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39화 (339/444)

제339화. 지금부터 반격이니까 (2)

초왕부를 돌아 나가는 강변.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고 있는 초왕부의 왕성을 지켜보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으니.

한 명은 연왕부의 대내관이었고.

다른 한 명은 기염곡의 곡주였으며.

마지막 하나는 낭중마군 송길준의 명을 받아, 흥안에 나와 있던 천마신교의 내사 하광이었다.

‘…낭패로군.’

하광은 쑥대밭이 된 초왕부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송길준이 짠 애초의 전략엔, 초왕부의 왕성을 이 꼴로 만든다는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당초의 계획은 황족들의 생리를 이용해 백도 무림의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초왕을 실각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언용운을 자금성으로 끌려가게 하여 뇌옥의 이슬이 되게 만드는 것이 계획이었거늘….’

차분하고 차가운 차도살인지계였지, 이런 식으로 초왕부를 난도질하는 게 아니었다.

‘계획의 문제는 아니었다.’

무림맹주와 연이 깊은 초왕이, 백도무림의 총아로 여겨지는 언용운을 은밀히 초대했다는 사실.

이 사실은 잘만 포장하면 천자가 초왕의 충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물론 누가 어떻게 포장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했다.

‘하여, 공자님께서 연왕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봉작지인 요령에서 연이은 실정과 실책으로 정치적으로 몰려있고, 애초에 역심도 있는 연왕이라면.

이 건수를 누구보다도 요긴하게 이용하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역심이 없다.

정말로 역심이 있는 자는 초왕이다.

그렇게 냉철하게 이 건을 이용하고, 천마신교를 우군으로 삼는 게 지금의 연왕과 천마신교 모두에게 득이 되는 최선의 수였다.

‘하나, 연왕은 전혀 다른 수를 빼 들었다.’

하광은 광동의 산장에서 송길준을 대신하여 연왕을 알현했던 순간을 상기했다.

‘…언용운이라. 그놈은 적이 많지? 놈이 설치고 간 뒤로 요령의 분위기가 이상해졌지. 사실 고도 짜증이 이만저만 나 있는 게 아니야. 아마 놈을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테지. 천마신교 자네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야?’

‘…….’

‘언용운을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이 살수들을 썼는데, 이 과정에서 초왕부에 참혹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확인해 보니 초왕 주흠순에게 역심이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가면 좋겠군.’

초왕을 향한 연왕의 증오는 심중의 역심보다도 깊었고, 자신감과 욕심 또한 대단했다.

한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간 모두 놓치게 된다는 조언도, 언용운이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라는 조언도 통하지 않았다.

평생을 유아독존으로 살아온 연왕은 기어코 기염곡이라는 수단을 빼 들었다.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이 상황이었다.

‘결과라도 좋았으면 모르겠는데… 초왕, 왕비, 왕자를 모두 놓치고 초왕부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한 꼴이 됐군.’

그렇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고 있는 때.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고 있던 연왕부의 대내관이 호통을 쳤다.

“그 상황에서 왕자마저 놓칠 줄이야! 초왕의 목을 가져오는 것은 힘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왕자는 잡았어야지!”

길게 기른 손톱으로 삿대질을 해오는 연왕 부의 대내관.

하광은 치미는 분을 삭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소인이 서산은 아닐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에 대내관의 음성이 두 사람 사이에 지팡이를 짚고 선 맹인에게로 향했다.

“기염곡(旣殮谷)이라더니! 뭐가 이미 염을 했다는 것이오?! 이러고도 천하제일살수들이라 할 수 있소이까?!”

그가 바로 기염곡주 조범이었다.

대내관의 호통에도 조범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천하제일살수라는 소리는 소생들이 붙인 말이 아닙니다. 천살막이 종적을 감추는 시기에 들어가는 바람에 세인들이 그냥 그리 부르는 것이지요.”

“웃어? 뵈는 게 없으니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이 안 되는 것이오?”

하나 그는 계속해 웃고만 있지는 않았다.

조범은 기도를 내보임과 동시에 탁! 하고 지팡이로 땅을 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소생이 수임을 할 적에 분명 이 일의 어려움을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닙니까?”

“…크흠.”

“기억이 나지 않으시면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들려드리지요. 본디, 초왕 같은 유력 황족의 지체에 손을 대는 일은 최소 수년은 공들여야 하는 일입니다. 구실은 좋으나, 정작 일이 성공할 가능성은 일할 미만. 연왕부에서 왕성의 구조를 정확하게 안다기에, 일 할을 더 높여 이 할이라 하였습니다.”

“…….”

“그런데도 진행을 하시겠다 하여, 저희는 딱 칼의 역할만 해드리기로 하고 일을 받았습니다. 곡인들의 목숨값이니 착수금을 돌려드릴 수는 없고… 촌각이 지나갈수록 일은 실패로 이어지게 됩니다. 어디를 치면 되겠습니까?”

