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다음 단계 (5)
내가 혈교의 기치(旗幟)가 담긴 구호를 읊조리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혈교인들의 태도가 더욱 공손해졌다.
“!”
“!!”
그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마재림이니 신교불패니 하는 구호들을 당당하게 외치고 다니는 천마신교와 달리, 저들은 구호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혈교는 비밀결사니까.’
그런데 기이한 무위에 압도적인 혈조술까지 선보인 내가 그들만 모아놓고 ‘혈염천하’라는 구호까지 말했다.
‘내 정체를 아는 독고철을 제외하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녀석들은 내가 혈교의 고위 간부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면 뒤에서 피식 웃은 나는 계속해 늙은 목소리를 흉내 냈다.
“힘을 얻고 싶어 본교에 귀의했을 것이다. 그렇게 교인이 되고 나서는 본교의 신공절학이 가진 강함에 매료되었을 것이고, 선별(選別)을 통과하기만 하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그 절학을 배울 기회를 주는 본교의 아량에 감복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긁어내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하나, 돌이켜보라! 힘을 얻고 싶은 계기가 있었을 것이고, 지옥 같은 선별과정을 견뎌내게 해준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실상 조직의 하층을 담당하는 저들이 어떤 경로로 혈교에 귀의하게 되었는지는 원작과 독고철의 이야기를 대조하여 교차검증이 끝난 뒤였다.
“…부당하고 가혹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관(官)은 자네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을 것이고. 정파(正派)를 자처하는 자들도 나 몰라라 했을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입에 올리자, 조아리고 있던 고개들이 하나둘 들어 올려졌다.
“자연히 복수심이 차올랐겠지. 하나, 복수란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 너희들은 차오른 복수심만큼 스스로의 무력함에 절망했을 것이다.”
덕분에 쏟아지기 시작한 시선들을 느끼며,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그렇게 백척간두에 서 있던 너희들은, 본교에 귀의한 덕분에 복수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작은 힘들을 얻었다. 하나 그 꿈은 여전히 아스라이 느껴지지 않는가?”
딱히 질문으로 한 말은 아니었으나.
이즈음 무릎을 굽히고 있던 녀석들 중 조장에 해당하는 송호겸이란 녀석이 입을 열었다.
“…혈마님께서는 혈염천하의 대의가 이루어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혼자의 힘으론 아스라이 느껴지지만, 그분과 형제들이 함께한다면 머지않아 그날이 올 것입니다.”
“끌끌끌. 그렇겠지. 본교의 대의대로 하늘 아래 모든 땅에 불신자들의 피가 흐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너희들의 복수가 이루어지겠지. 하나 과연 너희들이 살아서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을까?”
그러자, 독고철을 제외한 혈교인들의 눈에 의아함이 들어찼다.
그중 송호겸이 재차 입을 열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십니까?”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몇 마디 말로 저들의 혈교를 향한 충심이 뿌리 뽑힐 리 없다.’
절망에 절망을 거듭할 때 손을 내밀고 힘을 준 혈교를 신봉하고 있을 테니까.
“…혈마님께서 단언하신 천하가 피로 물드는 세상. 혈염천하는 분명히 올 것이다. 그분의 의지는 확고하시니까.”
그러니 혈마 본인이나 혈교의 대의 자체를 욕보여선 안 됐다.
“하나, 숱한 점조직으로 구성된 본교의 조직은 부득이하게도 혈마님의 눈과 귀에 바로 닿을 수 없다. 왕호(王號)를 부여받은 몇몇 늙은이들이 정보를 취합하고 있으니까.”
나는 혈교의 조직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만들을 꼽음과 동시에 원망을 쏟을 대상을 설정했다.
“겁많은 늙은이들의 아집으로 인해 본교의 형제들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 그로 인해 혈염천하가 이루어지는 날이 하루하루 밀려가고 있지. 우리들의 원수가 호의호식하는 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
“애초부터 나이가 많았던 놈들은, 푹신한 침상에서 편히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첫째론 녀석들의 심사를 들끓게 할 요량이었고.
