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28화 (328/444)

제328화. 다음 단계 (3)

경혜사태는 진의를 확인해야겠다는 듯 물어오셨다.

“멸마사태의 검을 견식 하고 싶다는 말은… 단순히 아미의 검식을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빈니와 겨뤄보고 싶다는 뜻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음 단계로 나아갈 길을 찾고자, 이런 부탁을 드립니다.”

“후우.”

내 말에 경혜사태는 긴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여셨다.

“언 회장.”

“예. 총장님.”

“언 회장의 나이에 화경에 이른 이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틀어도 한 손가락에 꼽힐 겁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무엇을 그리 서두르는 겁니까?”

“…조바심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었으면 애초에 소림의 무간동을 통과치 못했을 겁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걱정이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천마신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들리는군요.”

“예. 많은 분이 방금 총장님이 하신 말씀을 하곤 하십니다. 앞날이 창창하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입니다. 하나, 강호에 피바람이 일 것이 분명합니다. 누군가는 다치고 어떤 이는 죽을 것입니다. 제가 될 수도 있고. 제 벗들이 될 수도 있고….”

이미 사천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사천의 많은 젊은 무인들이 죽고 다쳤고, 독괴 어르신은 한 팔을 잃었다.

“…말학의 생떼에도 기꺼이 귀를 기울여 주시는 총장님 같은 분들이 그리될 수도 있습니다. 한데, 어찌 알량한 재주만 믿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

“그리고. 제가 드린 다음 단계라는 말은 단순히 위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럼요?”

“화경이라는 경지에 발을 디디고 나서 동기들과 대련을 하고 있는데, 뭐랄까….”

잠시 묵묵히 계시던 경혜사태가 재차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전혀 상대되지 않는 느낌인가요?”

“예. 어떻게 움직일지가 너무 빤히 보여서, 녀석들과 검을 섞는 와중에도 공덕대사와 합을 나눴던 순간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군요. 빈니도 화경에 발을 디딘 지 오래되었고, 생도 시절에 그 영역에 들어간 이를 처음 봐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떤 시기에 처해있는지 이해했습니다.”

“…뭔가 사춘기를 말씀하시는 투인데요.”

“일종의 통과의례라 할 수 있으니, 비슷할지도 모르겠군요.”

“통과의례?”

“뭐, 차차 알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빈니가 노파심에 한마디를 해보았는데, 언 회장의 마음가짐도 확인하였고.”

여기까지 말한 경혜 사태는 차를 한잔 들이키시곤 남은 말을 이었다.

“당장에 딱히 바쁜 일이 있지도 않으니, 어울려 주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나중에 원망이나 하지 마세요.”

“제가 총장님을 왜 원망하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언 회장을 아끼는 비구니가 아니라, 멸마 사태를 찾아온 거 라면서요?”

경혜사태는 피식 웃고는, 곧바로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흠. 학관에서 하기는 좀 그렇고. 무당으로 가지요. 생도들이 저녁 일과 마치는 시간이….”

“술시입니다.”

“그때까지 정문으로 오세요. 그사이 빈니가 장문인께 양해를 구해 놓겠습니다.”

*    *    *

저녁을 먹고, 마지막 결재 서류와 점호에 들어갈 간부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마친 나는 경혜 사태와 함께 무당으로 향했다.

해검지에는 무당오협의 맏이 명영이 나와 있었다.

“후학이 사태를 뵙습니다.”

“무극검은 잠시 안 보면 기도가 달라져 있는 듯합니다. 소림의 신승 선배와 화산의 매화검선 선배가 긴장해야겠어요.”

“빈도가 어찌 두 분 선배에 비하겠습니까. 데리고 오신 괴룡 같은 젊은 피에게 추월당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큼.”

“호호호. 장문인은 자소궁에 계십니까?”

“예. 연무장도 자소궁의 것을 쓰시면 됩니다. 차고 계신 검도 굳이 푸실 것 없이 패용한 채 오르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당의 도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자소궁에 올랐는데.

“이리 연무장도 내어주시고 병장기를 패용하는 것도 허락해주신 장문인의 아량에 빈니가 정식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태을자는 오늘도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허연 수염을 쓸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허허허.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니 이 늙은이가 마다할 이유가 있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볼일들 보시게.”

태을자를 향한 인사를 마친 나와 경혜 사태는 곧바로 연무장에 올랐다.

“달이 참 밝군요. 빈니는 따로 몸을 풀 필요가 없으니. 준비되거들랑 말씀하세요.”

“저도 오늘은 따로 몸을 풀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경혜사태의 말에 답하며, 회한을 잡아 뽑았다.

스르렁-

스렁-

경혜사태도 휘영청 비추는 달빛 아래 검을 뽑았는데.

