하 여러분. 우리 아들이 정무학관에 합격을 했소!”
“그 댁 아들만 합격했나?! 우리 제자도 합격을 했소!”
“스, 스승님! 동기생들이 웃습니다!”
응시생과 후보생을 거쳐 드디어 신입생의 지위를 얻은 일학년 생도들이 합격의 기쁨을 친지들과 나누는 이때.
나는 광장 좌우에 설치된 재학생 객석을 찾아갔다.
학기가 시작하니, 잘해보자는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곽우명 자치회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하네. 하지만….”
“하지만?”
“향란의 매진악, 운매의 호연찬. 두 분 선배님도 졸업하셨고, 언 회장 자네도 총학생회장이 되어 청죽에서 한 발 빗겨서 있게 되었으니. 올해야말로 우리 윤국의 해가 되도록 할 것일세!”
“하하하. 그러셔야죠. 정무의 깃발 아래 모두가 하나이나, 사대기숙사끼리는 또 경쟁을 이어나가야죠. 회장님과 윤국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운매와 향란 윤국의 신임 자치회장·부회장들과 잘해보자는 인사를 차례차례 나누고 마지막으로 청죽관의 자리에 와보니.
“후우. 왔는가. 언 회장.”
흙빛을 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경룡이 형이 보였다.
“…어. 예.”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경룡이 형의 곁에 있던 은하연에게 물었다.
“은 소저. 경룡이 형은 얼굴이 왜 저렇소?”
“입학식이 끝났잖아요. 이제 다른 기숙사들과 신입생 모집 경쟁을 할 차례라, 그 걱정 중이세요.”
그런 은하연의 말에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경룡이 저 녀석은 자치회장만 몇 번에, 작년에는 늙은 거지를 이끌고 와서 용운이 너더러 청죽으로 오라던 기백을 보였던 녀석이 어찌 저러고 있는고?
나도 그 점이 의문이라 사부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노삼 교수님까지 모시고 와서 저보고 청죽으로 오라시던 분이 왜 그렇게 쭈글거리고 계십니까?”
“…그때는 잃을 게 없었지. 밑져야 본전이었고, 다른 자치회장들이 자네의 진면목을 간과한 행운도 따랐지. 언 회장 자네를 따라 은 부회장과 정현, 하성이, 소릉이가 와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고.”
그렇게 운을 뗀 경룡이 형은 지난 일 년을 돌아보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만년 꼴찌를 하던 청죽이 이젠 춘추계 기숙사대항전에서 통합우승을 거둔 기숙사가 되었네, 심지어 추계대회는 소림과 새외의 후기지수들까지 참가한 정진대회였어. 청죽의 문을 두드리는 신입생이 있다면 그 영광을 본인도 누리고자 온 것일 텐데… 이젠 언 회장 자네가 청죽에 없잖나.”
“저 여전히 파란 무복 입고 있는데요? 아주 나간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같이 지내기야 하지만, 자네는 이제 사대기숙사를 모두 아울러야 하는 사람 아닌가. 아무튼 신입생들에게 뭐라 말을 하고 데려와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게 사실일세. 작년의 영광을 너희도 누리게 해주겠다는 말은 좀 조심스럽다고나 할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은하연을 봤다.
“제 생각엔 괜한 부담감이고 걱정입니다. 아니 그렇소 은소저?”
“제 말이요!”
그에 은하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경룡이 형은 여전히 불안했는지 내게 부탁을 해왔다.
“지금 입사지원서 가지러 갈 참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함께 가주겠나?”
“…그런 의미는 무슨 의미길래 종이를 받으러 같이 가자 하십니까? 내빈으로 오신 맹주님을 뵙기로 했습니다. 사람이 부족하신 거면 용길이 빌려드릴까요?”
“손이 부족한 게 아니라 기 좀 받자 이거지. 이제 총학생회장이 되었으니, 아주 청죽만 챙기는 모습은 못 보여주는 거 이해하네만. 어쨌거나 친정 아닌가? 청죽을 위해 이 정도는 해주게. 잠깐이면 되잖나?”
“나 원 참.”
기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고, 경룡이 형이 부담감이 막심한 것 같았다.
하여, 나는 흔쾌히 함께 행정처로 향했는데.
“여기. 자치회에 배부되는 입사지원서 스무 장입니다.”
“신입생용도 주십시오. 자치회실에 두고 저희가 알아서 나눠주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다 받아 갔는데요?”
우리를 맞은 교직원은 신입생들이 청죽관의 입사지원서를 다 받아 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 경룡이 형이 놀란 눈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예? 누가 장난을 친 것 아닙니까? 일부러 청죽관의 지원서를 없애려고 그런다거나….”
“그럴 리가요. 생도 본인이 수결을 해야 한 장씩 배부하는걸요.”
그 말은 즉.
청죽의 인원이 터져나가게 될 것이라는 거였다.
물론, 청죽관의 인원은 항상 다른 기숙사보다 많았다.
