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18화 (318/444)

제318화. 소림이 걱정 되는구만 (4)

내가 기수식을 취하며 나한승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는 때.

사부님께서 한마디 읊조리셨다.

- …예나 지금이나 소림은 변한 것이 없구만.

얼마 전의 내가 이 말을 들었다면, 그저 나한승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두고 사부님의 시절과 비교를 하시는구나 했을 것이다.

하나, 심신에 뒤덮여 있던 허물을 한 꺼풀 벗어던진 터인지라.

그 말이 조금 다르게 와닿았다.

‘느껴진다. 나한승들의 동요(動搖)가.’

살짝 악다무는 입.

찌그러지는 눈썹.

자신도 모르게 고쳐 쥐는 장봉(長棒).

수양이 부족하여 쿡 찌르면 바로 반응이 오는 이들과 달리 나한승들은 본인의 위치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긴 했지만, 저들은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이전의 나였다면 그저 위압감을 느끼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저들의 태도 속에 내재 된 어떠한 감정까지 느낄 수 있었다.

‘천년 소림을 향한 자부심.’

소림의 자랑 중 하나인 백팔나한진이 이제 막 약관을 넘었을 뿐인 이에게 꺾일 리 없다는 믿음.

본인들이 백도무림을 지탱해온 거목에서 피어난 잎사귀라는 자긍심.

나한승들에게서 묻어나는 감정을 파악하고 나니.

난 화경의 고수도 능히 제압하고야 만다는 백팔나한진을 눈앞에 두고도, 왜 질 것 같지 않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들은 지금 내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을 천년 소림의 역사에 기대어 상쇄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기야 했을 것이다.

지난 정마대전 이래 소림은 독존했다.

시대는 평화로웠고 백도무림의 모든 방파는 소림을 향해 존경을 표했다.

정무학관과 치러온 교류전이 있었으나, 그 역시 한 수 아래의 상대에게 소림의 무를 자랑하는 자리일 뿐이었을 것이다.

‘백여덟 나한이 동시에 나설 일은 공덕 대사 같은 분께 가르침을 받을 때를 제외하면 없었겠지.’

소림이 거둔 찬란한 역사와 달리, 경험이 결여된 나한들.

겉보기엔 그럴듯해도, 그 대열은 주먹만 한 구멍만 나도 와르르 무너질 터였다.

나는 씩 웃으며 회한을 세웠다.

“안 오면 내가 가지.”

그리고 땅을 박찼다.

물론, 방심해도 좋을 상대는 아니었다.

쌔애애애액!

대저 나한승이라 하면, 숱한 소림의 무승들 중에서 가리고 가려 뽑힌 이들.

썩어도 준치라고, 나한승들은 내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자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샤샤샤샤샥-

정진대회에서 견식한 바 있는, 하나가 다수가 되고 다수가 하나가 되는 일즉다다즉일의 묘리에서 기인한 백팔나한진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처처척!!!!

숱한 장봉들이 고슴도치처럼 뻗어져 나와 내 진로를 막으려 했고.

휙! 휙! 휙! 휙! 휙!

그렇게 뻗어져 나온 봉초들은 쾌초와 변초를 일삼으며 내 오감을 휘저어 나를 사지(死地)로 몰려 했다.

하나, 나는 그런 초식에 현혹되지 않았다.

‘만(卍)자를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군.’

몸은 나한승들의 틈바구니 한복판에 섞여 있는 나였지만.

지금 나는 하늘에서 저들을 내려다보는 느낌으로, 나한승들의 표정과 투기, 밟아내는 보법들을 한눈에 담고 있었다.

그런 감각 속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소림의 나한진을 상대하다 떠올리셨다는 검초를 시전했다.

‘파천학무.’

채작진을 시연하는 청죽관 생도들을 상대하다 사부님께 전수받은 이래.

채채채챙!!!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마다 써먹어 온 검초였지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지금까지는 그저 사부님의 발자취를 좇는 것에 급급했다면.

‘뒤에서 치고 오는 적을 견제하는 동작이 왜 없는가 했는데….’

오늘은 그 걸음들의 진의가 이해되고 있었으니까.

챙! 챙!

채채채애앵!!

‘이런 감각 속에서 검을 휘두르면 애초에 대처할 수 있거니와, 상대 쪽에서 홀로는 당하고 만다는 두려움에 빠져 무리 짓지 않으면 덤벼들지 않는구나.’

