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싸울 것입니다 (4)
운자 배의 대제자 운경.
그는 포권을 취해오는 정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
찰나가 억겁 같이 흐르기를 잠시.
붙은 듯 다물려 있던 운경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오랜만이구나.”
들려오는 대사백의 음성.
정현은 지난날을 담담히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예. 이리 가까이서 인사드리는 것은 오랜만인 듯합니다. 정무학관이 마인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무당의 사형제들이 내려와 도움을 주셨으나 그땐 경황이 없었고. 평소에 무당산 자락을 많이도 올랐으나, 소질이 용기가 없어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하나, 운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잠시 생각을 더듬어 봤지만, 운경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저 말을 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정현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수그리며 물었다.
“아둔한 사질은 방금 하신 말씀의 진의를 모르겠습니다.”
“네 몸은 정무학관에 가 있었지만. 무당엔 늘 네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둘러보거라. 이 산문에 네가 누비지 않은 곳이 있더냐?”
운경의 말에, 정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당의 사형제들과 함께 밥을 먹던 식당.
몸을 누이던 기숙재.
구슬땀을 흘리며 발을 구르던 연무장.
운경의 말대로 정현이 누비지 않은 곳이 없었고, 추억이 없는 곳이 없었다.
“…….”
하나, 추억 속의 연무장이 가득 차 있는 만큼, 단둘이 서 있는 이 순간이 휑하게 느껴졌다.
정현은 익숙한 경관들에서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운경이 재차 입을 연 건 이때였다.
“태허 사숙조의 일이 있고 나서. 무당은 강호에 자숙을 천명하였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문을 닫아거는 봉문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때때로 너와 정무학관 생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
“…제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운혁과 운진을 비롯해 학관에 적을 두고 있는 제자들이 이야기를 전해왔고. 그 소식지라는 것이 생기고 나서는 발행이 되는 족족 무당에도 전해졌다.”
“…그랬군요.”
“네 소식을 마냥 괘씸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소식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고. 어떤 소식엔 피가 끓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네가 없는 무당에서 너를 마주하며 지냈다.”
그에, 정현은 가까이서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던 운경의 말을 오롯이 이해하고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하나, 운경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를 탓하려고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 그냥 그리 지냈다는 것이고. 무당이 그리 지내 온 것을 아는 나였기에, 다른 제자들이 뛰어나가는 것을 말릴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문도 들었다. 네가 왔다는 소식이 어른들께도 전해졌을 텐데…. 어찌 가만히 계시는 것일까?”
운경은 말을 하며 무당의 본궁인 자소궁을 응시했다.
“서른 해를 산 사람 더러 마음이 확고하게 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립(而立)이라 한다던데… 나는 서른 평생을 도를 좇았음에도 알 수 없는 일투성이라.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한참을 상념 속에 있었다.”
“…….”
“한데, 네가 먼저 올라왔구나. 혼자 올라 온 것도 그렇고, 흙이 묻은 행색도 그렇고. 해검지에 내려간 제자들이 너를 곱게 보내준 것은 아닌 듯한데, 내가 바로 본 것이 맞느냐?”
“…예. 사숙들과 사형들은 돌아가라 하셨는데, 제가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여 다툼이 있었습니다.”
“네 기도가 남달라지긴 했으나 해검지에 내려간 제자 모두를 제압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찌 올라온 것이냐?”
“…정무학관의 동기들이 도와줬습니다.”
“벗이라… 좋은 것이지. 한데 다른 사형제들이 그런 네 행보를 납득할 수 있겠느냐?”
운경의 질문에.
정현의 머릿속엔 자신을 위해 나서준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치는 면면에, 정현은 자연히 언용운이라면 어떤 답을 할까를 떠올리게 되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납득하게 만들 겁니다.”
“납득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소질도 무당과의 일은 저 홀로 오롯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산을 옮기는 우공처럼 인내하며 매일매일 찾아오겠다, 다짐했습니다. 정무학관의 동기들에게도 그런 뜻을 전했지요.”
“한데? 따라주지 않더라 뭐 그런 변명을 하려는 것이더냐?”
미간을 좁히며 되묻는 운경.
정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괴룡. 언 소협이 그러더군요. 세상에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 할 일은 없다고요. 그리고 매일매일 무당을 찾아갈 거면, 본인들이 하루쯤은 같이 갈 수도 있지 않냐셨습니다. 그날을 당기자고 하시더군요.”
“…괴룡이라는 별호 만큼이나 괴상한 말 이로구나.”
“예. 참으로 괴상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현은 언용운을 상기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말씀에서 도를 보았습니다. 소질이 우공이산의 다짐을 해놓고, 정작 행동은 사형제들의 허락 속에 입문례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
“내심으론 첫술에 배를 불리려 한 것이지요. 마음속 깊은 곳에선 사형제들의 섭섭함이 한순간에 녹기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하나, 언 소협의 말씀과 대사백의 말씀 덕분에 그리 풀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무엇이 중하고 급한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방법을 강구할 겁니다. 그 방법이 의와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하에 오늘은 대사백을 비롯해 웃어른들을 뵙고 입문례에 참석하자 정했습니다.”