그러면서 한 마디를 해오셨다.

“언 회장의 무위가 화경에 이른데다, 멸마 사태의 검을 보고 싶다 하였으니… 이 순간부터는 생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 아니, 적으로 대할 것입니다.”

“예. 바라던 바입니다.”

“좋습니다. 언 회장도 괜한 예의 차릴 것 없습니다.”

이 순간.

경혜 사태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늘 웃어 주시던 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눈매는 맹금류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졌고.

대기가 빨려드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경혜사태의 몸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금광(金光)이 사태의 검에 감기길 잠시.

팟!

경혜사태가 땅을 접어 달리듯 순식간에 내 앞으로 쇄도했다.

“!”

나는 빠르게 회한을 그어 올렸다.

채애애애앵!!!

그에 회환과 사태의 검이 맞물리며 내 손아귀에 저릿한 감각을 선사했는데.

사태의 공세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쌔액! 쌔애액!!

쌔애애애액!!

넘실거리는 금광과 함께 휘둘러지는 경혜사태의 검은 밤바람을 마구잡이로 찢어발기며 그어져 왔다.

챙! 채앵!

채채채채챙!!!

순식간에 십여 합이 이루어졌고.

그 생각을 하는 사이.

명백히 급소를 노려오는 검들이 찔려져 들어왔다.

슈슈슈슈슉!!!!!!

챙! 채채채챙!!!!

그 검을 막느라 또 한 번의 십여 합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그야말로 멸마라는 단어가 왜 별호로 굳었는지 깨닫게 해주는 검초.

그 모습을 본 사부님께서도 혀를 내둘러 오셨다.

- 거, 비구니가 초식 한번 독랄(毒辣)하구나. 일전에도 생각했었다만 볼 때마다 불가의 제자가 맞나 싶은 검초로다.

챙! 채앵!!

‘윽. 아미파의 검은 그래도 좀 익숙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버겁긴….’

채애애앵!!!

‘…하네요!’

사천의 일로 혜정을 비롯하여 아미의 제자들이 펼치는 검을 제법 많이 눈에 담기도 했고.

송길준이 학관을 습격했던 일 전후로 경혜사태가 적을 향해 검초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다.

사태께 부탁을 드리기 전에 그 광경을 머릿속으로 숱하게 되새겼던 나였다.

챙! 챙!!

하나, 이렇게 새로운 경지에 올라 적의 위치에서 사태가 뿜어내는 살기를 마주해보니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아니다. 그나마 좀 익숙하니까 근근이 버티고 있다고 봐야 하나?’

경혜사태는 공덕대사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상대였다.

사태의 성취가 나보다 앞에 있긴 해도, 신승이라 불리는 공덕대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쪽이 더 위험한 느낌이다.’

공덕대사는 나무로 치면 거대한 소나무와 같았다.

한참 위의 존재.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대사가 내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존재.

‘반면 경혜사태와의 대련은….’

사천의 시커먼 대나무 숲, 오죽림을 떠올리게 했다.

캉!!!!!!

강력한 일격을 쳐내거나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면.

그 자리에 날카로운 공격이 여지없이 이어진다.

슈슈슉!!!!

빡빡한 검초로 내 검로를 방해해 오는데,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조금도 예측이 되지 않는다.

채채챙!!!

그런 사태의 검초를 상대하느라, 작은 생채기가 늘어가던 이때.

픽! 픽!

회한이 부웅! 하고 허공을 갈랐다.

그건 내가 경혜사태의 투로를 완전히 놓쳤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죽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은 그 순간.

경혜 사태의 검이 슬쩍 틀리더니.

내 정수리와 등짝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지나갔다.

빡!!!!!!!!!!!!!

빠아아악!!!!!!

“컥!”

그에 무당의 연무장에 잠시 처박히게 되었는데.

그런 내 등 뒤로 경혜사태의 음성이 이어졌다.

“흐음. 갈 길이 멀군요. 앞으로 빈니와 매일 자소봉에 올라봅시다.”

*    *    *

경혜 사태와 함께 달밤에 체조를 하다가, 두들겨 맞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한 지 일곱 날이 지났다.

회복력이 좋은 나였지만.

맞은 데 또 맞고, 또 맞은 데 더 맞다 보니.

정무학관의 얼굴이 묵사발이 돼선 안 된다며,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멍이 들게 되었는데.

“끙. 나중에 원망하지 마시라더니….”

오늘도 약속한 시간에 자소봉에 오르기 위해, 수련복으로 갈아입으며 멍 자국들을 확인하던 때.

호룩! 호루루룩!

응용이가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총학생회실에 딸린 내실의 문을 당옥기가 벌컥 열었다.

