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33화 (333/444)

제333화. 초왕부 (1)

진혈단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인근의 무관과 백성들에게 장학보를 홍보하는 것으로 일정을 끝냈고.

언동생과 다른 생도들도 별다른 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채, 무사히 각자의 일정을 마치고 학관에 복귀했다.

“후. 이제 일 학기 일정은 기말고사만 쳐내면 끝이구만.”

밤을 새며 시험을 공부할 생도들을 위로할 차와 간식을 자치회에 전달하고.

나는 나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시험을 치르면 방학이 시작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전에 끝내야 할 다른 일이 남아 있었다.

- 시험공부 안 하고 어디 가느냐?

‘자소봉에 갑니다.’

- 무당에? 아. 명영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로구나?

‘예.’

-  당분간 못 오겠다는 말도 전해야겠구나? 그 기말고사라는 것을 치를 준비도 해야 할 것이고, 끝나고 나면 바로 광서로 가야 할 것 아니냐? 그 말코 녀석이 네 상대를 해준다고 시간을 빼주었는데 그 정도 예의는 차려야지.

‘옙. 안 그래도 당분간은 못 올 것이고,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려 했습니다.’

- 나한테나 잘하거라!

‘……? 방금 예의를 차리라고 하신 분이 사부님 아니십니까?’

- 말 안 해도 하려 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열이 차오르는구나! 나한테나 잘해라! 나한테나!

툴툴거리시는 사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무당산을 오르길 잠시.

나는 해검지를 거쳐 자소봉에 당도하게 되었는데.

장문인께 인사를 하고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명영이 입을 열었다.

“대민 지원은 잘 다녀왔나 보군. 그러면 학관은 이제 기말고사 기간에 들어가는 거 아닌가? 당분간은 보기 힘들겠군.”

“예. 이후로는 또 여름 방학인지라. 안 그래도 오늘 대련이 끝나면 감사했다는 이야기를 드리려 했는데 먼저 말씀을 주셨네요.”

“감사는 되었고… 흠. 그럼 오늘은 나랑 같이 산책이나 하세.”

“산책 말씀이십니까?”

“그래. 만날 검을 섞는다고 수련이 아닐세. 이따금 쉬면서 풍광을 눈에 담는 게 되레 머릿속이 트이게 돕기도 한다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저 너머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라, 무당의 제자들만 아는 명소가 많네. 해가 진 지금은 단강구 인근의 야경을 볼 수 있는 목이 있지. 그쪽으로 가세.”

“예. 좋습니다.”

걸음을 옮기며 명영은 질문을 해왔다.

“어떻게, 나와의 대련은 공부에 도움이 좀 되었나?”

명영은 대련을 하며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진 않았다.

하여, 그와의 대련은 명영이라는 호수 속에 나라는 돌을 던지는 과정이었는데.

그 과정을 거치며 나는 내 수준을 조금 더 명확하게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음. 스스로를 또렷이 보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관(正觀)이라. 큰 공부를 했군.”

“대단한 걸음을 뗀 것은 아니고요.”

“스스로를 명확하게 관조할 수 있게 되면 될수록, 다른 사람의 수준도 잘 볼 수 있게 되지. 도가(道家)의 말이 아니긴 하지만 끌어다 쓰자면, 지피지기는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 그렇기는 하겠네요.”

“그래. 쓸데없는 싸움을 피할 수 있고, 벌어진 싸움에선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되는 걸세.”

그렇게 걸음을 옮기길 잠시.

나는 한눈에 단강구가 내려다보이는 목에 이르게 되었는데.

“오.”

등롱을 내걸고 물길을 옮겨가는 배들과 저녁 영업을 시작한 점포들이 내뿜는 초롱불.

그리고 벌써 벼락치기에 시동들이 걸렸는지, 불이 훤한 생활관들과 도서각들이 만들어낸 야경을 감상하고 있으니.

명영이 질문을 해왔다.

“그나저나 정현은?”

“녀석의 대민지원 일정은 저보다 먼저 끝난 것으로 아는데요? 오늘 아침에 안 왔습니까?”

