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24화 (324/444)

제324화. 싸울 것입니다 (3)

정현은 사형제들의 손속을 받아내는 와중에, 뒤쪽 수풀에서 어떤 기척을 느꼈다.

하나, 거기서 언용운과 언동생들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설마 했는데.’

혼자 다녀오겠다고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했는데, 따라올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에, 정현의 마음속에 일말의 서운함이 차올랐는데.

‘언 소협이시라면 이 일은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할 일임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 빈도가 그렇게나 미덥지 못하신가?’

정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언동생들이 짜 맞춘 듯 입을 열었다.

“오늘 무당파가 입문례를 치른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무당의 도사님들이 다투고 있는 걸까요? 대련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나마 은하연은 어투가 안정적이었으나.

이어서 입을 연 우소릉은 목각인형이 삐걱거리는 듯했고.

“그. 러. 게. 요?”

남궁윤과 당옥기는 전공 서적을 낭독하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래서는 물 한잔 얻어 마실 분위기가 아닌 듯하다.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하다.”

“남궁윤아. 그게 무슨 소리니? 정무학관의 생도인 우리가 어떻게 이런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어?”

그렇게 잡극(雜劇)의 말단 예인들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어색한 발연기들이 언동생들의 입에서 새어 나왔고.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인 언용운은 정현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연신 딴청을 피웠다.

“흠흠.”

그런 언용운과 언동생들의 모습에서, 정현은 그들이 자신이 섭섭해할 것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언동생들의 행색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땀에 전 수련복과 현철 족쇄.’

나름대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려고 저런 차림을 했을 것이다.

‘…언 소협의 성정상 겸사겸사 수련도 하자는 뜻도 있었겠지.’

그리고 먼저 출발한 정현을 따라잡기 위해 무당산의 험곡을 열심히 기어올랐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정현의 얼굴에 그만 웃음이 번지고 말았다.

“푸흡.”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린 정현이었으나.

홀로 가겠다던 의지를 따라주지 않은 섭섭함은 못내 남아있었다.

정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볼멘소리를 섞은 채 입을 열었다.

“원시천존. 아주 야행복도 입지 그러셨습니까?”

그러자 은하성이 언용운에게 급히 귓속말을 속삭였는데.

“…용운 형님. 정현 도장이 비꼰 것 같습니다.”

“…그러게. 비꼬기도 하고. 하성이 네 말대로 저거 무늬만 도사가 다 됐다.”

“…….”

“…눈치가 역시 섭섭한 모양인데요? 거 보십쇼. 제가 연극 같은 거 시키면 망할 거라고 했잖습니까.”

“이런 건 망하고 자시고가 없어. 그냥 우기면 되는 거니까.”

두 사람이 들으라는 듯 쑥덕이기를 잠시.

언용운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대낮인데 뭔 야행복이야.”

“하기야 새카만 옷은 되레 눈에 뜨이긴 했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수련하다 우연히 왔다니깐? 여기 애들 찬 족쇄들 안 보이냐?”

“잘 보입니다. 한데, 언 소협께서는 제가 드렸던 말씀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기억력이 상당히 좋으신 것으로 빈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섭섭해하지 마라, 너를 못 믿어서 따라온 게 아냐. 그리고 방금 웃었잖아? 원래 이런 건 웃은 시점에서 용서해 줘야 해. 진시황릉에 그려진 벽화랑 대명률에도 나와 있어. 제갈 소저, 그렇지 않소?”

“그… 렇죠? 진시황릉이 어디 있는 줄은 모르지만. 발견만 하면 그 안에 분명 그런 벽화가 그려져 있을 것 같네요.”

괜히 너스레를 떨며 둘러대는 언용운과 맞장구를 치는 제갈설지.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언동생들의 모습에, 정현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모두 제 걱정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곧 진지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정말로 빈도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겠다는 녀석이 해검지도 못 넘고 구르고 있으니, 우리가 걱정이 돼 안돼.”

“하지만, 사문과의 일은 빈도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자해지라 하였습니다. 얼마가 걸리든. 산을 옮기는 우공(愚公)의 심정으로 사형제들의 마음을 녹여볼 것입니다.”

그런 정현의 말에, 언용운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누가 하지 말래? 우리도 결자해지 하는 거 찬성이다.”

하나, 정작 돌아갈 태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예? 한데 말씀과 행동이 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입문례에는 네가 참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게 우리 생각인데, 정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모든 사형제를 하나하나 다 받아주어서 어떻게 참석할래? 하루가 백 시진쯤 되는 것도 아니고. 너도 슬슬 지쳐 보이던데?”

“그건….”

“조금 전에 네가 그랬잖아? 사형들과 다투겠다고 그리고 화해하겠다고. 그러기 위해 매일매일 올 거라며? 우공처럼?”