둘째론 조금 전 무위를 펼칠 때 해두었던 안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슬슬 발작이 올 때가 됐는데.’
저들이 익힌 역혈수라대법은 보통의 무림인과 경맥의 흐름이 전혀 달랐는데, 나는 그중 요혈에 해당하는 부위가 어딘지 알았다.
‘경문혈(京門穴)과 의사혈(意舍穴)이 도로로 치면 사통팔달의 역할을 하는 요지지.’
혈교인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때, 그곳을 파천의 내력을 실은 권장으로 두들겨 줬으니, 성취가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자는 마공을 익힌 부작용이 일어날 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커헑!”
“끄륵! 끄르르르륵!!”
열한 명의 인원 중, 서열 최하위에 해당하는 둘이 눈이 뒤집힌 채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나는 장포를 휘날리며 녀석들에게 달려갔다.
“혈염천하의 때가 오기까지 너희들이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너희들의 원수들은 기다려줄까?”
그리고 손가락 끝에 파천의 내력을 모음과 동시에 번개처럼 기의 흐름을 돌려놓는 점혈을 한 뒤.
팍! 팍! 팍! 팍! 팍!
팍! 팍! 팍! 팍! 팍!
뒷짐을 쥐며 입을 열었는데.
“…본교의 신공절학은 미치광이가 될 가능성을 동반한다. 이 두 녀석은 벌써 그 경계에 선 것 같구먼. 너희들도 크든 작든 조짐은 있었을 것이다. 선별과정에서 광인이 되어 명을 달리한 동기도 있었을 테지?”
“…….”
“내가 도와줄 수 있다.”
그러자, 송호겸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우리한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뭘 하자는… 아니 그전에 누구십니까?”
“끌끌. 지금 단계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줄 이유는 없지. 그저 진정한 혈염천하를 꿈꾸는 자 정도로만 알고 있어라.”
“…진정한 혈염천하를 꿈꾸는 자?”
“그래. 진혈단이라는 이름이 좋겠군. 나는 교내에 비밀결사를 만들 것이다. 방금도 말했듯 당금 본교의 조직은 혈마님의 눈과 귀에 바로 닿을 수 없다. 나는 천마신교에서 겁먹는 법만 배워온 늙은이들을 쳐내고 혈마님을 제대로 보필한다는 뜻에 동참할 이들을 모으고 있다.”
내 말에 복잡한 표정이 된 송호겸과 다른 혈교인들.
나는 그들을 향해 얼마 전 무림맹에 갔을 때, 약왕 어르신이 적어주신 약방문(藥方文)대로 조제한 약첩을 던졌다.
휙! 휙! 휙! 휙! 휙!
“광증을 억제하고 부작용을 덜어주는 산약(散藥)이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위에 보고해도 상관없다. 하나, 진혈단에 들어오겠다면 결의를 증명할 각오를 하고 있으라.”
여기까지 말한 나는 비영파천보를 시전하며 독고장을 떠났다.
* * *
언용운이 떠난 독고장.
독고철은 조아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큭.’
괴상한 복장을 한 채 노마두 행세를 하는 언용운의 행동에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다음엔 아파서 정신이 없었다.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꾼 것 같다.’
언용운의 손속이 닿은 사지육신엔 여전히 욱신거리는 통증이 남겨져 있었다.
‘…화경에 드신 줄은 알았지만, 술법들까지 곁들여지니 그야말로 괴이 망측한 강함이다.’
사실 언용운의 손속이 쏟아질 때만 해도 숱한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중에 하나는 ‘나를 못 믿으시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나, 이성이 돌아온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정반대였다.
‘이들과 함께 두들겨 맞았으니. 내가 당신과 밀접하다는 의혹을 품는 녀석은 없겠지.’
그건 독고철을 안전하게 해주는 뜻이 들어 있는 행동이었고.
휘하로 들어온 녀석들과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당혹스러운 경험에다 비밀까지 공유하게 됐으니까.’
그에, 독고철은 언용운이라는 인간에게 다시 한번 경탄했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렇게나 철저하구나… 본교의 고위간부들이 당장엔 회장님보다 무위나 직위에서 우위에 있을지 모르지만, 저런 철저함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독고철이 그런 생각을 하던 때.
