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29화 (329/444)

제329화. 다음 단계 (4)

경혜사태의 검이 금빛 궤적을 흩뿌리며 찔러져 들어왔다.

슈슈슈슉!!!!!

사정없이 찔러져 들어온 저 매서운 검초 앞에서 찰나의 방심이라도 한다면.

‘사태의 손에 들린 검날과 같은 크기의 구멍이 잔뜩 뚫린 벌집이 되겠지.’

모든 투로가 진심이 담겨있는 실초(實招)로 느껴지는 경해사태의 검초.

나는 회한으로 갈지(之)자를 그리며 경혜 사태의 검을 쳐냈다.

채채채챙!!!!!

지난 일곱 날 동안 사태가 펼쳐오는 공세의 형태는 매번 달랐다.

그에 대응하는 내 초식도 달랐다.

하나, 본질은 같았다.

나는 사태의 초식들을 그저 막고 쳐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 투로에서 묻어나는 허실을 분간하려 애썼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는 바쁘게 회한을 움직이는 와중, 경혜 사태의 움직임에서 묻어나는 의도를 쫓았다.

챙챙!

채채채챙!!!

‘왼발이 살짝 안쪽으로 쏠려있다.’

디뎌내는 보법.

검초가 펼쳐지기 전에 반드시 먼저 움직이는 팔꿈치와 어깨.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왼손.

이따금 들락이는 숨결.

‘무인은 온몸으로 자신의 뜻을 전한다.’

경혜사태 정도 되는 화경의 고수라 하여 다르진 않다.

숱한 단서들이 허와 실이 섞인 상태로 내게 전해졌다.

문제는 저 정도 되는 상대의 의도를 어떻게 무마시키면서, 내 의도 속으로 끌어들이느냐였다.

‘어찌할까.’

이 순간.

순간적으로 수많은 길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중 내가 택한 길은 사태의 의도에 어울려 주는 것이었다.

붕!!!

그에, 내 회한은 오늘도 허공을 갈랐고.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요?’ 하는 눈빛과 함께, 사태의 검이 살짝 틀리며 사랑의 매로 변하려는 이때.

쌔애애액!

나는 극도로 끌어 올린 집중력 속에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시간을 이용해, 왼발을 세워 땅에다 박았다.

그리고 오른발로 비영파천보를 응용해 땅을 밀었다.

내 몸은 팽이처럼 회전했고.

부웅!!!!!!!!!

허공을 갈랐던 회한은 내 몸과 함께 한 바퀴를 돌아 다시금 경혜사태를 향해 그어져 나갔는데.

쐐애애애애액!!!!

그런 내 의도를 눈치챈 모양인지.

경혜사태는 발작하듯 몸을 뒤로 빼며, 내려치려던 검로를 틀어 가로 그었다.

쌔애애액!

내가 곧바로 땅을 박차 거리를 좁혀올 것을 경계하는 동작이었는데.

부우웅!

부웅!

사태가 휘두른 검과 내가 휘두른 회한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기며, 서로의 볼에 자그마한 생채기를 새겼다.

픽!

픽!

경혜사태는 그렇게 생긴 생채기에서 배어나는 피를 훔치며 눈을 흘겨오셨다.

“빈니가 언 회장을 해하지 않기 위해 검면으로 내려치는 순간을 이용하다니. 이건 꼼수인데요?”

“예. 꼼수이긴 합니다.”

“꼼수임을 안다? 흐음. 빈니가 적이라는 가정을 잊고, 내 검초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이 수련은 더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걸 잊은 건 아닙니다.”

“그럼요?”

“그저 그것이 가장 쉽게 총장님을 제 의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인 듯하여 그리한 것입니다.”

하나, 내가 의도를 설명하자 경혜사태의 눈은 호선을 그었다.

“오호라. 뭐가 문제였는지 정말로 깨달은 모양이군요?”

