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7화. 확실하다 (2)
생활관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독고철의 모습에,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분위기가 묘한데?
‘그렇네요?’
아무래도 그간 쌓아 올린 신뢰와 흘러온 오해 거리가 싹을 틔운 것 같았다.
‘결정타는 낮의 화재 현장이었으려나?’
안 그래도 자연스럽게 혈조술을 선보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난리 통에 아귀가 딱 들어맞았다.
‘재산피해는 좀 났지만, 사람은 안 다쳤으니… 우로반점 주인장의 실화(失火)가 큰 도움이 됐네.’
뭐, 아무튼.
독고철이 내가 뿌려온 떡밥에 단단히 흘린 것 같았다.
하나, 본디 낚시라는 것은 챔질할 때가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
‘독고철을 낚는 일은 더더욱 그렇지.’
장차 녀석을 통해 혈교를 속속들이 파악해 나가려면, 관계의 주도권을 완전히 틀어쥐어야 했다.
‘녀석 나름대로 확신이 있으니 찾아온 거겠지만. 이 시점에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기분을 느끼게 할 필요가 있어.’
그러기 위한 제반 작업의 일환으로 나는 녀석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손님을 응접할 때 사용하는 각탁을 가리켰다.
“급하냐? 이거 조금만 보면 끝나니까 급한 일 아니면 저기 앉아서 좀 기다릴래?”
“예. 기다리겠습니다.”
사락- 사락-
이미 다 검토한 서류였지만, 나는 독고철이 조바심을 느끼도록 뜸을 들였다.
꿀꺽.
그리고 독고철이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녀석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다 봤다. 그래서 할 말이란 게 뭐야?”
“…….”
억겁처럼 느껴졌을 찰나를 기다린 끝에, 내 시선을 받은 독고철은 선뜻 입을 떼지 못하더니.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바꿨다.
“생각해 보니. 너무 개인적인 고민이라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독고철의 태도는 내 예상이 맞다는 방증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하더라도, 막상 혈교의 이야기를 하려니 두려움과 걱정이 드는 거겠지.
“늦은 시간에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만 돌아가 보겠….”
이젠 낚시대를 들어올려야 할 때였다.
나는 피식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내 생각엔 그 개인적인 고민 지금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를 믿어라. 믿고 털어놔.”
“…….”
그에, 침묵이 내려앉기를 잠시.
붙은 듯 다물려 있던 독고철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혈교의 교인이십니까?”
독고철의 말에.
사부님께서는 감탄을 해오셨다.
- 허. 고철이 저놈 저거 지금 제 입으로 마인임을 시인한 것 아니냐? 백도 무림에서 네 녀석의 입지를 모르지 않을 텐데. 죽여달라는 거나 진배 없는 행동이거늘… 당최 어떻게?
‘이제 사부님께서 그렇게 노파심을 드러내셔도 제가 꿋꿋이 뜻을 굽히지 않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 하여간에 사람 구워삶는 것은 따를 자가 없어요. 너는 조정 아니… 동창에 갔어야 할 놈이다.
‘…동창이라뇨? 제자한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지막 말을 제외 하면,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다.
백도무림 내에서의 내 입지를 모르지 않을 텐데, 스스로 마인임을 드러내다니 그야말로 목을 잘라달라는 말이었고.
철저히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원작의 혈교를 생각해 보면, 저건 혈마 휘하에서도 금기시되는 행동이었다.
즉, 독고철은 지금 내게 목숨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젠 내가 아는 혈교의 정보를 이용해 녀석을 주물러내면 된다.’
마음 같아선 쾌재를 부르고 싶었으나, 나는 그런 심정을 다스리며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눈치가 없진 않군.”
내 답에, 독고철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안도의 말을 뱉어냈다.
“역시!”
“쉿.”
나는 검지를 입 앞으로 가져가며 그럴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독고철은 그런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럼 상우청과 백리겸을 날리신 이유는….”
“혈마님을 따르는 우리와 녀석들은 가는 길이 다르다. 학관 안에 그런 녀석들이 끼어있으면 언젠가 본교의 행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런!”
“그러는 너는? 위에 내 정체가 의심된다거나 하는 보고를 하지는 않았겠지?”
“그럴 리가요!”
방금까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을 독고철은 내 물음에 순순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과 비교하면 보름달과 반딧불이 정도로 차이가 날 정도로 아둔한 저입니다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두 사람 모두 위험해진다는 것을 파악할 머리는 있습니다.”
“당장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예.”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하는 거 맞아? 십만대산에서 나고 자란 순혈 교인들은….”
“회장님이나 저 같은 백도 출신을 인정하지 않죠. 대놓고 그런 감정을 드러내느냐 내심에 그 생각을 두느냐 차이만 있을 뿐.”
