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인연과 악연 (3)
내 계획을 들은 대군사님은 석상처럼 굳어지셨는데.
“…….”
그러고 있던지도 잠시, 대군사님은 천천히 입을 여셨다.
“엄청난 계획이네. 성공 확률을 어느 정도로 보고 있어?”
혈교를 통째로 삼켜보려 한다는 생각을 다른 분들이 들었다면, 십중팔구 말리려고 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된다는 말씀이나, 위험하니 멈추라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성공 확률을 물어보시네요.”
하나, 대군사님께서는 진지하게 가능성을 묻고 계셨다.
“네가 치밀하고 똘똘한 걸 모르지 않으니까. 그간 보여준 것도 있고.”
그만큼 나를 믿으신다는 거였고.
백도 무림의 대전략을 그리는 군사답게, 나를 아끼는 마음을 떠나 사안을 냉정히 분리해서 보신다는 거였다.
‘내가 어떻게 답을 하느냐에 따라 대군사님의 지혜와 관무 양쪽에 뻗어있는 제갈세가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는 이야기기도 하지.’
나는 솔직히 말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물음에 답했다.
“주사위 놀음도 아니고 정확한 확률을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그야 당연히 감안해야지.”
“그간 파악한 바에 따르면, 혈교는 고위 간부 밑의 조직들을 점조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천마신교 본단 양쪽의 눈을 다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교단을 차리려면 어느 시점까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맞습니다.”
“나도 혈마가 역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중간 이하는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있겠다고 생각을 하긴 했어.”
“예. 그렇게 운영되는 조직인 만큼, 독고철이 혈교 내의 지위와 입지가 중간 간부급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혈마까지 몇 계단 안 남게 될 텐데. 그 시기를 잘 노리면 파죽지세로 혈마까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대군사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때 깔끔하게 혈마와 최측근의 수족만 제거할 수 있으면 혈교의 조직이 손에 들어올 수도 있겠네.”
그리고 재차 입을 여셨다.
“독고철이 혈교 내에서 입지와 지위를 높이는 일이야 네가 주는 정보를 적절히 흘리다 보면 시간문제일 것 같고. 걔가 배신할 가능성은 없어?”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녀석은 제가 혈교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요.”
“…무슨 수로?”
“그건 영업비밀입니다.”
“…대단하다 진짜. 뭐, 아무튼. 혈교의 조직이 득이 될지 해악이 될지는 방금 말한 파죽지세의 시기가 다가왔을 때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일단 그리 알고 있을게.”
* * *
무림맹에서의 첫날은 약왕 어르신과 대군사님을 뵙고 나니 훌쩍 지나가 버렸다.
찾아온 다음 날.
독고철과 장선이 내 방을 찾아와 포권을 취했다.
“회장님. 저희는 오늘부터는 다른 부서들도 방문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인사하려고 왔습니다!”
이곳은 백도무림의 심장인 무림맹이었다.
독고철이 나를 의심하기는 힘들 터였으나, 내가 풀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너희 둘은 꼭 붙어 다녀. 알다시피 선이가 착해. 철이 네가 붙어 있어야 내 마음이 놓여.”
“예. 회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여, 나는 장선을 걱정하는 척 독고철에게 감시기능이 달린 혹을 붙인 뒤.
다른 언동생들과 함께 혜민각의 일손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혜민각의 문을 닫아걸 시간이 되어 뒷정리하던 때, 반가운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큰 공자님.”
“용운이 있느냐?!”
내게 운등류를 전수해 준 진평장주 언정균과 무혁 백부였다.
“백부님. 그리고 진평장주님이 아니십니까?”
“안이십니까? 내가 선 자리가 안으로 보이냐? 어디로 보나 밖 아니더냐? 크하하하핫!”
- …….
“…….”
“…….”
그렇게 무혁 숙부가 일으킨 찬바람이 지나가길 잠시.
