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9화. 인연과 악연 (2)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원철.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달려오는 녀석이었지만.
‘…소림.’
내 뇌리엔 문득 파천검문과 소림 사이의 악연을 떠올랐다.
‘태사부이신 만박두타를 시기하여 근맥을 끊은 일에 앞장선 일파. 그들의 후인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입에서 쓴맛이 돌았으나, 백 년도 더 된 해묵은 이야기를 원철에게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철은 애초에 무(武)밖에 모르는 외골수라 그 범주에 들어갈 녀석도 아니고.’
나는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접어두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원철 스님. 오랜만입니다?”
“예! 오랜만입니다!”
“근데 혼자 나오신 걸 보니 여전히 친구는 없으신 모양이네요.”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제가 나이에 비해 배분이 쓸데없이 높다 보니 사형들은 바쁘시고 사질들은 어려워해서요.”
“아뇨. 제가 보기엔 원철 스님도 사교성이 없습니다.”
그러다 이어진 대화에.
원철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
언동생들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그중 당옥기가 신입생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와. 진짜 나쁘다.”
남궁윤과 우소릉이 그 뒤를 이었고.
“가차 없는 성격. 익히 아는 사실들 아닌가.”
“언 형이 원래 가차 없으시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가차 없었어요.”
정현과 은하성도 한마디를 더했다.
“원철 스님께서 첫 만남부터 한판 붙자는 투의 말씀을 하셨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만. 지나친 사실 나열로 인해 폭력성이 있긴 합니다.”
“정진대회 이래, 소림의 빡빡이들을 내 원수다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시골집 강아지처럼 반갑다고 달려온 사람한테 그냥 저런 말을 그냥 꽂아 버리시네… 그랬구나. 역시 용운 형님이시다.”
수첩을 펼쳐 대화를 받아 적던 예해수는 슥- 하고 붓을 그어 무언가를 지웠고.
사부님께서도 혀를 차셨다.
- …너어는 진짜.
원체 내 밑에서 밤낮없이 구르는 녀석들이다 보니, 어지간한 투덜거림에는 나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뭐냐. 그 눈빛들? 아니 내가 저번에 원철 스님한테 친구 하자고 했던 거 다들 기억 안 나?”
그러나 오늘은 나도 진심으로 억울했다.
“그런데 서신 한 통 안 보냈어 이 사람. 그래서 그냥 인사치레로 친해지고 싶다 한 줄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반가워하면, 그건 사교성이 없는 게 맞잖아?!”
하여, 곧바로 항변했는데, 내 말에 원철이 소림 승려 특유의 반장(半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 서신! 그 말씀을 들으니 감사를 표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괴룡!”
“이거 봐. 대화도 뚝뚝 끊기잖아. 내 말이 틀려?!”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제가 사실 괴룡에게 서신을 보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종이를 펼치고 보니. 무어라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싶기도 하고. 저야 수련을 하는 일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만, 괴룡은 맡은 바가 많은데 바쁜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는 했다.
하나, 그게 왜 감사한 일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말씀은 알겠는데, 그게 왜 고맙습니까?”
“아, 그건 이야기가 더 남았습니다.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아. 예. 해보세요.”
“고작 두 자 남짓한 종이 한 장일 뿐인데, 마치 망망대해처럼 느껴지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종이 한 장을 두고 번민하는 스스로가 보였고, 천하를 종횡하고 있는 괴룡이라면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를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
“괴룡과 합을 나눴던 순간을 복기하게 되었고, 앞으로 나눌 합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괴룡과 심상에서 싸우고 또 싸우다 보니 약간의 진전이 있었습니다. 하여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원철의 말이 끝났을 때.
사부님께서는 다시 한번 혀를 차셨다.
- 내 생각인데. 너도 너지만 저 원철이라는 중놈도 어지간히 맛이 간 녀석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 합니… 가 아니라, 잠시만요. 너도라뇨? 말씀이 조금 이상하신데요?’