“그래. 그런 우리가 의기투합 하는 것은 더더욱 바라지 않겠지. 알려서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내가 혈교인이라 철석같이 믿고 고개를 끄덕여 오는 독고철.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진짜 ‘제안’을 하도록 하지. 기실 우리 조직이 다 그런 편이지만, 나는 네 쪽의 줄은 전혀 모른다.”
“그러실 겁니다.”
“너나 나나 혈교에 발을 담근 것 자체가 족쇄나 다름없다. 저쪽에서 우리 정체를 공개하면 무림맹의 뇌옥으로 갈 테니 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는 선택지는 없어.”
“예.”
“옆으로 나올 수 없다면, 위로 올라가야지.”
“…위라시면?”
“혈마님의 바로 아래까지 가야지.”
“……!”
“그러려면 큰 그림이 필요하고, 우리가 가진 무기는 내가 취급하는 백도무림의 정보들 뿐이야. 이걸 적절히 선별해서 흘릴 필요가 있는데 그러려면….”
“제가 회장님과 호흡을 잘 맞춰야 하겠군요. 위에서 정보를 교차확인 했는데 말이 서로 다르면 안 될 테니까요.”
“그래. 그런고로 나는 네가 오는 연락과 가는 연락을 포함해서 교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나와 상의했으면 한다.”
나는 이쯤 하여 호흡을 한 번 골랐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거절해도 무방하지만, 나는 철이 네가 나를 꼭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러자, 독고철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따르겠습니다. 애초에 회장님과 의기투합하겠다는 생각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좋아. 그럼 입관 시험 이후로 달리 나눈 이야기가 있나?”
“제 쪽은 입관 시험에 응시한 이후 아직까지 접촉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래?”
“예. 아시다시피 풍문으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는 굳이 전하지 않는 게 방침인지라. 제가 합격한 이야기나 천마신교 쪽 응시생이 날아간 이야기는 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에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하나, 너무 사무적으로만 대해서는 안 됐다.
‘이러나저러나 독고철과 나는 오랜 시간을 봐온 사이가 아니니까.’
나는 마른 웃음을 지어 보이며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후. 그래 너는 어쩌다가 이리 흘러 들어왔냐?”
“…지난 정마대전 이후 저희 가문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회장님의 언가는 강시종은 잃었지만 권각종은 남았었죠?”
“그랬지.”
“저희는 아예 심결 자체가 날아가 버렸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독고철은 자신이 어쩌다 혈교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를 말했는데.
“…해서, 저도 회장님처럼 가문의 비전도 복원하고 또 크게 일으키고자 합니다.”
녀석의 이야기를 듣던 중.
생각해 보니 나눌 이야기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 철아 근데 너 공작금은 얼마나 받냐?”
“그냥 주는 대로 받습니다만?”
“그러면 안 되지. 너 돈 관리 못 하는구나? 나한테 맡겨. 이다음에 졸업할 때 돌려줄게.”
“…예?”
“왜? 내가 떼어먹을까 봐?”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래도 되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 걸 따지면 이렇게 우리가 의기투합하는 것 자체가 안 되지. 어차피 교에 관한 일은 뭐든지 함께 상의하고 움직이기로 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나한테 맡기면 막 그냥 그렇게 생활비로 써서 내버리는 게 아니라, 불릴 수 있다. 은소저나 외가의 정보가 있으니까. 너 가문 일으키고 싶다고 그랬는데 그거 돈이 한두 푼 드는 줄 알아?”
“그, 그것도 그렇습니다.”
“언가는 쪼그라들었어도 진주에서는 먹어줬는데, 독고세가를 일으켜야 하는 너는 주춧돌부터 골라야 할 판이잖아. 나한테 맡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나를 향해 사부님께서 혀를 차 오셨다.
- 저 녀석의 인생도 들어보니 기구 하구만, 아주 벼룩의 간을 내먹어라 간을 내먹어.’
‘벼룩의 간을 내먹는다니요? 아직 먹지는 않았습니다.’
- …….
‘그리고 이게 어떻게 벼룩의 간입니까 따지고 보면 철이 돈이 아니라 혈교 쪽 돈인데요? 적의 돈으로 적을 상대하는 대계라고 정정해주십쇼.’
- …하기야 애초에 네 녀석을 만난 것 자체가 기구한 인생이겠구나.
* * *
독고철이라는 패를 손아귀에 넣게 되었지만, 당장 내 일상에 큰 변화가 일어나진 않았다.
혈교 쪽에서 딱히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바쁜 나날이 계속됐다.
-맹주님 보십시오. 일전에 허락받은 계획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하여, 곧 다가올 신입생들의 무림맹 견학 일정에 독고철 생도를 포함시킬 생각이니 알고 계십시오.
‘다 썼다. 암어화도 했고.’
맹주님께 드릴 독고철에 대한 서신을 썼고.
“응용아. 이거, 맹주님께 전해드리고 와.”
호루룩!
신입생들을 조련했으며.
“하나에 동기는! 둘에 하나다! 하나!”