“…왔기는 왔는데. 시험 기간이라 당분간은 못 온다느니 방학에는 어디를 갈 예정이라느니, 우리 일대제자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어서 말이야.”

“…아.”

“누가 보면 자네가 무당의 제자고 녀석이 진주언가의 공자님인 줄 알겠구만.”

“그건 녀석이 이·삼대제자들의 마음을 돌려놓고 무당오협을 뵙고 싶은 마음이라 그런 것일 겁니다. 제가 방학 일정에 대해 확답을 주지 않기도 했고요.”

“하여간에 고지식해서는….”

그렇게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무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야경을 바라보았는데.

어느 순간, 명영의 손이 인근의 소나무 가지를 무심히 훑는다 싶더니.

투둑-

가지에 붙은 솔잎을 뜯어 나를 향해 던져왔다.

쌔액! 쌔액!

쌔액! 쌔액! 쌔액!

명영쯤 되는 고수는 손에 쥔 모든 것을 무기로 삼을 수 있다.

“!”

아니, 그가 발을 담그고 있는 현경이라는 경지는 기실 마음으로 검을 세우는 경지이니.

아무것도 쥐지 않아도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런 명영이 갑작스레 던져온 솔잎은 특급 살수가 빼 던지는 암기와 다를 게 없었다.

스렁-

나는 양손을 동시에 움직였다.

오른손으론 벼락같이 회한을 뽑아 들어 휘저었고.

왼손엔 파천의 내력을 응집해 솔잎의 방향을 틀었는데.

팅! 팅!

팅! 티티티티이잉!!!!

그렇게 날아온 솔잎들을 모조리 쳐내고 나니.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추가적인 공격도 없고. 사부님도 잠잠하시고….’

해할 의도는 없었나?

나는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입에 올렸다.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가르침이실까요?”

“비슷하네. 강호에 나가는 무림인은 항상 일말의 경계심을 뱃속에 품고 있어야 하네. 특히나 한 계단 올라선 무인일수록 더더욱 그래야 하지, 자기도 모르게 자만할 수가 있으니까.”

“후. 덕분에 세상에 믿을 놈….”

“…….”

“…분.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습니다.”

“큼. 철두철미한 성정이야 익히 알려져있어 나도 아네만. 곧 있으면 방학이고, 그럼 외유를 나갈 테니 경계하라는 뜻으로 한 수 얼러 보았네.”

“잠시지만 등골이 서늘하더군요.”

“그런 것 치고는 대응이 침착하던데?”

“과찬이십니다.”

“아무튼. 지금 단계에선 더 일러줄 것이 없네. 하산하시게.”

*    *    *

명영과 인사를 나누고 총학생회실에 돌아오니.

“후배님 오셨어요!”

예해수 선배가 나를 맞아주었는데.

선배의 목소리에도 기합이 들어가 있었고, 다른 언동생들 사이엔 전운이 감도는 듯한 기류가 흘렀다.

- …네 동생들의 분위기가 어째 묘하구나?

‘…그러게요.’

나는 빠르게 평소와 뭐가 다른지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언동생들이 모두 자리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길이랑 병아리들이 안 보이는데?”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이 입을 열었고.

“슬슬 광서행 이야기를 할 시기가 된 것 같아서. 적당히 할 일 쥐어서 내보냈어요.”

이어서 제갈설지가 말했다.

“현판식 때 맹주님이랑 용운 님이 나눈 이야기… 초왕부 이야기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소? 대군사님이 귀띔을 해주셨나?”

내가 되묻자, 제갈설지와 은하연이 차례로 답했다.

“뻔하죠. 큰일이 났으면 저희에게 말씀을 해주셨을 거고.”

“자잘한 일이 생겼으면 부려 먹어도 벌써 부려 먹었지.”

“…….”

“그런데 용운 님이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그럼 애초의 목적지랑 일치할 수도 있다 생각하던 찰나에, 초왕 전하의 봉작지가 광서인 게 떠올랐어요.”

그러고 보니 태영자가 해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만 남아 있다 싶었는데.

곧바로 우소릉과 제갈설지가 입을 열었다.