채애애애앵!!!!

그렇게 사부님의 걸음을 무아지경으로 따라잡다 보니.

자연히 나한진의 요소요소를 쑤시고 다니게 되었고.

“컥!”

“어흑!”

몇몇 나한승들이 날아가 처박힘에 따라, 다른 제자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사, 사제들이?!”

“어, 어째서 괴룡 한 명에게? 백팔나한진은 무적일 텐데….”

사실 백팔나한진은 나한 몇 명이 나가떨어진다고 무너지는 그런 허접한 합격진이 아니었다.

“사, 사형! 괴룡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선 듯 단단한데. 우리만 나가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 절대다수를 점하고 시작됐던 싸움이 예상외로 팽팽하자 제자들 사이에 당혹감이 번지기 시작했고.

“사념을 갖지 말고 본인의 위치와 역할을 사수하는 데 집중하라!”

주축이 되는 열여덟 나한이 목청을 높이며 다른 제자들을 다그쳤지만.

철통같이 단단하게 느껴지던 나한진은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뒤였다.

쌔액! 쌔액!!!

쌔애애액!!!!

여기서부터는 그야말로 내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나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제자들을 골라 공격했다.

그렇게 말 그대로 종횡무진하며 나한진을 헤집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부님이 전수해주신 파천학무의 형에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입버릇처럼 하시는 너는 너의 길을 가라는 그 말씀. 그건 그저 인간사의 은원관계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나는 소릉이를 통해 익히게 된 비영파천보를 사용해 초식에 속도를 더했으며.

팟!

노삼 교수님과 만복 방주님께 전수받은 항룡장 또한 거리낌 없이 내뻗었고.

꽈르르릉!!!!

펑!!!

운등류에서 비롯된 파천권법도 필요에 따라 내뻗었다.

휙! 휙! 휙! 휙! 휙!

퍽! 퍽! 퍽! 퍽! 퍽!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이, 최초에 백여덟이었던 나한들은 구십이 되었는데.

구십에서 일흔둘, 일흔둘에서 서른여섯.

서른여섯에서 다시 열여덟이 되었을 때.

쌔액! 쌔액! 쌔액! 쌔액!

쌔액! 쌔액!

나한들이 일제히 내질러 온 장봉을 일 검으로 틀어막았다가, 퉁겨내고 나니.

카앙!!!!!!!!!!!!!

시야가 확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사부님의 음성이 이어졌다.

- 호오. 조화경의 초입이라 불러도 좋을 법한 경지에 이르렀구나?

*    *    *

회심의 일격을 가한 열여덟 나한이 동시에 붕 떠서 날아가는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림의 무승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런!”

“배, 백팔나한진이! 괴룡 한 명에게 깨어졌단 말인가?!”

그렇게 입을 쩍 벌린 이들 중엔 원철도 있었다.

원철은 내심으로 언용운을 친구라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홀로 백팔나한진을 깨부순 친구의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그와 별개로 소림의 자랑이 박살이 나는 모습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소, 소림이 괴룡 한 사람에게….”

하여, 원철은 자기도 모르게 위안거리를 찾고자 혼잣말을 입에 담았는데.

“스, 스승님과 사숙들까지 아니더라도. 사대 금강도 계시고… 파, 팔대호원이나 사형들이 나서신 것은 아니니까.”

그러자마자, 공덕대사의 불호령이 떨어져 내렸다.

“눈앞의 광경을 뼈아프게 받아들여도 모자랄 판국에 그 무슨 자기 위로냐!”

그렇게 운을 뗀 공덕대사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천년의 거목이 숭산에 웅크려 말라 비틀어진 고목 나무가 되어가는 사이, 천하 사람들에게 망나니라 손가락질을 당하던 천덕꾸러기가 저리 꽃을 피웠구나.”

백도무림을 대표하는 후기지수의 성취는 그야말로 강호의 복이었다.

하나, 눈앞의 광경은 소림의 지난 백 년을 비추는 거울이나 다름없었다.

“괴룡. 그야말로 괴룡이로다.”

언용운이 내뻗은 주먹은 진주언가의 언가권이었고, 내지른 장력은 개방의 항룡장이었으며.

