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5화. 초왕부 (3)
초왕 전하가 열어준 보고(寶庫)에 가득한 각종 무구(武具)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와. 이게 다….”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해오셨다.
- 이 앞에 걸려 있는 조그마한 단검 하나조차 귀철(貴鐵)을 재료 삼아 명장의 손길이 거친 것이다. 언뜻 봐도 허접해 보이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성싶구나?
‘그렇네요.’
- 창고 자랑을 하려고 이곳을 보여준 것은 아닐 테고,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으니… 골라보라는 말은 용운이 네게 주겠다는 것인가?
‘아마도요? 그런 의미에서….’
- 그런 의미에서?
‘만수무강 하십시오.’
- ?
‘이제 멋들어진 장식장에서 쉬실 때가 되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 ???
그렇게 잠시 사부님을 놀리고 있었는데.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인지.
초왕 전하는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여셨다.
“초왕이 괴벽으로 쓰지도 않을 무구를 모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
“예? 어찌 감히 그런 망극한 생각을 떠올리겠습니까.”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무구들에서 흘러나오는 광채에 잠시 생각이 멈춘 것일 뿐입니다. 애초에 흠이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저도 노랗거나 하얀 금창약을 좋아하거든요.”
“…노랗거나 하얀 금창약?”
그런 내 말에 초왕 전하는 고개를 갸웃했고.
곁에 있던 대내관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자나 은자를 말하는 듯합니다. 전하.”
“하하하. 농담을 하기는.”
그에 초왕 전하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고가 사 모은 것도 있긴 하다네. 사실 나도 어렸을 적엔 천하를 호령한 장수들이나 협객들의 이야기를 좋아했거든.”
“오. 그러셨습니까?”
“그렇다네. 괴룡을 흠모하는 왕자의 기질도 따지고 보면 내게서 물려받은 것일 테지… 아무튼. 이중엔 내가 사 모은 명검도 있지만, 사정이 있는 물건들이 많아.”
그렇게 운을 뗀 초왕 전하는 몇몇 검들을 쓰다듬으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고가 무림인들을 후대한다는 이야기가 천하에 널리 퍼지면서, 후인을 찾지 못한 무림인들이 명을 달리하기 전에 찾아와 맡긴 것들이 제법 있어.”
“…아.”
“그 외에도 광서 땅이 아래로는 남해로 통하고 서로는 운남과 월남, 북으로는 호남으로 통하니 온갖 곳에서 진상품으로 바친 것들도 많고.”
“그렇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초왕 전하는 전시된 무구들을 가리키셨다.
“뭐, 괴룡이라면 무구를 맡긴 이들 중 누구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을 후인일 테지. 고가 관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데, 자네에게 필요한 게 있을지가 문제로군. 천천히 둘러보도록 하게.”
초왕 전하를 향해 읍을 해 보인 나는 돌아다니며 구경을 시작했다.
대내관은 그런 나를 따라다니며 내 걸음이 멈출 때마다 부연 설명을 했다.
“이건 활이 새하얗네요?”
“대협. 왕부에 오시는 길에 강변에 있던 코끼리 바위를 보셨습니까?”
“아, 그 구멍이 뚫려 있던 바위 말씀이십니까? 후한의 마원 장군이 활을 쏴서 생겼다고 하던데요?”
“예. 보고 계신 활은 마 장군의 활을 만든 궁시장(弓矢匠)이 제작한 또 다른 걸작입니다.”
묵묵히 그런 설명을 들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던 내게, 사부님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 평소의 용운이 너라면 싹싹 손을 비벼가며, 하나라도 더 받아 내려고 세 치 혀를 더 굴렸을 텐데. 웬일로 묵묵히 돌아다니고 있구나?
‘…무슨 사람을 파리처럼 말씀하십니까?’
사부님껜 볼멘 투로 답을 했다.
하지만 내심으론 창고를 통째로 달라고 하고 싶었다.
천하의 귀물들이 이만큼이나 있으니 욕심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곳이 지엄한 초왕부이기에 망정이지.’
다른 곳이었다면, 소문이 나도 벌써 났을 것이고.
욕심에 눈먼 이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들어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솔직히 욕심이 나긴 합니다. 하지만, 제겐 이미 회한이 있잖습니까?’
- 흥. 방금은 만수무강 하라더니?
‘저 아니면 누가 사부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농으로 한 말에 삐지신 건 아니시죠?’
- …그놈 말이나 못하면.
‘그리고 눈에 보이는 귀물들보다도 초왕 전하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초왕 전하는 천자에게 가장 신임받는 황족이었다.
그저 이름뿐인 왕작을 받아 호의호식하는 분이 아니었다.
‘초왕부는 따로 과거도 치러 백관을 뽑는 번국(藩國). 자체적인 군사력까지 갖추고 있다.’
유사시 유무형의 강력한 힘을 지원받을 수도 있는 초왕 전하와의 관계야말로 이 보고 안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여길 보여준 것 자체가 나를 시험해 보는 걸 수도 있고.’