“어, 엄청난 험지라고 하셨어요! 신법이나 내공이 출중해야 한다고! 내공은 몰라도 신법은 자신 있어요 저는!”

“신법하면 저희 제갈세가의 백학보를 빼놓으면 섭섭하죠. 내공이나 무위도 자신 있고요.”

뒤이어 당옥기가 턱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너희끼리 가면? 묵린토룡의 내단인지 뭉쳐진 흙덩인지 판단 가능할까? 그리고 사람 발이 안 닿은 곳이면 다른 영초도 있을지 모르는데. 솔직히 내 자리는 확정이지.”

그런 당옥기를 보며 은하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따라 엄청나게 아니꼽네요. 옥기 누님.”

“뭣?!”

“제가 다음 학기부터는 약학 수업 듣습니다, 진짜.”

“흥이다! 백날을 들어도 나한테는 안돼!”

그와 동시에 과열되는 분위기.

“제가!”

“저는….”

“나도!”

나는 손을 휘저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긴 했다. 아니, 근데 위험할지도 모른다니까 왜 다 따라가겠다고 난리야?”

그렇게 운을 뗀 나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남은 말을 이었다.

“내단 때문에 그러냐? 그건 따라간다고 주는 게 아니라 필요한 놈 줄 거야. 일단 내가 제일 필요해. 그리고 한 개는 당옥기 연구하라고 주겠지.”

그런 내 말에, 방금만 해도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었던 당옥기와 은하성이 합심하여 나를 힐난했고.

“캭! 우리가 그거 탐나서 가겠다는 줄 알아?! 진짜 언용운 너는 성격이 왜 그 모양이야?”

“그러니까요! 참, 사람 맘을 쥐락펴락하신다 싶다가도 항상 보면 제일 중요한 건 모르신다니까요?”

다른 언동생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들을 향해 말했다.

“그냥 다 밖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실력 점검 좀 하고, 같이 갈 사람 정한다.”

언동생들은 내 말에 따라, 각자의 병장기를 챙겨 우르르 밖으로 나왔는데.

생각해보니 정현과 남궁윤의 실력은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 정현이랑 남궁윤은 빠져. 너희 둘 실력은 대충 아니까.”

해서 열외를 하란 말을 하니.

“예.”

“…흫.”

정현은 절도있게, 남궁윤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빗겨 섰다.

나는 남은 녀석들을 보며 말했다.

“한 명씩 올라와.”

그런 내 말에, 가장 먼저 제갈설지가 씩씩거리며 올라온 것을 시작으로.

챙!

채채챙!!!

의지를 불태우는 언동생들이 차례대로 연무장에 올라서기 시작했는데.

채앵!

채채채챙!!

녀석들은 내가 광서로 데려갈 사람을 추리기 위해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나는 남길 사람을 뽑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소림으로 보낼 녀석들만 남긴다.’

그렇게 화경에 이른 감각으로 언동생들의 무위와 마음가짐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저울질을 해보기를 한참.

‘제갈 소저는 투쟁심이 너무 강해서, 소천이 형은 아무 생각이 없어서 초절정의 문을 열어젖히질 못하고 있군. 두 사람은 무조건 소림으로 보내는 게 맞는데….’

확실히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두 명 보이는 이때.

한 녀석이 눈에 밟혔으니, 다름 아닌 언용명이었다.

“큭.”

너덜너덜한 몸을 일으키고 있는 녀석을 응시하며 나는 생각했다.

‘원작에서 주인공 세대로 불린 녀석들 중엔 용명이의 성장이 제일 느리다.’

원체 성실한 성정에, 좋은 것을 챙겨 먹이며 심신을 단련시켰으니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언동생들과 성장세를 비교하면 확실히 더뎠다.

‘나 때문인가?’

원래라면 마인이 된 친형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경험을 해야 했던 용명이었다.

그 경험은 용명이를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녀석이 독기를 품게 만드는 계기이자 성장 동력으로 작용했다.

‘지금은 내가 버젓이 살아 활개를 치고 있으니….’

나비효과라면 나비효과였다.

어쨌든 녀석도 광서가 아닌 소림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그냥 소림으로 보내기엔….’