그런 조범의 말에, 하광은 지도를 펼쳐 들며 입을 열었고.

“속속들이 초왕부의 장졸들이 몰려들고 있는 지금, 민가를 다 뒤질 수는 없습니다. 초왕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붙들고 있는 전력 외에 남은 전력을 둘로 나누어 북편에 붙어있는 이곳과 하중도에 있는 이곳을 뒤져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내관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마필을 보관하는 곳은 그렇다 쳐도 두 번째 짚은 곳은 종묘 아니오?”

“맞습니다.”

“그곳은 아무런 방어시설도 없고 엄폐에도 마땅치 않은데? 차라리 민가에 숨어들지 않았겠소이까?”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민가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어진 되물음에 하광이 답하자, 대내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조범은 짧은 답과 함께 종적을 감췄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연왕부의 대내관과 하광 둘만 남게 된 이때.

대내관은 하광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이 부추긴 일이오. 설령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연왕부는 모르는 일이니. 그대들 천마신교가 책임을 지고 처리하시오.”

“…….”

“우리 연왕부에 티끌만큼이라도 불똥이 튄다면, 천마신교는 천하에 몸 둘 곳이 없어질 것임을 명심하시오. 그럼 나는 이만 전하께서 계시는 광동의 산장에 가보도록 할 테니, 일이 매듭지어지면 보고를 하러 오시오.”

말을 마친 연왕부의 대내관은 준비돼 있던 배를 타고 동쪽으로 멀어져 갔다.

대내관의 말은 뒷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을 시, 모든 책임을 천마신교에게 전가하겠다는 말이었다.

“철면피가 교활하기까지 하군.”

아마, 연왕부는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기에 마음껏 일을 벌인 것일 터.

하광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기왕지사 벌어진 일이니, 되는대로 수습은 해보겠지만… 연왕부는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연왕의 역심은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여러 계획이 좌절된 천마신교로서는 연왕부 같은 기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사실이었다.

‘귀하신 핏줄을 이용하고자, 한 번은 생떼에 어울려 주었으나.’

저런 행태를 보이는 자들과 평범한 형태의 동맹은 불가능했다.

‘안하무인인 것은 둘째 쳐도 교활한 것은 신교의 대계에 변수가 되겠지.’

하광은 연왕부를 차지하려면 완벽한 꼭두각시로 만드는 수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며.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왕자 일행은, 하중도에 세워진 종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는 왕자의 지략으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취해 거꾸로 방어시설이 없는 곳에 몸을 숨긴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이 절묘하게 통해, 한나절 동안은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갔으나.

쾅!

콰아앙!!

해가 지고 어둠이 완연히 내리깔릴 무렵.

이곳저곳 박살이 나는 소리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숨이 끊어지는 단말마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컥!”

“끄악!”

그에 왕자를 지근 거리에서 호위하고 있던 이들에게 초비상이 걸렸다.

“자네들은 나가서 흉수들의 접근을 저지하라!”

“예!”

“너희들은 입구를 막아라!”

“하오나 이곳엔 마땅한 것이….”

“위패든 뭐든 다 가져와서 막아!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쥐 죽은 듯이 있었지만,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선왕들께서도 이해하실 것이다! 어서!”

난리가 터진 이후로 줄곧 의연한 척을 하고 있는 왕자였으나, 아이는 아이.

끝까지 자신을 호종한 이들의 단말마가 들려오고, 종묘의 집기들이 급히 헐리는 광경에.

왕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범 내관. 내 선택이 틀린 것인가?”

“아닙니다. 마마. 이런 급박한 시기에 이만하면 큰 시간을 벌었사옵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는 괜찮으신 거겠지?”

“예. 마마의 기지 덕분에 두 분 모두 강녕하실 겁니다. 흉수들이 저희를 찾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방증이옵니다.”

“…그럼 되었다. 이 몸을 주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무사하시면 된 것이야. 나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런 말씀 마옵소서. 동궁에서 버틴 시간에 여기서 있던 시간까지 생각하면, 아마 지금쯤 근왕병들이 달려와 곳곳에서 흉수들을 몰아내고 있을 것 이옵니다.”

“범 내관의 말이 맞사옵니다! 마마! 성심을 굳건히 하소서!”

옥쇄를 각오하고 곁을 지키는 이들의 충심에, 왕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마마께서 흠모하시는 괴룡도 봉화를 보았다면 달려오고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리고 괴룡의 이야기에, 작은 주먹을 꼬옥 말아쥐었다.

“그럴까?”

“예. 마마. 희망을 잃으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알겠다!”

*    *    *

친위대가 아는 비밀통로를 통해 초왕부를 벗어난 우리는 종묘가 있다는 하중도를 향해 날 듯이 달려 나간 뒤.

“이쪽으로!”

나룻가에 있는 쪽배에 올라탔다.