주위를 썰렁하게 만든 장본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큼. 한데, 너희들 중에 소진이가 안 보이는구나? 같이 있는 게 아니었느냐?”
“저희는 무림맹 도착한 이후로 계속 혜민각 일을 돕는다고 바빴고, 누님도 백본회 준비를 도와드린다고 바쁘신 모양인지 저희도 아직 못 봤습니다.”
“그래?”
“예. 밀직원장님께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애초에 낙양 성내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여기 있겠구나 싶어서 바로 이리로 온 것이야.”
“아하. 두 분은 백본회에 참석하러 오신 겁니까?”
이어진 질문엔 진평장주가 입을 열었다.
“예. 큰 공자님. 가주님께서는 하북에 약방을 내는 일을 석가장의 장주님과 마무리하시기로 하셔서, 이렇게 제가 대신 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무리 이야기를 하시는 걸 보면 문을 열 일만 남은 모양이네요?”
“역시 총명하십니다. 하북삼협. 세 분 가주님들이 합심하신 터라, 일이 일사천리로 처리가 됐습니다.”
“오호. 앞으로 관리는 누가 한다던가요?”
“듣기로는 독괴 어르신이 상주하시면서 하북과 산서의 약방을 관장하실성싶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당가의 약방 이야기가 끝나자.
진평장주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입관 시험에서 마교의 간자들을 잡아내셨다지요?”
“아.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사천의 일도 그렇고, 큰 도련님의 위명이 천하에 자자하니 언가의 가신으로서 뿌듯하기 그지없습니다.”
“…낯간지러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허허. 아부라고 생각하시는 군요. 전혀 아닙니다. 저는 요즘 어딜 가든 일부러 언정균이다 하고 이름을 말하고 다닙니다.”
“…왜 그러시는데요?”
“그러면 진주언가 사람이냐고 묻는데. 그렇다고 답하면 천하제일후기지수니 신진제일협이니 하면서 큰 도련님 이야기를 남이 먼저 하곤 합니다. 그걸 듣는 게 그리 기꺼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을 돌렸는데.
“큼. 여기 약왕 어르신의 제자분들도 계시는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시죠, 따로.”
되레 의생과 의녀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섭섭하게 왜 따로 이야기 하나? 우리도 좀 듣게 해주게!”
“…예?”
“그래요. 만날 죽네 사네 소리만 듣다가 저런 이야기 들으니 좋은데 왜 못 하게 하세요? 진평장주님이라고 하셨죠? 계속해주세요!”
그렇게 서로 간에 회포를 풀며 시간을 보낸 끝에.
어느덧 시간은 흘러 무혁 백부와 진평장주가 낙양에 도착한 지도 이틀.
참석 요청을 받은 세가와 방파의 대의원들이 모두 무림맹에 모이게 되었다.
마침내 백본회의 정기회의가 소집될 때가 된 것이다.
맹주님의 발의에 이어 찬조연설을 하기로 했기에.
나와 언동생들도 예복을 갖춰 입고 백본회의 대회의장에 앉아 있었는데.
“반 각 뒤에 맹주님께서 당도하실 예정입니다.”
맹주님을 보좌하는 밀직원장 국도진이 개회가 임박했음을 알리자, 우소릉은 사시나무 떨듯이 안절부절못했다.
“…으으으.”
그에 은하성이 입을 열었다.
“바, 발표는 용운 형님이 다하시는데 소릉 동생은 왜 이렇게 떨어!”
“그러는 은 형도 떨고 있잖아요?! 심지어 정현 도장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신데요?!”
정현과 예해수도 긴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긴장은요. 아닙니다. 그런 거.”
“그치만, 정현 후배님의 안색이 제가 본 중에 제일 파리하신걸요?”
“그러는 선배님께서도 창백하십니다.”
“저, 저는 확실히 긴장했어요.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싶은데, 소식지에 담아야 하니까 참는 거예요.”