내딛는 걸음은 언젠가 마주친 적 있는 뇌전편복의 걸음과 닮아있었다.

‘…검술은 파천검법일 테고.’

소림의 제자들이 숭산에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가는 동안, 검마의 후인은 강호를 주유하며 천하를 호령할 용으로 거듭났다.

그 용의 복심이 숭산이 아닌 십만대산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하나, 검마에서 뻗어 나온 다른 가지가 있었다.

‘십만대산이라고 저런 용이 출현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마도가 어찌 마도인가.

강해지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의와 도리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마도인 것이다.

낙양의 무림맹에서 대의원이랍시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백 년도 안 되는 역사를 가진 천마신교에 고수가 있어 봐야 몇이나 있겠냐는 주장을 했었으나.

눈앞의 언용운이 바로 그들의 말이 허튼소리임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좌였다.

‘…….’

공덕대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복잡한 눈을 하고 있는 공효대사를 향해 말했다.

“…방장 사형.”

“…….”

“소림이… 바뀌어야 할 때가 온 듯합니다.”

“…….”

그런 공덕대사의 말에.

공효대사는 제법 긴 침묵을 곱씹은 끝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공덕대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연무장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언용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소림이 졌소이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날아갔던 열여덟 나한승들이 기함(氣陷)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찌 신승께서 직접! 그리고 저희가 진 것이지 소림이 진 것은 아닙니다!”

“예! 패한 것 자체에도 애석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제자들이 당황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겨룬다면 이렇게 패하지는 않을 것….”

그런 나한승들을 향해 공덕대사는 다시 한번 불호령을 내렸다.

“아둔한지고! 괴룡이 백도 무림의 적이었으면 너희 중 대다수가 오늘 싸움에서 명을 달리했거늘! 어찌 다음이 있을 수 있느냐?!”

“…….”

그에 나한승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공덕대사는 얻어맞은 표정들이 된 나한승들을 뒤로하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천축에서 경율론이 건너온 이래, 숱한 선사들이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설파하며 함께 깨달음의 경지로 가야 함을 말씀하셨음에도, 이 아둔한 중은 홀로 벽만 보고 있었구려. 그리하여 내 한 몸 건사할 재주는 닦았으나, 다가올 위난에서 소림의 제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는 잘 모르겠소. 그에 관한 시주의 생각을 노납에게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소?”

공덕 대사의 말에, 언용운은 난색을 표했다.

“말학 중에 말학인 제가 어찌 감히 신승께 얄궂은 소리를 주워 올리겠습니까. 천하 사람들이 경을 칠 일입니다.”

“허허. 누가 감히 화경의 반열에 든 고수 더러 말학이라 하겠소. 더욱이 마교에 관한 일은 백도무림에서 시주보다 앞에 있는 이는 없을 것이고.”

하나, 공덕대사가 재차 청하자.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면…. 우선 이름뿐인 교류전 말고, 제대로 된 교류를 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제대로 된 교류?”

“예. 무간동을 개방해주시고. 소림의 제자들이 정무학관의 후기지수들과 같은 전선에 서게 되었을 때. 위화감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교류법을 익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나온 의견에, 이번엔 공덕 대사가 난색을 표했다.

“하나, 소림이 무간동을 타에 허락지 않는 것은 며칠 전에 시주에게 이야기하였듯 광인이 될까 염려돼서라오. 아무나 들여보낸다고 시주처럼 성취를 얻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되레 심마에 빠지게 될 수가 있소.”

“그 점은 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저를 봐주셨던 것처럼, 대사께서 살펴보시고 견뎌 내겠다 싶은 녀석들은 허락해주십사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 언용운의 말을 들어보니.

무간동을 마냥 성취의 장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에 공덕대사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언용운이 말한 두 번째 방법에 관해 물었다.

“그렇다면야 제한적으로는 가능하겠지… 한데 후자는 정확히 어떤 교류법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러자, 언용운이 씩 웃으며 답했다.

“후자는 지금 바로도 시작이 가능할 거 같긴 한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제자들을 집합을 시켜주시면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말이오?”

“아, 근데 제가 대사님을 급히 따라온다고 제 짐을 안 챙겨 왔는데… 붉은 천은 가사(袈裟)에 쓰실 테니 당연히 있을 거고. 혹시 여기 호각 있습니까? 현철로 된 족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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