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다음 단계 (7)
광서 땅은 그 옛날 진시황이 대군을 보내고도 정벌에 실패한 이래, 강인하고 사나운 기질의 족속들이 살아가기로 유명한 땅이었고.
지리적으로도 남해(南海)를 끼고 있는 데다, 운남과 월남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그야말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라 할 수 있지.’
하여, 군부의 위소가 곳곳에 설치돼 있는 곳이었다.
관무불가침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 같은 무림인과 무관들은 그야말로 상극이라 할 수 있었다.
‘초왕부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아 간다면, 그쪽과 피곤한 일이 생길 일이 원천 봉쇄되겠지.’
아울러 모용세가의 일을 정리해준 공의 정산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체가 워낙 높아 서간으로 요청을 드리기가 뭐 했는데… 알현할 적에 은근슬쩍 그 일을 꺼내야겠다.’
생각을 마친 나는 맹주님께 전음을 보냈다.
[좋은 제안인 것 같습니다.]
[승낙하겠다는 것이냐?]
[예.]
[알겠다. 나는 이 길로 무창의 수군진에 내려가 있을 예정인데, 방학을 하려면 남은 학사일정이….]
[대민지원이랑 기말고사. 딱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그럼 내가 초왕부와 대략적인 조율을 해놓을 테니, 너도 그 안에 정확하게 인원을 추려서 연락을 주도록 해라.]
[옙.]
그렇게 독고세가의 현판을 내거는 날이 지나갔다.
학관으로 복귀한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생도들이 신청한 대민지원지들을 최종 검토했고.
일신의 무위 증진을 위해 무당을 오르는 한편, 기말고사 준비에도 힘썼으며.
이 시대의 술법들과 흑마법을 접목하는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물론, 진혈단을 챙기는 일도 빼놓을 순 없었다.
‘…올 때가 됐는데.’
안 그래도 바쁜데, 매일 귀면옹의 복장을 하고 독고장에 방문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야 신비함도 떨어지고.’
하여, 진혈단을 챙기는 일은 세 갈래 정보를 취합하여 교차검증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었다.
독고철의 대면 보고, 송호겸의 서류 보고, 그리고 솔거 거지들이 모아오는 개방발 정보가 그것이었는데.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가 내 생활관의 창을 두드렸다.
툭툭.
송호겸의 보고서를 회수해 오는 일은 우소릉이 전담했는데, 녀석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곧바로 창을 열었다.
그러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야행복으로 싸맨 우소릉의 눈매가 호선을 그었다.
“언 형.”
“꼬리가 밟히지는 않았지?”
“예! 언 형!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뒤 안 밟히고 어디서 뭐 빼돌려 오는 건 전문이잖아요!”
“목소리는 낮추고.”
“앗. 죄, 죄송해요.”
“아냐. 고생했다. 돌아가 쉬어.”
그렇게 우소릉을 돌려보낸 나는 송호겸이 작성한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명하신 흑도와 왈패를 억제하는 일은 우선 독고장이 있는 장완을 중심으로 진행했습니다.
뒷배가 없는 점포들로부터 보호세를 걷고 있던 흑도방파 하나를 축출하였으나.
평범한 백성들까지 저희 눈치를 보는 것이, 되레 독고세가의 명망에 누가 된 것 같습니다.
계속 진행해도 될지 여쭙니다.』
보고서의 내용에 미간이 좁혀지길 잠시.
호루룩!
열려 있는 창틈으로 응용이 녀석이 날아 들어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그리고 쓰다듬어 달라는 듯 볼에 얼굴을 비볐다.
나는 녀석을 쓸어주며 말했다.
“됐지? 거지들한테 받아온 거 줘야지 이제.”
그러자 응용이가 한쪽 발을 척- 하고 내밀었다.
호룩!
녀석의 다리에 달린 통엔 거지들이 보내온 서간이 있었다.
개방의 정보는 다른 강호의 소식도 많이 적혀 있었다.
나는 빠르게 독고세가의 정보를 훑었는데.
『얼마 전 성황리에 현판식을 치른 독고세가의 무인들이 장완검패라는 흑도방파를 지역에서 축출함.
과정 자체는 치밀하게 준비한 듯 깔끔했으나, 손속이 잔인하여 백성들에게까지 경계 받고 있음.』
그렇게 두 갈래 정보를 확인하고 나니.
때마침 독고철이 생활관을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철입니다.”
“문 열려 있다.”