다들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한가락 할 성싶은 늙은이들과 유력한 후기지수들이 다 모인 듯싶구나?
‘예. 다들 긴장할 만도 하죠.’
사부님 말마따나 회의장의 일 층엔 별호를 대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최소 각 문파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기라성 같은 무림명숙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고.
이 층엔 그런 명숙들을 수행해온 각 문파의 유력 후기지수들과 정무학관의 견학생도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중엔 당연히 무당파의 인물들도 있었다.
“어깨 펴라.”
하여, 정현의 어깨를 잠시 두드려주고 있는 이때.
당옥기가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말했다.
“쪼, 쫄리긴 한다. 그런데 언용운 너는 멀쩡하다? 진짜 둔갑한 요괴 같은 거 아냐? 성질도 더럽고.”
“……?”
내가 대꾸를 하기 전에, 남궁윤의 입이 먼저 열렸다.
“흥. 떨릴 일도 많군. 그게 바로 미숙하다는 증거다.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 거듭나려면 평정심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정무학관 생도를 대표하고 있다. 언용운과 나를 봐라.”
그 말에 당옥기가 미간을 구기며 콧방귀를 꼈는데.
“웃기시네. 은근히 언용운이랑 같이 묶이려고 들지 마. 작년에 비슷한 자리에서는 얼굴 벌게져서 제 발로 뇌옥에 기어들어 간 주제에.”
“…….”
그러고 있는 사이.
맹주님께서 회의장에 입장하셨다.
“정숙하십시오. 맹주님 오십니다.”
이어서 상호 간에 예를 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무림맹주이자 백본회의 회주인 저 공손무결은 금일 회의의 첫 번째 안건으로 합종군의 건을 올리겠습니다.”
그 시간이 끝나자마자 맹주님께서는 의견을 발의하셨다.
“천마신교의 해악이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정도의 모든 방파와 세가가 분연히 힘을 모아 십만대산을 방벌하자는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겨오셨다.
“본 안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에 앞서, 지난 겨울 사천의 난리를 겪었던 정무학관의 생도들이 찬조 연설을 하기로 했으니. 경청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언동생들을 이끌고 준비된 발언석에 나아갔다.
그리고 전생에 감명 깊게 읽었던 한 연설문의 첫마디를 가져다 쓴 발표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 * *
대군사님과 마찬가지로 당장에 합종군이 일어나는 것은 힘들 것이라 보는 나였지만.
초장에 대응할수록 천마신교의 위험성이 적어질 것임을 말하며 차분히 발표를 마쳤다.
“…이상입니다.”
내 발표가 끝나자, 장내 분위기는 정확하게 반으로 갈렸다.
한편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고, 다른 한편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탐탁지 않다는 듯 나를 쏘아보았는데.
이쯤 하여 맹주님께서 입을 여셨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작년에 같은 안건을 올렸을 때 치열한 갑론을박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기지수들은 이만 퇴장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반대하시는 분 있습니까?”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흙탕 싸움을 우리 앞에서 보이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없군요. 마침 점심때입니다. 숙수들에게 오늘 점심은 신경 써서 준비해두라 일렀으니, 후기지수들은 식당으로 이동해주길 바랍니다. 타격대 제 일각은 안내를.”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회의장을 나온 우리는 순번대로 차례차례 식당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 층에 있던 정무 학관의 병아리들과 합류를 해야 했던 터라, 우리는 맨 마지막 순번이 되었다.
“어? 호연찬 선배님 아니십니까?”
한데, 우리에게 배속된 타격대원은 다름 아닌 운매관의 전임 자치회장 호연찬이었다.
“하하하. 잘들 지냈나?”
“바쁘게 지냈죠. 선배는 좀 핼쑥해지신 것 같습니다.”
“생도 시절이 좋았어….”
“…그런. 그래도 이렇게 뵈니 반갑네요.”
“나도 그렇군.”