다른 혈교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경악하고 있었다.
“방금의 귀면옹(鬼面翁)은 도대체 뭐였을까?”
“진정한 혈염천하를 꿈꾸는 자라고 하지 않았나.”
“…….”
하나, 애초에 여기 모인 모두가 서로 다른 점조직에서 차출된 이들이었기에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하여, 묘하게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는데.
“…이 산약은 먹어도 되는 건가?”
딱 하나 공통점은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언용운이 던진 약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독고철은 자진해서 약첩을 펼친 뒤.
척.
가장 먼저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 독고철을 말리려던 송호겸이었으나.
“각주… 이미 드셨군요.”
독고철이 산약을 삼키자, 찰나의 고민 끝에 본인도 산약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조원들이 하나둘 따라 약첩을 펼치기 시작했다.
* * *
독고장을 빠져나온 후, 학관으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있은 지 반나절쯤 지났을 때.
독고철이 돌아와, 내실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철입니다.”
“어. 들어와.”
“예.”
“맞은 곳은 좀 괜찮냐?”
“…괜찮습니다.”
나는 녀석에게 심신의 안부를 물었는데, 그런 나를 보며 사부님께서 혀를 차오셨다.
- 쯧쯧. 병 주고 약 준다는 놈들은 모두 양반이야… 우리 제자는 두들겨 패고 안부를 묻는 위인이니까. 고철이 저것도 참 불쌍한 놈이다. 불쌍해.
“흠흠.”
나는 그런 사부님의 말씀을 못 들은 척하며, 전음으로 본론을 던졌다.
[마무리는 잘하고 왔냐?]
[예. 다른 가솔들도 복귀 한 것을 보고 오는 길입니다. 호위들끼리 실력 좀 봤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형제들의 분위기는?]
[당장은 서로 믿지 못하는지, 주신 약을 먹는 것을 주저했습니다만. 결국 모두 먹었습니다. 위에 보고를 할 분위기는 아닙니다.]
[그래?]
[예. 해주신 말씀, 뼈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조원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테고… 다들 약을 먹었으니 발작 주기가 무탈히 지나가고 나면 태도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알았다. 당분간 너는 다른 업무는 면제해줄 테니까. 시간표 끝나면 독고장으로 가서 녀석들 동향 살피는 거랑 가솔들 기강 세우는 일에 집중해.]
[예!]
그렇게 할 말을 마치고, 독고철을 보내려는데, 예해수 선배가 내실로 찾아왔다.
“두 분 모두 계셨네요. 마침 잘됐어요. 독고세가를 다시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실을 소식지 제목을 뽑아봤는데 어떤가요?”
선배가 내민 초안을 살펴본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독고세가 개같이 부활』
내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예해수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갈설지 후배님이 예전에 개같이 패배 소리를 들은 게,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온다는 소리를 하셔서 떠올랐는데… 확 관심이 끌리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겠는데, 너무 관심을 끌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철이의 실력과 독고가의 저력이 아직은 미미한 게 사실이니까요. 괜히 똥파리 같은 놈들이 꼬일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제목은 제갈세가의 공과 관의 도움을 강조하고. 독고세가의 이야기는 내용에다가 담담하고 명료하게 배치하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 * *
독고세가가 일어난다는 소식지를 완성해서 천하 곳곳으로 날려 보낸 지 보름이 지났다.
호루룩!
“어디 보자. 맹주님도 참석하시겠다는데, 철아?”
“…맹주님까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맹주님을 비롯해 여러 명숙이 참석 의사를 밝혀온 가운데, 현판식의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수하들은 어때?]
[서먹하던 분위기는 완전히 가셨습니다. 아무래도 함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이니까요.]
[그래?]
[예. 사흘 전에 보고드렸지만, 윗선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역설적으로 제 수하들이 진혈단과 함께할 뜻을 굳힌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럼. 오늘 밤. 다시 한번 소집하자.]
그런 내 말에, 독고철은 흠칫하며 답했다.
[…소집. 또 귀면옹으로 오시는 겁니까?]