다른 기숙사로부터 입사 거절을 당한 인원들이 모조리 입사하게 되어 늘 사람이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젠 신입생들이 원해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 달랐다.
“보십쇼.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경룡이 형을 바라봤는데.
- 느그 형 또 짠다. 짜.
사부님의 말마따나 눈시울이 뜨거워진 경룡이 형이 보였다.
“크흑.”
“또 우시네. 그만 우세요. 자치회장이 울보인 걸 알면, 신입생들이 쓰려던 지원서 다 찢겠습니다.”
“크흐흑. 고맙네. 언 회장. 다 자네 공이야.”
“어찌 저 혼자만의 공이겠습니까? 함께 청죽을 드높이기 위해 땀을 흘렸고. 마교의 습격에 맞서 목숨을 걸고 학관을 지켰잖습니까. 그 결과입니다.”
“크흥.”
“그리고 시작입니다.”
“시작?”
“언용운의 청죽관으로 끝나느냐 정무학관의 푸른 대나무로 우뚝 서느냐.”
“……!”
“말씀하셨듯 저는 이제 총학생회장입니다. 작년만큼 제가 챙기지는 못할 겁니다. 어쨌거나 저는 사대기숙사를 아우르는 신분이니까요. 경룡이 형과 여타 선배님들 그리고 은 소저에게 달렸습니다.”
* * *
경룡이 형을 다독인 나는 곧바로 청죽관의 생활관으로 향했는데.
방 앞에 도착하니, 맹주님께서 응용이와 어울려주고 계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떠냐? 나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나는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따라가겠다던가요?”
호룩!
그러자 횃대에 앉아있던 응용이가 내 어깨로 날아왔고.
맹주님께서는 ‘쳇.’ 하는 소리를 내시더니.
곧바로 질문을 해오셨다.
“아니. 충성심이 대단한 녀석이야. 삼시세끼 꿩고기를 약속했는데도 거절하던데? 그나저나 용운이 네가 먼저 따로 보자고 한 이유는 뭐냐?”
나는 그런 맹주님을 향해 독고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리겸과 상우청 말고 마교 쪽과 깊은 연을 맺은 후기지수가 한 명 더 있습니다.”
“…금시초문인 이야기로군?”
“제가 학관의 운영위에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어른 중에서는 맹주님께 처음 알리는 겁니다.”
“그 말이 참 기꺼우면서도 두렵구만. 일단 계속해 보게.”
“예. 독고철이라는 친구인데 혈왕부와 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는 왜 독고철이 혈왕부와 연을 맺었다고 생각하는지, 혈조술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백리겸과 상우청이 독고철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했고, 이어서 마교의 사천 공격도 한쪽 면이 비어있었음을 들어 혈왕부가 독립을 꾀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혈왕부가 십만대산의 교단에서 독립을 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편의상 혈교라고 지칭하면 되겠네요.”
그러자 맹주님께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확실히 사천과 운남의 경계에서 마교의 일파로 추정되는 움직임이 잡히긴 했지, 왜 도올월마와 낭중마군을 돕지 않았나 의문이었고… 근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 그 혈마의 끄나풀을 학관에 두고 용운이 네가 관리하겠다는 이야기냐?”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그렇네요. 당장은 끄나풀이지만 활용하기에 따라 백도무림이 크게 이득을 볼 수 있는 패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들어 가장 충격적인 선조치 후보고의 소식이군. 간덩이 큰 짓을 잘도 벌여놨어.”
“총장님이나 교수님들은 절대로 허락해주실 리가 없으셔서….”
“나는 허락해 줄 것 같고?”
“그렇다기보다는 백도 무림 전체를 생각하시고, 현장에서 오래 뛰어보시기도 하셨으니 귀는 기울여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맹주님께서 불허하시면 지금이라도 중단 가능합니다.”
그런 내 말에.
맹주님께서는 턱을 만지며 입을 여셨다.
“불허하면 중단. 그런데 내가 허락하면 정무학관에 적을 두고 있는 모든 교수와 생도들의 가문과 사문에게 선조치 후보고를 하는 일이 되지. 이거 허락했다가 일이 어그러지면 난리가 나겠구만.”
“…그렇겠죠?“
“그렇겠죠? 용운이 너야 후기지수니까 꾸중 좀 거하게 듣고 말겠지만… 나는 무림맹주 자리가 날아가겠는데? 잘도 그런 허락을 구하는구나. 내가 편한 것이냐?”
어깃장을 놓는 듯한 말씀이셨지만, 그 눈빛에선 나를 향한 신뢰가 묻어났다.
나는 씩 웃으며 답을 했다.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은 있고?”
“자신 없는 이야기는 애초에 꺼내지를 않습니다.”
“그럼 진행해. 쥐꼬리 같은 봉록에 골머리만 아픈 무림맹주 자리 날아가면 나야 좋지.”
* * *
맹주님께 허락을 구한 나는 총학생회실에 돌아왔다.
