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6화. 다음 단계 (1)
언동생과 나는 정현을 뒤로하고, 무당의 장문인인 태을자를 만났다.
“무림 말학 언용운이 대무당파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뵙습니다!”
태을자는 우리를 보고는 허연 수염을 쓸며 웃었다.
“허허허. 그리 깍듯이 인사를 해봐야 이 늙은이는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네. 예의는 명자배 아이들에게나 차리고, 나하고는 편히 담소나 나누다 가게.”
“…이대·삼대 제자분들과의 일은 죄송합니다.”
“그만한 나이 때는 다 싸우면서 크는 것이지.”
“장문인께서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말학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만, 동시에 죄송한 마음이 더 드는 것 같습니다.”
“죄송하기보다는 뿌듯해하시게. 명일이가 제자를 허투루 가르치는 녀석도 아니고. 괴룡에게 덤빈 녀석들이 정신수양이 좀 부족하긴 해도 몸뚱이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는 않는데… 그 얼굴에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으니까.”
“…큼.”
“엥. 웃자고 한 말인데, 이거 비꼬는 것처럼 들렸는가?”
명한을 제외하면 모두 날이 서 있는 인상이었던 무당오협과 달리, 태을자는 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는데.
편히 담소나 나누자는 이야기가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학관에 적을 두고 있는 제자들의 생활과 소림의 세 고승의 안부를 물은 끝에 자리를 파했다.
“늙은이가 바쁜 사람들 시간을 너무 빼앗았구먼. 오늘은 이만들 하고. 이리 면을 텄으니 시간 날 때 종종 찾아와 늙은이 적적함을 덜어주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아차차, 태영 사제도 보고 가기로 했다지?”
“예. 정현이 소개를 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럼 만난 김에 면벽동에서 그만 죽치고 밖으로 나오라고 전해주게,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위인인데… 자네들 말이라면 또 들어줄지도 모르니.”
그러고 자소궁을 나오니, 정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녀석과 함께 태영자가 들어가 있다는 무당의 면벽동으로 향했다.
그 길에서 소천이 형이 질문을 해왔다.
“용운아.”
“응?”
“그 태영자 어른이 정현을 거둬주신 분 맞지?”
“어. 맞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언동생들은 옷매무시를 한 번씩 가다듬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은하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면벽동이면, 사람 한 명 간신히 들어가는 그런 공간 아닙니까? 이 인원이 다 들어갈 수 있습니까? 특히나 소천이 형은 몸을 한 세 번 정도 접어야 할 거 같은데요?”
그런 은하성의 말에, 정현이 피식 웃었다.
“동실 하나하나는 그렇습니다만. 그들과 연결된 공동이 가운데 있습니다. 손가락과 손바닥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벽곡단 같은 것도 손바닥에 해당하는 공동에 가져다 놓으면 수련 중인 분들이 알아서 가져가지요.”
“아하. 그렇군요.”
“예. 참회동이랑 착각을 하신 것 같은데, 태영자 장로님은 무당이 내린 벌을 받으시는 게 아니시라 거동에 강제는 없습니다. 거기까지 가면 제가 장로님을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목적지인 면벽동에 도착하게 되었고.
정현이 공동과 연결된 석굴 중 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잠시.
태영자가 정현과 함께 걸어와 인사를 건넸다.
“반갑네. 빈도는 태영이라 하네.”
태영자는 무당의 제자들 사이에 큰 골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 면벽동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나와 언동생들은 정중히 소매를 붙여 들어 그 의지에 예를 표했다.
그러자, 태영자도 우리를 향해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정현을 도와주어 고맙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말학들에게 표하시는 과례는 둘째치고, 저희가 나선 일은 정현을 도와주었다 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그런 내 말에, 태영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네. 자네들이 나서는 모습에서 무당의 제자들도 느끼는 바가 많았을 걸세. 그리고 내 인사는 단순히 오늘 일만 두고 한 것이 아닐세. 정현은 마음이 많이 가는 제자라네, 내가 거둬 그런 것도 있지만….”
그렇게 운을 뗀 태영자는 정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백지 같은 녀석이 꼭 저와 같은 무결한 도를 숭상하는데. 하얗고 꼿꼿한 대나무는 도끼를 맞기에 딱 좋지 않은가?”
제갈설지와 당옥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정현 님의 성정이 심하게 그런 편이긴 했죠.”
“맞아. 일학년 때 쟤 선도부장 하는데, 뭐든지 원리원칙. 진짜 우리 청죽관 사람들 다 힘들어했어.”
