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거목 (2)
몇 수 더 배워야겠다는 내 말에.
“괴룡 시주. 호흡이 가빠 못 들은 모양인데, 노납이 방금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조언을 드렸다오. 나와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오.”
공덕대사는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조바심을 내지 마시오. 시주는 젊기도 젊거니와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소.”
들어보니, 수준 차이를 느낀 탓에 그런 청을 한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시간은 시주의 편이오. 천성이 둔하고 재주가 모자라 눈썹이 하얗게 셀 만큼 시간이 필요했던 노납보다 훨씬 빠르게 이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전혀 없다오.”
뭐,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공덕대사와 지도 대련을 한 탓에 수준차를 실감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나, 나는 조바심을 내는 게 아니었다.
“대사님. 저는 지금 조바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향상심 정도가 맞겠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공덕대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천마신교는 결코 중원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녹록한 상대도 아닙니다. 그걸 짐작하시기에 대사께서도 평생을 수련동에서 보내신 것이겠지요. 저는 훗날 뒤를 돌아봤을 때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청을 드리는 겁니다.”
그 말이 끝났을 때 연공장 안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덕대사는 선기 가득한 시선으로 내 진의를 가늠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민이 된다는 듯 수염을 쓸었다.
“하나, 시주는 공식적으로 근신 중이오. 노납이 배분을 앞세워 이곳에 들락거리면 맹주님과 대군사님을 곤란케 하지 싶은데? 뒷말들이 나올 수가 있잖소.”
그 말은 사실상 수련을 도와주는 것 자체는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노납이야 소림의 뒷방에서 수련이나 하며 지내는 늙은이라, 무림 동도들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상관이 없지만… 시주같이 장차 강호에서 할 일이 많은 젊은이가 나 같은 늙은이의 비호를 받는다는 인상을 얻으면 전정에 득이 될 것이 없소.”
하여, 나는 공덕대사가 걸려 하는 부분을 해소할 제안을 입에 올렸다.
“대사께서 지내시는 암자로 제가 가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내 제안에.
공덕대사는 눈을 키우며 입을 열었다.
“소림으로? 시주는 정무학관의 총학생회장인데. 이끌어달라 뜻을 모은 생도들은 어쩌고?”
곁에서 듣던 원철도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내가 머리를 깎겠다는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출가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근신 기간만 소림에서 지내고자 합니다.”
“그런 뜻이었구만.”
내 답에 공덕대사는 수염을 쓸었고, 원철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근신 기간 동안 연공실에서 원철스님과 수련이나 할까 했는데. 대사님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여기서 그러고 있는 것보다는 대사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무림의 큰 어른께서 따로 훈육한다고 하시면 반대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요?”
“그야 그럴 테지.”
“어차피 숭산은 학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기도 하니, 소림에 먼저가 있다가 일행들이 무림맹 견학을 끝내고 학관으로 돌아갈 때 합류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절차상의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자, 공덕대사의 고개가 드디어 끄덕여졌다.
“한데 성에 차시겠소? 시주께서는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무인이 더 높은 경지를 탐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오. 무라는 것은 끝이 없소. 되레 나와 함께 지낼 시간을 한정하면 더 큰 갈증을 얻게 될 수도 있다오.”
“그럴 수도 있겠죠. 하나, 저 스스로가 종종거린다고 조화경(造化境)이라는 경지로 단박에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해온 수련과는 다른 느낌을 조금 더 겪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 말에 답을 돌려드리자.
비로소 공덕대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시주의 뜻이 이다지도 확고하다면야.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합시다.”
* * *
공덕대사가 맹주님과 이야기해보겠다며 연공장을 나간 지 한참.
맹주님과 대군사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맹주님. 대군사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빈승 또한 이렇게 사과를 드립니다.”
두 분은 먼저 원철의 인사를 받아주셨는데.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원철스님.”
“대군사님.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꾸중을 듣는 와중인데 어찌 안락함을 찾겠습니까.”
“전후 사정을 다 파악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리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미타불, 말씀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러고는 나를 흘겨보셨다.
“…원철스님과 저를 보시는 눈빛의 온도 차가 심하게 나는 것 같은데요. 이거 기분 탓일까요?”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아주 시원하게 일을 저질렀더구나.”
“뒷감당은 우리한테 미루고?”
“미뤘다기보다는 두 분을 믿은 거죠. 헤헤.”
그런 두 분께 너스레를 돌려드리니, 맹주님께서 헛웃음 흘리시며 밖의 일을 전해주셨고.