그렇게 낙양성 밖까지 마중을 나온 원철과 인사를 나눈 우리는 곧바로 무림맹으로 향했다.
맹주님께서는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고.
“오느라 고생들 많았네.”
“신입생도 대표 남궁영! 무림 맹주님께 보고드립니다! ”
당금수석 남궁영의 보고와 함께 신입생들의 신병은 공식적으로 무림맹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무림맹의 여러 기관을 대표해 견학생들을 맞으러 온 사람들이 방문표를 신입생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그 틈을 타 맹주님께서 내게 전음을 보내오셨다.
[약왕당부터 갈 것이냐?]
[정확히는 혜민각부터 가보려고요.]
[그래. 진척이 있다는 혈교의 일은 급한 것은 아니지?]
[예. 뜸을 들여야 하는 일이라, 급한 사안은 아닙니다.]
[알았다. 발표 준비야 어련히 잘했을 것이고. 나도 신입 생도들 면담에, 백본회의 정기회의 준비한다고 바쁠성싶으니. 약왕 어르신 뵙고 나선 대군사님부터 만나보거라.]
[옙.]
* * *
보고를 마친 우리는 곧바로 약왕 어르신의 제자들이 병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는 곳인 혜민각으로 향했다.
“여기! 여기 좀 도와주게!”
맹주님께서 ‘보고 싶어 하더라.’ 하고 따로 언급할 정도로 재회를 고대한 여기 식구들이었지만, 회포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이곳은 밀려드는 병자로 매일매일이 전쟁인 곳이었으니까.
“마비산! 누가 마비산을 가져와!!”
거기 붙어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말 그대로 쏜살같이 하루가 지나, 혜민각이 문을 닫을 시각이 되었고.
그 뒷정리까지 야무지게 돕고 약왕당에 돌아오니.
대의녀 금.
그녀가 살풋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목욕물을 준비해 뒀습니다. 다른 분들은 저기 계신 연이 의녀님을 따라가시고. 언용운 생도는 저를 따라오세요.”
그 말에, 나는 금이 의녀를 따라나섰는데.
약왕당에 두 번째 방문해보는 나로서는 그녀가 나를 어디로 안내하는지를 단번에 알아챘다.
“약왕 어르신께서 계시는 곳으로 바로 가는 겁니까?”
“맞아요. 언용운 생도도 바쁜 몸이 되셨고, 약왕 어르신께서는 신입생들을 또 따로 뵈셔야 하니. 언용운 생도는 지금 먼저 만나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보시다시피 꼬락서니가 엉망이라서요.”
“미남이시라 딱히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는데요? 약왕 어르신께서 의관 같은 거 신경 쓰시는 분도 아니시고.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약왕 어르신께서 온종일 기다리셨어요.”
“저를요?”
“예에. 오늘 확실히 도착할 거라는 소식에 새벽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셨으니까요.”
“아니 어르신은 그렇게 기다리실 거면. 귀띔을 주시든 와서 좀 도와주시든 하시지….”
그런 내 말에, 금이 의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또 그렇지가 않아요. 어르신께서 혜민각에 가면 다들 어르신께 진맥을 받으려 해요. 그럼 위급한 환자가 시기를 놓칠 수도 있고, 정말 약왕 어르신이 필요한 병자가 어르신을 못 뵐 수도 있고 그래서요.”
“하기야. 죄송한 마음에 그냥 떠오른 대로 말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한 일은 아니세요. 늦은 거야 혜민각 일 돕고 오다 보니 지금이 된 건데요 뭐. 오히려 기특해하실걸요?”
그러는 중, 어르신이 기거하시는 전각에 다 다르게 되었고.
금이 의녀가 나를 향해 소곤거렸다.
“…그럼 기별할게요?”
“예.”
“약왕 어르신. 언용운 생도가 왔어요.”
“없다고 해라!”
