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23화 (323/444)

제323화. 싸울 것입니다 (2)

무당의 살림을 총괄하는 원화궁.

명한은 소속 제자들과 입문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여기 이 향들은 자소궁의 왕령전에 가져다 놓고. 운덕은 옥허궁에 가서 오늘 입문례를 치를 도동들에게 지급할 목검을 다시 한번 확인하거라.”

무각주 명일이 찾아와 입을 열었다.

“사제 바쁘신가?”

“바쁘지는 않습니다. 그냥 제가 원화궁을 맡고 나서 처음 치르는 입문례라, 혹시나 미흡한 것은 없는지 두 번 세 번 살피는 거죠.”

“그럼 차 한 잔 내어주겠나?”

“안 그래도 목이 컬컬하던 차였습니다. 거기 앉으십시오. 금방 내어드리겠습니다.”

본디 원화궁을 책임지던 이는 태허자와 명균이었다.

그들이 일련의 사태와 함께 참회동 신세가 되는 바람에 갑작스레 명한이 이곳을 맡게 되었기에.

무당의 장로들과 사형들이 노파심에 찾아오는 일이 잦았으나, 오늘 명일이 걸음 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쪼로록-

명한은 차를 따르며 머릿속에 스친 생각을 말했다.

“정현 때문에 오셨습니까?”

“귀신이구만.”

“평생을 사형들과 동고동락했는데요. 이젠 척 보면 보입니다.”

명일은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맞네. 정현 때문에 왔다네. 이번 입문례에 정현을 초대한 일이 과연 잘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아서 말이야.”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흠.”

“녀석이 대공을 세워도 잘했다 칭찬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목숨을 걸었다가 살아 돌아와도 고생했다 위로 한마디 해주지 못하는 지금이 맞다고 보십니까? 단둘뿐이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태허 사숙은….”

“사제.”

“…아무튼. 사형도 정현의 성품을 모르시지 않지 않습니까? 녀석이 정말로 무당의 사형제들을 믿지 못해서 그랬겠습니까? 입버릇처럼 도(道)를 찾던 녀석입니다. 믿어 의심치 않던 사문의 비위(非違)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사제. 나는 지난 일을 두고 방금의 말을 한 게 아니네.”

“그러면요?”

“사제가 하도 성화인데다가, 먼저 대사형을 설득을 해버려서 나도 허락을 했네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운자배, 정자배 아이들이 정현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한 말일세.”

명일은 찻물을 들이켜 목을 축인 뒤, 재차 입을 열었다.

“무림맹에서 괴룡의 편을 들어준 일로, 이대 삼대 제자들의 입이 튀어나와 있던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나?”

“…알고 계셨습니까?”

“사제가 나서서 단속한 것까지 알고 있네.“

”크흠.“

“진산 제자들의 분위기가 그렇고, 정현 이 녀석은 그런 사형제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모르겠고… 그냥 흐르는 대로 두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일세.”

“흐르는 대로라….”

“정현 스스로 무당의 제자라는 자각은 있으니, 강물이 흘러 바다로 나아가듯 서로 간의 도가 언젠가는 통하지 않겠나?”

명일의 말에, 명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전에 나올법한 정론입니다만. 세상 모든 게 저절로 도로 통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사형도 아시지 않습니까?”

“…….”

“때로는 물꼬를 터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정현도 다른 제자들도 아직 미숙한 나이입니다. 이 사제는 가만히 두는 게 더 깊은 골을 만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 젊은 혈기들이 부딪히면 그 미숙함들이 반드시 충돌을 낳을 걸세. 부스럼을 긁는 일이 될 수가 있어.”

그렇게 두 도사가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던 때.

무당의 이대 제자 한 명이 급히 달려와 입을 열었다.

“명일 사숙!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이냐?”

“정현이 해검지에 당도했습니다.”

“콕 찝어 정현을 말하는 것은 녀석이 혼자 왔다는 이야긴가? 괴룡이나 동기들 없이?”

“예. 한데, 젊은 제자들이 허락도 없이 정현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명일은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맞으러 간 게 아니라, 막으러 간 것이겠지. 거보게. 일이 이렇게 된다니까. 내려가 보세.”

명한은 그런 사형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두십시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조금 전에 말씀하시기를 강이 흘러 바다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한데, 강물의 여정이 과연 순탄하기만 합니까? 바위에 부딪혀 돌아가기도 하고 흙탕물과 섞이기도 할 겁니다.”