정기 대면보고를 하러 온 녀석이, 직면한 사태를 모르진 않을 터,
나는 앞서 손에 넣은 서간들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뭐야 이거? 저번에 보고할 때 완벽하다더니.”
내가 묻자, 독고철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게… 장완검패를 몰아내는 계획은 완벽했는데. 정무학관에 잠입하기 위해 따로 훈련을 받은 저와는 다르게… 다른 단원들은 선별과정에서 들었던 물이 덜 빠졌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녀석은 흑도방파와 부딪히는 과정에서 단원들이 항복한 자들의 손목을 날렸다고 보고했다.
그 말에 나는 절로 턱을 매만질 수밖에 없었다.
‘흠. 방학 기간에 광서에 가려면 내가 자리를 비워도 진혈단이 알아서 굴러가게 해놔야 하는데…. 이대론 안 돼.’
생각을 마치고는 독고철을 향해 말했다.
“오늘 밤. 단원들 소집해라.”
그렇게 진혈단을 소집한 나는 귀면옹의 복장을 하고, 독고장을 찾았다.
후두두둑-
그리고 예를 표하려는 녀석들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사랑의 매타작을 시작했다.
빡! 빠악!
빠악! 파파파팍!!!
그렇게 다짜고짜 참교육을 실시한 나는 잠시 널브러져 있던 단원들이, 저마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금 예를 표해왔을 때.
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정한 혈염천하의 대의란 무엇인가?”
그런 내 물음에 무턱대고 입을 여는 녀석은 없었다.
하여, 정적이 흐르길 한참.
사부님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 그게 뭔데? 나도 궁금하구나?
‘제가 어떻게 압니까?’
-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느냐?
‘누가 알다뇨? 제가 혈교를 만든 놈도 아니고, 애초에 진혈단이라는 이름 자체를 그날 즉석에서 만든 건데요.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겁니다.’
- ???
‘중요한 건. 저놈들한테 임무에 실패했다는 걸 새겨주는 거, 그리고 초점을 어디다 맞춰야 하는지 알려주는 겁니다. 흑도와 왈패를 억제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독고세가의 평판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말이죠.’
그렇게 사부님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는 때.
송호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는데.
“아둔한 속하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혈염천하는 무엇인가 하는 말씀은… 피란 꼭 흘려야 할 때. 딱 흘릴 만큼의 피만 흐르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 * *
장완은 정무학관이 있는 단강구와 지척이다.
백도무림의 요람과 가까운 이곳이다 보니.
정무학관의 생도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을 가르치는, 이른바 입시 무관이 상당히 많이 포진해있었다.
그런 땅엔 그늘이란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백도무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의 보호비를 거둬가는 영악한 흑도방파도 있고.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호객을 하고 있는 아이도 있다.
“떡 사시어요! 한 개만 먹어도 속이 든든하구! 찰기가 있어 낙방자도 철썩 붙는 떡이랍니다! 거기 공자님 떡 한 개만 사주셔요!”
그리고 떡이든 광주리를 걷어차는 심사가 뒤틀린 이도 있다.
퍽!
“꺅!”
“방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예? 아, 아니어요.”
일대를 순찰하다 그 광경을 확인한 송호겸은 생각했다.
‘멍청하군.’
이 일대엔 떨어질 추(墜)자나 떨어질 낙(落)자에 병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많다.
‘말을 가려가며 호객을 했어야지. 떡 하나 팔아보려다가 한 광주리를 다 날렸군.’
원래의 송호겸이었다면 혀를 차며 지나쳤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을 테니, 혀를 차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생사의 교훈이란 본디 피눈물과 함께 배우는 것이고 배우지 못하면 죽는 것.
한마디로 알 바 아닌 것이다.
‘…단주님의 명.’
하나, 독고세가의 무복을 입고 있는 그에게는 귀면옹이 내린 명이 있었다.
‘백도 무림 내에서 독고세가의 평판을 끌어 올려야 한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귀면옹이 송호겸을 두들겼던 순간들이 자연스레 상기되었다.
‘…….’
그에 잠시 몸서리를 치던 송호겸은, 그런 소집을 더는 겪고 싶지 않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거기 계신 공자님.”
“나를 부르는 거요?”
“예. 그 아이가 공자님의 심사를 뒤틀리게 한 것은 맞지만, 광주리를 걷어차신 건 너무하셨습니다.”
“당신은 뭔데 참견질이요? 무복에 놓인 수를 보니 독고세가?”
“예. 독고세가의 호위 총관입니다만.”