“동기느은!!!!”
재학생들도 굴렸다.
“재학생 올빼미들! 춘계 기숙사 대항전이 끝나면 병아리들과 함께 수련하게 됩니다! 그때 부끄럽고 싶습니까!?”
“아닙니다아!!”
그러면서 수업을 들었고.
학생회장의 업무를 쳐냈다.
그런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 속에서 굳이 사건이라 부를 만한 일을 하나 꼽자면.
당옥기에게 혈수만독주를 더 사다 준 일이었다.
“자.”
“뭐야 이거? 꺅! 혈수만독주잖아?!”
“이맘때. 약령시가 크게 열리잖아.”
“우리 석류랑 홍옥이 친구 생겼네! 하성이랑 어디 갔다더니 얘들 데리러 간 거였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원작의 이맘때 혈수만독주를 구하는 것을 방해했던 두 세력 중에 해금방은 작년에 사라졌고, 마교는 근래 들어 웅크리고 있는 시기를 겪고 있었으니까.
“허. 용운 형님이랑 내기했는데, 홍옥인지 석류인지 다른 놈들인지 알아보는지 못 알아보는지. 그걸 알아보시네요.”
“당연히 알아보지! 여기 눈 모양이나 다리의 크기가 전혀 다른데.”
“제 눈엔 그냥 다 똑같이 징그러운데….”
“캭! 그 말 취소해! 얘들도 다 들어! 자 여기다 손 넣고 쓰다듬으면서 연지(臙脂)랑 단심(丹心)이 한테 미안하다고 해!”
“히익! 싫어요! 벌써 이름까지 지었어!”
“뭐야 그 태도는?! 장침 맛 좀 볼래?”
“…당옥기. 하성이 잡을 시간에, 연구나 해라 연구나. 이학년 나부랭이를 이렇게 밀어주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
“간다! 가!!”
“…역시 용운 형님뿐입니다.”
“너는 내기에 건 은자나 내놔.”
“…….”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춘계기숙사 대항전이 시작할 때가 되었다.
“오늘 열리는 대회는 신입생들을 위한 무대입니다. 타오르는 신화(新火)처럼 뜨겁고 건강하게 경쟁하여 장차 백도 무림을 이끌어나갈 젊은 불꽃들이 여기 있음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 *
하얀 무복을 입고 바늘구멍이라 불리는 입관시험을 통과한 신입생들이, 사색 무복을 나눠 입고 실력과 의지를 겨루는 정무학관의 춘계 기숙사 대항전.
“청죽의 격구단이 운매를 꺾었다!”
“허, 괴룡의 세대와 고완산 그 친구가 없어서 운매 쪽이 유리하지 않을까 했는데 이걸 청죽이?!”
“윤국이 위기 우승을 가져가서 공동 일 위였는데, 이렇게 되면 청죽이 단독으로 치고 나가는 것 아닌가!?”
“청죽! 청죽!! 청죽!!!”
청죽 역사상 최초로 통합우승을 거둔 작년의 기세를, 청죽관의 신입생들이 이어가고 있는 이때.
“예쁘다 남궁영!”
“든든하다 장선!”
“잘생겼다 독고철! 독고철 생도 수결 좀 해주십쇼!”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출전자들에게 엄청난 환호와 함께 수결 요청이 이어졌는데.
‘자귀(秭歸)?!’
그중 어떤 사내가 내민 종이엔 독고철이 혈교에 귀의하라는 제안을 받았던 장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걸 확인한 독고철은 중앙 단상에 앉아 있는 언용운을 향해 수신호를 보낸 뒤.
수결을 받아 어디론가로 향하는 관객을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사람들이 내기 돈을 거는 장소였는데.
“향란에 한 냥 걸겠소!”
“나는 윤국에 두 냥 걸겠소!”
돈을 거는 사람들로 주변이 시끌시끌한 와중.
예의 사내가 독고철을 향해 전음을 보내왔다.
[처음엔 무사히 입관만 하셔도 더할 나위 없다 하였는데, 자치조직의 중추에도 들어가시고… 대단하십니다. 이례적으로 혈마님께서도 기대가 크다는 전언을 내려보내 주셨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상우청과 백리겸이 걸려 들어준 덕분에 언용운이 정치적으로 저를 받아 줄 수밖에 없게 되었거든요.]
[본교의 복입니다. 그럼 보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말단이지만 총학생회의 간부가 되었다는 시점에서 처음 목표는 초과 달성했다고 보았습니다. 하여, 괜히 정보를 캐려 무리하지 않고 선배와 동기들의 신임을 얻으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잘하셨습니다. 하면 쓸만한 정보는 없는 겁니까?]
[제 손을 거친 정보 중에 교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이번 춘계대항전이 끝나면 있을 신입생대표의 무림맹 견학 일정을 제갈설지 선배가 인솔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까?]
[아.]
[있습니까?]
[…그, 공작금을 좀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