무간동에서 헤쳐나올 동력이 마뜩잖아 보였다.

‘어머니 얼굴이 아른거려서 이러긴 싫지만… 모진 말을 좀 해야겠다.’

생각을 마친 나는 호흡을 고르고 있는 용명이를 향해 말했다.

“적당히 해라. 왜 계속 일어나는 거냐. 다른 녀석들이 안 되겠다 싶으니까 엎어져 있던 거 못 봤어?”

“…그렇게나 위험한 곳이면. 저도 꼭 따라가서 보필하고 싶습니다.”

“네 실력으론 안 돼.”

“…….”

“걸음이 빠르던지, 약학에라도 조예가 깊던지, 아니면 돈이라도 잘 세던지. 그런 다른 특출난 게 없으면 무위라도 월등하던지 해야 하는데. 아니잖아?”

그리고 차게 식은 눈빛을 보내며 마지막 말을 맺은 뒤.

팟-

비영파천보로 땅을 박차 녀석의 뒤를 잡고는 견정혈을 내리쳤다.

“하성이가 아까 한 말마따나 다음 학기부터 약학 수업이라도 듣던지 해라.”

빡!!!

*    *    *

그렇게 광서행 명단이 정해졌다.

그 명단을 무창에 계시는 맹주님께 보낸 나는 기말고사 준비에 열중했고.

시험을 치르고 나서는 빠르게 학관의 일을 마무리했다.

[진혈단 관리 잘하고. 피서지 도착하면 응용이를 보낼 테니 서면으로 정기 보고해.]

[예.]

독고철에겐 진혈단을 잘 관리하고 있으라는 명을 내렸고.

두 병아리와 모용길에겐 방학 잘 보내라는 덕담을 남겼다.

“다들 방학 잘 보내고. 시간 허투루 쓰지 마라. 개강하면 검사할 거니까.”

그리고 제갈설지, 팽소천, 언용명 세 사람에게는 소림으로 가라는 당부를 한 뒤.

나머지 언동생들을 이끌고 광서행에 올랐는데.

무창의 수군 진까지는 이렇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서들 오너라.”

“예. 맹주님. 그런데 소진 누님이 안 보입니다?”

“아, 소진이는 복학 준비한다고 밀린 공부가 많아서 낙양에서 준비를 하고 있다.”

“아, 같이 가는 게 아니었군요?”

“그래. 나도 일이 바빠서 동정호까지는 바래다주겠지만, 광서에는 너희끼리 다녀와야겠구나. 뭐, 용운이 네가 화경에 이르기도 했고. 초왕 전하의 울 안에 쉬러 가는 것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음. 예.”

“…뭐지, 방금 그 약간의 터울은?”

“…가는 길에 택할 관도를 떠올린다고 그랬습니다. 동정호의 수적들만 피하고 나면, 형산파 권역이고 거길 지나면 거의 바로 계림부 아닙니까? 문제없습니다.”

맹주님은 상선으로 위장한 배에 우리를 태워 동정호의 영역 끄트머리까지 바래다주셨다.

그런 맹주님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금 여정에 올랐는데.

이후로도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용운 형. 소신 발언 한 번 해도 됩니까?”

“해봐.”

“피서를 더 남쪽으로 가는 게… 이게 맞습니까? 슬슬 찌는듯한 더위가 느껴지는데요?”

“나는 모르겠는데.”

“아니 형은 화경이라 한서불침이시니까 그렇죠!”

이따금 천장호가 볼멘소리를 해오거나, 변복을 한 은씨 남매를 못 알아보고 상인들이 바가지를 씌우려다 녀석들의 상재에 탈탈 털리는 게 일이라면 일이었는데.

그렇게 산 넘고 물 넘어 남하하기를 한참.

마침내 광서성에 이르러 초왕부가 있는 계림(桂林)에 이르게 되었다.

“원시천존. 송대의 문장가 범치능이 이르기를, 이 땅을 그림으로 그려 고향의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너무도 아름다워 보고 믿는 사람이 없다더니. 이곳이 바로 계림이로군요.”

“그래. 공기부터 달달한 게 벌써부터 군침이 싹 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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