“예. 감각이 비약적으로 트이고, 몸이 뜻한 대로 정확히 움직이는 것에 붕 떠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저 일신의 감각을 장악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상대와 자연의 움직임까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조화를 이뤄내야 진정한 화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경혜사태는 빙그레 웃고는 들고 계시던 검을 허리춤의 집에 돌려 넣었다.

“아마, 오늘 이후로 동기들이랑 대련하면 전혀 다른 기분이 들 겁니다. 대저 화경의 고수라 하면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서도 수련을 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요.”

“밤 나들이는 끝이라는 투로 들리는데요?”

“빈니는 오래도록 살초만 연구해온 사람입니다. 언 회장이 겪은 적응기에 맞수로 삼기엔 적합하나, 이 이상의 대련을 하는 것은 괜히 다칠 위험만 늘어날 뿐. 딱히 공부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언 회장은 빈니가 봐주면서 검을 섞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다른 교수님과….”

자소궁의 곁문이 열리며 태을자가 고개를 내민 것은 이때였다.

“우리 명영이는 어떤가?”

그런 태을자를 향해 경혜사태와 나는 포권을 취했는데.

“장문인.”

“장문인을 뵙습니다.”

태을자는 손을 휘휘 저으며 같은 물음을 전해왔다.

“인사는 되었고. 방금 말한 상대로 명영이는 어때?”

경혜사태는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극검이 공부를 도와준다면야 언 회장으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무극검 명영.

그는 언젠가 마주할 마교와의 일전에서 일익을 담당해 줘야 할 사람이었다.

내 성취를 끌어 올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의 수련을 방해해선 안 됐다.

나는 다시 한번 포권을 취하며 그런 생각을 전했다.

“말학으로서는 너무도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명영 선배의 수련을 방해하는 게 아닐지. 그 점이 걱정됩니다.”

그런 내 말에 태을자는 수염을 쓸며 입을 열었는데.

“흐음. 본인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아마 방해가 되지는 않을걸?”

“그렇습니까?”

태을자는 다시 한번 수염을 쓸더니.

“우리 무당이 문을 반쯤 닫아건 뒤로. 일대 제자들의 직무가 줄기도 했고, 방금 경혜 사태가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절대 고수는 흐르는 물이나 스치는 바람에도 도를 쌓아가는 법일세.”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자소궁에서 내려갔다.

“더욱이 그 바람이 젊은 바람이라면 강호의 미래에도 득이 될 것이고 명영 본인에게도 자극이 되겠지. 예서 잠시 기다리고 있게.”

그러길 잠시.

태을자와 함께 자소궁에 올라온 명영 도사가 연무장 위로 올라서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귀찮지 않으시겠습니까?”

“전혀. 사제들은 일이 바쁘다 피하고, 젊은 제자 중엔 검을 청해오는 이가 없어서 심상 속에서만 맞수를 찾은 지 제법 되었는데. 괴룡이 검을 청해준다면야 나는 좋지. 천하제일후기지수의 진면목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각은 같은 시각으로 해도 무방할 것 같고, 나와 검을 섞다 보면 지칠 것인데…. 괴룡은 맡은 바가 있으니, 격일에 한번 자소봉으로 올라오시게.”

“예.”

“좋아. 오늘은 사태와의 대련으로 심력 소모가 있을 테니, 가볍게 실력이나 보세. 들어와 보게.”

태청검수의 수장.

무극검 명영.

“후.”

다음 대의 천하제일인이 될 것이 확실하다 불리는 검수를 향해, 나는 회한을 휘둘러 나갔다.

*    *    *

격일로 자소봉에 올라 명영에게 지도 대련을 받은 지 보름이 지났다.

“언 공자? 제갈 소저랑 같이 독고세가의 현판을 내걸 위치를 검토해봤는데요.”

그러는 사이 독고세가를 세울 입지가 선정되었다.

“아무래도 장완(张湾)이 좋을 것 같아요.”

“그렇소?”

“예. 학관이 있는 단강구와 가깝기도 하고. 마침 괜찮은 가격의 장원이 매물로 나왔어요.”