그리고 은하연이 골자를 마련해 놓은 장학재단의 일을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니.
총학생회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똑똑-
“총학생회실에 용무 있어서 왔습니다.”
“와, 왔습니다!”
“문 열려 있습니다.”
묘하게 귀에 익은 음성들에게 답을 하니.
남궁영과 장선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각각 서류 한 장씩을 예해수 선배가 앉아있는 책상에 내려놓고는 꾸벅 포권을 취했다.
“총학생회에 입부 신청을 하고자 왔습니다!”
“저, 저도요!”
그에 예해수 선배가 녀석들이 내민 서류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음? 지금은 사대기숙사 입사지원서 넣는 시기 아닌가요. 저희는 아직 공고도 안 했는데요?”
그러자 남궁영이 다시금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학칙상 자치조직에 해당하는 동아리는 전년도부터 조직할 수 있게 되어있어서, 별도의 공고 없이도 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왔습니다. 잘못 알고 있었던 거라면,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공고가 난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런 남궁영의 말에 제갈설지가 피식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학칙상으론 맞는 말이에요. 애초에 총학생회가 작년에 조직됐고 지금 간부들도 그렇게 뽑은 거니까요. 영 님이나 선 님도 용운 님이 허락만 해주시면 큰 문제는 없겠죠.”
남궁윤은 이어서 입을 열었는데.
“하지만 신입생이다. 관례적인 절차를 엄히 적용하는 게 좋지 않겠나? 괜히 내 덕을 봤다는 소리 같은 게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자, 남궁영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아미를 좁혔다.
“제가 무슨 오라버니 덕을 봤다고요? 저 당금수석인 걸요. 오라버니도 못 하셨던?”
그 말에 남궁윤은 벌게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나는! 언용운이랑 같은 기수였다!”
당옥기는 손으로 입 옆에 벽을 치며 은밀히 말을 건네왔다.
“…나 궁윤이 얼굴 저렇게 벌게진 거 처음 봐.”
“처음 본다고? 왜. 호랑이 똥 때문에 무림맹에서 재판 열렸을 때 보지 않았냐?”
“아! 맞네?!”
아무튼 보기 드문 구경거리임은 분명해서, 전병이라던지 말린 감이라던지 뭔가 씹을 거리가 생각나는 찰나.
듬직한 몸을 고이 접고 있던 장선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래서 저희 나중에 다시 오나요?”
장선을 놀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는지, 은하성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 이것 참. 선배도 못 알아보고 손찌검을 하는 신입을 들였다간 하극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는데… 받아줘도 될지 모르겠네.”
그런 은하성의 말에 장선은 남궁영을 향해 물었다.
“선배한테 손찌검? 남궁 소저. 형님 누님 중 누구한테 손을 댄 적이 있었나요?”
“예? 아뇨?”
“장선이 너 말야 너.”
“제가요?”
“그래 네가요. 너 윤국관에서 기억 안 나? 네가 내 턱 돌렸고, 내가 그랬잖아. ‘대신 사과하지 방금의 말도 취소하고.’ 그러니까 네가 ‘조심해주세요.’하고 갔고?”
“어?! 그 일을 하성이 형님이 어떻게?”
“용운 형님 명을 받잡고 잠입을 해 있었는데. 장선이가 내 턱을 그냥 돌려버렸지. 안 그래, 소릉 동생?”
“…어. 저희가 변복에 역용을 하고 있었지만, 말씀하신 게 다 사실이긴 하죠?”
“아? 아아아?!”
그에 장선은 울상이 되었고.
은하성은 신이 나서 너스레를 떨었는데.
“아이고 턱이야. 그때 맞은 곳이 아직도 욱신거린다. 아이고 용운 형님!”
궁지에 몰린 장선이 본인의 억울함을 말한 것은 이때였다.
“그, 그치만 용운 형님한테 똥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사람을 추종하는 무리는 똥개 같은 놈들이라고 했고요!!”
“아니?! 야! 그 말은 내가 한 게 아니지!”
그러자 모여있던 다른 언동생들이 일제히 은하성을 향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허.”
“아무리 용운 형이 씹고 다녀도 좋다고 했지만. 저건 좀… 거지새끼들이 하는 욕보다 심한 느낌인데.”
“심하군. 풍근 소리 이후로 가장 큰 충격이다. 똥개라니.”
“아니! 진짜 제가 한 말 아닙니다아아! 저 말은 홍필이라는 놈이 한 거고! 저는 끽해야 언용운은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위인이다… 헙.”
“…하성이의 마음의 소리는 잘 들었고. 남궁영. 장선. 입부신청서는 제대로 써왔어?”
“네! 선배님!”
“예!”
“제갈소저. 받아주시오.”
“예. 용운님.”
그렇게 두 사람의 입부 신청서를 받아준 이때.
‘독고철.’
내 머릿속엔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두 명 받은 김에, 나도 인재 영입 좀 하러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