“…예. 그랬습니다만.”

“너랑 우리는 매일 같이 부대끼는데, 그런 네가 매일 무당을 찾다 보면… 어떤 날은 우리도 함께 찾는 날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냐? 정현 네가 나와 같이 진주언가에 갔던 것처럼?”

“…어. 예?”

“언젠가 있을 그 날을 오늘로 당긴다.”

자신의 말에 정현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때, 언용운은 무당의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운경! 운경 도장 계십니까?! 안 계시는가?”

그리고 운경이 자리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정현을 향해 말했다.

“운경 도장이 운자배의 대제자 맞지? 내려와 있지는 않으신가 본데?”

“아. 예.”

“우리가 적당히 길을 터줄 테니까. 너는 오늘 본궁으로 올라가서 그 양반이랑 회포를 푸는 데 집중한다. 다른 사형제들이랑은 내일부터 차례차례 마주해.”

*     *     *

나는 길을 터준다는 말을 마치고는 앞으로 나섰다.

처처처척!

그런 내 옆으로 정현을 제외한 언동생들이 좌우로 늘어섰다.

그러자, 우리가 뭔 소리를 하는지 지켜보자는 투로 가만히 있던 무당의 제자들 틈에서 말들이 나왔다.

“괴룡! 뭘 하자는 것이오?”

“무당의 일이요. 간섭하겠다는 거요?”

이때, 운혁이 그 틈바구니를 헤집고 나왔다.

“제가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언 회장. 내 일전에 신신당부하지 않았는가? 자네들만 정현을 아끼는… 자네들이 정현을 아끼는 것은 잘 알아. 하지만, 이런 행동은 정현과 사문의 관계를 더 꼬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겠나?”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한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안 꼬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보니까 다들 정현이 마냥 밉기만 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내 말에 운혁 뒤에 선 무당의 제자들 중 한 명이 목청을 높였다.

“뭘 안다고!”

“다른 건 몰라도 흥분하신 건 알겠습니다. 보통 그럴 때 한 행동들이 나중에 흑역사가 되곤 합니다.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이 돌아왔을 때. 차분하게 정현과 마주하시죠.”

내가 그쪽을 응시하는 사이, 운혁은 재차 입을 열었다.

“하. 이건 사형제들끼리의 문제란 말일세. 알만한 사람이 남의 집안일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에이. 저희가 왜 남입니까?

그런 내 말에, 운혁은 그게 뭔 소리냐며 복장을 터트렸다.

“남이지! 나는 언가가 아닌데, 자네가 무당의 제자라도 되는가?”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하셨다.

- 남이지. 남이고 말고. 나는 저런 말코 놈들 모르느니라.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못 들은 척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무당이 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제 옆에 선 녀석들을 일컬어 언동생이라고 합니다. 정현도 그중 하나고요.”

너와 내가 형제는 아니지만 정현과 내가 형제.

대충 그런 느낌.

“그럼 정현과 제가 형제인 셈이니… 운혁 선배는 제 동생의 사숙 아니겠습니까?”

“???”

그게 무슨 궤변이냐는 표정을 한 무당의 제자들을 앞에 두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과연 이게 오롯이 정현 홀로 감당해야 할 일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저 녀석을 데리고 천하를 많이도 싸돌아다녔거든요?”

“…그게 지금 이러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안 데리고 다녔으면 무당에 와서 사형제들을 마주하는 시간이 빨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책임이 있긴 있습니다. 정현을 향한 사형제들의 마음을 조금은 나눠 받을 자격이 있다 싶네요.”

내가 그렇게 말을 마치자, 가장 먼저 당옥기가 입을 열었다.

“저번 겨울 방학엔 내가 사천에 데려갔어! 나도 자격 있어!”

이어서 은하성과 우소릉 그리고 예해수도 입을 열었다.

“저랑 소릉 동생도 정현 도장 많이 귀찮게 했죠.”

“헤헤. 무공이랑 과제랑 이것저것 알려주신다고. 휴일마다 같이 있긴 했으니까요?!”

“저도 복학하고 바뀐 게 너무 많아서, 정현 후배님의 시간을 많이 빼앗긴 했네요.”

제갈설지와 남궁윤도 말을 이었다.

“정현 님을 귀찮게 한 거로 치면 사실 제가 빠질 수가 없죠. 용운 님이 정현부터 이기고 오라고 하셔서 참 많이도 덤볐는데… 요즘 바빠서 그럴 새가 없었지만, 진짜 언젠가는 이기고 말 거예요.”

“흠흠. 나와 향란관 생도들도 어느 정도는 일조한 것 같군. 그런 측면으로 보면 이 남궁윤도 자격이 없지는 않을 성싶습니다.”