생각을 마친 나는 소매를 붙여 들며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구경을 한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왜? 성에 차지 않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황족들을 둘러싼 암투에 도가 튼 사람답게, 초왕 전하는 내 마음의 일면을 알아채고 되물어 왔다.
“…그럼 내가 시험을 한다 생각한 모양이군?”
“그런 생각도 있긴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시험이니,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 하나, 이건 순수한 호의였는데… 답을 하며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고에게 달리 원하는 것이 있나 보군?”
“예.”
“말해보게.”
“언젠가 전하께 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큰 도움이라, 많은 뜻이 담겨있는 듯한데… 천마신교와 백도 무림 간의 일전을 염두에 둔 말 같군. 고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맞습니다. 저희가 먼저 검을 뽑든, 놈들이 저희를 치든. 백도 무림 전체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백도무림 전체가 합종을 해야 하는 상대라… 관무불가침이 오랜 기조이긴 하나, 그런 싸움이라면 자금성에서도 역모를 경계할 수밖에 없지. 그때 도와달라는 거구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초왕 전하는 헛웃음을 터트렸는데.
“허허. 그랬다간 자칫 역모의 수괴로 몰릴 수가 있음인데, 기껏 백성을 걱정하는 척은 다 해놓고 목숨이 아깝다고 꼬리를 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거 고가 괴룡한테 제대로 코가 꿰였구만.”
“망극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답을 하며 소매를 붙여 들기를 잠시.
“그리하지. 내가 힘이 되어주겠네.”
초왕 전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여시더니, 대내관을 불렀다.
“대내관. 인주와 손수건을 다오.”
“예. 전하.”
대내관은 곧바로 초왕 전하가 찾는 물건을 대령했고.
전하는 끼고 있던 반지 중 하나를 도장 삼아 손수건에 찍어 넣은 뒤, 내게 내밀었다.
보기엔 그저 손수건 같았지만, 여기다 무슨 내용을 쓰든 그게 초왕의 뜻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그걸 받았다.
* * *
내가 손수건을 받아 가자.
초왕 전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여셨는데.
“일어나게. 그리고 내 체면이 있는데, 한 개쯤 골라보게.”
그러고는, 창고 한 켠에 있는 연푸른색 갑주를 꺼내 보이셨다.
“아, 이건 어떤가?”
대내관은 그 갑옷을 받아 내게 내밀었는데.
“전하께서 권하시는 이 갑주는 해룡왕의 갑주라 합니다. 조와국(爪哇國)의 진상품으로, 바다에 떨어진 운철을 실처럼 가늘게 벼려 엮어 만든 것이지요. 어쭙잖은 날붙이로는 감히 흠집도 낼 수 없는 보배입니다.”
받아서 들어 보니, 얇은데다 가볍기까지 했다.
‘무복 안에 입에도 전혀 티가 나지 않겠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초왕 전하는 재차 입을 여셨다.
“고가 내린 손수건을 잃어버려서야 큰일이 날 테니. 이 갑주 안에 덧대어 항상 지니고 다니면 되겠군.”
어차피 내겐 회한이 있어서 다른 병장기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예.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해룡왕의 갑주를 받기로 한 뒤, 우리는 보고를 나왔다.
“그래 남은 방학은 어찌 보낼 참인가? 왕부에서 수련을 할 텐가?”
초왕 전하는 영약 같은 것에 관심이 있으실 분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내게 기대를 걸어주시는 분께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구하기 힘든 영약이 광서 땅에 잠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걸 한번 찾아볼 생각입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초왕 전하는 미간을 좁히셨다.
“흠. 근데 천마신교가 절대로 중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네들을 주시할 거 같군. 그간의 여정을 보면 더욱 그렇고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왕부에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을 겁니다.”
“내가 왕부를 걱정하여 이런 말을 하겠는가? 자네가 위험해지는 것 자체가 사실 내게 폐를 끼치는 일이야.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면 초청한 내가 뭐가 되며, 괴룡을 좋아하는 왕자는 어찌 되겠나?”
“…그 말씀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흠. 갑자기 든 생각인데, 이러면 어떤가?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면 고가 행차 일정을 그리로 잡는 거야. 그리하여 일체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도록 해주겠네.”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요. 왕부에 폐가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일을 부탁한 위인이 이만한 일로 폐라는 말을 하는가?”
“큼.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나는 초왕 전하의 제안을 차분하게 고민을 해보았다.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잠시 숙고해보았는데… 그것보다는 입이 무겁고 무위가 출중한 사람을 좀 붙여주시면 충분할 듯합니다.”
“그 정도면 되겠나?”
“예. 위치가 도솔폭포의 무저갱입니다. 내려가는 건 제 실력으로 충분히 가능한데, 다시 올라오는 게 문제였습니다. 내리고 오를 자리를 좀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초왕 전하와의 면담은 끝이 났다.
나는 언동생들의 곁으로 돌아와 남은 연회를 즐겼다.
그리고 객관으로 돌아와 회의를 소집한 뒤.
초왕 전하와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그렇게 되어서. 전하께서 친위병을 빌려주시기로 했다.”
그러자 예해수 선배가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진짜 그 이야기를 확답받아 오셨다고요?”