[굳이 나를 노출할 필요는 없지. 진혈단의 일은 철저하게 귀면옹으로 나선다. 근데 말하면서 배는 왜 가려?]
[…아. 저도 모르게 그만.]
[오늘은 안 때릴 거야. 아마도.]
[…아마도?]
- 불쌍하다. 불쌍해.
[아무튼. 나는 뭐 좀 챙겨서 갈 테니까. 철이 너는 지금 바로 독고장으로 가서 귀면옹이 오늘 밤에 모이라 했다는 서신을 보내왔다고 전해. 종이랑 목탄필 인원수대로 준비해놓고.]
[예.]
그렇게, 독고철을 먼저 장완으로 보낸 나는 탁가철방에 들렀다.
본격적으로 진혈단을 운영하기 시작하면, 언제 혈교의 본단과 사건이 터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회한을 끌러 놓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인지라, 회한을 숨길 칼집을 주문해둔 터였는데.
철방에 도착하자, 탁장명이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공자님! 오셨군요!”
“예. 건운이는 잘 크고 있습니까?”
“공자님의 이름자를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남들 다하는 병치레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아, 준비하신 것은 여기.”
탁장명이 내민 직사각형 모양의 목함을 열자, 피처럼 검붉은 도장에 해골과 마귀의 형상이 양각된 검집이 들어 있었는데.
‘전생에 썼던 마구(魔具)의 조형을 참고해서 도안을 만들었는데, 하여간에 솜씨 좋아. 진짜 똑같이 만들었네.’
그걸 감상하고 있으니.
탁장명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그 귀신가면도 그렇고, 이런 취향이셨습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부득불 필요해서… 아니, 근데 ‘이런 취향’이라뇨. 말씀의 저의가 무엇인지 조금 궁금해지네요?”
“아. 다른 뜻은 없습니다. 저한테 무언가를 주문하실 때 되도록 공자님의 취향을 반영해 드리려는 뜻으로 여쭌 겁니다.”
“…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칼집을 챙긴 나는 곧바로 귀면을 쓰고 장포까지 챙겨 입은 뒤, 독고장으로 향했는데.
도착 직후 주변에 매복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날 듯이 땅을 박차 지붕 위에 올라서니.
척.
독고철과 열 명의 조원이 연무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후두두둑-
나는 녀석들 사이로 가볍게 내려서며 혈교의 기치를 읊조렸다.
“…혈염천하.”
그러자, 저번과 달리 오늘은 열한 명의 인원이 나직이 복창했다.
“혈염천하.”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진혈단의 일원이 될 각오들이 되셨는가?”
“예.”
“끌끌끌. 하면 증명하게. 독고 가주는 노부가 준비하라 이른 것을 각원들에게 나눠주게.”
내가 말하자, 독고철은 종이와 목탄필을 주변에 나눠 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각자의 인생을 거기다 적게. 모든 것을 적어. 어쩌다 본교에 흘러들어 왔는지. 훈련한 동기는 누구였는지. 그간 행해온 임무는 무엇이었으며, 윗선과 아랫선을 접선한 장소들은 어디였는지.”
내 말에, 종이를 받아든 혈교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을 모두 적어 낸다면, 그건 혈교를 노출하는 행동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약점과 역린을 바치는 일이 될 터였으니까.
나는 녀석들의 결단을 돕기 위해, 왼손에 혈조술과 함께 파천의 내력을 감으며 말했다.
“…어쭙잖은 각오로 진혈단에 들겠다 한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노부를 능멸한 죄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자, 독고철이 가장 먼저 종이를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어서 송호겸을 비롯한 다른 혈교 놈들도 종이를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나는 그런 녀석들의 틈을 걸어 다니며 감시했다.
“뒈지기 싫으면 빨리빨리 적….”
- 이놈아 목소리만 늙은 듯하지 않으냐! 말투! 말투!
“…노부는 인내심이 많은 편이 아니다. 그저 솔직히 적어 내는 일에 어째서 손이 멈추지? 손이 멈추는 자는 진혈단의 대의를 능멸한 것으로 간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