운매관 삼인방도 한마디씩을 했고.

“작년 여름방학에 진주언가로 가자는 제안은 기실 제가 했었으니. 저도 자격이 있겠습니다.”

“나는 뭐 없는 것 같은데….”

“그럼 가만히 있어라 천장호. 만날 나더러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더니. 바보냐?”

“바, 바보? 그러는 소천 형은요?!”

“훗. 나는 역기 옮기는 일을 자주 부탁했지.”

마지막으로 은하연이 말했다.

“다 떠나서 정현 도장 몸져누우면 청죽관 망해요. 진짜 복귀하시기까지 혼자 온갖 일 다 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오시자마자 사형제들한테 두들겨 맞고 몸져누우면… 저 진짜 퇴사(退舍)할 거예요! 때려치울 거야!”

그렇게 언동생들이 길을 열겠다는 뜻을 불태우는 때.

스르렁-

나는 회한을 잡아뽑았다.

그러자, 목덜미에 소나무 무늬가 선명히 새겨진 무복을 입은 태청검수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해검지에서 검을 뽑다니! 지금 무당을 적대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적대라뇨. 못 들으셨습니까? 저희는 도장들을 형제처럼 생각한다니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회한을 해검지의 바닥에 꽂았다.

“형제들끼리 뜻이 맞지 않으면 싸울 때도 있는 거죠. 뭐, 그러면서 크는 거 아닙니까?”

그런 나를 따라, 다른 언동생들도 검을 땅에 꽂았다.

이래저래 격양돼있던 무당의 젊은 제자들은 우리의 행동을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미 정현과 다툴 적에 검을 해검지의 바닥에 꽂았던 그들은 곧바로 땅을 박차 왔고.

지켜보고 있던 이들도 검을 뽑아 땅에 꽂고 덤벼왔다.

쌔액!

무당은 본디 화산 그리고 남궁세가와 천하제일검문을 두고 경쟁하는 검문이었다.

하나, 그중 검이 가장 빼어나다 뿐이지, 권각술이 허접한 것은 아니었고.

제운종으로 대표되는 신법과 보법은 가히 일절이라 할 수 있었다.

쌔액!

쌔애애액!

무당의 제자들은 날랜 걸음으로 쇄도하며 특유의 부드러움의 묘리를 띤 권장을 내질러왔다.

“정현이랑 붙어봐서 알겠지만, 저거 흐물거리는 거 같다고 아무렇게나 상대하면 너희 힘에 너희가 다친다?!”

“아니까 언 공자나 잘하세요! 너무 심하게 패면 안 돼요?!”

“…사람을 뭘로 보는 거요?”

“언 공자로 보죠! 채작진 양익! 반개!!”

하지만 해볼 만했다.

언동생들은 기본적으로 천재로 분류되는 녀석들인데다, 나와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었으니까.

처처처척!

언동생들은 순식간에 대형을 이뤘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거점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절도있게 휘몰아치는 태극의 향연 속에서 언동생들이 꿈쩍하지 않자.

태극을 이루던 무당의 제자들이 묘리를 유지하지 못한 채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턴 내 시간이었다.

팟!

나는 퉁겨나가는 무당의 제자들을 비영파천보로 쫓았다.

“?!”

“!”

쏜살같이 달려드는 내 모습에 무당의 제자들은 내 간격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반격을 해왔다.

“느리고.”

“엌!”

“뻔해.”

“컥!”

하나,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자는 보이지 않았다.

“입문례 하러 가셔야 하는데. 얼굴 다치시면 안 되지. 다들 자꾸 복부를 막으려고 하시는데, 어지간하면 얼굴을 막으시오. 얼굴을.”

*     *     *

‘언 소협은 확실히 조화경에 이르셨구나.’

숱한 화경의 고수를 보았고 그보다 더 고강한 무위를 지닌 이도 본 적이 있는 정현이었지만.

함께 동고동락해온 언용운이 절대고수의 경지에 들었음을 확인하는 감회는 전혀 달랐다.

내뻗는 한 초식 한 초식에 전율이 이는 듯했다.

보고 있자면 온종일 보고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런 이가 자신을 형제라 말하고 그 어떤 비난도 나눠 받겠다 하니.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

하나, 해검지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정현에겐 올라야 할 길이 있었다.

정현은 언용운과 다른 언동생들을 뒤로하고 해검지를 넘어섰다.

그렇게 본궁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오른 지 잠시.

무당파(武當派).

세 글자가 쓰여있는 패루를 지나자,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몸을 움직였던 무각의 연무장이 나왔는데.

그 연무장 위엔, 정현의 자세를 잡아주곤 했던 이대제자의 맏이 운경이 서 있었다.

“정현.”

“…운경 대사백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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