“엊그제 현판 건 집구석에 총관은 무슨. 이봐. 내가 누군지 알아?!”
송호겸은 으름장을 놓으려 하는 사내를 빠르게 파악했다.
‘말로 해서 알아들을 종자는 아닌 것 같고. 먼저 손을 움직이지 않고 저리 입을 나불대는 것을 보면… 무위도 집안도 대단한 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괜히 싸움이 길어지면 피곤해지겠지. 빠르게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
파악을 끝낸 송호겸은 말을 하며 경맥에 혈술을 돌렸다.
“누군지 모릅니다만. 정무학관에 입관하려는 이가 할 행동이 아님은 알겠습니다.”
그리고 발검했다.
딸깍-
번쩍하는 순간 뽑혀 나온 송호겸의 검은 꼬장을 피우던 사내의 앞머리를 베어냈다.
샤샥!
“!”
반의 반 치만 깊었어도 잘려 나간 건 머리카락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사색이 된 사내를 향해 송호겸은 살기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이한테 사과하십시오. 이 일로 분이 치밀거든 독고세가의 문을 두드리시고.”
“…그. 미, 미안하게 됐다!”
사내는 잘려 나간 앞머리를 남기고는 줄행랑을 쳤고.
송호겸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거기 너.”
한데, 어째선지 아이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송호겸의 부름에 답했다.
“…네, 넷?”
그제야 검을 뽑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송호겸은 살기와 함께 검을 갈무리한 뒤.
어색한 미소를 띠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 이름이 뭐냐?”
하나, 역효과였던 모양인지 아이는 더 겁에 질린 얼굴이 됐다.
“…이, 이름이요?”
“…아니다 됐다.”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송호겸은 뒤집힌 광주리에 떡을 주워 담으며 말했다.
“손님을 끌어보려는 뜻은 가상한데, 낙방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이 동네에서 금기어다. 조심해.”
“아!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 말을 마친 송호겸은, 광주리를 챙긴 뒤.
“이건 내가 사마.”
“네?”
은자 하나를 아이에게 던져주고, 걸음을 뗐다.
“대, 대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그를 향해 연신 머리를 숙여오는 만두 머리에.
송호겸은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다.
* * *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보름이 훌쩍 지나, 어느덧 대민 지원을 나갈 때가 됐다.
나와 언동생들은 각각 짝을 지어 단강구 일대로 흩어졌는데.
나는 독고철과 짝을 이뤄 독고세가의 권역인 장완을 둘러보게 되었다.
물론, 나는 진혈단원들에게 미리 대민지원 업무에 해당하는 일들을 명령해 놓았기에.
이쪽의 목적은 단원들의 행동과 현지 분위기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하여, 나그네로 역용을 하고 독고철과 함께 장완 일대를 돌아다닌 지 한참.
그 과정을 함께한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보름 전에 받았던 보고 내용과는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구나?
‘예. 돌아다니는 단원들 행동거지는 딱히 흠잡을 데 없고, 백성들 쪽에서 독고세가 사람들한테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괜찮아 보이네요?’
개방 쪽에서 추가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장완검패를 축출한 이후로는 피를 보는 일 없이 백성들 돕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더니.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독고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하고 있는 것 같네.”
“휴. 다행… 아니 감사합니다.”
그런 내 말에 독고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지 잠시.
녀석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회장님, 그런데 말입니다.”
“뭐가?”
“말씀하신 진정한 혈염천하의 대의 말입니다. 그때가 오면 회장님과 제가 쌓아온 백도의 인간관계들은….”
독고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는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야 사실 혈교인도 아니고 양쪽의 상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지만.
‘혈교인인 독고철은 부대끼고 있는 언동생들이나 맺게 된 인연들에 대한 고민이 생길 때가 됐지.’
나는 녀석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대의(大義). 거기에 매몰된 정파인들 때문에 너나 다른 단원들이 본교에 귀의하게 된 거 아니냐?”
“…그건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작은 의(義)들이 모이면 그 역시 대의다. 무엇이 소중한지, 혈술 덕에 얻게 된 힘으로 뭘 지키고 무엇을 되갚아 주고 싶은지. 스스로 생각해봐.”
“…….”
“어렵게 들리면 그냥 나만 믿고 따라오든지.”
“예.”
그렇게 이어진 대화 끝에, 독고철이 지은 표정은 처음 운을 뗐을 때보다 후련해 보였다.
그에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진혈단 쪽 일은 마음 놓고 떠나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