“말이나 못 하면… 아무튼, 밖의 일은 큰일로 번지지는 않을듯싶구나. 이래저래 사안이 용운이 네 쪽이 유리한데 이렇듯 고개까지 먼저 숙였으니 다른 명숙들도 뭐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어서 각각 한마디를 더해오셨다.
“특히나 공덕대사께서 훈육의 명목으로 근신하는 동안 너를 소림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시던데. 그렇게까지 하면 정말로 꼼짝 마라지.”
“그런데 이게 용운이 네 의견이 포함된 결정이 맞느냐? 내가 이해하기론 데려다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투로 들리긴 했는데… 여기 원철스님이 계시지만 정말로 혼나러 가는 거라면 그렇게까지 할 사안은 아니다. 아무리 신승이라도 그럴 권한은 없으시니. 내가 막아 줄 수 있다.”
“제가 청한 것 맞습니다. 어차피 발표도 했고. 여기서 근신하는 것보다는 대사님께 한 수 배우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그래?”
“예. 그리고 제가 엄벌을 받는 듯한 느낌이 나는 게, 저랑 싸운 녀석들을 꾸중하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좋으실 거고요?”
그 말에 답하자, 대군사님께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셨는데.
“하여간에, 대단해요. 언용운. 심계가 안 섞인 게 없어요.”
그러다 말고 ‘아, 맞다.’ 소리를 내며 다시 입을 여셨다.
“너 구명하겠다고 옥기랑 다른 애들이 뛰어다닌 건 알아?”
“언동생들이요?”
“응. 각자 가문과 사문의 대의원들한테 부탁해서 과한 벌은 부당하다면서 의견을 전해왔더라. 직접 전해도 되는 말을 대의원들을 움직이다니… 이 녀석들이 용운이 네 밑에서 꼼수만 배워서는.”
“꼼수라뇨. 그건 대군사님이 저랑 바둑두실 때 두는 거죠. 고단수로 정정 부탁드립니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한데, 대군사님과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문득 뇌리에 간과하고 지나갔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각자 사문이라면 정현은 무당을 움직인 겁니까?”
“아마도? 명일 도사가 괴룡은 중벌을 받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고 말하던데. 그런 부탁을 할 사람이 정현밖에는 없지?”
“…흠. 무당과 정현 사이의 응어리가 풀린 걸까요?”
“음… 그런 분위기는 또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기야.
정현이고 명일 도사고 앞뒤로 꽉 막힌 인종들인데 극적인 무언가가 있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정현이 용기를 냈다는 정도로 보는 게 맞겠네.’
그렇다 하더라도 무당과의 관계에서 녀석이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정현도 대견했고, 다른 녀석들도 나를 구명하겠다고 동분서주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에 뭉클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하여,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는데.
“짜식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은 좋아 보이는데?
‘좋기는요. 굳이 그런 짓 안 해도 다 잘 풀릴 일이었는데요. 괜히 지들 발만 아프지.’
- …아비를 닮았느냐?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거라.
그렇게 사부님과 어울리고 있자니, 맹주님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공덕대사께서는 너와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소림으로 가겠다 하시던데. 아이들과 면회를 하겠느냐? 지금 불러다 줄까?”
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맹주님께 답했다.
“이야기를 안 하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맹주님을 곤란하게 하는 분들이 언동생들 반응을 보고, ‘언용운이 진짜 벌을 받는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대군사님께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여신 것은 이때였는데.
“그야 그렇긴 하겠지. 그런데 방금은 애들한테 감동한 눈치더만? 그냥 가려고?”
“짜식들이 기특한 거는 사사로운 일이고, 이번 일을 어찌 매듭짓느냐는 무림맹의 일이니 별개죠.”
“애들 원망은 어쩌고?”
“…죄송한 말씀인데, 그 정도는 두 분께서 감당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뒷마무리하시기 쉽게 이렇게 판을 깔아 드렸잖아요?”
“와. 지독하다 지독해. 너보고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말 모조리 취소할래… 맹주님 저는 용운이가 무림맹에 들어오면 은퇴할 거예요. 얘랑 일하면 제 명에 못 죽지 싶네요.”
- 좌견천리라는 별호를 허투루 얻은 것은 아니로다. 설지는 제 팔자를 스스로 꼬았는데. 고모 되는 쪽이 확실히 낫긴 낫구나.
“하하하. 저도 같이 나가겠습니다. 낚시나 하러 다닙시다.”
대군사님과 무림맹주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셨지만, 난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다.
언동생들을 제외하고 사정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남아있던 탓이었다.