“…겪어야 할 진통이란 말인가?”

“정현은 어려서부터 태청검수가 되겠다 노래를 불렀고. 이대제자들은 녀석을 아꼈습니다. 달려간 녀석들의 심부에 증오만 있겠습니까? 다른 감정도 있을 것입니다. 터트려야 낫는 종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현이 어찌 받아들이느냐는 또 다른 문제일세.”

“사형은 무림맹에서 정현을 보셨습니다. 보시기에 어떠했습니까?”

“…….”

“제가 본 정현은 무당에서 지낼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천하를 주유하며 많은 도를 담은 듯했습니다. 사형께서는 정현이 사형제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하셨지만….”

여기까지 말한 명한은 해검지가 있는 방면을 응시하며 말을 맺었다.

“낙양에서 사형을 그리 뵙고 가서, 다시 이렇게 무당에 왔다는 건. 녀석 나름대로 준비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     *     *

무당파의 본궁이 있는 도관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해검지(解劍池)라 부르는 연못을 거쳐야 했는데.

정현이 그곳을 지나려는 때, 무당파의 젊은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걸음을 가로막았다.

그에 정현은 포권을 취했다.

“…사숙. 사형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 정현의 인사를 무당의 제자들은 코웃음을 치며 받았다.

“예. 사질 참으로 오오랜만에 뵙습니다.”

“천하에 위명이 자자하신 검룡이 오셨습니다 그려.”

“홀로 고고하신 우리 사질께서 누추한 무당에는 무슨 일인 걸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무당산에 오르면서도 정작 본궁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녀석입니다. 그런 녀석이 도동들이 입문례를 치르는 오늘 찾아온 이유가 뭐겠습니까?”

“무당이 사실상의 봉문에 들어가게 만든 녀석이 선배 대접은 또 받고 싶은 모양이군.”

무당의 제자들은 날이 선 말을 쏘아내며 위협적으로 걸어왔다.

저벅저벅.

그에 정현은 뒷걸음질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현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은 ‘사숙조의 초대를 받고 온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하나, 정현은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형식적으로 입문례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정현은 눈을 감았다.

얼마 전, 소림의 무간동에서 겪었던 시련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무간동의 일곱 지옥.’

그중 다섯 번째 관문에선 정현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향해 검을 겨눠야 했다.

손이 벌벌 떨렸고 가슴이 찢기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환영들엔 언동생들도 있었지만, 무당의 사형제들도 있었다.

‘언동생들이 가족이라면 무당은 집이다.’

당시 그들을 베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들로부터 적대를 당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무당의 사형제들도 아마 그런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옳은 일이었다.

하나 그 여파에 휘말릴 이들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고.

스스로 사형제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옳은 일이니 언젠가 사형제들도 이해해주겠지 생각했다.

‘…도망친 것이다. 내가 무당에 응석을 부린 것이니, 운혁 사숙의 말도 맞다. 내 쪽에서 밀쳤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야.’

의기투합을 하고, 때로는 속상해도 하고.

섭섭하면 섭섭하다 투정도 하고, 그러다 딱밤을 맞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은 같이 모여 밥을 먹고.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언 소협이었다면 달랐을 텐데….’

그러자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또렷해졌는데.

무리에 섞여 있던 운혁이 입을 연 것은 이때였다.

“정현. 때를 잘못 잡은 것 같다. 네가 참석할 자리가 아닌 듯하니, 학관으로 돌아가라.”

정현은 내딛던 뒷걸음을 멈추고 엷은 숨을 토해냈다.

“하.”

그리고 눈을 떴다.

“저는 무당의 제자입니다. 장문인께 받은 송문검이, 사형제들과 함께 받은 정현이라는 도호가, 제 안에 자리 잡은 무당의 심결이 그걸 증명합니다.”

“…….”

“제가 입문례에 참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꼴을 못 보겠다면? 막는다면 어찌할 것이냐?”

“싸울 것입니다.”

“뭐라?”

“그리고 화해할 겁니다. 해검지에 매번 오면서도, 사형제들이 저를 보는 것이 고역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걸음을 돌려왔습니다.”

운을 뗀 정현은 거침없이 남은 말을 뱉었다.

“하나, 곱씹어보면 기실 제가 두렵기도 했습니다. 더는 뒷걸음 치지 않을 것입니다. 마주할 것입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매일매일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송문검을 뽑아 바닥에 꽂은 뒤.