“제일 중요한 터줏대감은? 입지가 좋아 봐야, 박힌 돌과 갈등이 있으면 안 되잖소.”

내가 되묻자 제갈설지가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장완의 터주라 할 수 있는 가문은 괴가(蒯家)인데, 선비 가문인데다 제갈가의 방계 가문 중 한 곳과 인척이기도 해서 도와주실 것 같아요.”

은하연과 제갈설지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독고철을 응시했다.

“그렇다는데?”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크흑. 크흐흑.”

독고철은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했다.

은하연은 그런 녀석을 향해 뼈있는 말을 던졌다.

“언 공자가 온갖 손가락질 받아 가며 쌓은 명성과 인연 덕분에 가능한 거지, 이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아, 알고 있씁니닼.”

“그래. 지금 흘린 눈물 잊지 말고. 감사하면 꼭 갚아.”

“…예!”

- 그렇지. 하연이 저것이 역시 똑 부러지는구나. 무엇이 중한지를 알아.

그런 은하연의 모습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시던 때.

장선은 독고철을 얼싸안으며 덩달아 눈물지었다.

“크흑! 축하해 철이 친구! 이 은혜는 저도 함께 갚겠습니다!”

그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번지는 이때.

은하성은 웃다 말고 너스레를 떨었고.

“허. 그럼 이제 철이한테 독고 가주님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남궁영과 우소릉은 저마다 눈을 키우며 말했다.

“와, 그렇네요. 어떻게 보면 학관 밖에서는 독고철이 저희 중에 제일 급이 높겠는데요?”

“헉. 그럼. 나, 나는 철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짝.

나는 느릿하게 손뼉을 쳐서 언동생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자자, 잡담은 여기까지. 장완에 현판을 내건다. 지금 딱 그거 하나 정해졌을 뿐이야. 민관무 처리해야 할 일 산더미다?”

그리고 곧바로 빠르게 손뼉을 쳐 녀석들을 독려했다.

짝. 짝. 짝. 짝. 짝.

“그거 끝나면 대민 지원 일정도 잡아야겠지. 기말고사 치기 전에 일정 맞추려면 빠듯해. 빨리빨리 움직여.”

*    *    *

독고세가를 일으키는 일은 차근차근 진행됐다.

선정한 입지를 굳혔고, 각종 인맥과 영향력을 이용해 지역유지인 괴가의 양해와 관(官)의 이해를 약속받았으며.

장원의 매입도 끝냈다.

그리고 그 장원을 관리할 가솔들도 들였다.

“이제 현판식만 치르면 되겠는데?”

“예.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명단은?”

“예. 여깄습니다.”

집안 살림을 총괄할 총관부터 부엌을 맡을 찬모까지.

총합 서른 명의 인원이었는데.

그중 열 명은 혈교에서 독고철에게 내어준 인력들이었다.

“여기 적힌 열 명이 교에서 보내준 네 직속 수하란 말이지?”

“예. 회장님.”

“네가 각주긴 하지만, 이 인력들은 내가 좀 휘어잡아놓을 필요성이 있겠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

“음. 괜찮겠습니까?”

“괜찮고 자시고 무조건 해야지. 정보가 우리를 통하지 않고는 새지 않도록 단속해야 할 거 아냐. 그래야 적재적소에 쓸 수 있고. 왜? 네 부하라 이거냐?”

내가 묻자, 독고철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소속만 넘어왔다 뿐이지, 아직 저와 신뢰관계나 상명하복 관계가 확립되지 않은 녀석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회장님을 노출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는데. 네가 말한 신뢰 상명하복 관계는 지금 체제에선 이루어질 수가 없어. 너는 학관에 있고 저 녀석들은 주로 이곳에 있고. 목숨이 걸린 임무를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서야 신뢰가 언제 쌓이겠냐?”

“…그건. 그렇습니다.”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나머지 스무 명은 심부름 명목으로 제갈세가로 보내고. 여기 열 명이랑 너는 해시(亥時)에 독고장의 연무장에 모여있어. 내가 시켰다는 말은 하지 말고.”