남궁윤은 두 녀석을 향해 반론을 했다.
“선도부장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그런 대화가 오가길 잠시.
듣고 있던 태영자가 말했다.
“두 분 소저의 말처럼 걱정은 되는데, 남궁 소협의 말처럼 정현을 틀렸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키우며 고민이 많았지. 한데 괴룡을 비롯해 여기 있는 젊은 영웅들과 천하를 주유하며 여러 도를 마주한 덕분에, 편협했던 정현의 도가 많이 진전된 듯하네. 그러니 이렇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걸세.”
쭉 듣고 나니, 무엇을 두고 고마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담담히 인사를 받았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인사를 받겠습니다.”
그러고 나자.
태영자는 그간의 일에 관해 하나하나 물어왔다.
“장문 사형께서 전해주시는 소식들을 듣긴 했네만. 이야기의 장본인들이 다 모여있으니, 이래저래 궁금증이 드는군. 그래. 운혁한테 혼나는 걸 구해주는 게 첫 만남이었다고?”
묻는 투가, 바깥일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닌 듯했으나.
부모 같은 마음으로 정현이 보내온 날들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또 이 은하성이 전문입죠!”
은하성은 신을 내며 입을 열었고.
곁에 있던 언동생들도 중간중간 한마디씩을 더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를 한참.
“…그래 가지고 글쎄 그 빡빡이들이 백팔나한진을 펼치고도 용운 형님한테 깨졌답니다.”
녀석의 이야기가 그간 강호를 누벼온 일들을 차례차례 거쳐, 숭산에서 종지부를 찍자.
태영자가 호수같이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보고 나니 알겠군. 괴룡은 암반을 뚫고 나온 소나무 같은 사람일세 그려.”
“…과찬이십니다. 얘들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과장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닐세. 정현도 그렇고 다른 젊은 영웅들이 왜 그렇게 괴룡에게 빠져 있는 줄 알겠구만… 알고 나니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떠오르는군.”
“어떤?”
“내가 젊은 시절 표행을 했던 일이라네.”
태영자가 표행을 한 이야기?
그건 원작에서 주인공 세대의 무공이 진일보하는 계기로 이어지는 단서였다.
* * *
‘혹시나 했지만, 원작과는 시기가 맞지 않아 오늘은 그냥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먼저 말씀을 꺼내실 줄이야.’
순간적으로 쾌재를 부를 뻔한 것을 참아내던 때.
시기적절하게 은하연이 눈을 키웠다.
“장로님께서 표사 일을 하셨단 말씀이신가요?”
나는 한마디를 건네며 목소리를 정돈했다.
“잠깐 하셨겠지, 내가 은 소저를 도왔던 것처럼.”
“맞네. 도사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표주(漂周)를 하던 시절. 암표(暗鏢)를 맡은 적이 있네.”
태영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소릉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헛숨을 들이마셨다.
“헉. 암표? 그거 나쁜 거 아닌가요?”
그에, 은하연이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턱대고 나쁘다 아니다는 표현을 붙이기는 애매하죠. 암표는 표물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호송하는 것을 말해요. 그렇다 보니 표물이 국법에 어긋나는 것일 때도 있지만, 그냥 사정 자체가 은밀한 경우도 있어요. 예컨대 자금성의 암투에서 비롯된 일이거나 하는 식으로요.”
태영자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표주를 하던 중 대막(大漠)의 모래밭에서 길을 잃어 꼼짝없이 죽을 뻔한 것을, 용대인이라는 행상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그치가 아무것도 묻지 말고 광서까지 데려다 달라더군.”
“원시천존. 대막에서 광서까지라면 상당한 거리인데… 이 이야기는 빈도도 처음 듣습니다.”
“그야 네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그와 함께 광서까지 오는 길에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네만….”
묻지 말라는 것 자체가 사연이 있고 귀하다는 것이다.
암표라는 것은 원래 노리는 이가 따르게 되어 있는 법이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각설하고 본론만 말하자면. 광서땅에 어떻게 당도하긴 했다네. 그렇게 험곡에 놓인 다리 하나만 넘으면 우리를 노려온 자들을 따돌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문제는 다리가 너무 낡아 보였네. 나는 용대인을 향해 목숨이 가장 귀한 것이니 마차를 포기하라 말했지.”
“그런데 용대인이 포기를 하지 않았군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더군. 나는 단호하게 말했네. 나는 물건이 아니라 당신을 광서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것이라고.”