그러자, 양진무와 은하성이 각각 노를 잡고 미친 듯이 물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그렇게 물살을 가르기 시작한 쪽배 위에서,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살수는 은신이 절반, 인내심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난전이 벌어진 이상, 몇몇을 빼면 개인 기량은 우리 쪽이 위일 거야.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놈들은 최정예 살수야.”

그렇게 운을 뗀 나는 계속해 주의할 점을 말했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살심과 목표 달성만을 위해 움직임인다는 것을 명심해.”

그러면서 종묘의 위치를 보니.

물 위를 달려 나가도 될법한 거리에 이른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선발대와 지원대를 나눴다.

“절반쯤 왔네. 무저갱의 절벽에서 발 놀리는 거 보니까. 정현, 우소릉은 수상비(水上飛)가 가능한 것 같던데 나와 함께 먼저 들어간다.”

“예! 언 소협!”

“네! 언, 언 형!”

“나머지는 최대한 빨리 따라 들어와.”

그리고 파천의 내력을 다리에 감은 뒤.

팡! 팡!

파파파파팡!!!

물 위를 박차며 내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표표한 걸음걸음으로 하중도에 도착해, 종묘 안으로 뛰어 들어가니.

방실 곳곳이 뜯겨 있는 가운데.

가장 좌측 편에 위치한 곳에 흑의인들이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챙! 채애앵!!!

그 너머엔 피범벅이 된 와중에도 살수들의 검을 몸으로 받아 내고 있는 동궁전의 궁인들이 있었다.

“저기다!”

나는 우소릉 정현과 삼각의 대형을 이루어 달려감과 동시에.

상단전에서 뽑아낸 내력으로 빚은 술식을 왼손에 감은 뒤.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식어가던 시체들은 내 명을 받들어, 초왕부의 궁인들을 돕기 시작했는데.

크아아아!!

시체 병사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 살수들의 모습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무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어지간하면 네 술법을 처음 보면 당황을 하는데. 저놈들은 당황하지도 않는구나?

‘아무래도 제가 초왕부에 와있다는 걸 알고 있는 놈들이었나 봅니다.’

- 하면….

‘연왕도 연왕이지만, 천마신교의 입김이 있었나 본데요? 그렇게 집요하게 저를 쫓을 녀석들은 놈들 뿐이니까요.’

살수들이 당황했다면 상황을 장악하는 게 쉬웠겠지만.

어쨌거나 시체들이 일어나 살수들을 막아서기 시작한 덕분에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촤악!

촤아악!!!

그 틈에 놈들의 덜미를 다 따라잡은 나와 두 명의 언동생들은 검을 휘둘러 나갔는데.

촤악!

촤아악!!!

하필이면 이 순간, 왕자의 내관들이 이루고 있던 최후의 방어선의 한 축이 무너졌다.

“!”

“!”

기염곡의 살수들도 우리도 그 틈을 보았다.

놈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나와 두 명의 언동생들을 향해 몸을 던져왔는데.

그중 세 명의 살수는 왕자가 있는 종묘 안으로 걸음을 박찼다.

“언 소협!”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정현은 내 이름을 부르며 큼지막한 태극을 그려내 살수들의 검을 우측으로 쏠리게 만들었는데.

그 틈에 우소릉이 번개 같이 앞으로 나서며 발판을 자처하더니.

“언 형!”

내가 발을 딛자마자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우소릉을 밟고 뛰어오른 나는 종묘 안으로 날아가며, 세 명의 살수중 한 놈에게 회한을 던졌고.

쐐애애애애애액!

컥!

다른 한 놈은 어깨로 등뼈를 가격해 날려버렸다.

빠아악!!!!!

하나, 아직 한 명의 살수가 남아 왕자를 향해 검을 뻗어가고 있었다.

‘…늦는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왕자와 살수 사이에 끼어들어, 검을 몸으로 받아낸 뒤.

캉!!!

해룡갑에 가로막힌 검을 양 손바닥으로 잡아 뺏었다.

그리고 그 검으로 녀석의 목을 베었는데.

촤악!

그러자마자, 왕자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괴룡! 괜찮습니까?!”

“그건 제가 드릴 물음입니다 왕자마마.”

“그치만 몸으로 검을 받았는데 괜찮을 리가?!”

“쇳소리 못 드셨습니까? 무복 안에 갑주를 입고 있었습니다.”

“아! 다행! 다행입니다! 다들 저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괴룡까지 그렇게 되면….”

“그게 왜 왕자마마 때문입니까. 저 새끼들 때문이지.”

왕자님께 한마디를 한 나는 짧게 호흡을 고른 뒤.

“…후. 내가 말이야. 진짜 이렇게 심장 조이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닌 건, 난생처음이다. 이 새끼들아.”

기염곡의 살수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덕분에 심장 수련 잘했고. 지금부터 반격이니까. 유언 있으면 미리미리들 생각해 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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