“예. 근데 소식지에는 실으면 안 됩니다? 저희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이야기하면 안 되고요.”
“다, 당연하죠!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삼족이 위험해질 일인 걸요?!”
그사이 은하연은 내가 얻어온 결과를 곱씹었는데.
“전하의 신뢰와 약속은 억만금으로도 못 사죠. 언 공자가 배포로 그걸 받아왔네요.”
“원시천존. 언 소협에게 흐르는 도기를 전하께서도 보신 것이겠지요. 한데, 저희가 오르고 내릴 지점을 오롯이 왕부의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정현은 붙여주시기로 한 사람들에 관해 물었다.
“누가 오롯이 맡긴데? 전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뭐든지 돌다리는 두드려봐야지.”
“하면?”
“다 같이 가긴 하겠지만. 목적지에 완전히 도착하면 조를 둘로 나눌 거다. 나를 포함해 침투조는 용 대인의 마차를 찾아 내려갈 거고. 부진아들은 친위병들과 함께 윗목을 지킨다.”
내 말에 언동생들이 저마다 ‘부진아’라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이때.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나다 싶은 사람 있지? 제갈 소저랑 소천이 형 그리고 용명이 남길 때.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냐?”
“…….”
“내가 용명이한테 말은 모질게 했지만, 걔들 소림에 보냈다. 특히 남궁윤.”
“…나 말인가?”
“그래. 그 눈빛. 나는 이 중에 언용운이나 정현 정도 말고는 상대가 없다고 여기는 그 눈빛.”
“…….”
“가만 보면 그런 태도가 은연중에 배어 나오는데… 그 위치에 안주하면 정현은 고사하고 아마 방학이 끝나고 나선 제갈 소저하고 등위가 바뀌게 될 거야.”
“…….”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지. 출정일까지 수련이다.”
* * *
무저갱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선 챙겨야 할 물품도 있었고, 정확한 위치를 다시 한번 추려보는 일도 필요했다.
그런 제반 준비와 수련에 매진하길 한참.
마침내 용 대인의 마차를 찾아 나서기로 한 날이 되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들. 조심하게.”
“예.”
“양총기 휘하의 장졸들은 괴룡의 말을 내 말이라 생각하고 따르라.”
“존명.”
천지가 어둑할 무렵.
시커먼 야행복을 입고 초왕부를 나선 우리는 강변까지 나아간 뒤.
준비돼 있던 배를 타고 계림부를 따라 흐르는 강물을 헤쳐나갔다.
그렇게 물길을 따르길 이틀여.
양진무가 배를 강변에 세웠는데.
“자칫하면 폭포로 향하는 물살에 휩쓸릴 수가 있으니.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싶더니.
쏴아! 쏴아아아아!!!
거대한 폭포가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무저갱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위태롭게 놓여있는 다리 하나가 보였다.
보이는 풍경에, 천장호는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고.
“…여길 내려가신다고요? 이거 부진아가 좋은 말이었네.”
은하성은 침투조로 뽑힌 우소릉의 어깨를 두드려 밀었다.
“소릉 동생 잘 다녀와. 내가 친형제처럼 생각하며 아꼈는데, 나를 찍어누르고 신법을 자랑할 때 알아봤어. 자업자득이야.”
“…….”
그런 녀석들의 말을 무시하며 나는 지도상으로 미리 정해둔 위치에 말뚝을 튼튼히 박아넣은 뒤.
남궁윤, 당옥기, 우소릉.
침투조로 선정된 세 명을 향해 말했다.
“가자.”
그에, 침투조로 뽑힌 남궁윤이 들쳐메고 있던 밧줄을 그 말뚝에 걸었다.
“알았다.”
그리고 두말없이 뛰어내렸다.
“다음 당옥기.”
“…어. 내가 그냥 묵린토룡 내단 어떻게 생겼나 알려줄게. 생각해보니까 나까지 안 가도 되겠어.”
“오.”
반면 당옥기는 주저했다.
“다른 영초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딱 보면 느낌 올 거야. 식물이 영기를 축적한 거라, 보면 느낌이 딱 와. 알지?”
“사.”
“아니이. 자, 잠깐만! 진짜 잠깐만!”
“삼.”
하나, 내가 숫자를 세며 다가가자.
결국 제 몫의 밧줄을 들쳐메고 남궁윤의 밧줄을 따라 내려갔고.
“캬아아악! 나쁜 놈아! 너는 진짜 벼락 맞을 꺼야아아!”
“다음 소릉이.”
“…….”
우소릉은 나와 무저갱 중에 어떤 게 무서운지 저울질을 하듯 번갈아 보더니.
“으윽!”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고함을 전했다.
“눈은 떠야지! 눈은!”
그리고 정현을 비롯해 위쪽에 남기로 한 언동생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까 장호가 부진아 이야기를 하던데, 그건 수련 과정에서 너희 동기 부여하라고 한 말이다. 믿는다. 사실상 우리 목숨 너희한테 맡긴 거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언 공자.”
나는 은하연의 말을 뒤로 하고, 무저갱 안으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