여기까지 말한 태영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마차에 든 물건 중엔 묵린토룡(墨鱗土龍)의 내단이 있다며, 도와주면 절반을 무당에 기증하겠다는 말을 했지. 나는 필요 없다 말했고, 용대인은 홀로 마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네.”
그러자, 예해수가 눈을 키웠고.
“무, 묵린토룡의 내단! 그건 만년설삼에 비견되는 영약아닌가요?”
당옥기와 제갈설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근데 만년설삼은 그래도 눈에 띄기는 하는 반면, 묵린토룡은 열사(熱沙)의 땅 아래서 살아가는 녀석이라… 의원들 사이에선 스무대가 공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만나고 잡을 수만 있으면 군체(群體) 생활을 하는 녀석이라 여러 개의 내단을 얻을 수 있지. 그래서 대막의 대부족들을 일으킨 시조 설화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녀석인데… 교훈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신 것 같고. 용대인이 추락한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네.”
태영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장호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걸 왜 저희한테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진즉에 본인이나 무당이 취하시지 않고요?”
“그 광경 자체가 욕심의 말로로 보였다네. 태허 사형의 일은 들어 알고 있을 것이고. 이번에 무당의 제자들이 정현에게 섭섭해하는 것도 봤으니 알겠지만… 도사라 하여 특별한 인종이 아닐세,”
“…….”
“그저 도를 구하고자 범인보다 노력할 뿐 오욕과 칠정을 똑같이 겪는다네. 과유불급이라고, 천하에 무당만큼 풍족한 도관이 없을 텐데, 괜한 분란의 씨앗이자 화를 불러들이는 일이라 생각했네.”
“그렇다면, 지금 이 이야기를 해주신 건….”
천장호의 마지막 질문엔 내가 답했다.
“천하가 태평하던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마교의 발톱이 날카롭고 언제고 이 땅을 할퀴어 올 상황 아니냐. 과유불급보다는 다다익선을 택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시겠지.”
“괴룡의 말이 딱 맞네. 뭐든지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네. 그리고 괴룡과 다른 젊은 영웅들이 보여준 심지라면 분란의 씨앗이 아니라 성장의 거름이 될 듯하다는 생각도 하였고.”
* * *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무당의 입문례 날이 지나갔다.
그날부터 정현은 매일 아침 수련이 끝나면 무당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광서 지도를 구한 뒤.
정현을 따라 무당에 들러 태영자로부터 용대인과 마차가 추락한 위치를 받아왔다.
- 오늘은 내내 말코 놈에게 받아온 지도만 보고 있구나.
‘제 영약이 있는 곳인데 정확하게 머리에 박아 둬야죠.’
- …벌써 네 것이 되었구나. 땅이 꺼졌을 수도 있고. 물이 침범했을 수도 있거늘.
그럴 리 없다.
원작에서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니까.
태영자는 단순히 천길 낭떠러지라 했지만, 묵린토룡의 내단이 잠들어 있는 곳은 기실 무저갱(無底坑)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험준한 지형이었고.
마차 자체가 천고의 영약을 운반하기 위해 귀목과 현철로 만든 귀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태울 겁니다. 흠. 이쪽 지형에서 내려가는 게 제일 낫겠는데….’
그렇게 머릿속에 지도를 집어넣은 나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지도를 살라버렸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질문하셨다.
- 출발하려는 것이냐?
‘아뇨. 이건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 호오. 네 녀석이 어쩐 일이냐? 누가 채갈 것은 걱정이 되지 않느냐?
범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지형에, 시기도 원작에 비해 앞선 지금이었다.
누가 채갈 것은 걱정 요소가 아니었다.
‘누가 채가거나 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를 쫓는 눈은 있을 수 있겠죠.’
마교가 됐던 다른 곳이 됐던 나한테 관심들이 많을 터.
나도 언동생들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때,
벌컥!
총학생회실의 문을 벌컥 열고 독고철이 들어왔다.
“회장님!”
녀석은 뿌듯한 얼굴로 내 옆에 다가서더니, 전음을 보내왔다.
[교에서 저를 각주급으로 승급시켜 줬습니다.]
[직함만 바꿔준 거 아냐?]
[아닙니다. 공작금도 올려주고, 제가 관리하는 인력도 배치해 준다고 합니다.]
독고철의 말은 혈교를 꿀꺽 삼키는 일이 한 걸음 전진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독고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제 다음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