“제게 섭섭한 것이 있으시다면 말이든 몸이든 얼마든지 토로하십시오. 분이 풀리실 때까지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지만 길은 비켜 주십시오.”

*     *     *

사형제들의 몰아붙임에 정현이 뒷걸음질 치는 동안, 나와 언동생들의 엉덩이가 몇 번이나 들썩였는지 모르겠다.

하나, 정현은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시간이 헛되지 않다 싶을 정도로 자기주장을 펼쳐냈다.

“우리 정현이가 달라졌어요.”

- …뭐냐 그 요상한 말투는.

그에 잠시 찡함을 느끼고 있는 이때.

“엇!”

“소릉아. 쉿.”

“…아. 넵. 근데 정현 도장이랑 다른 도장들. 싸우는데요?”

무당의 제자들 중 몇이 얼굴을 붉히는가 싶더니.

파파파파팍!

저들도 송문검을 땅에 박아 넣고는 정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쌔액!!

쐐애액!!!

성질을 못 이겨 달려드는 듯하였으나, 명문은 명문.

휙! 휙!

휘휘휙! 휙!!!

무당의 제자들이 펼치는 권각술엔 특유의 부드러움이 묻어나오는 가운데 절도가 있었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수세를 펼치는 정현의 동작엔 여유가 있었다.

그에 놀란 토끼눈을 했던 우소릉의 목소리에도 여유가 돌아왔다.

“근데 다들 검수(劍手)로 알고 있는데, 검은 바닥에 꽂고 주먹으로 싸우시네요?”

“해검지잖냐.”

“아? 해검지에서 검을 푸는 건 외부인만 해당 되는 규칙 아니었나요?”

우소릉의 되물음엔 제갈설지가 답했다.

“해검지에서 검을 푸는 건 규칙이라기보다는 무당의 개파조사이신 장진인께 보내는 예의 같은 건데요. 지금 정현 님이나 다른 무당의 제자분들이 좋은 마음으로 대련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다투고 있는 거니까… 아무래도 보여드리기가 부끄럽나 보네요.”

그런 제갈설지의 말에 당옥기가 한마디를 하는 때.

“바보들인가? 부끄러우면 싸우지를 말지.”

정현이 곡예를 하듯 몸을 비틀며 연달아 들어온 공격을 기가 막히게 빗겨냈다.

그리고 말아쥔 주먹을 태극을 그리며 펼치더니, 장력을 내뻗었다.

뻥!

뻐엉!

그에 무당의 제자 둘이 나부끼듯 튕겨 나갔고.

은하연은 정현의 무위를 지켜보다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복귀하셨을 때 기도가 달라 보이시긴 했지만, 직접 보니까 눈을 비비고 싶을 정도네요.”

“확실히 진일보하긴 한 듯하오.”

“예. 원래도 몸의 움직임이 부드러우셨는데, 마치 유영하는 듯하네요. 상대의 동작을 정확히 보시면서 쳐내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요. 주먹으로 수세만 하시는데 저 정도인데… 검까지 쥐면 무시무시하겠는데요?”

그런 은하연의 말에.

어째선지 남궁윤이 헛기침을 하는 이때.

“흠흠.”

나는 은하연을 다독이며 말했다.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소. 검을 쥔 세월을 생각하면 은 소저의 성장이야말로 놀라울 정도고, 소림과 앞으로도 계속 교류하기로 했으니 다른 사람도 준비가 되면 신승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받게 될 거요.”

그렇게 정현과 무당의 제자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지 한참.

슬슬 정현이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현은 미련하게 수비에만 전념하다가, 제 사형제들 중에 지쳐 보이는 이가 보일 즈음 가볍게 일장을 넣어 이탈시키고 있었는데.

몰려나온 녀석들만 마흔은 돼 보였고.

소식을 들은 다른 무당의 제자들도 속속 모이는 게 보였다.

‘그중에 목덜미의 깃에 송문이 새겨진 무복을 입은 사람은 무당의 자랑 태청검수들인 것 같고.’

저런 식으로 될 일이 아닌데.

그 같은 생각이 내 머릿속에 스치던 때.

일장을 허용한 정현이 바닥을 굴렀다.

우당타탕.

그에 나는 쪼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며 다른 언동생들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더는 안 되겠다. 가자.’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언동생들과 함께 수풀을 헤치고 나갔다.

“아니. 수련을 하다가 목이 말라서 무당에 물 한잔 얻어 마시러 왔는데. 우. 연. 히. 아주 우연히 이 광경을 봐버렸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