그와 청죽관 출신 졸업생 선배들을 비롯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무림맹의 식당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식당 앞에 다다르니, 또 다른 반가운 얼굴.
팽소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용운! 얘들아!!”
손을 흔드는 그녀를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림맹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습니다. 얼굴 보기 힘들어요.”
“너희 발표 준비하는데 괜히 방해할까 싶기도 했고, 스승님도 도와드린다고 바빴고 그랬어. 아, 발표 좋던데? 나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천하에 정도가 깊이 뿌리내린….”
“…거기까지만 합시다.”
그런 팽소진을 향해.
신입생들은 깍듯이 포권을 취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그에 팽소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나 작년에 학교 거의 통으로 쉬어서. 복학하면 수업같이 들을 것 같은데. 선배 대접을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그런 팽소진의 음성에.
병아리 삼인방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선배님은 선배님이죠. 아, 호칭이 불편하신 거면 언니라고 부를까요?”
“맞습니다! 한번 선배님은 영원한 선배님이십니다!”
“동기들 말에 동의합니다.”
나는 녀석들을 순서대로 소개했다.
“셋 다 소릉이보다 어리니까 누님이 편하게 안 대하면 족보 완전히 꼬입니다. 저기는 남궁영. 궁윤이 동생이고. 가운데는 해남파의 장 선. 여기는 독고철.”
그런 내 말에, 팽소진은 눈동자를 크게 키우며 내게 물었다.
“남궁윤 동생인데 저렇게 싹싹하다고? 오빠 쪽은 근데 왜 저래?”
“…….”
“거, 누님도 소천이 형이랑 다르잖아요. 심지어 쌍둥인데.”
“아…. 그건 그렇네. 아니! 잠깐만! 그전에 다 우리보다 어리다고?! 지, 진짜로?”
그렇게 팽소진과 회포를 풀고 있는 이때.
식당에 먼저 도착한 후기지수들이 온갖 이야기를 하는 중에, 백본회와 관련된 내용이 내 귀에 들려왔다.
“맹주님이 제의하신 합종군 건. 어찌 될 것 같소? 통과가 되려나?”
“통과는 어렵지 않겠소?”
“아까 발표한 자리에, 언용운 남궁윤 당옥기가 있었소. 하북 팽가는 진주언가와 의형제 사이고. 제갈설지도 언용운과 어울려 다닌다던데… 그럼 오대세가가 한 뜻인 거 아닌가? 거기에 사천에서 해를 입은 청성과 아미. 그리고 개방이 힘을 더하면 벌써 여덟인데?”
“해를 입었다 하여 지금 당장 합종군을 일으키자고 하겠소? 실상 제자들이 가장 많이 다친 두 곳인데. 나가 싸울 제자가 얼마나 되겠소?”
“그도 그렇군.”
“그리고 제갈세가는 이런 일에 신중하오. 설령 찬성한다 해도 소모될 양식(糧食)과 공격로를 검토해야 한다고 신중론을 말하지 싶은데?”
후기지수들의 생각들이 들려와, 나는 언동생들을 멈춰 세운 채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한데, 나는 이렇게 백도무림 전체가 모여서 이야기를 논하는 것 자체가 저놈들 기를 살려주는 거라고 보오.”
“빈도도 동의합니다. 그래봐야 백 년도 안 된 근본 없는 사교 놈들 아닙니까? 천마니 월마니 떠들어 대는데. 그 짧은 역사로 빚은 고수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흘러나오는 소리 중에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그 월마라는 자도 풍문에는 괴룡이 벤 것을 대군사님이 다르게 발표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후기지수 선에서 정리가 됐다는 건데. 맹주님이 작은 위험을 호도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그 마교라는 것이 그 옛날 검마라는 자를 추종하는 자들인데, 그렇다면 소림의 무학을 훔치려다 병신이 된 자의 후인들 아닙니까? 기실 별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나는 까드득 이를 물며 식당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방금 지껄인 새끼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