돌아온 답은 부정적이었는데, 금이 의녀는 되레 킬킬 웃으며 내게 말했다.
“들어가시면 돼요.”
나는 내 입으로 인기척을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르신? 저 용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자 약왕 어르신이 퉁명스레 나를 맞았다.
“없다고 하라 했는데 왜 들어와?!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
“오면서 금이 의녀님께 들은 말씀과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 많이 다르네요?”
“뭐라고 했길래?”
“저 오기를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계셨다던데요?”
“참나. 금이 저것이 머리가 굵어져도 한참을 굵어졌구나. 내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마음대로 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어찌 있지도 않은 일을 입에 올려?!”
“그 말을 듣고 저는 기분이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저도 어르신이 뵙고 싶었으니까요.”
“흥.”
“근데 정말로 있지도 않은 일 맞습니까? 의녀님이 굳이 ‘목이 빠져라.’라는 말씀을 한 게 마음에 걸리는데요?”
“나 원 참. 아니라니까? 그런 적 없다!”
입으로는 툴툴거리시지만, 정말로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셨다.
그에 나는 마음을 놓고 데려온 녀석들을 부탁했다.
“흠흠.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에는 선배 동기 그리고 병아리들이랑 함께 왔습니다. 잘 좀 봐주십시오. 특히나 병아리 중에 독고철이라는 녀석이 있는데….”
“내가 무슨 네놈이나 네놈 따르는 것들 침 놔주는 사람인 줄 아느냐? 입으로는 보고 싶었다던 놈이 잘 지내셨냐는 말도 없구만.”
“너무 퉁명스러우시니까 제가 조심스러웠죠. 잘 지내셨습니까?”
“만날 탕약 앞에 앉아 있는 늙은이가 잘 지내고 자시고가 어딨느냐 똑같지 뭐. 네 녀석은 잘 지내던데? 한 번씩 보내오는 서신 외에, 그 소식지라는 놈 덕분에 네 녀석의 행적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건 과장이 좀 많이 됐습니다. 이번에 같이 온 견학생 중에 예해수 선배라고 계시는데. 그쪽으로 걸출해서요.”
한데, 그러다 이어진 이야기가.
약왕 어르신의 역린으로 이어졌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 과장이 삼쯤 들어갔으면 칠은 진실이겠지. 네 녀석 뒤를 따라다니는 온갖 별호와 이야기들. 사실 나는 죄다 마음에 안 든다. 누구를 베었다느니, 사지에서 살아나왔다느니 하는 것들.”
“…….”
“죄다 마음에 안 들어! 하여간에 날붙이 차고 다니는 것들은 왜 그런 것을 칭송하는지… 너는 어떠냐? 사람 베고 죽을 뻔하고 그런 일로 칭송받고 좋으냐?”
“단순히 나무라시는 게 아니라 하문을 하시는 것 같아서 답을 드리자면. 저는 남들이 뭐라 하는지는 사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냥 필요하니까 검을 뽑고, 나서야 할 것 같으니 나서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러다 나온 내 답에.
나와 약왕 어르신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그러기를 잠시.
어르신께서 먼저 입을 여셨다.
“유명세에 취해 맛이 가는 놈들을 많이 봤는데. 네 녀석의 눈동자는 여전히 호수처럼 잔잔하구나. 나름대로 초심을 잃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
“사실 들려온 네놈 소식 중에 마음에 드는 것도 있긴 했다. 네놈 덕에 목숨을 구한 사람들이 입에 올리고 다닌다는 신진제일협. 그 소리는 마음에 들었어.”
“큼. 그게 제일 부끄러운 별호인데요.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닙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그런 것은 너무 복잡해. 공맹의 후예도 아닌 나로서는 관심 없다. 그저 내 손을 거친 녀석이 사람을 살리는 검이 되길 바랄 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윗도리나 벗어! 사천에서 탈진을 해서 쓰러진 것을 당가의 돌팔이들이 돌봤다던데. 탈은 안 났는지 보게!”