“예!”

그렇게 독고철에게 명을 내린 나는 나름의 준비를 했다.

여러 가지 필요한 물품을 챙겼고 회한에 재를 먹였으며.

옷도 시커먼 장포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탁가철방에 부탁해 만든 귀신가면을 쓰고 시간에 맞춰 독고장을 찾은 뒤.

재를 먹인 회한을 슬쩍 빼 올려 사부님께 정찰을 부탁했다.

‘다 모였습니까?’

- 고철이 놈과 떨거지 열까지. 도합 열한 명이 있긴 하구나. 한데 오늘은 또 뭔 짓거리를 하려는 것이냐?

‘보시면 압니다. 회한은 차고 있으면 티가 너무 나니까 여기서 보고 계십쇼.’

그렇게 적당한 위치에 사부님을 올려놓은 나는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혈교.’

놈들은 기본적으로 강함을 숭상하는 녀석들이었다.

그저 말 몇 마디로 나를 따르게 할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일단 좀 패야 한다.’

그냥 패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압도적이고 괴이할 정도의 강함을 보여줘야 했다.

내가 공덕대사나 명영의 무위를 마주했을 때 받았던 비슷한 느낌을 저들도 느끼게 만들어야 했다.

물론, 그 양반들의 무위에 나를 견줄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해볼 만해.’

무극검의 검을 상대하며 완전히 화경에 발을 들인 나였다.

모여있는 녀석들에 비해 한참 위인 성취였고.

거기다 흑마법도 있었다.

‘패는 와중에 암흑동화만 중간중간 점멸하듯 써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을 거다.’

생각을 마친 나는 회한으로 좌수에 상처를 낸 뒤.

혈조술을 일으킴과 동시에 시커먼 장포를 휘날리며 독고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후두두둑-

그런 나를 확인한 혈교 놈 중 몇몇은 전투태세를 취했는데.

“웨, 웬 놈이냐?!”

“귀면?!”

그중 내 눈동자를 알아본 독고철은 눈으로 말을 걸어왔다.

‘…회, 회장님. 생각이 있으시다는 게?’

하나 독고철 역시 휘어잡아야 하는 대상 중 하나였다.

‘늘 당근만 내밀면 안 되지.’

이쯤에서 방광이 강제로 쥐어짜이는 경험을 한번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사학-

나는 허공에서 암흑동화를 시전 한 뒤.

독고철의 바로 앞까지 번개같이 쇄도했다.

“???”

그리고 암흑동화를 풀며 파천의 일권을 내질렀다.

빠악!!

“컥!”

그렇게 독고철을 숨도 제대로 못 쉬게 게 만든 나는 곧바로 비영파천보로 땅을 박찼다.

그리고 또 다시 암흑동화를 시전했다.

“고, 고수다!”

“또 사라졌다!”

암흑동화는 기실 잡기에 불과했다.

혈교에 투신한 자들인 만큼 기감만 곤두세우면 내 위치를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귀, 귀신인가!?”

하나, 화경에 이른 내 몸놀림에 이미 압도당한 저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시각에 의존하여 내 움직임에 현혹되었다.

빡! 빠악!!

여기서부터는 땅을 짚고 헤엄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점멸하듯 암흑동화를 사용하며 혈교 놈들의 사이를 유린하듯 종횡무진했다.

빠아악!!

패고, 차고, 처박고.

그렇게  간신히 정신이 붙어 있을 때까지 두들겨대다가.

열한 명의 인원이 묵사발이 되었을 때.

연무장 바로 앞에 놓인 가주전의 지붕 위에 올라갔다.

척.

그리고 혈조술을 사용해 등 뒤에 피로 된 날개의 형상을 내보였다.

촤악!!!

‘유치해 보여도 저 녀석들에겐 이런 게 직빵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걸 확인한 놈들은 꺽꺽거리는 와중에, 모두가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정확히 누군진 몰라도 혈교의 간부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늙은이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혈염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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