정현의 생각을 들은 운경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알면서도 모르겠구나. 네게 무당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너는 무엇일까.”
그러다 문득 연무장 한편에 세워져 있는 무구거치대로 향해 가더니.
“패도(霸道) 같기도 정도(正道) 같기도 한 말을 하는 네 속에 자리 잡은 심상은… 혼돈일까 태극일까.”
무당의 제자들이 송문검을 받기 전에 사용하는 낡디낡은 목검 두 자루를 빼내어 한 자루를 정현에게 던졌다.
그리고 정현을 향해 땅을 박차왔다.
“보여다오.”
* * *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운경의 목검이 태극을 그려내며 휘둘러져 왔다.
쌔액!!
갑작스레 시작된 싸움이었지만, 정현의 가슴 속엔 당황스러움보다는 반가움이 차올랐다.
‘대사백의 검.’
무각주 명일이 정현에게 무당의 검이 무엇인지 일러준, 밤하늘의 북극성 같은 사람이라면.
운경은 그 검을 제대로 갈고 닦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알려준 땅 위의 이정표 같은 사람이었다.
쌔액!
뒤따르고 싶었고, 옆에 서고 싶었었다.
때때로 넘고 싶다는 발칙한 상상도 남몰래 했었다.
어린 시절엔 숱하게 보여달라 졸랐고, 철없던 시절엔 겨뤄 달라 졸랐던 검.
정현에게 운경의 검은 더없이 반갑게 느껴졌다.
하나, 그랬기에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보여드리는 자리가 아니다. 그간 내가 얼마나 무당을 그리워했는지. 또 무당의 검을 얼마나 고민했는지 보여드려야 한다.’
그런 다짐을 되뇌며, 정현은 검초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쌔액! 쌔액!
쌔애액!
그에, 정현과 운경 두 사람의 검로와 숨이 섞여 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려지는 태극 중 어떤 태극은 맞물리기도 했고.
펑!
어떤 태극은 검을 둔 두 사람이 튕겨 나가며 역태극을 그리게 했다.
따악!
휘리릭! 휘리리릭!
그렇게 두 사람이 그려내는 태극이 면면부절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한참.
운경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거리를 벌렸다.
척.
“천근을 다스릴 힘을 얻었음에도 넉냥의 중요함을 잊지는 않았구나.”
“…무당의 검이 추구하는 도(道)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은 하루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성장도 많이 했고.”
“과, 과찬이십니다.”
“지나친 겸양은 자화자찬으로 비침을 모르느냐? 가히 무당 최고의 자질이라 불리던 녀석답다. 얼마 안 되는 동안 놀랄 만큼 발전했어.”
“자화자찬을 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 아래 저는 상대도 안 되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 있어 그리 말했을 뿐입니다.”
“…괴룡에게 어지간히도 빠져 있구나.”
정현의 말에, 운경은 헛웃음을 지으며 검을 거둬들였는데.
“…뭐, 이리 검을 섞어보니. 섭섭한 마음보단 반가운 마음이 더 크다.”
연무장의 위쪽에서 인기척이 난 것은 이때였다.
“흠.”
그에 운경과 정현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는데, 그쪽엔 자소궁에서부터 무당오협이 내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급히 포권을 취했다.
“스승님.”
“삼대제자 정현이 사백·사숙조를 뵙습니다.”
하나, 무당오협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이곤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아무래도 해검지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해검지에 가면 언 소협이 다른 무당의 제자들을 때려잡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실 텐데?’
그에 해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정현의 몸이 움찔하는 이때.
명일과 명한이 지나가며 한마디를 해왔다.
“네 동기 안 잡아먹는다.”
“그래. 손님 맞이하러 가는 길이고, 대충 어떤 상황일지 예상하고 있느니라. 정현 너는 장문인께 가보거라.”
* * *
덤벼온 무당의 제자들에게 단기 수면 처방을 내리고는 손을 털고 있던 때.
우소릉과 은하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
“밧줄을 찾고 있었어요. 언 형.”
“…밧줄은 왜?”
되물음엔 은하성이 답했다.
“기절시켰으면 이제 묶는 게 수순 아닙니까?”
“야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몰매를 치는 분위기라 말리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게 우리 핑계인데, 묶긴 뭘 묶어?!”
“앗. 버릇이 돼놔서.”
“앗. 거리고 앉았다. 하성아… 언제 사람 될래? 그냥 등끼리 맞대게 모아만 놔.”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른 언동생들과 함께 무당의 제자들을 정리했는데.
그 정리가 끝나갈 무렵.
제갈설지가 본궁을 향해 놓인 계단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용운 님? 무당오협이 다 내려오시는 것 같은데요?”
그에 당옥기가 아미를 좁히며 말했고.
“지, 진짜네. 명한 도사님 말고는 인상 무섭던데… 평도 안 좋고.”
그런 당옥기를 향해 남궁윤이 미간을 좁혔다.
“말을 가려 해라. 평이 안 좋다니. 제자들에게 엄하신 거지.”