* * *
“당가의 돌팔이들이 좋은 약을 많이도 썼나 보구나. 당시 흡수한 영약의 여파가 혈맥에 산재해 있는 듯 한데… 흠. 네 녀석의 게걸스러운 체질을 생각하면 내력을 더 증진시킬 방도가 있을 것도 같구나?”
“오. 정말입니까?”
“이건 근데 내가 며칠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돌아가기 전에 약방문을 써주든 어쩌든 하마.”
“예. 그럼. 데려온 녀석들도 좀 잘 봐주십시오. 당옥기 그 녀석 연구도 좀 봐주시고, 아. 궁윤이는 저번에 금침대법을 못 받았었는데 걔도 좀 봐주시고요.”
“궁윤이?”
“아, 남궁윤이요. 남궁세가의 장자.”
“아, 그 화병이 심하던 그놈! 화병은 나아졌는고?”
“글쎄요. 호랑이 똥 이야기만 하면 천불을 내기는 하는데. 저는 모르겠네요.”
“알았다. 내 알아서 할 테니, 가봐라.”
그렇게 축객령을 받아 밖으로 나온 나는 곧바로 대군사님을 뵈러 갔다.
마교가 위험하다는 발표 준비야 해왔지만, 정확히 맹주님과 대군사님이 백본회에서 뭘 하려고 하시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그 점에 관해 묻자, 대군사님께선 흔쾌히 답을 해주셨다.
“맹주님은. 합종군을 결성해 십만대산을 들이치자는 안건을 다시 올리실 생각이셔.”
“맹주님이 모으려 하시던 신진세력의 연계가 벌써 그만큼 단단해졌습니까?”
“아직은 아니지, 당문의 약방도 이제 막 설립한 차고. 네가 학관에 침투하려 한 후기지수를 잡은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명숙들이 많아.”
“그럼 그게 통과가 됩니까?”
“안 되겠지. 부결이 날 확률이 아마 팔·구할쯤 될걸?”
“한데 왜 그 안건을 다시 올리시는 겁니까?”
“안건을 올리는 것 자체로 의의가 있으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 것도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는데.
“…아. 장차 큰 사건이 터지면 두 번이나 합종군 제안을 했던 맹주님의 발언권이 엄청나게 강해지겠군요. 후기지수 대표취급을 받는 제 발표까지 곁들여지면 금상첨화고요?”
“맞아.”
“큰 그림 한번 무섭게 그리시네요.”
대군사님께서는 헛웃음을 지어 보이시며 나를 향해 물었다.
“너만 하겠니? 혈교 이야기는 뭐야?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여러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짜 정보를 주다가 거짓 정보를 흘리는 식으로 반간계를 해볼 수 있을 거고, 그쪽의 고급 정보를 획득할 수도 있겠지요.”
하나, 대군사님께서는 총기가 흐르는 눈동자를 빛내며 재차 물어 오셨다.
“흐음. 그런 것 치고는 네가 독고철을 심히 가까이 두는 것 같은데? 그 정도 계략이면 하연이 밑에 둬도 충분하잖아? 굳이 총학에 들였다는 것은 그거 말고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거 아니니?”
“…….”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너? 뭐야 빨리 말해.”
“크흠. 아 이게 근데 지금으로서는 변수가 많아서 조심스러운데요?”
“딱 보니 맹주님한테도 말 안 한 것 같은데… 비밀도 지키고, 하지 말란 소리는 안 할 테니까 말해 봐봐.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야지 보조를 맞출 거 아냐?”
잠시 고민해본 결과, 대군사님께는 염두에 둔 진짜 계획에 관해 말씀을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독고철이라는 패를 활용해서 뜸을 잘 들이고. 때를 잘 맞추면… 혈교라는 조직 자체를 통째로 꿀꺽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