“응용이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있던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는데.

“꺅!”

“야이!”

황급히 문을 닫기를 잠시.

“미, 미안! 응용이가 자꾸 끌고 와서… 아니! 왜 여기서 옷을 쳐 갈아입어?! 생활관 냅두고!”

“술시까지 자소봉 올라가야 해서 아침에 나오면서 가져왔지. 지가 기척 없이 문 열어 놓고 왜 적반하장이야?!”

“아무튼! 나는 아무것도 못 봤….”

녀석이 다시 문을 열며 입을 열었다.

“…어가 아니라. 야! 너 몸에 그거 멍이야?! 얘들아 큰일 났어! 언용운 온몸이 멍투성이야!”

그러더니 언동생들을 다 불러 모았다.

“언 공자가?”

“어! 등이 새파래!”

“용운 형이 누구한테 맞고 다닐 사람이 아닌… 정말이네? 얼룩덜룩한데요?”

그리고 당옥기 본인은 왕진 가방을 챙겨 왔다.

“등이 제일 심하던데? 엎어져 봐.”

“멍 좀 든 것 가지고 뭔 유난이냐.”

“아니에요. 용운 님. 멍도 우습게 보면 안 돼요. 혈종이 너무 심해지면 탈 나요.”

“그래. 등에 있는 거는 곰팡이 슨 것처럼 그렇던데. 그런 거 내버려 두면 큰일 나.”

꾹.

“!”

“아프냐?”

“…멍을 침으르 쑤시는드 그름 은으플끄?”

“캬캬. 복수다 이 자식아.”

“…나와.”

“농으로 한 말이고. 혈종은 원래 이렇게 빼는 거야.”

그렇게 당옥기가 내 등에 사혈을 하고 있는 이때.

은하성이 입을 열었다.

“대체 밤마다 무당에 가서 뭘 하시는 겁니까?”

은하성의 물음엔 남궁윤이 답했다.

“보면 모르나? 맞고 다니고 있잖아.”

“아니 그걸 누가 모릅니까? 천하의 용운 형님이 누구랑 어쩌다 저 꼴이 됐냐는 거죠.”

그에, 정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 무당의 사형제들이 언 소협께….”

나는 그런 녀석들을 모두 떨치며 말했는데.

“그런 거 아니니까. 너희들 할 일이나 해. 총장님께 특훈을 좀 받고 있는데 아직 감을 못 잡았을 뿐이야.”

그런 내 말에 우소릉이 헛숨을 들이키며 눈을 키웠다.

“헉. 그, 그럼 총장님은 괜찮으세요?”

“괜찮다마다. 나는 아직 제대로 된 공세도 못 해봤으니까.”

“언 형도 제 눈에 엄청난 고수로 느껴지시는데… 총장님이랑 그렇게나 차이가 나는 건가요?”

그런 언동생들을 뒤로하고, 나는 자소봉에 올랐는데.

몸을 푸는 와중 우소릉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뭐가 문제지?”

경혜 사태가 나보다 윗줄의 고수시긴 했지만.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건 말이 안 됐다.

“사태께서 통과의례라고 한 것도 그렇고…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 있은 지 잠시.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어지간하면 알아서 깨닫는 게 낫다는 주의라 가만히 있었는데. 너무도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어서 한마디 해야겠다. 용운이 너는 지금 아이로 돌아갔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어.

‘엥. 제가요? 일부러 혈조술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만?’

-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저 무에서 가장 기본적인 게 무엇이냐?

‘안 맞고 개 패는 거죠.’

- …뭐, 뜻은 맞지. 근데 그게 왜 안 되고 있겠느냐. 소림의 젊은 땡초와 무당의 말코들을 상대할 때와 달리 비구니를 상대할 때의 너는 그때의 움직임을 십분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야 소림이나 무당의 제자들은 손에 보이는 듯이 움직였고. 사태는 전혀 다르시니까….’

- 언제부터 그렇게 눈에 의존했느냐? 조화란 네 몸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네 영역 안으로 적을 끌어들여서 상대의 행동까지 조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 조화지.

그 말을 듣고 보니.

자연스럽게 지난 일곱 날 동안 경혜사태가 보여준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태는 그저 스스로의 심신을 오롯이 통제하고 있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미 화경에 이른 내 행동을 유도했다.’

그저 성정이 잔혹하여 초식이 독랄한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화경에 들기 전의 나도 분명 그렇게 싸워왔었는데….’

트인 감각 덕분에, 한 수 아래의 상대들과의 싸움이 너무 쉽게 느껴져 어느 순간 그 감각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절로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치게 되었는데.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다.”

때마침 자소봉에 올라오신 경혜 사태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여셨다.

“오호. 정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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