“아, 약왕 어르신이랑… 독고철한테는 말해 놓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응용이 좀 들여보내 주십시오.”
* * *
맹주님과 대군사님 그리고 나와 공덕대사의 의견이 일치하는 상황.
내가 소림으로 간다는 결정은 곧바로 이루어졌고.
찾아온 다음 날.
동이 채 트기 전인 새벽녘.
“맹주님. 노납은 이만 소림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용운이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나는 원철과 함께 날 듯이 걷는 공덕대사의 걸음을 부지런히 쫓아 나가기 시작했다.
무림맹이 있는 낙양에서 숭산이 있는 등봉현까지는 고수가 걸음을 서두르면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기에.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수의 향화객의 행렬과 누런 승복을 입고 있는 숱한 제자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 무당도 제자와 향화객이 많다 싶었는데, 소림에 비하면 새 발의 피로구나.
‘소림은 소림이니까요. 송나라 시절에 이미 승려가 팔천 명이 넘게 숙식을 했다던데 이 근방에 있는 사람 다 합치면 저것조차도 새 발의 피죠.’
그렇게 나는 백도 무림의 거목.
천년 거찰(巨刹) 소림의 산문에 발을 들였는데.
공덕대사의 걸음에 누런 승복을 입은 제자들이 줄줄이 반장을 해오는 와중.
원철이 신이 나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왔다.
“저쪽이 불경과 비급들을 보관하는 장경각입니다! 아, 저기는 계율원. 제자들이 혼이 나곤 하는 곳이지요. 그리고 저기는 손님을 접객하는 지객당입니다. 보통 저리로 향하는데 괴룡 시주는 바로 방장실로 가는 모양입니다?”
“원철스님.”
“예! 시주!”
“저희가 일단 지금 근신 중이거든요?”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신나 보이시거든요. 지금.”
“아? 제, 제가요? 큼. 조심하겠습니다.”
어째선지 신이 나 보이는 원철과 함께 소림의 경내를 걷기를 잠시.
나는 소림의 방장 공효대사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오랜만이구려 괴룡.”
“예. 대사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름대로 일이 많긴 했으나, 북해로 사천으로 뛰어다닌 괴룡에 비할 바는 아니외다. 뭐, 안부 인사는 이쯤하고 오느라 시장하실 텐데… 원철과 함께 아침 공양을 좀 들고 계시겠소? 공덕사제와 괴룡을 어찌 대접할지 의논을 좀 해야겠소이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나는 원철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원철과 공덕대사가 지낸다는 암자에 가 있으니.
공덕대사가 돌아와 말했다.
“노납은 바로 수련에 들어갈까 하는데… 따라나서시겠소?”
대사의 걸음을 따라나서니, 양 갈래 갈림길 앞에 놓인 두 개의 동굴이 보였다.
대사는 그 앞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른편은 평소에 나와 원철이 수련을 하는 수련동이고. 왼쪽은 무간동(無間洞)이라는 곳이오.”
“아. 저기가 바로 무간동이군요?”
“무간동이 어떤 곳인지 알고 계시오?”
모를 리가 있나.
무간동은 불가의 십 지옥을 본떠 만든 시험의 장으로, 소림의 제자가 필히 거치는 관문이었다.
‘지옥순례.’
본인의 수준과 그릇에 따라 난도가 달라지는 저 시험의 장은 소림의 제자들이 여타 후기지수들에 비해 심신이 모두 단단한 이유 중 하나였다.
‘비슷한 것을 다른 문파와 정무학관의 교수들도 연구하고 있으나, 원조만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덕대사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하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방장사형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괴룡이 기간을 정해 놓고 머물기로 한만큼. 내 수련을 따라다니는 것보다, 지옥순례를 한번 경험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시주의 의견은 어떻소?”
이런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다.
‘소림의 제자만 거치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생각도 못 했는데.’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지옥순례를 해보겠습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자.
공덕대사의 손가락은 무간동을 가리켰다.
“하면, 좌측의 동굴로 가보도록 하시오.”
나는 주저 없이 공동 안으로 들어갔다.
쿠구궁-
이윽고 문이 닫히더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경 읊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는데.
당장에 내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생부터 이어진, 혼에 깃든 정신 면역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사부님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심상의 문을 열어서 진법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정신 면역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겠지.’
하지만 해볼 만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과 쌓아온 시간들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이 관문을 모두 돌파했을 때. 나는 반드시 강해져 있을 것이다.’
생각과 동시에 나는 심상의 걸쇠를 젖혔다.
그러자, 도산지옥의 날붙이들이 나를 향해 쏘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