“캭! 그게 그거지! 난 몰라. 언용운 네가 하자고 한 거다?”
“아니 내가 뭐 칼 들고 협박했나? 본인이 스스로 해검지에 칼 꽂으면서 나서놓고?”
“아니, 그건 그렇지만… 이런 건 대장이 책임져 주는 거지!”
그런 당옥기의 말에, 여기저기서 ‘옳소.’ 소리가 튀어나오고 천장호가 ‘역시 괜히 따라왔다.’ 하는 소리를 중얼거린 지 잠시.
무당오협이 해검지에 당도했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꾸벅 포권을 취했고, 언동생들이 뒤이어 주먹과 손바닥을 포갰다.
“무림 말학들이 무당오협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뵙습니다.”
그러자, 무당오협 중 기도가 특히 남다른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빈도는 명영이라 하네.”
“무극검 선배님이셨군요.”
명영.
무당의 자랑 태청검수의 수장이자, 무당 제일의 검수.
“부끄럽게도 그리 불린다네. 허허허. 그나저나 괴룡 더러 강호인들이 천하제일후기지수라 부른다더니. 무당의 제자들이 오늘 제대로 임자를 만났던 모양이군.”
신승 공덕대사보다 훨씬 젊은 나이임에도 함께 입에 오르내리는 고수인 그였으나.
“송구합니다.”
“오면서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가 송구할 것이 뭐 있나. 도를 좇는다는 녀석들이 수양이 부족하여 제 무덤을 스스로들 판 형국이거늘.”
우리를 향해 위압감을 내보이지도, 적개심을 섞어내지도 않았다.
하여, 나도 핑계나 변명 대신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정현과 동고동락하다 보니, 이 일이 무당의 집안일 임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소, 송구합니다!”
“정현이 인복이 많군.”
“제자분들은 보기엔 저래도 일각 안에 깨어날 겁니다.”
“알겠네. 오면서 듣자 하니 처음에는 정현 혼자 보냈다가, 뒤늦게 나선 것으로 아는데. 기왕지사 여기까지 왔으니. 입문례에 참석하는 게 어떻겠나?”
“아.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마다, 바쁘지 않으면 참석해서 준비한 음식들도 나눠 먹고 장문인도 뵙고 가시게.”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한 시진 뒤에 식을 시작할 것이고. 장문인께서는 입문례가 끝나기 전까지 자소궁에서 나오시지 않는 게 법도이니. 끝나고 뵙는 것으로 하세.”
“예.”
내가 답하자, 무당의 무각주 명일이 동의를 구하듯 명영을 응시했고.
“사형.”
명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명영을 제외한 네 사람이 해검지의 물을 퍼다 기절해 있던 제자들을 향해 뿌렸다.
촤아악!!!!
“푸하… 앗!”
“!”
제자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들 앞에 서 있는 무당오협의 모습에 기겁했다.
그들을 향해, 명영은 물었다.
“지기백(知其白), 수기흑(守其黑), 위천하식(爲天下式). 무슨 뜻이더냐?”
제자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희다는 것을 알고 검다는 것을 다스리면 천하의 모범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면, 다음 구절은 무엇이냐?”
“위천하식(爲天下式), 상덕불특(常德不忒) 복귀어무극(復歸於無極). 그리되면 어긋남이 없게 되어 무극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경전의 구절을 달달 외고 있음에도, 행동에 배어나질 않으니 쇠귀에 경을 읽어온 꼴이고, 그런 주제에 마음의 갈피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쯧쯧. 소중에서도 둔우(鈍牛)로다.”
“…….”
“뭘 그리 눈을 깜빡이고 있느냐?! 튀어 올라가서 낯을 씻고 입문례에 참석할 준비를 하거라!”
“…예!”
그런 무당의 제자들을 뒤따라 무당의 본 도관에 입성한 우리는, 간단한 세면을 마치고 무당이 내어준 깨끗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뒤.
입문례에 참석했는데.
딸랑딸랑.
대앵- 댕-
도동 신분이던 제자들이 향불로 팔을 지짐과 동시에 도호를 받고, 마지막으로 진산제자의 무복을 받는 의식이 끝이 났을 때.
먼저 올려보냈던 정현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네가 많았지. 좀 전에 보니까 다른 제자들 틈에 어떻게 잘 끼어 있더라? 어떻게 좀 풀린 것 같냐?”
“모두 덕분에 운경 대사백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랑은 언 소협과 이야기 나눴던 대로 차근차근 풀어나가지요. 아, 그보다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명영 도사님이 입문례 마치고 나서 장문인을 뵙고 가라고 하시긴 하시더라.”
“아. 장문인은 당연히 뵙고 가시는 게 좋겠지요.”
“음? 반응을 보니 너는 장문인을 이야기한 게 아닌가 본데?”
“예. 제가 소개해드리고 싶다고 한 분은 태영자 장로님이십니다.”
태영자?
정현을 거두어주신 분이자, 원작에서 정현과 주인공 세대의 무공을 진일보시킬 계기를 연결해주신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